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9. 17. 01:28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묵산스님(보림사 주지) |
‘한다 안한다’ 마음 버리고 평상심으로 살라
서울 정릉의 삼각산 기슭에 자리잡은 보림사. 도심 속의 재가선원으로서 백봉 김기추(白峯 金基秋, 1908∼198) 거사의 제자들이 만든 참선단체 보림회의 근본도량이다. 이 곳에는 백봉 거사와 도반으로서 출·재가 선객들을 지도하고 있는 묵산 스님이 주석하고 있다. 1월 15일, 1년만에 찾아뵙는 묵산 스님은 82세의 세수에도 여전히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기자를 맞이한다. “현대불교 지상 백고좌에 좋은 법문들이 많이 나와서 사회를 밝히는 등불이 되고 있다고 알고 있어요. 진리에 목말라 하는 중생들에게는 감로수가 되어야 하고, 불교의 잘못된 부분은 바로잡아 주는 기사를 잘 쓰시기 바랍니다.” 매번 찾아뵐 때마다 불교언론으로서의 사명과 역할을 일깨우는 묵산 스님. 스님은 “불교는 상대성이 아닌 절대성을 강조하는 종교”라며 “스님들이 기복 불교를 자제하고 자성을 깨달아 부처가 되는 길을 안내해야 한다”고 말한다. 잘못된 신행의 폐해를 알고 고쳐나가는 일이 지중하다고 말하는 묵산 스님은 지난해 말 큰스님들의 잇단 열반으로 불자들이 의지할 곳을 잃은 데 대해 무척이나 안타까워 했다. “이제 젊은 스님들이 수행을 바르게 해야 해요. 정진도 제대로 안하고 금강경이 어떠니 저떠니 하는 것은 알음알이를 내는 차원일 뿐입니다. 불법은 문자를 떠난 자리예요. 안목이 열리지 않으면 바로 볼 수 없습니다. 이 공부는 참선하지 않고는 생사해탈이 어려운 거죠.”
묵산 스님은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의 저서인 <백척간두에서 진일보>라는 책 제목을 예로 들며, ‘백척간두’의 앞소식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육조 스님의 ‘본래 한 물건도 없는’ 도리를 깨쳐야 한다는 것이다.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이 자리는 삼세제불이 손을 들고 항복하는 자리요 입이나 생각으로는 붙일 수 없는 곳이요, 금강경 등 온갖 경이 나오는 당처입니다. 육조 스님의 최상승 도리를 등지고서야 어찌 자성부처를 찾겠습니까.” 부처님께서 걸식하시면서 이 집, 저 집에서 하신 설법은 ‘이 몸을 끌고 다니는 마음자리를 찾으라’는 것. 몸과 분리될 수 없는 마음은 행주좌와 어묵동정, 생로병사를 함께 하는 동반자이면서도 잊고 사는 그것이 아니던가. 마치 새가 허공에 살면서 허공을 인식하지 못하듯, 물고기가 물속에 살면서 물을 잊고 살듯이, 사람들은 내가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를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약 35년전, 강원도의 한 토굴에서 정진하던 중 허공이 부서지는 체험을 했다는 묵산 스님. ‘내가 부처요 허공이 나의 몸’임을 깨달았던 그 때의 경계다. 면목 없는 자가 근본이라(無面目者是本然)/ 두두 물물이 이리 쫓아 왔다(頭頭物物從此來)/ 추월, 춘화를 그대는 아는가(秋月春花君知否)/ 돌여인 젓대 부는데, 목인이 춤추더라(石女吹笛木人舞). 묵산 스님이 이 때 체험한 허공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물리적인 허공이 아닌, 진공(眞空) 자리였다고 한다. “천당과 지옥이 부서지고, 불보살이 다 부서졌어요. 생사 거래와 남녀노소, 일체의 차별이 다 무너졌지요. 눈, 귀, 코, 온통 몸뚱이가 다 허공이 되었어요. 내가 화엄경이 되고 법화경, 열반경, 금강경, 원각경, 능엄경이 되었습니다. 마음자리하나 잡아놓으면 팔만대장경이 날 떠날 수 없어요. 말쑥하게 빈 청정법신(淸淨法身)의 자리예요. 기가 막힌 거예요. 