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칠불통경(七佛通經)이라 하여 《법구경》에도
나오는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마음을 맑히라 함은 겹겹으로 닫쳐 있는
마음을 활짝 열라는 뜻입니다.
나쁜 짓 하지 않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착한 일을
행할 때 그 마음은 절로 맑아집니다.
또 열린 그 마음은 착한 일을 스스로 하게 합니다.
마음의 바탕은 선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이처럼 마음을 맑히는 일입니다.
언제 출가해서 스님이 되었는가,
얼마나 오랫동안 절에 다녔는가는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투명한가,
얼마나 열려 있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신앙에 귀의한 기간에 따라 마음의 맑고
탁함이 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적인 이론이란 공허한 것입니다. 경전을 읽고
어록을 거듭 되새겨 보아도 공허함을 느낍니다.
이 알고, 보고, 듣게될 수록 거기에 걸려서
실제로는 행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루하루 행(行)할 수 있으면 됩니다.
아는 것이 너무 많으면 도리어 병이 됩니다.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무학(無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배운 것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배움에 걸리지 않은,
배운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아는 것에 걸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말을 했고 따위의 인용을
잔뜩 늘어놓을 뿐 자신의 소리는 없습니다.
제대로 여과(濾過)되지 않아 그런 것입니다.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알려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적게 알고도 많이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가지를 듣고도 열 가지를 행할 수 있다면
그는 바로 듣고 알아차린 사람입니다.
자비니 사랑이니 하는 것은 지극히
추상적인 말입니다.
만나는 대상 누구에게나 한결 같이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바로 자비입니다.
밝은 표정과 따뜻한 말씨로서
이웃을 대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신앙인 들에게 화두(話頭)가
되어야 합니다.
화두라고 하니 조주스님의 '무(無)'나 임제어록의
것처럼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만나는 이웃마다 따뜻하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
이것이 화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굳이 들추지 않더라도
너무 살벌하고 거칠고 어둡습니다.
그 나라 국민의 자질과 수준을 알려면 그들의
친절 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얼마나 무례하고 거칠고 불친절한지는
해외에 나가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친절이 대하면 내 마음이 열려서 따뜻해집니다.
일상 생활 속에서 쉬 경험하는 일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저도 사실은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저 역시 평상시에 다른 사람에게 불친절한
편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큰 교훈을 얻은 일이 있습니다.
미국 칼리포니아 세크라맨토에 잘 아는 신도와 함께 한
가정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그 집 안주인은 매우 친절했습니다.
하지만 늦게 귀가한 바깥주인은 뭔가 마땅치 않은 표정으로
우리 일행을 본체 만체 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손님에게 어찌 이리 대할 수가 있는가 싶어
좀 불쾌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돌이키게 되었습니다.
살아오면서
저 자신 주변 사람들에게 모질고 불쾌하게
대한 것들에 대한
과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불친절하게 대한다면
그것은 내가 일찍이
내가 누군가에게 불친절했던 것에 대한 메아리가
되돌아 온 것입니다.
그때의 좋은 경험을 바탕으로 저도 그 후로는 친절하게
사람을 대하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참선하고 기도하는 일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에 못지 않게 타인과의 일상적인 접촉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맑힐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그때그때 열어야 합니다. 마음이 열려야
갈등과 대립이 살아지고 하나가 됩니다.
개인과 가정, 사회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집안에 갈등이 있다면 가족간의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면 기름에 물이
돌 듯이 뭔가 늘 뒤틀려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평상심이 도(道)라고 합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동안의 마음가짐이 바로 도라는 것입니다.
불치의 병에 걸려서 앞으로 3년밖에 살 수 없다는
선고를 받았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럼 아마도 남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 것인가가
화두로 새롭게 떠오를 것입니다.
과일에 씨앗이 들어있듯이 살아 있는 목숨 속에
죽음의 씨앗이 들어 있습니다.
누구도 뛰어 넘을 수 없는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을
자각한다면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절실한 과제인지스스로 판단하고자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것이 우리가 해야할 본질적인 일이고,
한 눈 팔지 않을 일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그날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한 번 뿐인 인생을 후회 없이
살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인생을 부질없는 일들로 낭비하지 마십시오.
한 생애는 결코 길지 않습니다.
요즘 저도 이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신세를 진 이들에게
은혜를 갚고 가야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새 천년이니 어쩌니 야단법석이었는데 어느새 한해를
마무리 하는 입동(立冬)입니다.
옛말에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업만 남아 생을
따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이웃들에 도움이 되고 빛이
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저마다 한 몫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공연히 엄마 배아프게 하면서
튀어나온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들은 이 대지와 공기와
햇볕과 바람, 달과 별,
나무와 강물로부터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아 왔습니까?
