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혜 법어/청정거사에게 보임

2011. 8. 20. 10:3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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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혜 법어

1. 청정거사(淸淨居士)에게 보임.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부처의 경계를 알고자 한다면, 그 뜻을 허공처럼 맑게 하고 망상과 모든 집착을 멀리 여의고 마음이 향하는 곳에 전혀 장애가 없도록 해야 한다.”

부처의 경계는 모습 있는 바깥 경계가 아닙니다. 부처는 곧 스스로 깨달은 성스런 지혜의 경계입니다. 꼭 이 경계를 알고자 한다면, 수행하여 깨달아 얻는다는 단계에 의지하지 말고, 의식(意識) 아래에 애초부터 있었던 더러운 객진번뇌(客塵煩惱)를 깨끗하게 없애야 합니다. 허공처럼 드넓고 텅 비어서 의식 속의 모든 집착을 멀리 여의어 헛되고 거짓되고 진실하지 않고 허망한 생각 역시 허공과 같아지면, 이 공용(功用) 없는 묘한 마음이 향하는 곳에는 저절로 가로막는 장애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의 법․하나의 일․하나의 몸․하나의 국토․하나의 중생에게서 여래를 보아서는 안되고, 마땅히 모든 곳에서 두루 여래를 보아야 한다.”

불(佛)이란 깨달음[각(覺)]이라는 뜻이니, 모든 곳에서 언제나 두루 깨어 있기 때문입니다. 두루 본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본원(本源) 자성(自性)인 천진(天眞)한 부처가 하나의 시간․하나의 장소․하나의 법․하나의 일․하나의 몸․하나의 국토․하나의 중생 세계 속에서 두루하지 않음이 없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중생은 이것에 어둡기 때문에 삼계(三界)를 윤회하며 여러 가지 고통을 받습니다. 모든 부처님은 이것을 깨달아 모든 있음의 바다를 뛰어 넘어 뛰어나고 묘한 약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과 즐거움이 모두 실체가 없고, 다만 어리석음과 깨달음의 차이가 있기에 고통과 즐거움이 길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헛되이 따라가는 것을 일러 말했습니다. “법신(法身)이 오도(吾道)를 따라 흘러 다니는 것을 일러 중생이라 한다.” 중생이 나타날 때에 법신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이 까닭입니다. 이 대사인연(大事因緣)을 짊어지려면, 모름지기 결정적인 뜻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반은 믿고 반은 의심한다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옛 스님이 노래했습니다.

 

“도(道)를 배우는 것은 마치 부싯막대를 돌려 불을 일으키는 것과 같으니
연기가 나더라도 멈추어서는 안된다.
샛별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서
집으로 돌아가야 비로소 끝마치는 것이다.”

 

끝마치는 곳을 알고자 합니까? 자기의 경계와 남의 경계가 한결같은 곳이 그 곳입니다.

이미 이 도를 배웠다면, 24시 가운데 사물을 만나고 인연에 반응하는 곳에서 나쁜 생각이 이어지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돌이켜 비추어 보질 못하고 하나의 나쁜 생각을 일으킨다면, 마땅히 재빨리 주의를 기울여 잡아당겨 돌이켜야 합니다. 만약 한결같이 그것을 따라가 이어져 끊어짐이 없다면, 도를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지혜가 없는 사람이라고 할 만합니다.

 

옛날 위산(潙山)이 난안(嬾安)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24시 속에서 무엇에 힘을 쓰고 있는가?”
난안이 말했습니다.
“소를 키우고 있습니다.”
위산이 물었습니다.
“그대는 어떻게 소를 키우는가?”
난안이 말했습니다.
“한 번이라도 수풀 속으로 들어가면, 쏜살같이 코를 끌고 나옵니다.”
위산이 말했다.
“그대는 참으로 소를 잘 키우는구나.”

