겁(劫) 밖의 일구(一句)(上)

2010. 8. 7. 10:1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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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劫) 밖의 일구(一句)(上)

스님께서 법좌에 오르시어 주장자로 법좌를 한번 치시고 나서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어느날 색(色)을 비추어 주는 마니보주(摩尼寶珠)를

오방천왕(五方天王)에게 보이시고 물으시기를

 

「천왕들이여 이 보배 구슬의 빛이 무슨 빛깔인가」 하고 물으니

오방천왕들이 제각기 다른 빛깔로 보인다고 하자 이에 부처님께서는 그 구슬을

소매 속에 감추시고 다시 손을 들어 보이시며

 

「그러면 이 보배 구슬의 빛깔은 무슨 빛깔인가」 하고 물으시매

이에 천왕들이 고개를 가우뚱 거리다가

「지금 부처님의 손에는 구슬이 없거늘 어디에 그 빛깔이 있다고 하시읍니까」 하자

 

이에 부처님께서는 탄식하여 말씀하시기를

「천왕들은 어찌 그렇게 어리석은가 세간의 구슬을 보일 때는 제각기 붉다든지

푸르다든지 누르고 회고 검다고 각기 자기 소견을 내어 이야기 하더니

 

이제 내가 참 구슬을 들어 보이니 전혀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구나」 하시었다.

이말에 오방천왕들은 모두 자성을 돌이켜 도를 깨달았다.

 

이에 게송으로 말씀하시기를
靑黃赤白從何來
無色色彩隨緣成
청·황·적·백등의 빛깔이여
어디로 쫓아 나왔느뇨
본래 빛깔이 없으나
인연 따라 생겼을 뿐이네.


이 말씀에 대각연(大覺連) 선사가 송(題) 하시기를

滿手擊來識問伊하니 盡音無物可流窺로다
直然船主多才智하여 敎得崑崙辨寶歸로다
昨日也焦?하니 罪過彌天이로다
今日也焦?하니 虎口橫身이라
折半裂三은 卽不問어니와 格外一句는 作?生고!
喝!
손을 척 들어서 물었으나
모두 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네
뱃 주인이 재주와 지혜가 많아서
곤륜(崑崙)에게 보배를 가져오라고 하더라
어제도 방탕하니 죄가 하늘에 닿았고
오늘도 이와 같으니 호랑이 밥이로다.
둘과 셋은 묻지 않거니와
겁(劫)밖에 일구(一句)는 어떠한고.
악 !

이 말씀이 무슨 소식이냐 하면 중생들이란 이 세상을 볼 때 무엇이든지

형태나 현색에 집착하여 그것이 절대 불변하는 것인양 믿고 있지만 그러한 것들은

인연을 따라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인연법에 의존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중생은 있다든지 없다든지 하는 유·무에 집착 합니다만

사실 근본 자리에서 보면 본래 무엇이라고 내세울 것이 없읍니다.

 

흔히 법문을 할 때 법상을 차리고 목탁을 치고 법문을 한다고 청하기도 하고

설하기도 하지만 참으로 부처님의 청정자성 그 본래 면목 자리에서 보면 좌중에 앉아

설법을 듣는다든지 설법한다고 하는 것이 도무지 다 틀린 이야기 입니다.

 

이러한 것은 오히려 분별망상을 짓는 행동입니다.

다만 중생들의 신심을 촉발하기 위하여 그렇게 할 뿐이며

근본 당체(當?)는 글자나 말이나 중생들의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읍니다.


그러므로 분별망상하지 말고

세상의 모든 이치가 허망한 줄 알아서 부지런히 참선 정진해야 됩니다.


이 공부는 승·속·남·녀·노·소·귀·천에 관계치 않은 것이니

 말의 뜻만 알아 차리면 바로 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읍니다.

참 바른 지견이 오직 소중할 뿐임을 알고 부지런히 공부합시다.

각 선원 수좌스님들과 강원의 학인 스님을 위하여는 이 정도 상단법문으로 끝내고

있는 이 법문을 듣기 위해 대적광전에 많은 신도들이 모였으니 그들의 신심을 돈발케 하는

법문 몇 편을 들어 이야기 하려 합니다.


그리 멀지 않을 때의 이야기 입니다.

지금도 부산 동래에는 범어사가 있읍니다만,

 

그 범어사에 낙파인성(洛波印性)이라는 스님께서 살고 계셨읍니다.

그 스님이 젊었을 때는 신심이 장하여 강원에서 열심히 경학을 공부하여 기필코

선원에 들어 도를 이룰 것이다 하고 발심을 하였으나 얽힌 바 여러 인연을 뿌리치지 못하고

 

범어사에서 서기(書記)직의 소임을 맡아보게 되었습니다.

