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직접 본적이 있는가?

2011. 4. 16. 13:3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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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직접 본적이 있는가?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은 까필라와스뚜(Kapilavastu)이다. 지금의 네팔 안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 까필라와스뚜를 방문한 적이 있는 도올 김용옥 교수는 어느 TV의 특강에서 게와집 몇개 있는 조그마한 동네라고 하였다. 이는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큰 나라의 왕자가 아니라 작은 나라의 왕자임을 상기시켜 주기 위해서 한 말일 것이다.

 

아무리 나누고, 쪼개고, 분석을 하고, 관찰을 해 보아도 

작은 나라의 왕자 부처님은 출가하여 이곳 저곳을 유행하며 공부하셨다. 그때 당시 이미 최고의 교육을 받았을 부처님은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스승을 찾아 공부하였는데 만족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 부처님의 출가당시 전통적으로 전승되어 온 사상 중의 하나가 범아일여인데, 부처님은 이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불교tv사이트에서    버릴 것인가 찾을 것인가란 프로에서 정준영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다. 

 

처음에 브라만과 합일하기 위하여 수행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실체를 찾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했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나누고, 쪼개고, 분석을 하고, 관찰을 해 보아도 그 안에서 아주 미세한 것마저 고정된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못 찾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이다.”

(정준영 교수, 제1회 초기불교의 이해 -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있는가?)

  

부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물질과 정신으로 분해하고,   마음을 수상행식으로 나누어 분석하고, 관찰해 보아도 손톱 끝으로 잡을 수 있는 작은 흙먼지 크기의 입자정도 되는 고정된 실체조차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정된 실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아라고 설하셨다고 한다.

 

마지막 효도 

법문을 듣다 보면... 무언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지켜보고 있다고 한다. 더구나 비디오 카메라로 우리의 행동을 낱낱이 찍고 있다고도 한다. 그래서 죽었을 때 그 비디오를 되돌려 보면서 악행과 선행을 구별해 낸다고 한다 

하지만 악행을 저질러 악처로 가게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49재를 지내주면 선처로 갈 수 있다고 한다. 염라대왕이 심판할 때 잘 봐달라고 부탁하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해서 죽은 부모를 위하여 자식들이 마지막으로 효도하는 것이 따라서 49재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라고 법문하는 것을 불교TV에서 보았다. 

목사들의 설교 역시 천국과 자신의 창조주에 대하여 실감나게 이야기한다. 마치 천국을 갖다 와 본 사람처럼, 창조주를 만난 것처럼 이야기 한다 

이처럼 종교인들은 보이지 않는 실체가 있다고 말하고, 신자들은 그 말을 그대로 믿는다. 하지만 그 누구도 보았다거나 들었다거나 느끼지 못하였다면 실체가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신을 본적이 있는가 

이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신의 영역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고 우리의 인식 밖에 있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예로부터 그렇게 말을 하여 왔기 때문에 그런 줄 알고 무조건 믿어라는 말과 같다. 이와 같은 견해에 대하여 초기경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였다. 

 

“그대는 그들 모두가 브라흐마 신과 하나됨으로 이끈다고 말하는가?”

“그렇게 말합니다. 고따마 존자님.”

“그러나 와셋타, 세 가지 베다에 정통한 브라흐민들 중 어느 한사람이라도 브라흐마 신을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또는 세 가지 베다에 정통한 브라흐민들의 스승의 스승 중에서 어느 한 사람이라고 브라흐마 신을 직접 본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또는 그 스승들 중 7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어느 한 사람이라고 브라흐마 신을 직접 본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디가니까야:13 떼윗자 경 1-15,19,24,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부처님은 브라만을 믿는 브라흐민들에게 신을 본적이 있는가?”하고 물어 본다. 그러자 누구하나 신을 본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 것도 7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신은 본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자 역시 본적이 없다고 말한다.

 

선인들이 쓰고 암송한 것을 

그래서 부처님은 브라흐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와셋타, 세 가지 베다에 정통한 브라흐민 중에 어느 누구도, 또한 그들의 스승들 중 어느 누구도, 또한 그 스승의 스승들 중 어느 누구도, 또한 그 스승들 중 7대를 거슬러 올라가 어느 누구도 브라흐마 신을 직접 본 사람이 없다.  

베다 시구의 저자이며 암송자들인 고대 브라흐민 선인들이 쓰고 암송한 것을 오늘날 브라흐민 선인들이 쓰고 암송한 것을 오늘날 브라흐민들은 전승된 그대로 정확하게 그대로의 어조로 암송한다.  