 

도를 배우는 사람이 나쁜 생각을 제어함이 응당 난안(嬾安)이 소를 키우는 것과 같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스스로 순수하게 익어갈 것입니다. “남의 활은 만지지 말고, 남의 말은 타지 말고, 남의 일은 알지 말라.” 이것은 비록 늘 하는 말이지만, 또한 도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양식(糧食)이라고 할 만합니다. 다만 늘 스스로를 점검해 보시되, 아침부터 저녁까지 남을 이롭게 하고 자신을 이롭게 할 무슨 일이 있기만 하면, 벌써 치우치고 완고함을 느낄 것이니, 마땅히 스스로 경계(警戒)함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옛날 도림(道林) 선사는 진망산(秦望山)의 큰 소나무 아래에 머물렀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를 일러 조과화상(鳥窠和尙)이라 하였습니다. 시랑(侍郞) 백거이(白居易)가 전당(錢塘)을 진압(鎭壓)하고서 일부러 산에 들어와 도림 선사를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선사께서 앉아 계신 곳은 매우 위험합니다!”
선사가 말했습니다.
“노승에게 무슨 위험이 있습니까? 시랑의 위험이 더욱 심합니다!”
백거이가 말했습니다.
“저는 강산(江山)을 진압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무슨 위험이 있겠습니까?”
선사가 말했습니다.
“횃불이 서로 부딧히고, 식견(識見)과 성격이 안정되어 있지 못한데, 위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백거이가 다시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불법(佛法)의 대의(大意)입니까?”
선사가 말했습니다.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많은 선을 행하십시오.”
백거이가 말했습니다.
“세살 먹은 어린아이도 그렇게 말할 줄 압니다.”
선사가 말했습니다.
“세살 먹은 어린아이가 비록 말할 수는 있으나, 팔십 먹은 노인도 행할 수는 없습니다.”
백거이가 이에 절을 하고는 떠났습니다.

 

이제 마음의 노고를 덜고자 한다면, 저 세 살 먹은 아이도 말할 수 있는지 없는지, 팔십 먹은 노인도 행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는 상관하지 말고, 다만 모든 악을 행하지만 말라. 곧장 이 말을 알아차린다면, 믿어도 좋고 믿지 않아도 좋으니, 생각해 보라.

세속 사람들이 드러내어 행하는 무명(無明)을 바로잡아 선(善)을 행한다면, 아직 선을 충분히 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찌 부끄러움을 모르고 선을 빙자하여 악을 행하는 것 보다 뛰어나지 않겠습니까? 교문(敎門)에서는 그것을 일러 ‘원인이 참되지 못하면 결과가 왜곡된다.’고 합니다. 만약 바로 이 마음을 곧장 행하여 곧장 위 없는 깨달음을 얻는다면, 참된 대장부가 하는 일이라고 할 만합니다.

 

무한한 세월 동안의 일이 다만 지금 이 순간에 있으니, 지금 무한한 세월 동안의 일을 알아차린다면, 즉시 기와가 부서지고 얼음이 녹는 듯 할 것입니다. 지금 알아차리지 못하면, 다시 무한한 세월을 지나더라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이와 같은 법은 옛날부터 언제나 그러하여 털끝만큼도 바뀐 적이 없었습니다.

이 일은 총명하고 영리한 사람이 짊어질 수 있습니다만, 만약 총명함과 영리함을 사용한다면 짊어질 수 없습니다. 총명하고 영리한 자가 비록 쉽게 이 일 속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잘 유지하기가 어렵고, 대개 들어간 곳에서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힘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총명하고 영리한 자는 선지식이 이 속의 일을 말하는 것을 듣자마자 곧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벌써 심의식(心意識)을 가지고 이해해 버립니다.

 

이와 같은 자는 스스로 장애를 만드는 것이니 영원토록 깨달을 때가 없을 것입니다. 바깥의 귀신이 일으키는 재앙은 오히려 다스릴 수가 있지만, 이것은 곧 죽은 조상이 일으키는 재앙이니 굿을 하여 빌어도 소용 없습니다. 영가(永嘉)가 말한 “법의 재물을 덜고 공덕을 없애는 것이 이 심의식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가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선비들이 많은 책들을 두루 읽는 것은 본래 성식(性識)에 이익이 되도록 하려는 것이나, 도리어 옛 사람들의 말을 기억하여 가슴 속에 채워넣는 것으로 일을 삼으니 이야깃거리만 더할 뿐, 성인이 가르침을 베푼 뜻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온종일 남의 보물을 헤아리지만 자기에게는 반푼의 돈도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고 읽는 것 역시 마찬가지여서, 마땅히 달을 보고 손가락은 잊어야 하며, 말을 따라 이해하면 안됩니다.