자연히 서기가 되다 보니 소임상 돈과 곡식을 출납하기도 하고 대?소 사중 살림살이를

관장하면서 살고 있었으므로 공부하고는 거래가 멀고 세속적인 것과 가까왔으므로

 

자연 낮잠도 자고 그것 밖에 승행에 어긋나는 짓도 하는 등의

해태심(懈怠心)으로 인하여 중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읍니다.


그러던 어느날 낙파스님의 꿈에 이미 죽어버린 그의 도반이 찾아와서

나와 같이 가서 볼 곳이 있네하고 이끌고 가기에 따라서 범어사 뒷 계곡으로 올라가니

 

어느 처소에 이르니 많은 스님들이 계셨다.

자세히 보니 나이 많은 노스님과 젊은 스님들이 좌선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 앉아 계시던 스님 한 분이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거든

부지런히 부처님의 경전을 읽고 참선하여 스스로의 선업을 닦아 자신도 구하고

딴 사람도 구제해야 하거늘 어찌 태굴심(怠屈心)만 일으켜 삿된 업만 쌓는고,

 

스님이 이 말을 명심하고 함부로 예사 소리로 듣지 말지니

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 후일에 후회할 날이 있을거니와 우리와 같이 나쁜 몸을 받아

돌 아래 어두운 굴 속에서 누겁(累劫)을 지낼 것이니라.

 

어떻게 하든지 마음을 돌이켜 발심 수도 하시오.

그리고 우리들을 이 어두운 업에서 제도해 주시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하는 말에 깜짝 놀라 일어나 본즉 꿈이었다.


그래서 곧 정신을 수습하여 꿈에 본 도반을 따라갔던 그 계곡을 찾아가 보았더니

꿈에 보았던 꼭 같은 큰 바위아래 크고 작은 여러 마리의 뱀들이 우글거리고 있었읍니다.

 

이런 광경을 본 낙파스님은 정신이 번쩍들어 그 자리를 물러나 절로 돌아왔읍니다.

깨달은 바있어 바로 걸망을 싸서 운수(雲水)의 길에 들어 올라 금강산으로 갔읍니다.

 

그 곳에서 스님은 열심히 정진 했읍니다.

한벌의 옷과 한 때만 잡수시고 오십 여년을 한결같이 참선과 계율로서 사시다가

도를 이룬 뒤 어느날 다시 그 옛날 뱀 굴에 가서 그 뱀들을 위하여 독경과 법문을 해 주었더니

그 뱀들이 그 몸을 벗어나 생천(生天) 했는데

낙파스님은 세수(歲壽) 84세에 입적하였다고 합니다.

편집자 주: 이 법문은 지난 음력 5월 15일 해인 총림에서 여름 결제중에

                     대중을 위하여 하신 혜암스님의 상단 법문입니다.

                   그 대강을 해인지에 2회에 걸쳐 게제하게 되었읍니다

때로는 세상을 거꾸로 바라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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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가랑이 사이로 먼 곳의 풍경을 보던 경험이 있으시지요?




그런 자세로 보는 풍경은,
하늘과 땅의 위치가 뒤바뀐 것 같고
늘 보던 눈에 익은 풍경이라도 어쩐지 새롭고 재미있었지요.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꽤나 오랜 세월
단 한 번도, 세상을 그렇게 신비롭게 보는 일을 잊어버리고
어렸을 때의 그 경험을 떠올리는 것조차 잊고 살았지요.




눈에 보이는 풍경을 바로 보는 것조차 천천히 살펴보고
즐길 틈마저 잃어버리고
달리는 차창(車窓) 밖으로 건성으로 보거나
보이는 풍경을 감상하기 보다는
그 풍경과는 거의 상관없는 어떤 일들로
머릿속은 늘 복잡하게 얽히고 섥히기만 했지요.





나이를 먹어가면서 '꿈'을 잃고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직도 '꿈'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것은 '꿈'이 아닌 '욕심(慾心)'으로 바뀌었는데도
세상 물정(世上物情)의 때 묻은 눈으로 보기 때문에
'꿈'과 '욕심'을 구분하는 것조차 어려워졌지요.




아주 가끔씩이라도 자신이, 나이든 '어른'이라는 생각은 접어버리고
어렸을 때 가랑이 사이로 먼 산 풍경을 보았듯이
지금 여러분 눈에 보이는 풍경을 거꾸로 한 번 보세요.
그리고..엉뚱하다 생각될 수도 있겠으나,
머리 속으로는 지금 여러분이 처(處)한 현실과 입장도
거꾸로 뒤집어 생각해 보세요.

 


 

 

언제나 즐거움이 가득한 건강한 여름날이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