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수행할 것인가?--고산 스님

2011. 7. 1. 23:4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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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수행할 것인가?--고산 스님 

새벽 동천에 뜨는 샛별아
몇 줄기 푸른 물은 바위 앞을 지나가고
한 조각 흰구름은 강 위를 떠도네.  
산도 그 산이여,  물도 그 물이로다.  
그 하늘,  그 구름,  무한한 시간과 드넓은 공간.  .  .  .  .  
성도가 무엇이고,  열반은 무엇인가?

번뇌의  타는 불을 꺼버린 상태를 열반이라 한다.

생노병사에 얽힌  모든 부자유와 무명을 완전히 제거한 적정의 상태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는, "나는 일체의 승자이며, 일체 의지자 이다.

 일체법에 물들지 않고, 일체를 버렸으며, 갈애가 다하여 해탈하였다"고

말씀하시어, 성도의 깊은 의미를 간파하셨다.

즉,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체득하여 완전히 깨친 각자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성도는 보편타당한 진리를 바르게 보고 참되게 알며, 또한 그것을 자기

체계화하여 자율적인 인격을 완성함을 일컫는다 할 것이다. 그렇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분명히 새벽의 동천에 뜬 샛별을 보시고 문득 성도하시었다.

동천에 뜬 샛별은 석가세존께서  성도하시기  전에도 떴을 것이며, 앞으로

몇만 겁을 지나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뜰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석가세존께서

성도하시기 이전의 많은 세월 동안에도 그 자리에 뜨고 또한 날이 밝으면

사라졌을 것이건만, 어찌하여  석가세존께서만 성도의 길잡이로 삼을 수

있었단 말인가?    

우리들의 눈에도 샛별은 보이고, 우리들에게도 무한한  세월과  계기가

주어졌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껏 어둠 속에서 샛별을 등지고  무명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같은 날, 같은 새벽, 같은 별을 보면서도  어찌하여 우리들에겐

성도가 없단 말인가! 청정법신, 본래의 대광명, 대자재, 묘용난사한 진리의

세계에서야 탄생도 없고 , 죽음도 없으며, 성도마저도 없는 것이겠으나,

우리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바른 길을 가르치고 전미개오의 큰 법을 보이기

위해서는 팔상의 시현이 분명하고 방편의 가설이 역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리라.  

우리는 어디까지나 미혹을 헤매는 어리석은 중생일 뿐이다. 논리적으로 추측하고,

구두선으로 나불대며, 사비량으로 짐작하면서 그것이  성도인 것처럼 착각하고

오만을 부리는 세태가 한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성도란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는 바른 길을 완전히 발견하였다는  뜻이다.

번뇌의 찌꺼기가 없는 무루의 지혜라고도 하며, 성불 또는 성등정각이라고도 하여,

불과에 이르는 참된 수행을 이룩함을 뜻한다. 이것은 체험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자기개발의 광명이요, 진루망상이 모두  떠나버린 슬기의 결정이며,

오욕과 무명의 여읜 해탈을 극점이기도 하다.  

성도절을 맞음에 있어 우리 모두는 뼈를 저미는 마음으로 오늘의 수행을

반성하여야 할 것이요, 새로운 각성의 마음 무장에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같은 인연으로 세상에 태어나 , 석가모니 부처님은 3천년전에

성도하시었건만 어찌하여 우리들은 끝없는 생사고해에서  순류표침만을

계속하고 있단 말인가.
마땅히 우리들 수행력을 뒤돌아 볼 일이다. 어찌 성도가 남의 일일 수 있으랴!

불교의 절대적이며 근본되는 교리의 골격으로 삼학이 있다.  
계-정-혜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불교를 배워 도를 이루려는 이가 반드시  

닦아야 할 세 가지 배움의 길이라는 뜻이다.          
러시아의 문호 푸쉬킨은 일찍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양식있는 인간이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가를 신속하게 판단하는 능력을 가진 자라 할 것이다. " 

 불교도가 지향하는 궁극의 도달점은'깨달은 사람'이 되는 것인 바,  

위에서 푸쉬킨이 말한 '양식있는 사람'과 상통하는 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라고 하는 슬로건이 말하듯 정신을  청정하고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상 언동에 특별히  유념하여야 할 것이요,

규범에 어긋나지 않는 생활로서 일관하지 않으면 안된다.  

