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바라밀 수행 / 법상 스님

2010. 8. 8. 17:5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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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바라밀 수행 / 법상 스님

 

 

보시(布施)란, ‘베풀라’는 것입니다.

베풂의 수행을 통해서

괴로움의 이 언덕에서 피안의 저 언덕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보시바라밀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베품과 보시바라밀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베품이라는 것은 그저 남에게 무언가를 준다는 의미이므로,

여기에는 보답을 바라거나,

과보(果報)를 바라는 마음이 남을 수 있습니다.

베풀기 싫은데 억지로 베풀 수도 있는 노릇입니다.

 

그러나 보시바라밀은 베풀고도 베풀었다는 상이 남아있지 않은

맑고 청정한 베품, 즉 무주상보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무주상보시란 상(相)에 머물지 않고 하는 보시를 말합니다.

즉 보시를 하고 ‘내가 했다’라는 상이 남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도왔다고 하는 상이 남아 있으면

어떤 형태로든 그가 나에게 돌려 갚기를 바라게 되고,

혹은 머릿속에라도 기억해두고는

이후에 갚아지지 않으면 서운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상에 머물러 보시를 하게 되면

그대로 ‘내가 했으니 언젠가 받겠지’ 하는 마음 때문에

다음의 어느 때, 혹은 다음 생, 그 다음 생에까지 쫒아가서

그 빚진 마음을 꼭 돌려받기를 원하고,

그 마음이 굳어져 업이 되어 윤회하는 원동력이 되므로

결국에 그 상 때문에 윤회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주상보시는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올바른 자각이 있을 때 자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실천의 행입니다.

본래 너와 나라는 분별이 없으니

어디에 네 것, 내 것이 있겠으며 가고 옴이 있겠습니까?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올바른 자각의 지혜가 생겨나면

동체대비심의 대자비심이 우러나오기 마련이고

서로가 둘이 아니라는 이 자각은

곧바로 무주상보시라는 실천행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무주상보시는 베풀었다는 상이 남아있지 않으므로

어떤 보답이나 과보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에 했을 뿐인 것입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기에, 주관과 객관이, 주는 자와 받는 자가

둘이 아니기에 베풀고도 베풀었다는 상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배가 고프니 밥 먹고, 갈증이 나니 물 마시는 것처럼,

배고픈 사람 있으니 공양하고, 갈증 나는 사람 있으니 물을 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내가 내게 하듯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함이 없이 하는 것이 보시바라밀의 참 의미일 것입니다.

 

내가 필요해 스스로 옷을 사 입거나, 배고파 음식을 먹는다고 했을 때,

내가 나에게 보시했다고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내가 옷 입히고 먹였으니 내가 내게 과보를 받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 이웃의 어려움이 바로 나의 어려움과 둘이 아니라는

연기의 도리를 알기에, 당연히 나에게 하듯이 베푸는 것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시바라밀은 단순하게 베푸면 되는 일이 아닌,

지혜가 밝아졌을 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반대로 자꾸만 베풀고 베풀어 보시바라밀의 씨앗을 심어 놓으면

보시바라밀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되어 지혜를 밝힐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보시바라밀은 그저 복 짓는 일이 아닌

지혜를 밝히는 깨달음의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보시바라밀의 실천은

‘내 것이다’라는 아상(我相)을 타파하는 방하착 수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살에게는 ‘나다, 남이다’ 하고 나누는 분별심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이 괴로우면 보살도 괴롭기 마련인 것이지요.

 

중생이 모두 성불하는 날이 바로 보살이 성불하는 날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보살에게, ‘나다’, ‘내 것이다’, ‘내가 옳다’, ‘내 맘대로 한다’ 라고 하는

아상(我相)이 모두 비워졌기 때문입니다.

보살에게 있어 ‘나’는, 나 혼자만이 아니라

일체 중생과 둘이 아닌 존재로서의 ‘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보살은 베풀어도 베푼 대상과 베푼 이를 따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아상과 나와 너를 가르는 분별심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일체가 한마음으로 ‘나’이기에 주고받는 이가 따로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보시바라밀’인 것입니다.

 

근본이 이러하지만 우리들은

‘내가 누구에게 얼마만큼’을 준다는 세 가지 상에 머물러 보시합니다.

무주상보시가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청정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삼륜청정(三輪淸淨)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보시하는 사람[施者], 보시하는 물건[施物],

그리고 보시를 받는 사람[受者]의 셋을 말하며,

이 셋이 모두 청정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보시를 했다는 생각을

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나다’하는 놈이 끼여들기 때문에

작은 것을 베풀고도 내가, 누구에게, 얼마의 보시를 했다는 상에 집착합니다.

 

이는 결국 보시를 하면서도 ‘내가’라는 상이 그 근본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보시는 유주상보시(有住相布施)입니다.

우리는 남과의 관계 뿐 아니라

부부간, 부모자식간, 형제간, 친구간에조차 이러한 상을 가지곤 합니다.

 

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러한 것은 모두가 아상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불교는 아상을 버리는 종교입니다.

보시바라밀은 이러한 아상의 뿌리를 뽑아내게 하는

방하착의 생활 실천이라 하였습니다.

어려운 것도 아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생활의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보시하는 이를 수행자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행한다고 해 놓고서 베풀 줄 모른다면

백날을 가부좌로 앉는다고 하더라도 복이 미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복과 지혜는 수레의 양 바퀴처럼

우리 수행자들에게 중요한 두 축이 됩니다.

복이 없는 지혜나, 지혜가 없는 복은 참이 되기 어렵습니다.

복과 지혜를 함께 증장시키기 위한 최고의 수행이 바로 보시바라밀인 것입니다.

