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 부처님의 평화적 분쟁 해결 이야기 / 삶은 환(幻)타지다

2011. 4. 4. 17:4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당신이 주인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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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전에서 찾아낸 행복한 인생 이야기’를 듣는 시간

                               울림이 있는 유쾌한 배움의 시간’

                                   불교TV방송시간:수(14:30) / 일(22:00, 23:00)

 

 

 

 

피소드     부처님의 평화적 분쟁 해결 이야기              

episode 1   

 

 

‘작심삼일’이라고 삼 일마다 한 번씩, 하하~ ‘108참회 발원문’을 읽고, 또 실천하면 됩니다. 하하하하하~ 그러니까 마음을 한 번 먹은 게 삼 일 간다. 그러니까, 삼 일에 한 번씩 자꾸 주위를 환기시켜 주면은 계속 갑니다. 오래 지속될려면 매일매일, 삼 일에 한 번 하지 말고, 매일같이 ‘108참회 발원문’을 하나씩 하나씩 음미하면서. 하다 보면은 자꾸 이게 경각심이 생기죠.

 

어쨌든, 항상 모든 것은 변화하니까, 해도 바뀌고, 사람도 바뀌고, 또 세상도 바뀌고. 변화야말로 진리죠. 그래서 ‘변화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거. 고것만 변화하지 않죠. 예. 그 진리만. 나머지는 모두, 모든 존재는 바뀐다. 그러니까 바뀐다는 것을 안 바뀔라고 노력할 게 아니라, ‘어차피 바뀔 거 긍정적으로 바뀌자.’ 이게 올바른 노력이죠. 자꾸 막 늙어가는 거를 안 늙어갈라고, 나이를 안 먹어보일라고 노력해서는 안 되고, ‘어차피 늙는 거 곱게 늙자.’허허허~ ‘복덕을 지어가면서 늙자.’이렇게 해서, ‘어차피 죽을 거 잘 죽자.’하하하하하 하~

 

                                   

 

국난을 극복한 그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사는 세상이 더불어 사는 세상이죠. 그래서 나 혼자만 잘해서 될 일이 있고, 나 혼자서만 잘한다고 되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더불어 살기 때문에 국가라든가, 또는 자치 단체라든가, 세계, 우주, 이런 것은 서로 공업이 있거든요. 그래서 자기 개인의 업에 의해서 사는 측면도 있지만, 또 공업을 우리가 무시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실은 국가가 잘 돼야 또 정치적으로 안정이 되고, 경제적으로 또 그렇게 발전을 하고, 안정이 돼야 개인적으로도 잘 되는 거지. 그런 그 전체를 떠나서 부분만 너무 생각해서도 안 되고, 그래서 국난 극복 방법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는데, 지난 시간엔 질병, 또 가뭄, 또 악귀들을 쫓는 법. 이런 것들을 말씀드렸죠.

 

요번에는 국가 분쟁을 해결하는 그런 사례담을. 국가 간의 분쟁이, 이것은 유사 이래 계속 있었던 거죠. 옛날부터. 국가가 있는 한 국가 간에 분쟁이 있는 것이고.

 

세계적으로 정세가 계속 변화하니까. 변화한다는 것은 충돌도 있고, 더 좋아질 수도 있고. 이러면서 계속 말하자면 진화를 해 나가는 거죠. 그래서 진화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을 하고. 허허~

 

부처님 당시에 부족 간에 분쟁이 있었습니다. 사끼야족과 꼴리야족이. 근데 사끼야족은 말 그대로 샤까족. 우리가 부처님을 왜 석가모니 부처님이라고 그러잖아요. 석가모니라는 말이 원래 사끼야족의 성인이다. 이런 소리예요. 모니가 성자를 뜻합니다. 성인. 그래서 샤까모니 하면은 원래는 사끼야족의 성인, 성자, 이런 뜻인데, 고것을 한문으로 옮기다 보니까 석가모니가 됐는데, 원래는 샤카모니, 또는 샤까모니, 이런 식으로 발음이 되죠. 그래서 부처님의 친족은 석가족입니다. 사끼야족.