정이란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의식작용으로서, 흔히 선정이라 표현화며,

마음을 안정시켜 하나의 사고대상으로 전심전념하는 것을 말한다.  

혜는 계와 정으로 대표되는 건강하고 균형있는 신체작용과, 안정된  정신을

통일할 때 얻어지는 식견이자, 지혜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가지 조건에 충실할 때, 비로소 그 사람을 '양식있는 사람'이라 부르는

것이요, 그것은 곧 불교인의 궁극의 목표인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그 첫

걸음이라 할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기본적인 수행의 조건을 '신'속에 포함하여 그 본래의

뜻을 살리고 있다.  계는 산만한 마음을 방지하여 산란하지 않게 하는데

그 뜻을  둔다. 불교는 신을 존숭하여 믿고 의지하는 유신론적인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본래 청정한 자성을 깨닫고, 그게 곧 우주 본연의 이치요 진리임을  알아,

 최고의 지혜를 증득 완성함에 그 목적을 두는  철저한  자력신앙의 종교임을

알아야 한다.  

마음이 곧 부처님이라고 하였으니, 일체 만유는 마음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을 청정하고 바르게 갈고 닦아 본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러나 중생들에게는 안, 이, 비, 설, 신, 의라고 하는 육근이 있어, 온갖 번뇌와

망상과 시시비비가 생겨나고 , 그에 따라 공연한 분별심이 일어나는 것이니,

 이를 어찌 할 것인가? 이 육근이 요구하고 가고자 하는 바, 이끄는 대로 이끌려

가게 된다면,  부처님 되고자 하는 본연의 길과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것은 당연지사다, 어찌 육근의 시종이 되고서 성불의 대도를 이룰 수 있겠는가?

즉, 계는 이 육근에서 비롯된 온갖 부정한 욕망과 번뇌 망상, 삿된 분별심을

엄히 단속하는 채찍과도 같은 것으로, 가히 불심을 보호하는 울타리요,

담이라 할 것이다. 계를 지킴으로 하여 안정을 얻게  되며, 번뇌와 망상이

구름 걷히듯 소멸한다.  

정은 경거와 요동이 없는 평온정착한 마음상태를  가리키는  가르침이다.  

마음에서 잡된 물결이 고요히 잠들고, 식랑의 거친 파도가  침식되어버린

상태야말로 부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정담한 현상이라고 할  것이다.  

정은 참된 사고와 참구의 기본이다.  산란한 마음에서 어찌 바른 사고작용과

몰두가 행하여질 수가  있겠는가? 모든 과학과 문학적 유산이 곧 정에서

가능했던 것임을 알아야 한다.  

혜는 슬기로움을 의미한다.  계를 준수하여 고요함의 울타리를  두르고,  

그 속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어 밝고 자유로운 사유를  행하고, 그로부터

지혜 즉, 참된 슬기가 생겨나는 것이며, 비로소 부처님의 절대  자유하고

평등무애한 세계로 나아가는 바른 방편을 얻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대비바사론의 삼장과 삼학을 비교할 수 있다. 율은  계학에, 경은 정학에,

론은 혜학에 대비된다 할 것이다.  팔종강요권상을 보면, 삼장은 능전의

가르침이며, 삼학은 소전의 의라고 하였다.  

경, 율, 론, 삼장은 주관적인 교리라 할 수 있으며, 계, 정, 혜, 삼학은 객관적인

교의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삼장의 교리를 근본으로 하여 삼학의 깊은 뜻을

실천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천 가지 경과 만 가지 이론에 모르는 바 없이

모조리 통하였다 하더라도, 결국 두 발로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실천력과

치열한 수행에의 정진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 많은 지식과 알음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것은 마치 가을이 저물어 가는 산 속에 떨어져 내리는

낙엽과 같은 것이다.

이 글은 계. 정. 혜. 삼학을 이론적으로 자세히 설명하자는 데에 그  본래의

뜻이 있다. 경과 율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청정하고, 수행의 실천력이

바르다면 그것이 성불작조의 가장 확실한 씨앗이 됨을  밝히고자 함에 뜻이

있는 것이다.  