 

옛 스님이 말했습니다.
“부처님이 모든 법을 말씀하신 것은 모든 마음을 제도(濟度)하기 위함이다. 나에게는 아무런 마음이 없으니 모든 법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뜻을 가진 선비가 책을 읽고 경전을 봄에 이와 같을 수 있어야, 비로소 성인의 뜻을 몸소 확인할 자격이 조금은 있는 것입니다.

옛날 이문화(李文和) 도위가 석문자조총(石門慈照聰) 선사를 찾아 뵙고 임제(臨濟)의 종지(宗旨)를 깨달아 하나의 게송을 지었습니다.

“도를 배우려면 모름지기 무쇠같은 사나이라야
손을 대는 마음에서 바로 판가름이 난다.
곧장 위 없는 깨달음만을 취할 뿐
어떠한 시비(是非)에도 관여치 말라.”

 

묘하구나, 이 말씀이여! 밝은 깨달음의 씨앗이 싹을 틔워 도운다고 할 만하구나.

세간의 온갖 번뇌는 쇠사슬처럼 연이어져서 끊어짐이 없습니다. 깨닫는 곳에서는 곧장 깨닫지만, 무한히 오랜 옛적부터 익혀온 습기(習氣)와 만약 힘서 싸우지 않는다면,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모르는 사이에 더욱 깊이 빠져들어 섣달 말일에 이르면 결국 손을 쓸 수 없게 됩니다. 숨이 끊어질 때에 잘못되지 않으려 한다면, 바로 지금 하는 일부터 잘못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지금 하는 일이 잘못되어 있으면서, 목숨이 끊어질 때에 잘못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옛 스님이 말했습니다.
“소를 찾으려면 발자국을 먼저 찾아야 하고, 도를 배우려면 먼저 마음이 없어야[무심(無心)] 한다. 발자국이 있으면 소도 있고, 마음이 없으면 도도 쉽게 찾는다.”

이른바 마음이 없다는 것은, 마치 흙․나무․기와․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서 앎도 없는 것이 아니라, 경계에 접촉하고 인연을 만남에 마음이 안정되어 움직이지 않고,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고 모든 곳에 열려서 걸림 없고 막힘 없고, 오염됨이 없으면서도 오염됨 없는 곳에 머물지 않고, 몸과 마음을 꿈이나 환상같이 보면서도 꿈이나 환상이라는 허무한 경계에 머물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경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참으로 마음이 없다고 할 만하고, 입으로만 말하는 마음 없음이 아닌 것입니다. 만야 아직 참으로 마음 없음에 이르지 못했으면서 단지 말만 하고 있다면, 묵조(黙照)의 삿된 선(禪)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부처란 중생에게 필요한 약(藥)이니, 중생의 병이 치유되면 약도 필요없습니다. 만약 병이 치유되었는데도 약을 가지고 있다면, 부처의 경계에는 들어가지만 마구니의 경계에는 들어가지 못하니, 그 병은 중생의 병을 아직 치유하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병이 치료되었으면 약은 버려야 하듯이, 부처와 마구니를 모두 쓸어내 버려야만 비로소 이 대사인연(大事因緣)에 조금이나마 맞아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귀종(歸宗)이 뱀을 베고 남전(南泉)이 고양이의 목을 벤 것을 두고, 말이나 배우는 무리들은 흔히 말하기를, 즉시 묘하게 작용한 것이라고 하고, 또 커다란 작용을 앞에 드러내면서도 법칙(法則)을 두지 않는다고도 합니다만, 결코 이러한 도리가 아님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테두리와 격식을 벗어난 눈을 갖추어야, 말하면 즉시 그 귀결점을 압니다. 대법(大法)에 밝지 못하고서 기와를 부수고 거북에 구멍을 뚫어 점을 치듯이 한다면, 언제 끝마치겠습니까?