 

그 다음에 부처님의 어머니계통, 외가는 꼴리야족이예요. 그러니까 말하자면은 친가는 사끼야족, 외가는 꼴리야족. 근데 이 두 부족의 중간에 강이 흘렀어요. 강물 이름이 로히니 강입니다. 근데 그때 마침 또 가뭄이 심하게 들어가지고, 물이 부족하니까, 이 두 나라가 다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들이었어요. 농사를 지어야 되는데, 농사의 첫째가 물 아닙니까. 물이 풍족해야 되는데, 논에다가. 그래 가지고 가뭄이 드니까 서로 물이 부족해지고 이러다 보니까, 로히니 강물을 자기네 쪽으로 서로 끌어 들일라고 하다보니까 분쟁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말다툼으로 시작하는 게, 보통 말다툼으로 시작해서 싸움이 시작되는 거죠.

 

처음에 농부들이 서로 말다툼을 시작했어요. 그래 가지고 “강물을 너에게 줄 수 없다.” 서로 이러다가 점점 말이 거칠어졌고, 또 한 사람이 흥분해서 주먹을 한 방 날렸죠. 그랬더니 다른 쪽도 격분해서 되받아 쳤고, 이게 원래 한 방씩 치고 받고 하다가 싸움이 나는 거죠. 처음에 농부들 싸움인데, 이게 점점 국가 간의 전쟁으로, 점점 이렇게 발전해가는 거죠. 사소한 싸움이 점점 커지니까.

 

그래 가지고 서로 종족의 기원까지 들춰가면서 욕을 퍼부어대기 시작한 거예요. 우리가 싸우다 보면은 왜 험담을 하잖아요. 기원까지 막 들어가면서 사끼야족들한테는, “너희들은 말이지 짐승처럼 누이동생과 결혼해 사는 녀석들이, 그런 형편없는 녀석들이 공격한다고 우리가 뭐 당하 거 같애?” 이렇게 하고. 또 사끼야족은 꼴리야족한테, “문둥이 자식들아! 너희들은 왕 대추나무속에서 짐승처럼 살았던 천민들이, 이런 형편없는 놈들.”하하하~ 하고 막 옛날 족보까지 들춰내면서 싸우는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냐면, 사끼야족은 원래 왕자들 출신인데, 왕자하고 공주들이 한 나라에서 쫓겨났어요. 그래 가지고 자기들끼리 나가서 부족을 이루고 살면서 자기네들이 종족,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서 근친 결혼을 했던 거예요. 그래서 그런 욕이 나온 거예요.

 

우리나라도 과거에 신라 때 이런 때보면 골품제도 있었죠. 그거랑 똑같은 겁니다. 그 당시에 성골은 성골끼리 결혼해야 되고, 진골은 진골. 이런 식으로. 그래서 그걸 갖다가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던 거를 끄집어내서 막 욕을 하는 거고. 상대방을 부화를 돋구는 거죠.

 

또 하나는 이 꼴리야족은 선조 때 문둥병에 걸려가지고, 동네에서 추방을 당해 가지고, 큰~ 대나무 통속에서 나무 열매 껍질을 먹고 살았는데, 그러나가 병이 나았어요. 그래 가지고 나중에 아까 추방을 당한 사끼야족의 공주하고 꼴리야족의 왕하고 결혼을 해 가지고 아이들을 나아서 꼴리야족이 되었습니다. 사실 꼴리야족과 사끼야족은 다른 부족이라고 할 수도 없는 거죠. 그러니까. 서로 간에 옛날 선조 때부터 계속 이렇게 섞여오고, 부처님 당시에도 꼴리야족과 사끼야족은 서로 이렇게 성혼을 많이 했어요. 결혼을. 그러니까 한민족이죠. 한민족 안에 약간 다른 족이라고 할 수 있는.