거듭 말하건대, 계는 악이 새어들 틈을 틀어막는 데 필요한 처방이며,

정은 지와 적을 위한 것이라면, 혜는 지와 관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어느 일이건 그 근본되는 바 기초를 바르고 튼튼하게 닦음이 우선이듯이

불교수행의 근본은 곧 삼학인 것이니 잊지 말고 명심할 일이다.

참회 우리 불자들이 생각생각마다에 공부할 생각을 지니지만 뜻대로 이루지

못하고 허송세월만을 보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중생사인 것이다.

이렇게 한 해 한 해 지나가고 점점 죽음의 문에  다다르게  되니 곧 죽음에

이르게 된다. 마치 도살장으로 향하는 중생들처럼 한걸음 한걸음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거늘 모두가 이를  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기에 어리석은

중생인 것이다.

 매일 매일 자신의 지나간 행적을 참회하고 살펴본다면 , 우리는 많은

시간들을 벌 수 있다. 참회는 왜 하는가 하면 모든 중생들이 본인도 알게 

 모르게  십악죄를 짓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죄 지은 일이 없는 데 무엇 때문에  참회를 하는가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불효를 했거나 남편 봉양을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

등은 양심때문에 참회를 잘 한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뚜렷이 죄지은

일이 없는 사람은 참회하는데 인색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 중생들이 왜 참회를 해야 하는지 살펴보자.

정초 참회 7일 기도를 할 때 10가지 죄악 중 첫째가 산 목숨 죽인 죄를 참회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살생 한 번하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무의식중에 산 미물을 살생한 경우가 허다하며 몸에 이롭다고  닭이나

소, 돼지, 개 등을 마구 잡아 먹는 것이 중생들인 것이다.

그 다음에는 도둑질한 죄를 참회하는 것이다. 요즘 세상에 도둑질 한 번 하지

않은 사람도 없다. 양심에 손을 얹고 잘 반조해 보면 누구나 도둑질 한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세 번째는 사음한 죄를 참회하는 것인데 정한 부부 이외에

다른  사람 생각만 내도 사음한 것이 된다.
네 번째는 거짓말한 죄를 참회하는 것인데 세 살까지만 해도 거짓말을 하지

않다가 네 살만 넘어 분별심이 생기면 벌써 거짓말을 하게 된다.  

이렇게 중생들이 무의식중에도 죄를 짓기에 참회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고

부처님께서 사바세계에 출현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중생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의지, 수행하면

밝은 세계가 되고 사람이 착하고 어질게 된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각자의 길이 있다. 남자의 길, 여자의 길, 농부의  길 ,

 상인의 길, 이 길이 바로 도이다. 이 길대로 점차적으로 수행하면  되는데

중생들은 신, 구, 의, 삼업을 끊임없이 지어 죄를 짓게 된다.  

부처님께서 하신 마지막 법문 중에 입을 봉하여 꼭 한마디 할 때 열 번 이상

생각하고서 하라 하셨다. 간단하면서도 여기에 모든 도리가 다 들어 있다.

또한 뜻도 함부로 일으켜서는 안된다. 자기도 모르게  중생들이 수시로 업장을

일으키고 계속 십악을 지을 뿐 아니라 팔만 사천 번뇌 망상이 쉴 사이 없이

일어나고 있는데 입을 모으고 생각을  가다듬으며 행동을 함부로 옮기지

않으면 모든 것이다 씻겨지게 되고 하루하루가 행복하게 될 것이다.

내 양심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 바로 참회다.  우리 손가락 하나하나에도 전부

이름이 있다. 손가락 하나하나는 따로따로 힘을 쓰지 못하지만 합치면 힘을

쓰고 사용할 수가 있다. 우리 불자들도 분열하지 말고 화합, 단결하면 안락

국토가 되는 것인데  분열된 생각이 서구에서부터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불자들은 서구의  개인주의 정신을 본받지 말고 우선 이웃부터 화합하여

불행한 일, 즐거운  일을 함께 하는 보살행을 실천해 나가야 하겠다.