 

만법을 비우고자 한다면, 먼저 자기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자기 마음이 깨끗해지면, 모든 인연은 쉬어집니다. 모든 인연이 쉬어지면, 본체와 작용은 모두 같습니다. 본체는 자기 마음의 깨끗한 본원(本源)이고, 작용은 자기 마음의 변화하는 묘한 작용입니다. 깨끗함에 들어가고 더러움에 들어가도 물듦이 없으면, 마치 큰 바다에 바람이 없는 것과 같고, 큰 허공에 구름이 흩어져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곳에 이르러야 비로소 불교를 배우는 사람이라고 할 만합니다. 아직 이와 같지 못하다면, 재빨리 주의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요즘 총림(叢林)에서는 옛 사람이 기묘한 말로써 문답한 것을 가지고 차별인연(差別因緣)이라 여기니, 이렇게 알랑거려 남을 홀리는 학자(學者)들은 전혀 진실에 근거하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부처님께서 법을 말씀하실 때에는 오직 사람들이 알지 못할까봐 두려워할 뿐입니다. 비록 감추는 듯이 말하더라도, 달리 비유를 들어서 중생이 깨닫도록 하려는 것 뿐입니다.

 

예컨대 어떤 승려가 마조(馬祖)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마조가 말했습니다.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다.” 여기에서 깨달으면, 다시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깨닫지 못하면, 이 ‘이 마음이 부처이다’는 곧 차별인연입니다.

무릇 경전을 보거나 옛 스님들이 도에 들어간 인연을 보고 마음이 아직 밝게 깨닫지 못하여, 갑갑하게 헤매며 아무 맛이 없게 느껴져 마치 쇠말뚝을 씹는 듯할 때에 힘을 내기에 딱 알맞습니다. 무엇보다도 놓아 버리지 말아야, 곧 의식(意識)이 나타나지 않고 생각이 일어나지 않고 분별이 끊어져 이치의 길의 소멸합니다. 평소 도리를 말할 수 있고 분별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정식(情識) 쪽의 일입니다. 흔히 도둑을 자식으로 오인하는 일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종류의 사람은 오전에는 경전을 보고, 염불하고, 참회하며, 저녁에는 구업을 지으며 남을 욕하고, 다음날에는 다시 이전처럼 예불하고 참회하며, 이것을 죽을 때까지의 일과로 삼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고, 범어(梵語) 참마(懺摩)를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범어 참마는 번역하면 ‘허물을 후회한다’는 뜻인데, 상속심(相續心)을 끊는다는 말입니다. 한 번 끊어서 영원히 다시는 이어지지 않고, 한 번 참회하여 영원히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것, 이것이 우리 부처님이 가르치신 참회의 뜻임을 도를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하루 24시간 내내 심의식(心意識)이 늘 고요하여 일이 없기를 바란다면, 모름지기 고요히 앉아 마음이 방일(放逸)하지 않도록 하고 몸이 동요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오래도록 익혀가면 저절로 몸과 마음이 편안히 안정되어 도(道)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적정바라밀(寂靜波羅蜜)은 중생의 산란하고 허망한 느낌을 안정시킬 뿐입니다. 만약 고요한 곳을 붙잡고 구경(究竟)이라고 여긴다면, 묵조(黙照)의 삿된 선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조주(趙州) 스님이 말했습니다.
“나는 24시간 가운데 두 때를 제외하니, 죽 먹고 밥 먹을 때에는 시끄럽게 마음을 쓰지만, 그 나머지 시끄럽게 마음을 쓰는 경우는 없다.”