얼마나 많은 보살핌을 받아왔습니까?
그것도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무상으로
은혜를 입어왔습니다.
그것들은 한 순간도 없으면 우리가 살아갈 수 없는
매우 귀중한 것들입니다.
또한 부모형제와 스승과 친구들로부터는 얼마나 많은
은혜와 가르침을 받아왔습니까?
살아있는 동안 이러한 은혜에 보답을 해야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도리입니다.
우리가 몸담아 살고 있는 이 우주는 틀에 박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변광대(無邊廣大)하다,
끝없이 넓고 크다고 이야기합니다.
서로서로 좋은 일을 하면 이 세상은 좋은 기운으로
채워져서 살기 좋아집니다.
반면에 도리에 어긋나는 나쁜 짓들을 하면
나쁜 기운 때문에 살기가 어려워집니다.
오늘 이 세상이 어떤 곳인가 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 행위, 생각, 말씨들이 만들어 놓은 결과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십시오.
현재도 불안하고 미래도 불확실합니다.
기상 재해나 예측할 수 없는 돌발사고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요즘은 새삼스럽게 인류의 위기가 논의되고
있기도 합니다.
식량과 자원, 환경과 같은 우리 생활과 직결되는 문제들이
심각한 위기상황에 처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의 인류의 위기가 결코 모자람,
결핍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함부로 쏟아버리는 낭비에 그 본질이 있다고 봅니다.
지구의 자원들이 모자라서 인류의 위기가
논의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것으로도 충분하지만 지금처럼 계속 낭비만
한다면 고갈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전체 인류의 1/6도 되지 않는 선진국의 국민들이
지구자원의 1/3을 탕진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잘못 길들여진 낭비의 습관을 고쳐간다면
위기는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선 내 자신부터, 내 집에서부터,
내 직장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을 모두가 하기 때문에
길이 없는 것입니다.
얼마 전 파리 길상사에 갔다가 한국 식당에 들러
화장실에 들어갔었습니다.
그런데 화장실 변기에 수도꼭지가 작은 것과 큰 것,
두 개가 달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을 아껴 쓰는 시설이 프랑스에는 이미 보편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면 그 기운이
나를 감싸서 괴롭습니다.
반면에 누군가를 사랑하고 따뜻하게 대하면 그 기운은
나를 즐겁게 합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업력의 힘으로 움직입니다.
근래에는 신문이나 방송을 거의 듣지 않고 지냅니다만
얼마 전 우리 나라 기형아
출산율이 10 0/0 를 넘어서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새로 태어난 신생아의 10명 중 하나 둘은 기형아라니
이 시대의 상황과
함경이 얼마나 심각한지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법구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마음이 천당도 만들고 지옥도 만든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근본이라는 말입니다.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선한 일은 서둘러 행하고 악한 일에는 마음을 멀리하라.
선한 일을 하는 데게으르면 그의 마음은 이미
악을 즐기고 있다.'
최근에 제가 아는 한 스님으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2년 전에 한 도반과 심하게 다투었는데 이가 두 개나 빠져
몹시 화가 났었다는 글이었습니다.
스님들뿐 아니라 절에 다니는 신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잔뜩 꼬여 있으면서 참선하고 기도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불쑥 떠오르는 한 생각이 중요합니다. 그런 생각을
잘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마음을 맑히는 일이고 정진이 됩니다.
끊임없이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내 자신이 행복해지고 싶다면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결코 독립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자신이 고통스럽다면 언젠가 내가
남을 고통스럽게 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업의 율동이자 메아립니다.
절이건 교회건 건성으로, 습관적으로 다니지 마십시오.
종교는 습관성의 의약품이 아닙니다.
참된 절이나 교회는 여러분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 마음속에 친절과 사랑의 꽃을 피우십시오.
그 친절과 사랑으로 인해 삶이 충만해 질 겁니다.
눈에 보이는 절이나 교회는 여러분 마음속의 절이나
교회로 인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찮은 업이라고 해서 가벼이 여기지 마십시오.
조그만 불티가 온산을 불태웁니다.
조그만 선행이라고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한 방울의 물이 강을 이룹니다.
1959년 티벳에서 여든 살이 넘은 노스님이
중국의 침략을 피해 히말라야를
넘어서 인도에 온 일이 있습니다.
서방의 기자들이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 연세에 그토록 험준한 히말라야의
설산을 넘어 오셨습니까?'
그러자 스님께서는 대답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왔지요.'
우리가 사는 일도 이와 같습니다. 매순간 한 걸음씩
내딛으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문제는 어디를 향해서 내딛느냐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디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오늘의 인연이 우리들의 삶이
한층 마음 맑히는 일로,
마음 활짝 여는 일로 이어지기를 바라면서 이야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