불교의 대자대비 정신으로 화합하여 민족정신을 통일시키고 동강난 우리 

 민족도  통일시켜야 한다.  우리 세상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흔히 복을 말하고

있다. 복 중에서 제일은 오복이다. 경전에서 오복은 세 가지로 나오는데

그 한 가지는 수명장수, 부귀, 강령(편안한 생활을 하는 것), 호덕, 임종을

잘 하는 것이고 두 번째 오복은 수명장수, 부자로서 넉넉하게 사는 것,

몸에 병이 없는 것, 재앙이 없는 것, 도덕군자이며 세 번째 분류는 오래 사는  

것, 부귀, 기가 있는 것, 강령 아들 많은 것이라 했다.

이 세 가지 오복의 분류 중에서 요즘은 세 번째 것을 많이 찾고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오복을 말해도 이에 해당하는 자가 없어  자나깨나

걱정이 많은 것이다. 재산이 많으면 수명이 짧다든가 수명이 길면 재산이

 없다든가 한다. 이러한 이치를 알면 한 가지 성취되면 다른 것은 성취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이  전부 이와 같다고 하셨다. 즉 장단이 있다고 하신

것이다. 모든 것을 다 갖출 수는 없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좋은 일은

잘 하지 않으려 하고 나쁜 일 하기를 멀리 하고 좋은 일, 하기 어려운 일을

자꾸 실천해야 보살이 되고 성불도 할 수 있다. 이 점을 명심하고 부처님

말씀대로 선업을 쌓아 늘 행복한 하루하루가 되도록 하자.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 보살행을 알기 전에 먼저 보살의 정확한 뜻풀이가

있어야만 할 것 같아 보살이란 어떤 분인가를 대강 설명하고자 한다.

보살이란 보리살타의 준말로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보살이란'깨달은 중생'이다. 이는 그 본모습은 부처님이지만 짐짓

중생을 구제키 위해 중생으로 화현하는 하화중생적인 의미의 대성자를

가리킨다. 둘째, 보살은'깨달음으로 가는 중생'으로서 육바라밀, 팔정도

사홍서원 등을 닦아 나가는 상구보리적인 불국토 건설의 본원을 가진

모든 불자들을 지칭하는 뜻으로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보살행은 두 번째의  '깨달음으로 가는 중생'으로서의 보살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보살행을 익히는 요령을 배워보자.

보살행이라고 하면 불경에서는 대체로 육바라밀, 사홍서원, 자리이타,

상구보리하화중생, 도체대비 등으로 말씀하고 있음나 여기서는 그러한

본격적인 보살행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기초적 소양으로서의 '세 가지

독한 마음을 여의는 방법'을 중점적으로 논의하겠다.

첫째, 보살은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막연히 '욕심'하니까 그 한계가 본명치 못하나 대체로  분수에 맞는 삶을

벗어나는 것이라 생각된다.  욕심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재산에 대한

욕심, 성욕, 음식욕, 명예욕, 그리고 수면에 대한 욕심이 있는데 사실

이  다섯은 어느 하나도 생활에 필요치 않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치면 욕심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재산도 열심히

땀흘려 많이 벌어서 좋은데 쓰면 되는데  사람이 그렇지 못해서 잡으면

놓을 줄을 몰라 집착하고  축적하려고만 하니 그것이 큰 탈이다.  

재물이란 항상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꼼짝 못하게 하니, 그로 말미암아

모든  죄악의 싹이 트며 세상을 어지럽히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성욕도 종의 번식을 위해서 건전한 부부관계는 좋으나 함부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한다든지 방탕하고 무절제한 성관계는 사회윤리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종교적으로 볼 때도 용인될 수 없는 죄인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인생이 색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도 그만큼 사람을 번뇌죄장으로 묶어 놓는 큰 힘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옛 어른의 말씀에 재색지화는 심어독사라  함도  이를 두고 하는 뜻이리라.

재산과 성욕에 의한 화가 독사에 물린 거솝다 심하다는 이뜻을 눈 어두운

우리 중생은 깊이 음미해야 할 것이다. 식욕, 명예욕, 수면욕 등도 마차가지로  

어느 것이나 삶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지나치면 인생을

망치는 욕심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욕심이 지나치면 탐심이 되고 우리의

오관과 정신이 탐심에 물들어 경계마다 호상이요, 일마다 사고가 터져

일체 행동거지가 곧 죄업이 되고말아 영원히 헤어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니 조심할 일이다.  