이것이 이 노스님의 진실한 생활이니, 불법(佛法)과 선도(禪道)를 알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선악(善惡)은 모두 자기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말해 보십시오. 발을 들어 걸음을 떼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것을 떠나 무엇을 일러 자기 마음이라 합니까? 자기 마음은 다시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자기 마음이 일어나는 곳을 안다면, 가없는 업장(業障)이 일시에 깨끗해지고, 온갖 뛰어난 것들이 찾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태어날 때에는 어디에서 오며, 죽을 때에는 어디로 갑니까? 오고 가는 곳을 안다면, 비로소 불법을 배우는 사람이라고 할 만합니다. 삶과 죽음을 아는 자는 누구입니까? 삶과 죽음을 받는 자는 또 누구입니까? 오고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는 자는 또 누구입니까? 문득 오고 가는 곳을 알아차리는 자는 또 누구입니까? 이 이야기를 보고서 이해하지 못하고 눈은 껌뻑껌뻑하고 배속은 어수선하고 가슴 속은 한 개 불덩이를 넣어둔 것과 같은 자는 또 누구입니까? 알고자 한다면, 단지 이해하지 못하는 곳에서 알아야 합니다. 곧장 알았다면, 비로소 삶과 죽음이 결정코 서로 간섭하지 않음을 알 것입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날마다 다만 타인의 공부를 점검하듯이 늘 자신을 점검한다면, 도업(道業)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기뻐하기도 하고, 성내기도 하고, 고요하기도 하고, 시끄럽기도 할 때는 모두 점검할 때입니다.

조주가 말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話頭)를 기뻐고 성나고 고요하고 시끄러운 곳에서 또한 들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신경을 써서 깨달음을 기다리면 안됩니다. 만약 신경을 써서 깨달음을 기다린다면, ‘나는 지금 어리석다’고 스스로 여기는 것입니다. 어리석음을 붙잡고 깨달음을 기다린다면,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이 지나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다만 화두를 들 때에 잠시 정신을 차리고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하고 살펴보십시오.

 

조주가 말했습니다.
“부처라는 한 마디를 나는 듣기 좋아하지 않는다.”

부처라는 말도 오히려 듣기 좋아하지 않는데, 쓸데없는 공부는 없다고 생각하여 쓸데없는 일에 관여하며 날마다 분주하게 타인을 점검하겠습니까? 옛 사람들이 이 일을 쥐고서 이치로 나아가기도 하고, 사실로 나아가기도 하고, 시절에 의지하기도 하고, 위에서 쥐고 있기도 한 것에는 전혀 정해진 기준이 없었으니, 경전에서 말하는 “부처님은 하나의 음성으로 법을 말씀하셨지만, 중생들은 부류에 따라 각자 이해한다.”가 바로 이것입니다.

 

(헌신(献臣) 도우(道友)는 부귀한 속에 있으면서도 부귀에 휩쓸리지 않고, 이 한 개 대사인연(大事因縁)을 알고서 삶과 죽음을 확실히 벗어났다. 내가 형양(衡陽)으로 유배를 와서 그와 만난지가 4년이나 되었지만 단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다. 관리로 근무하며 정무(政務)를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온갖 일들을 관대히 처리하였고, 청렴하고 신중하고 무겁고 두터웠으며, 일찍이 남의 허물이나 단점을 말한 적이 없으니, 이야말로 참된 불보살(仏菩薩)의 행실이다.

이번에 가리켜 주기를 고집스레 요구하기에 이 26단의 글을 써서 그에게 보여 준다. 또한 그렇게 순수하게 성실하게 도(道)를 향하여 힘을 쏟기 때문에 그가 성공하도록 도와주려고 하니, 바라건대 여기에 의지하여 공부하여 장차 대사(大事)를 밝혀 양대년(楊大年)이나 장무진(張無尽) 등의 여러 대로(大老)들처럼 우리 집안을 안팎에서 보호하는 보살이 된다면, 내가 헛되이 말한 것은 아닐 것이다.)

- 無事人

 


 

꽃은 피어도 소리가 없고
새는 울어도 눈물이 없고

사랑은 태워도 연기가 없네


장미가 좋아서 꺾었더니 가시가 있고

친구가 좋아서 사귀었더니 이별이 있고

세상이 좋아서 태어났더니 죽음이 있네


나, 牧童 이라면 한잔의 우유를 드리겠지만

나, 詩人 이라면 한首의 詩라도 드리겠지만


나, 가난하고 부족한 자이기에

그대에게 드릴 수 있는건 오직하나,

사랑, 사랑 뿐 이라오!

 

 

- 작자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