전승을 그대로 암송하는 이들조차도 ‘브라흐마 신이 언제 나타나고 어떻게 나타나고 어디에 나타나는 지를 알고 본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세 가지 베다에 정통한 브라흐민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들은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브라흐마 신과의 하나되는 길을 가르친다. 그러면서 이것만이 해탈에 이르는 곧은 길이며, 바른 길이며, 이 길을 따르는 사람은 브라흐마 신과 하나됨으로 이끈다’고 말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브라흐민들이 말하는 것이 터무니없음이 드러나지 않았는가?”
(디가니까야:13 떼윗자 경 1-15,19,24,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어느 누구도 신을 본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과 합일하는 범아일여를 주장하지만 이는 고대 브라흐민들이 전승한 내용을 그대로 암송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터무니 없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빌고, 간원하고, 구슬린다고 해서

그리고 부처님은 예를 들어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찾아 사랑하려는 것과 같다고 설명한다. 이는 알지도 못하고, 본적도 없는 여인을 사랑하려는 것 같이 공허한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또 부처님은 예를 하나더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것은 마치 아찌라와띠 강을 건너 저쪽 강둑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이 그냥 이쪽 강둑에 서서 소리지르기를, ‘저쪽 강둑아 이쪽으로 오너라!’하고 부르는 것과 같다. 와셋타, 이 사람이 부른다고 해서, 빌고, 간원하고, 구슬린다고 해서 저쪽 강둑이 이쪽으로 오겠는가?”

(디가니까야:13 떼윗자 경 1-15,19,24,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이쪽 강둑에서 저쪽 강둑으로 건너가려 하는 자가 건널 생각은 하지 않고 저쪽 강둑에 대고 이쪽으로 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는 실체도 없고 단지 이름이나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대상에게 빌고, 간원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이는 선대부터 전승되어온 계율과 의식 때문이다. 조상이 그렇게 하였기 때문에 후손은 의미도 모르는 채 따르는 것과 같다.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아찌라와띠(Acirvati) 

경에 나오는 아찌라와띠(Acirvati)은 어디에 있을까.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지금의 네팔과 인도의 웃따 쁘라데쉬(Uttar Pradesh) 주를 관통하여 흐르는 고대의 강이름이라 한다. 현재는 랍티(Rapti)강이라 부른다고 한다 

아찌라와띠강은 부처님 당시 꼬살라(Kosala)왕국의 수도이었던 스라와스띠(Sravasti, Savatti, 사위성)가 서쪽 제방 방향에 위치하였고 갠지스강을 구성하는 다섯 개의 지류 중의 하나라고 한다. 그런 아찌라와띠강은 어떤 모습일까 

하나는 위성으로 찾아 보았고, 또 하나는 후박나무님의 블로그에 실려 있는 사진으로 확인 하였다. http://blog.daum.net/whoami555/13742041

  

 

 

 구글위성으로 본 아찌라와띠(Acirvati)

강아래 벌판 가운데 스라와스띠(Sravasti, Savatti, 사위성)가 보인다. 

 

 

 스라와스띠(Sravasti, Savatti, 사위성)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Sravasti

 

 

 아찌라와띠 강 

출처 http://blog.daum.net/whoami555/13742041 

 

 

 

 

 

쓸모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죽은 이도 살려낸다는 명의가 있었다.

이름이 지바카인데 인도말로 ‘생명’이라는 뜻이다.

그는 부처님을 잘 따랐던 빔비사라왕의 아들인 무외와 창녀와의 사이 태어났다.

어머니가 그를 낳자마자 보자기에 싸서 버렸는데 마침 무외 왕자가 발견하였다.

왕자는 죽은 줄 알았더니 목숨이 붙어 있다고 하여

‘지바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잘 키웠다.

 

지바카는 15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인 무외 왕자에게 공부를 하겠다고 말했다.

무슨 공부를 하겠느냐고 묻자,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생명을 되찾아 주기 위해 의술을 공부하겠다고 하였다.

지바카는 집을 떠나 이웃 나라의 명의인 핑갈라에게 10년 간 의술을 배웠다.

 

10년이 지난 어느 날 스승은 의술의 마지막 비법을 알려주겠다고 하였다.

희망에 부풀은 지바카에게 스승은 묘한 제안을 하였다.

 “전국을 다 뒤져서 ‘약에 쓸 수 없는 풀들만 골라서 한 바구니’를 구해오라.”는 것이었다.

지바카는 명의가 되겠다는 희망으로 방방곡곡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하지만 산과 들에 널려 있는 풀들 중에서 약에 쓸 수 없는 풀을

찾는 것은 참으로 힘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지바카에게 스승이 “얼마나 캐 왔느냐?”고 물었다.

지바카는 “아무리 뒤져 보아도 쓸모없는 풀을 찾을 수 없어서

스승님의 분부를 받들지 못하겠다.”고 힘없이 대답했다.

그때 스승은 뜻밖에도 지바카에게 자비스럽게 말했다.

 

“하나도 뽑아오지 못했다는 말이지? 잘했다!

쓸모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안 너는 참으로 어진 의사가 될 것이다.

이제 아픈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러 가라.”

 

스승 핑갈라의 예언적 당부대로 지바카는 민간에서도 못 고치는 병이 없었다.

빔비사라왕의 치질과 부처님의 풍병,

아나율 존자의 눈병과 아난다 존자의 부스럼을 치료하는 등 명의가 되었다.

당시에 별 기구도 없이 두개골을 절개하는 수술을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면서도 파세나디왕에게 자신은 기껏 사람 몸의 병이나 돌볼 뿐

마음까지 돌보는 대의왕은 바로 부처님이라고 하였다.

 

세상에 정말로 쓸모없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