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선과 관법(위빠사나)에 우열은 없다

2011. 9. 17. 00:5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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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선과 관법(위빠사나)에 우열은 없다

/ 법정스님

 

 

한동안 소식이 끊겨 궁금했는데, 올 여름 안거를 지리산에서 보내게 됐다니

반가운 소식입니다. 물과 구름처럼 흐르며 떠도는 운수납자(雲水衲子)에게

일정한 주처(住處)란 당초부터 있을 수가 없고,

 

인연 따라서 걸망 부려놓고 정진하며 지내는 곳이 내 집이요,

인연터 아니겠습니까.

처음으로 빈 암자에서 홀로 지내게 됐다고 하니 홀가분해서 좋기는 하겠지만

 거기에는 투철한 수행자의 자기 질서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누구의 눈치를 볼 것도 없고 또한 참견할 사람도 없어 좋은 면도 있겠지만,

자칯 잘못 길들이면 게으름에 빠질 함정이 입을 크게 벌리고 있습니다.

 

사는 사람이 게을러 일상의 기거동작에 질서가 따르지 않으면,

그 어떤 뛰어난 도량이라 할지라도 그곳이 곧 마굴(魔窟)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편지에는 선원의 조실스님한테 받은`이 뭣인고?' 화두에 전혀

의정(疑情)이 일어나지 않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리고 화두선과 관법은

어떤 것이 더 좋은 수행법인지를 물었습니다.

 

화두(話頭)란 잘 아다시피 옛선사들의 말씀이나 문답에서 이루어진

기연(機緣)으로 학인들이 끓임없이 참구(參究)해야 할 선의 과제입니다.

 

물론 이 화두는 중국의 선불교에서 시작된 것이며,

특히 임제선(臨濟禪) 계통에서

성행된 참선 수행법입니다.

 

같은 선종 중에서도 조동선(曹洞禪)에서는 산천 초목이나 꽃이 피고

새가 지저귀며 낙엽이 지는 온갖 자연현상을 그대로 화두로서

받아들입니다. 현성공안(現成公案)은 이를 가리킵니다.

 

화두란 다른 말로 하자면 어떤 존재나 현상의 극치와 근원을

 참구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극치와 근원에 대한

의심(疑心)이 일어나지 않으면 온전한 화두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뭣인고'나 조주의 `무자(無字)' 화두는 너무나 많이

우리 귀를 스치고 지나간 말이기 때문에 그 신선감이나

의심이 제대로 일어날 수 없음은 당연합니다.

 

육조 혜능 스님의 그 시절 회상에서는, 또는 조주 스님의

 문하에서는 그때의 말이나 문답이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에

그것이 화두로서 긴장감이나 현실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은 과거의 그 말씀이나 기연들을

일러주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들이 다같이

형해화(形骸化)된 관념으로 다루기 때문에

 

긴장감이나 현실성이 결여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절로 화두에 대한 의심이 전 존재로서 일어나야지

억지로 의심하려 하거나 머리로 헤아리는 것은

망상이지 진짜 화두가 될 수 없습니다.

 

수행자는 그 누구를 물을 것 없이 정직하며 솔직해야 합니다.

자신의 길이 잘못 든 줄 알았다면 더 망설일 것 없이

곧 바른 길을 택해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뭣인고 화두에 아무리 애써도 의정이 일어나지 않으면

세월과 정력을 부질없는 데다 쏟아버리지 말고

미련없이 거기에서 벗어나 다른 길을 개척하십시오.

 

실참실오(實參實悟) 즉, 진실한 삶을 위해서 라면

전통이나 인습을 박차고 일어나 깨어 있어야 합니다.

화두선과 관법은 어떤 것이 더 좋고 못한 우열이 없습니다.

 

 관법은 부처님 당시부터 행해진 수행법으로 지금도

동남아 상좌부(上座部) 불교권에서는 널리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화두선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중국의 선불교에서 시작된 수행법으로 한국 불교에서도

이를 답습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화두선은 최상승선(最上乘禪)이고

관법은 소승선(小乘禪)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이런 말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가 어떤

방법의 수행을 하건 간에 최상승의 심지를 계발(啓發),

지혜와 자비가 충만해서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혜명(慧命)을 잇고 있다면 그는 최상승선을

성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화두선을 하건

관법을 하건 보리심을 발하지 않고

 

자기 한몸의 깨달음만을 위해 앉아 있다면 그는

바로 소승선을 닦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최상승선과 소승선의 갈림길은 화두선이냐

관법이냐에 있지 않고,

 

수행자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참구하며

어떻게 회향하느냐에 달린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예전 사람들은 단순하고 순박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선사들의 말씀이나 문답이 그야말로 참구의 극치인

화두(話頭)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복잡하고

 소란스럽고 거칠디거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단순하게 몰입하는 수행법이 보다 적합할 것 같습니다.