일체 행동이 여래선이요, 조사선인 자리입니다.” 묵산 스님은 제자들에게 자주 우리 본성을 ‘허공’에 비유해 설법하지만, 이 ‘진공’자리에만 머물러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부처자리인 마음을 자유자재로 씀으로써, 텅 비어있지만 묘하게 작용하는 ‘진공묘유(眞空妙有)’와 하나되어 살라는 것이다. 이른 바 절대성(絶對性)으로 상대성(相對性)을 굴리고, 체로써 용을 굴리며 사는 자유인이 되라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선과 악, 보리와 번뇌, 부처와 중생, 생과 사가 둘이 아닌 이러한 ‘불이법문(不二法門)’을 깨닫기 위해서는 어떤 공부가 필요할까? 묵산 스님은 “보는 놈 자체를 먼저 인정해야 상대(경계)를 인정할 수 있다”면서 “내 자신의 본성을 바로 보아서 확인할 수 있다면 대상과 둘이 아님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 본성자리에서 볼 때 생과 사는 바다의 파도가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며, 허공에 구름이 가렸다 사라지는 이치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치를 알아 정법을 세우고 굴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깨닫고 난 후에는 경허 선사처럼 선악을 자유자재로 굴리고 쓸 수 있지만, 중생의 사표가 되려는 이들은 비상한 각오와 절제된 행동규범이 필요하다는 게 스님의 말이다. ‘무릇 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한(凡所有相 皆是虛妄)’ 이치와 ‘오온이 모두 공함(五蘊皆)’을 알아 진공과 허공이 둘이 아닌 자리를 체득해야 안목이 열린다는 것이다. 즉 ‘마하반야’가 바로 허공을 걷어잡은 소리인 것이다. “이 평등한 성품, 즉 대원경지(大圓鏡智)에서는 피차(彼此)와 친소(親疎)가 없습니다. 부처님(마음)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지만 우리가 모를 뿐입니다. 자기 동반자를 모르고 사니, 관음, 문수, 보현보살이 지금 이 자리에 함께 하는 상주일체(常住一切)의 존재임을 모릅니다.” 묵산 스님에 따르면, 이 마음은 ‘천지인 삼재의 주인이자 만법의 왕’(主於三才 王於萬法)이다. 허공은 말이 없지만 춘하추동을 만들어 내듯이 마음은 만법을 굴리는 주인공인 것이다. “마음이란 본래 빈 자리입니다.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사량분별이 끊어진 자리입니다. 첫걸음에 진공(眞空)을 얻은 후 내 바탕 위에서 묘유(妙有)를 굴리는 것입니다. 유(有)에서 무(無)로, 무에서 다시 유로 나아가되 유무를 초월해서 정진해야 합니다.” 그래서 묵산 스님은 “우리가 정진을 잘 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주체성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하며 보고 듣고 아는 그놈을 항상 관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반야심경을 들으면 내가 반야심경이 돼서 행동하고, 금강경을 들으면 내가 금강경이 되어 생활해야 한다. 화두 들고 있는 이 놈이 무엇인가? 절하고, 운전하고, 책읽는 이 놈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 묵산 스님은 선에서 부처와 극락이 나왔기에, 불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선(禪)을 떠나서는 한시도 살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스님은 “24시간 도(道) 안에서 일체의 분별심을 버리고 그것과 하나되어 평상심으로 살 것”을 당부하면서 오늘도 법문을 마친다.