 

그래서 부처님도 아버지는 사끼야족이고, 어머니는 꼴리야족이니까, 마야부인은. 그러니까 사실은 둘 다 친척이죠. 근데 결국은 둘이 서로, 처음에 말싸움으로 시작하다가, 한 방치고 되받아 치고, 주거니 받거니 하다 결국은 군인들까지 완전무장을 해 가지고, 왕들이 군대를 이끌고 서로 나왔어요. 로히니 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다 진을 치고, 서로 맞받아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부처님한테까지 그 얘기가 들려오니까, 부처님께서 ‘내가 그냥 있어서는 안 되겠다. 두 부족이 분쟁을 하다보면 공멸을 하겠다.’그래서 부처님께서 중재에 나셨죠. 중재에 나셨는데, 부처님께서는 신통력이 있으시니까, 딱~ 하늘을 공중을 날아서 사끼야족과 꼴리야족이 대치하고 있는 로히니 강의 중간에 허공에서 딱~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계신 거예요. 그러니까 사끼야족 사람들도 딱 와서 보니까는 강위에 부처님이 딱~ 앉아계시고, 꼴리야족도 와 보니까는 강 위의 허공에 부처님이 가부좌를 틀고 계시니까, 강 쪽에다 대고 삼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서로 지네끼리 삼배를 하는 게 되지. 하하~ 사끼야족은 꼴리야족을 향해서 삼배를 하는 것이고, 꼴리야족은 사끼야족을 향해서 삼배를 하잖아요.

 

그러면서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고, 그다음에 부처님께서 법문을 해주시니까 법문을 듣고, 마음이 바뀐 거예요. 법문의 주요내용들이, “너희들이 지금 왜 싸우느냐? 도대체? 무엇 땜에 싸우느냐?” 하고 추적을 해 들어가 보니까, 결국은 강물, 물 때문에 싸우는 거거든요. 그래서 부처님이, “그러면은”, 무사들이 거기 쫙~ 서로 나와 있잖아요. 끄샤뜨리야 계급 사람들이. “그러면 끄샤뜨리야 이 사람들의 생명이 더 값어치가 나가냐? 이 강물, 물이 더 값어치가 더 나가냐?” 하고 물어보죠. 그러니까는 “글쎄요. 목숨이 아무래도 귀하겠죠.” 물도 목숨을 위해서 필요한 거지, 사실은. 물을 위해서 목숨이 필요한 게 아니고, 목숨을 위해서 물이 필요한 거죠. 그러다보니까는, 그래, 그렇게 목숨이 값어치가 나가는 건데, 둘이 서로 싸우면 서로 죽는 거죠. 그래서 결국, 이긴 자나 진 자나 피해는 막심한 거니까, 생명이. 그런 법문들을 들으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누그러진 거예요. ‘아이, 우리가 싸워서는 안 되겠구나.’해 가지고, 둘 사이의 분쟁이 대화로 해결하게. 이렇게 해서 “물을 사이좋게 나누어대자.”그러면 이렇게 하루는 이쪽으로 댓다, 하루는 저쪽으로 댓다. 이런 식으로 해서 서로 대화를 통해서 합의가 됐어요. 그래 가지고 하마터면은 둘이 막 싸워가지고 큰 일 날 뻔 했는데, 부처님께서 그렇게 중재를 잘 하셔 가지고, 두 부족 간에, 참, 친가와 외가에서, 하하하~ 날 뻔 했는데, 그것을 잘 조정을 하셨다. 그래서 서로 화해를 하고, 그 다음에 농작물을 잘 관리해서 흉년을 면하게 되었다.

 

그래서 흉년도 면하게 되고, 또 전쟁도 피하게 되고. 요것을 부처님께서 직접 나서서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부처님은 그냥 나무 밑에서 맨 날 참선만 했을 거 같은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물론 평상시에는 그렇게 참선하시고, 또 경전을 설하시고 이랬지만은, 이런 현실적인 어떤 분쟁, 또 국가 간의 분쟁이잖아요, 이것은. 이런 게 있었을 때 직접 나서서, 물론 또 신통력도 있어서 또 강물 위에 딱 떠가지고, 허공 위에 떠있으니까 벌써 사람들이 이게 마음이 허허허~ 달라지겠죠. 그 모습만 봐도. 그래 가지고 부처님을 향해서 절을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꼴리야족과 사끼야족이 서로 보고 삼배를, 하하하~ 그래서 우리도 분쟁이 생기면 서로 마주보고 삼배를 하면은. 우리는 북쪽을 향해서 삼배를 하고. 하하~ 그런 방법도 필요할 거 같애요.