단순하게 몰입하려면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마음의 흐름을

살피는 일이 요긴합니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마음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을 `살피는'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에 따르지 않고

마음의 주인이 되는 일입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염처경(念處經)》에서

부처님이 친히 설한 바입니다.

 

선법(禪法)을 처음으로 중국에 전한 것으로 알려진

달마 스님, 그 분의 가르침에 `마음을 살피는

이 한 가지 일이 삶 전체를 이끌게 된다(觀心一法 總攝諸行)'고

한 것도 바로 이를 가리킨 말씀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달마 스님은 관법을 몸소 닦고 그걸

가르쳤습니다. 그때는 화두선이 나오기 이전입니다.

 달마 스님이 관법을 앆고 화두선을 닦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소승선자로 치면서 최상승선을 체험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과 옛 선사들은 한결같이 말씀하십니다.

`본래성불(本來成佛)'이라고. 이 말씀이 진실이라면

그럼 우리는 무엇 때문에 새삼스레 좌선을 하면서

애써 닦고 있습니까?

 

이에 대한 답을 옛 스승들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애써 정진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래의 깨달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이를 본증묘수(本證妙修)라고도 합니다. 왜냐하면

닦지 않으면 더럽혀지기 때문입니다. 깨닫기 위해서

닦는 것과 깨달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정진을 한다는 입장은

 

그 방향이 아주 다릅니다. 어떤 바탕 위에서 닦을 것인가는

각자의 수용능력에 달렸습니다.

아무쪼록 이 여름철 안거에 그 어떤 말에도 속지 말고

몸소 체험하고 스스로 확인하면서

그윽한 삼매의 꽃을 피우기 바랍니다.

 

佛日會報 <91. 6>

 


 법정스님의 관법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의정은 일어나되 사구참선만 하는 저에게는
그저 버리고 법문만 들입따 봐야할것같습니다

선사님들 스승님들의 법문이

저에게는 좋은 화두일것같습니다

 

망상만 떨고 앉아

삿된 이미지만 보는것보다는 노는입에 염불을,,,

스승님들의 법문을 화두 삼아야 할것같습니다

원공법계제중생자타일시성불도 ()

 


                                                                                                  

                                                                                                   



인어공주ㅡ







Haris Alexion

[To Treno Fevgi Stis Okto]



    - To Treno Fevgi Stis Okto -


    To traino feygei stis ochto
    Taxidi gia tin Katerini
    Noemvris minas den tha meinei
    Na mi thymasai stis ochto
    Na mi thymasai stis ochto
    To traino gia tin Katerini
    Noemvris minas den tha meinei

    Se vrika pali xafnika
    Na pineis oyzo stoy Leyteri
    Nychta den thartheis s alla meri
    Na cheis dika soy mystika
    Na cheis dika soy mystika
    Kai na thymasai poios tha xerei
    Nychta den thartheis s alla meri

    To traino feygei stis ochto
    Ma esy monachos echeis meinei
    Skopia fylas stin Katerini
    Mes tin omichil pente ochto
    Mes tin omichil pente ochto
    Machairi stin kardia soy ekeini
    Skopia fylas stin Katerini 


    카테리니행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11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내 기억 속에 남으리
    카테리니행 기차는 영원히 내게 남으리

    함께 나눈 시간들은 밀물처럼 멀어지고
    어제는 밤이 되어도 당신은 오지 못하리
    당신은 오지 못하리
    비밀을 품은 당신은 영원히 오지 못하리

    기차는 멀리 떠나고 당신 역에 홀로 남았네
    가슴 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
    남긴 채 앉아만 있네
    가슴 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



    아그네스 발차가 부른 '기차는 8시에 떠나네'입니다.
    내 조국이 가르쳐 준 노래(SONGS MY COUNTRY TAUGHT ME)라는 음반에
    다섯번째 실린 곡입니다.그리스 출신의 세계적 메조 소프라노
    Agnes Baltsa의 노래. 정통 성악곡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수미가 우리말로 부른 5번트랙
    [기차는 8시에 떠나네]가 아주 유명하죠.
    곡마다 들리는 bouzouki 라는 악기의 선율이 상당히 &54650;O윱求?