글=김재경 기자·사진=고영배 기자 묵산 스님이 말하는 ‘참선’ 묵산 스님은 최근 위빠사나에 대한 관심 고조와 창가학회 등 일본 불교의 확산에 대해 우려하며, 정통 선에 대한 쉼없는 탁마를 당부했다. “참선을 해야만 크게 깨칠 수 있다”는 묵산 스님은 “깨닫기 위한 요체는 하얀 백지장처럼 일체를 방하착(放下着)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에 본래 없던 내가 어디 있었는가를 절실히 참구해서, 온갖 분별심일랑 싹 쓸어버려야 한다는 것. “마음을 쉬고 비우는 방하착 공부를 위해서는 부처님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걸식할 수 있는 대발심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큰 부자였던 중국의 방거사가 모든 재산을 버리고 깨달았듯이 무집착, 무소유를 실천해야 합니다. 고인들은 ‘일체를 방하착하면 본심은 드러나고 자재하여 법왕궁(法王宮)에 노닐게 된다’고 했어요.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할 정도여서는 안됩니다. ‘백척간두’ 조차 버려야 합니다.” 묵산 스님은 “선이란 공(空)이며 부처이며 도(道)”라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근본으로 공부해야 한다고 설한다. 달마대사가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摠攝諸行)’이라 했듯이, 마음 하나만 관하면 모든 행동이 그 속에 다 포괄된다는 설명. “가령 우리가 마음을 관하면 모든 문제가 다 쉬어버립니다. 물 위에서 파도가 일듯이, 그 마음 바탕에서 좋은 생각도 내고 남을 해롭게 할 생각도 내고, 온갖 사심도 일어나고 온갖 욕심도 일어납니다. 마음 하나를 집중해서 관하면 어지러운 경계가 다 사라지지요.” 묵산 스님은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몸과 생각을 움직이는 본성을 관하되, 육근에 대한 집착이 완전히 소멸할 때까지 비우고 또 비우는 공부를 지어가길 당부한다. ‘넓고 크게 두려움 없이 고요하게 본성자리에 비추어보라(蕩蕩無畏 寂而照 照而寂)’는 말이다. 그러나 해탈한 자에게는 정진이니, 인욕이니 하는 말이 더이상 필요 없다. 화두, 염불, 절, 독경은 방편일 뿐이기 때문이다. 딱지가 떨어진 격외장부(格外丈夫)에게는 수행법이랄 게 붙을 수 없다. 스님이 해말쑥한 성품자리에서 분별심을 버리고 ‘절대성으로 상대성을 굴리며 살라’고 말하는 이유다. |
망향 望鄕
- 노 천 명 -
언제든 가리라
마지막엔 돌아가리라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아이들이 하눌타리 따는 길머리론
학림사 가는 달구지가 조을며 지나가고
등잔 심지를 돋우며 돋우며
딸에게 편지 쓰는 어머니도 있었다
둥굴레 산에 올라 무릇을 케고
활나물 장구채 범부채를 뜯던 소녀들은
말끝마다 꽈 소리를 찾고
개암쌀을 까며 소녀들은
금방망이 놓고 간 도깨비 애길 즐겼다
목사가 없는 교회당
회당지기 전도사가 강도상을 치며 설교하던
촌 그 마을이 문득 그리워
아라비아서 온 반마[班馬]처럼
향수에 잠기는 날이 있다
언제든 가리 나중엔
고향 가 살다 죽으리
모밀꽃이 하이얗게 피는 촌
조밥과 수수엿이 맛있는 고을
나뭇짐에 함박꽃을 꺾어오던 총각들
서울 구경이 소원이더니
차를 타보지 못한 채 마을을 지키겠네
꿈이면 보는 낯익은 동리
우거진 덤불에서
찔레순을 꺾다 나면 꿈이었다.
노천명 (1912~1957)
시인. 황해도 장연 출생이다.
본명은 노기선(盧基善)이나, 어릴때 병으로 사경을 넘긴 뒤 개명하게 되었다.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32년(밤의 찬미)를 발표하며 등단한 이후
<조선중앙일보>,<조선일보>,<매일신보>에서 기자로 근무하면서 창작 활동을 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시 〈사슴〉이 유명하다.
독신으로 살았던 그의 시에는 주로 개인적인 고독과 슬픔의 정서가
부드럽게 표현되고 있으며 전통 문화와 농촌의 정서가 어우러진
소박한 서정성, 현실에 초연한 비정치성이 특징이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중에 쓴 작품 중에는 〈군신송〉등 전쟁을 찬양하고
전사자들을 칭송하는 선동적이고 정치적인 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화여전 동문이며 기자 출신으로서 같은 친일 시인인 모윤숙과는 달리
광복 후에도 우익 정치 운동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950년 북조선의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피신하지 않고
임화 등 월북한 좌익 작가들이 주도하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문화인 총궐기대회 등의 행사에 참가했다가, 대한민국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뒤
조경희와 함께 부역죄로 체포, 투옥되었다.
모윤숙 등 우익 계열 문인들의 위치를 염탐하여 인민군에 알려주고 대중 집회에서
의용군으로 지원할 것을 부추기는 시를 낭송한 혐의로
징역 20년형을 언도 받아 복역했으며 몇개월 후에 사면을 받아 풀려났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문학 부문에 선정되었다.
총 14편의 친일 작품이 밝혀져[1]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도 포함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에 보성전문학교 교수인 경제학자 김광진과 연인 사이였다.
노천명과 절친한 작가 최정희가 시인 김동환과 사귄 것과 함께
문단의 화제 중 하나였고 두 사람의 사랑을
유진오가 소설화하여 묘사한 바 있다.
김광진은 광복 후 가수 왕수복과 함께 월북했다.
경기도 고양시 벽제면의 천주교 묘지에 언니와 함께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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