명심할 것은, 열심히 땀흘려 정당하게 벌어서 바르게  쓰고, 남은 것은 중생과

부처님을 위해서 돌이켜 공양할 줄  아는 진정한'동체의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둘째, 보살은 화를 내지 않는다.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은 앞에 설명한  탐심을  제거했다는 뜻이 된다.

왜냐하면, 성냄이란 자신의 구하는  바가  좌절될 때 일어나는 고약한

번뇌이기 때문이다.  만일 정당한 욕구라면 성취되지 않을  리도  없겠지만,

설사 만족치 못하더라도 정당한 성취를 위해서 부단히 쉼없는 노력만이 있을 뿐

성냄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잘못된 욕심의 근본적인 문제는  일시적  충동에 의한 욕구라는 것과,

그러한 죄악에 물들  욕구를  성취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욕구의 물결'그것이 더욱 문제라는 점이다.  

 

옛말에 견물생심이란 단어가 의미하듯이 보고 듣고 인식하는 대로 보다 좋은 것,

맛있는 음식, 값진 의복, 편리한 시설, 훌륭한 주택 어느 것 하나 마음이

이끌리지 않는 바가  없는데 현실이 그것을 취할 수 없을 때 (대개 자제력으로

순간을 극복하지만)참지 못하고 울컥 흥분하면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저지르고

마는 것이다.  정당한 방법, 노력을 수반한 성취를 생각해야지 비리로 얻어지는

순간의 기쁨은 영원히 고통만 증가시킬 뿐이라는 깨끗한 자각이 필요하다.

이것이 진심을 방지하는 길이라고 생각된다.  화라고 하는 것은 초조, 긴장, 갈등,

 불안 등의 심리적 현상을 동반하는 것으로서 이는 정신적 안정을 해치며 심성을

포악하게 하고 판단을 흐리게 하는 등, 결국은 미로를 헤매는 악순환을 거듭케

하므로써 파멸을 가져오는 것이다.  화를 내면 육체적으로는 쉬 늙게 되어 수명이

단축되고  몸의 제 기능이 정상을 유지하지 못하여 만병의 근원이 된다는

의학계의 보고에서 보듯이 , 화는 매우  경계해야될  성질이다.

 

옛말에 한 번의 화로 몸의 피가 서 말 석 되가 마른다고 하였고, 어떤 큰 스님이

평생을 수행하고도 한 번의  화냄으로 인하여 그 자리에서 뱀의 몸을 받았다는  

일화를  보더라도 두렵고 두려운 것이 성내는 일이다.

셋째, 보살은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어리석다는 단어는 퍽 이해하기가 곤란한 말인지도 모른다.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인지의 깊고 얕음이 있기  때문에 어떤 상태를 어리석다 하겠는가?

이는 객관적인 판단기준에 맡겨야 한다.  경전에 의하면 어리석음이란,  

 

첫째로 자신을 과신하는 상태로서, 자기의 수명이 무한할 것이라 믿는

고집, 자기의 생각만이 옳다는 고집, 모든 사물이 자기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믿는 고집 등을 들 수가 있고,  둘째, 너무 자신을 멸시하는 상태로서, 자신의

주관이  없고,  뚜렷한 신념이 없으며, 자신의 존재마저 부정해 버리는 일종의

허무주의적인 견해로서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마저 갖지 못하는 안타까운

중생의 상태를 말한다.  또한, 죄를 인정치 않고 도덕관념을 낡은  사상이라고  

하여 배척하며, 자기만이 새시대를 창조하는 위력을 지닌 절대자적 존재로 믿고

 교만, 방자하여 타인을 해치는 행위 등도  지극히 어리석은 것의 범주 속에

 들어간다고 본다.

이상의 세 가지 독한 마음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계율을 지키는 굳은 마음,

지극한 평화를 지키는 선정의 마음, 시비곡직을 판단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지혜의 마음을 가꾸어 나가는 것이 보살의 기초적 소양이기에 간곡히

부탁하는 것이다.  먼저 자신의 내적수행을 돈독히 하고 외적교화를 위해

부지런히 불법의 말씀을 말과 행동으로 이웃과 사회와 가족에게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이 보살행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서 실천해 나가기를 바라고 바란다.  
여기에 육바라밀, 팔정도, 사홍서원을 닦아나간다면 그보다 더한 공덕이

어디 있으며, 그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으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