    그리스는 우리와 유사한 정서를 지닌 나라이다.
    한때는 유럽을 제패하고 민주주의를 꽃피운 문화대국이지만,
    근대이후 외세의 침입을 많이 받아 투쟁의식과 한(恨)이 어우러진 정서가
    그리스 사람들 가슴속에 깃들어 있다. 특히 그리스가곡은 터어키(투르크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시절과 2차대전 때 독일(나치)의 침략을 받았던 시절에
    그리스시민이 읊었던 저항의 노래라고 한다.
    저항의 표현으로서 그리스가곡은 언론의 자유가 억압받던 환경하에서
    만들어지다 보니 가사내용이 구체적이 아니고 분노의 직접적 표현이 아닌
    간접적인 억눌린 사람들의 소박한 비애가 담겨져 있어 더욱 애틋하게 한다.

    우리나라 SBS방송 드라마 '백야(白夜)' 주제곡으로도 사용되었던
    '기차는 8시에 떠나네'는 저항의 노래라기보다는 기차를 타고 떠난
    돌아오지 않는 연인을 언제까지나 기다리며 부르는 노래이다.
    하지만, 떠난 연인은 조국을 위해 큰 일을 하려고 떠난 투사인 것으로 보인다.
    결국은 돌아오지 않은 연인을 언제까지나 기다리며
    매일같이 기차역으로 나가는 그리스여인의 여심(女心)...

    기차는 8시에 떠나네 (To Treno Fevgi Stis Okto)는
    그리스가 낳은 위대한 작곡가 겸
    가수 미키스 데오도라키스(1925. 7. 29)의 곡입니다.

    미키스 데오도라키스란 이름은 조금은 생소한 이름일지도 모르지만
    니코스 카잔차키스 소설을 영화화 한
    1965년 영화[희랍인 조르바(Zorba The Greek)]의 영화 음악 작곡자로
    한 때 ‘그리스 음악의 대사’라는 호칭을 얻기도 했던 이입니다.





    Haris Alexion - To Treno Fevgi Stis Okto
    (기차는 8시에 떠나네)





    Nena Venetsanou - To treno fevgi stis ohto


    ....................................................

    - Το τρα?νο φε?γει στι? οχτ? -


    Το τρα?νο φε?γει στι? οχτ?
    ταξε?δι για την Κατερ?νη
    Νο?μβρη? μ?να? δεν θα με?νει
    να μ? θυμ?σαι στι? οχτ?
    να μ? θυμ?σαι στι? οχτ?
    το τρα?νο για την Κατερ?νη
    Νο?μβρη? μ?να? δεν θα με?νει
    Σε βρ?κα π?λι ξαφνικ?
    να π?νει? ο?ζο στου Λευτ?ρη
    ν?χτα δε θα 'ρθει σ' ?λλα μ?ρη
    να 'χει? δικ? σου μυστικ?
    να 'χει? δικ? σου μυστικ?
    και να θυμ?σαι ποι?? τα ξ?ρει
    ν?χτα δε θα 'ρθει σ' ?λλα μ?ρη
    Το τρα?νο φε?γει στι? οχτ?
    μα εσ? μον?χο? σου ?χει? με?νει
    σκοπι? φυλ?? στην Κατερ?νη
    μεσ' στην ομ?χλη π?ντε οχτ?
    μεσ' στην ομ?χλη π?ντε οχτ?
    μαχα?ρι στη καρδι? σου εγ?νει
    σκοπι? φυλ?? στην Κατερ?νη


    카타리니행 기차는 언제나 8시에
    떠나는군요..
    11월은 영원히 당신의 기억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우오조(ouzo)를 마실 때
    우연히 만났지요...
    당신은 무슨 비밀인지를 간직한 채
    밤에는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기차는 8시에 떠나지만,
    당신은 카타리니에 혼자 남았겠지요..
    가슴에 칼을 품고 안개속에서
    시계를 주시하며 5시에서 8시까지...

    ................................................



    작곡가 데오도라키스(1925~)는 음악적 업적만큼이나 정치적 인물로서
    자유와 해방, 그리고 민주주의를 지향한 그리스 저항운동의 상징이다.
    그의 삶의 궤적은 그대로 그리스 현대사와 연결돼있다.

    2차세계대전 당시 데오도라키스는 점령군 이탈리아와 독일에 대항하던
    청년단체에 가담하면서부터 그의 파란만장한 정치적 이력은 시작된다.
    전후 영국의 내정간섭으로 그리스는 좌우로 양분돼
    내전(Civil War, 1944~1949)이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다.