 

우리는 빈 몸으로 이생에 잠시 와서

빈 배처럼 인연 닿는 데로 이리 저리로 떠돌아다니다가

다시 빈 몸으로 돌아갑니다.

 

‘내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죽을 때 그 ‘내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며,

그렇다 보니, 죽어서도 이승의 집착을 못 버려 이승을 떠돌다가

인연 닿는 곳에서 다시 태어나는 윤회의 사슬에 묶이게 되는 것입니다.

 

대기업 회장이라고, 죽을 때 더 많이 가지고 가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대기업 총수나 우리네 어려운 이웃들이나 모두 다 죽어서

화장터 불길 속으로 들어갈 때는 똑같이 껍데기만 들어갈 뿐입니다.

한 두어 시간쯤 지나서 불길 속에서 나올 때가 되면

모두가 한 줌의 재가 되어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 순간에는 모두가 평등합니다.

대기업 회장이라고 더 오래 타지도 않고,

더 많고 멋진 재가 되어 나오지도 않습니다.

한평생 벌어놓아도 죽을 때가 되면 내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대기업 회장쯤 되면,

돈 버는 일이 너무 바쁘다 보니 가족들과 여가를 갖고,

소풍을 가지도 못하고, 단란한 대화를 자주 나누기도 오죽 힘들겠습니까?

일평생을 오직 회사 관리, 돈 관리하느라 편안히 여유를 즐길 수가 있을까요?

주말이면 절에 나와 수행도 하고, 자기 수양을 할 수가 있겠는가 말이지요?

 

그러면서도 죽을 때가 되면 우리네와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세상을 살아가며 너무 돈, 돈 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구나 얼마전은 IMF 시대라 하여, 많은 사람들이 더욱 고생하고 있었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욱 보시를 해야 이 어려운 고비를 벗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연세가 지긋하신 한 거사님께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평생 벌어 놓은 돈을 어떻게 쓰고 죽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까 하고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죽기 전에 모든 재산을 사회의 어려운 우리 이웃을 위해 헌납하여

좋은 마음으로 보시하는 것이 가장 수행자다운 삶의 회향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분명 살면서 모아온 모든 노력은

보시바라밀행이 되어 엄청난 복덕이 되고,

돈 벌기 위해 한 모든 행위들은 바라밀행으로 전환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세상 아등바등하며 내 재산 늘리려고, 내 소유를 늘리려고

그렇게 아상을 높이기 위해 살아와놓고는

죽는 순간에까지 아상을 놓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갑니다.

‘내 자식’에게 물려주려고 또 다른 아상의 연장인 ‘자식’에 미련을 듭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아상의 연장인 경우가 많습니다.

나 잘 되고자 하는 것처럼, 내 자식 잘되게 하려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죽기 전에 자식들에게 많은 재산 물려 줄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식에게 업장만 지어 주는 꼴이 됩니다.

사회에 환원하여 어려운 이웃을 위해, 또 부처님 법 전하기 위해

좋은 마음으로 회향한다면 그 모든 복덕은 몇 배가 되어 자식에게로 되돌아 갈 것입니다.

이런 회향은 우주 법계에 저축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아마도 몇 배 되는 이자까지 합하여 자식에게 남겨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무엇이 진정한 자식 사랑인가를 생각해 볼 일입니다.

 

자! 이제 보시바라밀행을 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내가 무아(無我)이고, 공(空)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면,

돈이나 재물, 명예에 그렇게 집착하지는 않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무아(無我)인 나를 가지고 자꾸만 ‘나다’하는 생각(我相)을 가지기 때문에,

이를 연유로 해서 ‘내 것이다’라는 생각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내 것’에 집착하게 되니 베풀 수 없는 것입니다.

 

‘나다’라는 생각을 없애고,

진실로 무아임을 자각하는 것만으로,

우리의 삶은 무주상보시가 몸에서 뗄래야 뗄 수 없는 삶의 실천방법이 될 것입니다.

 

 

 

 

노인경 (老人經)

 

   


老人經은 결국은 무엇을 하라
무엇을 하지 마라 하는 식이지요.
그래서 老人經은 하라,마라,"經"이라고 합니다.


  

  


가진 것은 버려야 할 때를 알라.
돈은 다 쓰고 죽어라..
나이든 유세 하지 마라.
잔소리 하지 마라.
큰소리도 하지 마라.


  

 


  자식 며느리 흉보지 마라.
자식 대접을 깍뜻이 하라
몸 아픈 타령하지 마라.
죽을 병은 단 한가지뿐이다.
저축하지 마라.



 


돈 아끼려 고독을 사지 말라
베풀 줄 알라.
가진 것이 없어도 남길 것은 있다.
용서 하라.
마음속에 원망의 싹을 키우지 말라



  

 



봉사하는 삶을 살아라.
몸과 두뇌를 끊임없이 움직여라.
마음을 긍정적으로 가져라.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라.
노인은 애완동물을 기르라.


  

 

 
 
자연으로 돌아가라
노인은 여행을 하라.
노인은 목욕탕을 조심하라
하는 일 없이 어슬렁거리지 마라.
멍청하니 앉아서 세월을 기다리지 마라.


 
 
 
시간을 선용하라.
늙었어도 학생으로 남아라.
돈 앞에 당당 하라.
모든 것을 내주라.
죽음을 내  팽개치지 마라.
 

 

 

 
 
 
Cusco - Montezuma
 
 

이것은 해야 되고

이것은 하지마라

무엇은 해야 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되는지 알려주는 것

이것이  (老人經) 노인경이라오.

젊은이들이여 한 번쯤 귀담아 들어 보시구려

당신들 보다 인생을 훨씬 많이

살아온 사람들이 터득한

교훈이라오

당신들도 언젠가는 이런 노인경이 필요하다오.-이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