 

그래 가지고 우리가 참, 분쟁을 하게 되면 결국은 공멸하기가 쉽거든요. 그래서 고런 것을 이렇게 지혜롭게, 또 평화롭게 조종해주신 부처님의 과거 일화, 이런 것을 우리가 잘~ 새겨볼 필요가 있지 않나. 부처님께서 게송을 읊으셨어요. 요게 아주 좋은 게송이라서 같이 한번 해보겠습니다.

 

 

우리 진정 행복하게 살아가자

증오 속에서도 증오 없이

미워해야할 사람 속에서도

미움을 버리고

우리 자유롭게 살아가자

 

우리 진정 행복하게 살아가자

질병 속에서도 질병 앓지 않고

병자들 속에서도 병듦 없이

우리 건강하고 자유롭게 살아가자

 

우리 진정 행복하게 살아가자

쾌락된 환경에 물들지 않고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쾌락을 따르지 않으며

우리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가자

 

 

야~ 이게 짧은 게송 세 편이지만은, 여기에 그 평화, 자유, 행복, 이게 다 나오는 거 같애요. 어떻게 하면 정말 우리가 행복하고,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지. 예. 그래서 행복과 자유와 평화는 누가 이렇게 주는 게 아닙니다, 나한테. 우리에게 누가 던져주는 게 아니고, “옜다. 행복해라.” “옜다, 자유로와라.” “옜다, 평화로와라.” 이렇게 주는 게 아니고, 우리가 만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우리 작품입니다.

 

근데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냐면은, ‘증오 속에서도 증오 없이, 미워해야할 사람 속에서도 미움을 버리고 살아야 자유로와진다.’ 그러니까 미워해야할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근데 미워해야할 사람을 안 미워하는 것은 대단한 사람이 하는 거죠. 그러니깐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를 하는 것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죠. 허허허~ 남들이 못하는 거를 해야, 그게 대단한 사람이 되는 거죠. 예. 그러니깐 누구나 미워하는 거는 할 수 있는 거지만, “너, 나를 지금 미워했어? 그럼 나도 미워해.” 이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고, 그걸 했을 때 그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근데 그와 반대로, ‘상대방의 증오 속에서도 상대방을 증오하지 않는 거.’ 요거는 정말 평화와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이고.

 

그다음에 ‘병자들 속에서도 병듦 없이’ 육체적 병이나 정신적 병이나, 그런 어떤, 그런 것 없이 물들지 않고 살아가는 것.

 

그다음에 ‘쾌락에서도 쾌락을 따르지 않으며’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쾌락을 따르지 않으며 자유롭고 평화롭게’ 요것도 아주 요새 현대 사회에서는 상당부분 공감이 가는 부분입니다. 물론 우리가 분쟁이나 또는 질병이나 이런 것들이 참 큰~ 문제죠. 하지만 진짜 더 큰 문제는 쾌락을 추구하는 거, 이게 더 큰 문제라는 거예요. 이것을 순경계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크~게 경계가 두 가지 경계가 있어요. 역경계와 순경계. 역경계라는 것은 나한테 오지 않았으면 하는 거. 이게 역경계예요. 질병, 분쟁, 이런 거 안 왔으면 좋겠죠. 그게 역경계예요. 순경계는 나한테 좀 왔으면 하는 게 순경계예요. 근데 부처님 말씀이 차라리 역경계는 우리에게 덜 속박이 된다는 거예요. 순경계가 더 위험하다. 역경계는 어떤 분쟁이 오거나 질병이 오면은 사람이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야, 내가 이걸 이겨나가야지.’ ‘야,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될까?’하고 오히려 막, 대화나 어떤 회합을, 또는 자기 경각심을 통해서 그걸 이겨나갈라고 노력을 하는데.