    이 기간 중 좌익계의 민족해방전선은 외세에 대항해 극렬한 저항운동을
    펼쳤지만,1946년 왕정이 복고돼 빨갱이 사냥은 계속되었고 데오도라키스는
    적색분자로 체포돼 마크로니소스 섬의 수용소에서 다리가 부러지고
    턱이 으스러지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6년여의 내전은 미국의 군사지원을 받은 반(反)공산주의
    연합 정부의 승리로 끝났다.
    내전종식 후 아테네 음악원과 파리 음악원 에서 정규 음악교육을 받았고
    "코플리 음악상" 수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데오도라키스의 젊은 시절 정치적 투쟁은 1960년대 들어 민족적 정체성을
    추구하는 음악으로 나타났다.
    그 뿌리는 민족악기 부주끼와 전통음악인 렘베티카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마노스 하지타키스와 더불어 그리스 민중의 정서를 담은
    수많은 가요를 만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왕정은 시민의 민주화 요구를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선동으로
    규정했고, 때마침 평화시위행진 중이던 EDA(좌익민주연합) 의장 람브라키스가
    테러로 사망하면서 시위는 격화된다.

    이에 데오도라키스는 1963년에 람브라키스 민주청년당(Lambrakis Democratic
    Youth)를 설립하고, 1964년에 피레우스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정치적 역량을 지속하였다.

    왕정에 대한 반체제 시위는 새로운 의회의 선거를 약속했지만,
    1967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 계엄령 아래 비상사태가 선포되었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체포되고 섬으로 추방당하였다.

    또한 검열과 고문은 파시스트 정권의 표현이었다.
    좌파 운동과 함께 혁명가요가 대중 사이에서 인기를 끌자 군부는
    군법령 13호를 발표했다.그 중에는 직접 데오도라키스의 작곡, 지휘,연주,
    심지어 그의 음악을 듣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데오도라키스의 노래들과 같은 네오 키마와 렘베티카는 지식인과
    학생의 반독재 투쟁과 궤를 같이하면서 다시 한 번 불을 지피며 부활했고
    지하클럽에서 신진 가수들에 의해 맥을 이어나갔다.
    데오도라키스는 지하에서 활동하며 '애국전선'을 도모했지만
    체포되어 투옥됐다. 하지만 1957년 모스크바 음악제에 그리스 대표 파견단으로
    참여했을 때 심사위원 쇼스타코비치와 한스 아이슬러,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작가 아서 밀러와 대중음악가수 해리 벨라폰테 등이 주도한
    국제 연대운동으로 데오도라키스는 3년여만에 석방됐고,
    곧 세계여론에 밀린 군부는 데오도라키스를 국외로 추방시켰다.

    프랑스로 망명한 그는 세계적으로 그리스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한
    투쟁의 일부로서 약 천회의 음악회를 주최했고 '독재에 반대하는 저항의
    보편적인 상징'이 되었다.

    1983년에 레닌 평화상 수상, 1987년 터키의 국민 작곡가 줄푸 리바넬리)와
    "그리스-터키 우호 협회"를 발족하였고, 또한 10년 뒤 그리스와 터키 사이의
    영토분쟁으로 에게 해의 긴장이지속되자 "평화를 위한 콘서트"를 기획하고
    1997년 6월 니코시아(Nicosia: 키프로스)의 '녹색국경'에서 공연했다.

    1992년 공직을 사임한 이래 세계평화와 인권운동을 멈추지 않고
    클래식 작곡과 지휘에 전념하고 있다.
    데오도라키스는 교향곡, 오페라, 발레음악, 칸타타와 오라토리오 등
    고전음악에서부터 영화음악과 1,000곡 이상의 가요들이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노래는 소프라노 조수미가 부르기도 했던
    <기차는 8시에 떠나네(To Traino)>, 영화음악으로 영화감독 줄스 다생의
    1962년<페드라(Phaedra)>와 1964년<그리스인 조르바(Zorba il Greco)>,
    1969년 군부독재 당시 코스타 가브라스(Costa Gavras) 감독의
    <계엄령(Stage of Siege, 1972)>등이 있다.

    특히 <계엄령>의 OST는 칠레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작품
    "깐토 헤네랄(Canto General: 모든 이를 위한 노래)"을 오라토리오로
    만든 "깐토 헤네랄"에서 따온 명곡들로 구성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