 

순경계,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 여기서는 이거 이겨나갈라 그러지 않고 거기에 물들기가 쉽죠. 오히려. 예. 경각심을 가지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 끌려들어가고 물들고. ‘아,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사는데 뭐, 나라고 뭐 이렇게 살면 뭐 안 될 거 있어?’이런 생각이 들잖아요. 왜냐하면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꼭 그렇게 사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러고 언론이나 이런 데서도, 참 그런 어떤 쾌락을 추구하는 걸 부축이잖아요. 수많은, 저는 광고들 보면서, 아주 그 사람들의 그 감각을 자극하는 그런 광고들이 참, 홍수 같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다 쾌락을 부추기는 거거든요. 물론 물건을 팔기 위해서 하는 거지만, 결국은 감관을 건드려서 쾌락을 부추겨서 물건을 파는 거잖아요. 그런 것들이 나중에는 당연시 여겨진다 이거죠. 거기서 뭐 경각심을 일으키지도 않고, 오히려 쾌락에 빠지지 못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쾌락에 같이 들어가는 게 정상인 걸로. 이렇게 알 수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될 것은 분쟁보다, 질병보다 쾌락에 탐닉하는 거. 이게 더 무서운 거고. 이거는 뭐 병에 걸린 지도 모르게 걸리는 거니까. 그래서 고런 세 가지. ‘증오 속에서도 증오 없이, 질병 속에서도 질병을 앓지 않고, 또 쾌락 속에서도 쾌락을 따르지 않으며 자유롭게 살아가자.’

 

그래서 이 자유라는 것은, 물론 육체적 자유도 필요하겠지만은, ‘진정한 자유는 바로 이런 증오로부터의 자유, 또 질병으로부터의 자유, 또 쾌락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 이게 진정한 자유지. 다른 자유는 물론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자유는 되지만, ‘진정한 자유를 얻고 진정한 행복을 얻을래면은 증오 속에서도 증오하지 않는, 질병 속에서도 질병에 물들지 않는, 또 쾌락 속에서도 쾌락에 빠지지 않는, 자유. 요게 진정한 자유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하 하하하하~ 힘들어도 알고 있어야 언젠가는 벗어날 수가. 꾸준~히 노력하면은. 자기가 똥구덩 속에 빠졌는지를 알아야 벗어날라고 하는 거지. 그 자체를 모르는 거예요. 왜냐하면 똥 속에서도 처음에는 냄새가 나는데 나중에는 적응이 돼가지고 냄새가 안 나요. 왜냐하면 그게 당연한 줄 알아요. 허허 허~

 

그러니까 구더기를 불쌍하다고 똥 속에서 건져가지고 맑은 물에 넣어주면요, 구더기는 거기 지옥입니다. 거기가. 왜냐하면 이미 똥에 적응이 돼있어 가지고, 그 속에 들어가야. ‘아, 아늑하고 따뜻하다. 먹을 것도 많고, 천국이 따로 없네.’이럽니다, 그거 건져가지고 맑은 물에 넣어주면은 ‘아이고 나 죽어. 먹을 것도 없고. 이거 뭐야 도대체. 이게 지옥이야.’이런 다구요. 왜 그러냐? 거기에 물 들은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어디에 물드느냐가 중요한 거죠. 증오에 물들거나, 질병에 물들거나, 쾌락에 물드는 사람이 그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물들어 가지고, 자기가 그 물든 속에 있는 거조차도 잊어버리게 되니까.

 

그래서 이런 것들을 부처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자신을 한 번 더 돌이켜보고, ‘아~ 내가 올해만이라도 한 번 자유롭게 살아보자. 진정한 자유를 한 번 내가 얻어 보자. 이렇게 심기일전해서, 작심삼일, 삼일에 한 번씩 되새기면서 일 년을 끌고 가보는 거죠. 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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