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천품 7~9장 하늘에 제사하여도 一念道만 못하다.

2011. 10. 14. 22:1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법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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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숨이 다하도록 쉬지 않고 하늘에 제사하여도 一念道만 못하다.

     

     

     

    제7장

    월천반사 종신불철 불여수유 일심염법 일념도복 승피종신

    月千反祠 終身不輟 不如須臾 一心念法 一念道福 勝彼終身

    한 달에 천 번씩 하늘에 제사하여 목숨이 다하도록 쉬지 않아도

    잠깐 동안이나마 한 마음으로 법을 생각하는 그것만은 못하나니

    한 생각 사이의 복을 짓는 것 저 몸을 마치는 것 그것보다 나으니라.

     

     

     

     

    제8장

    소종백세 봉사화사 불여수유 공양삼존 일공얄복 승피백년

    雖終百歲 奉事火祠 不如須臾 供養三尊 一供養福 勝彼百年

    비록 백 년을 다 마치도록 불신[火神]을 받들어 섬기더라도

    잠깐 동안이나마 삼존(三尊:佛ㆍ法ㆍ僧)께 공양하는 것만

    못하나니

    한 번 공양한 그 복이 백 년 동안 제사 지낸 것보다 나으리라.

     

     

     

     

    제9장

    제신이구복 종후관기보 사분미망일 붕여예현자

    祭神以求福 從後觀其報 四分未望一 不如禮賢者

    신(神)에게 제사하여 복을 구하고 뒤에 올 보답 기대하지만

    어진 이에게 예배한 복의 4분의 1도 되지 못하리.

    ===================무심지덕=해===================

    세상에는 수많은 길(道)이 있다. 그들이 목적을 삼고 가는 길은

    매우 다양하다지만 결국 다 명예를 구하고 복을 구하고 권력을

    구하고 종을 구하고 영생을 구한다는 것이 궁극적 목적일 뿐이다.

    육사외도 참고=>http://cafe.daum.net/jungjin37/64GS/34

     

     

     

    이들이 각자 소망하는 궁극적인 목적에는 완전무결한 진리가

    있는가. 그들이 보고 듣고 감각하고 추리하여 소망하고 갈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에는 진실한 과보의 실체가 있는가?

    아니다. 그들이 보고 듣고 구하는 것 자체가 환예(幻翳)와 같고

    공화와 같은 것이며 정견이 아닌데 어떻게 실체가 없는 무상함

    에서 위없는 궁극적인 도가 이루어지겠는가.

     

     

     

    옛날 원시인들은 천둥 번개가 치는 것을 보고 하늘에서 신이

    노여워서 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두려워했고. 그리고

    대지가 가물면 하늘에 빌어 비를 구하며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그것을 믿는 사람 없다.

     

     

     

    비유하면,

    저 어리석은 중생들이 전도된 견해로 두려움을 만나 나약하여

    불신을 믿거나 천신에게 제사지내며 복과 명예와 구원을 구하며

    예배 하는 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어스름한 밤길에서 꾸불꾸불한 셋기 줄이

    바람에 흔들리며 닥아 오는 것을 보고 뱀 인줄 착각하여 놀라

    도망치면살려 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다음날 날이 밝은 뒤에 그것이 한낱 셋기 줄인 줄 알고

    나면 속아서 놀래 달아난 것에 웃음이 나오고 말 것이다.

     

     

     

    이처럼,

    허깨비에게 속아서 허깨비를 믿고 예배하며 천년만년을 제사하

    복을 구하고 노력해서 뒤에 올 보답을 기대 해도 그 보답의 결

    과는 헛것에 불과 하므로 잠깐 동안이나마 한 마음으로 정법을

    생각하는 그것만은 못하고, 번뇌 없는 한 생각 사이의 복을 짓는

    것이 저 어리석은 노력으로 수백 수천의 몸을 희생하여 마치는

    것 그것보다 나으며, 어진이 삼존(三尊:佛ㆍ法ㆍ僧)께 예배한

    복의 4분의 1내지 백분의 일. 천분의 일도 되지 못한 과보를 얻

    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허망하지 않은 정법을 깨달아 정법에 머물러 계시면서

    정법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므로 어진이 삼존이라 하시기에 무한

    공덕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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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보는 눈

 

 

칠푼이 팔푼이만 급수가 있는게 아니라
멀쩡한 사람도 다 급수가 있다.
그러나 학벌, 재산, 지위, 재주로 급수가 정해지는게 아니다.

오직 한 가지, 세상 보는 눈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사람 급수가 드러난다.
동서양 역사책에도 없고 학교 교과서에도 없고,
스승의 가르침에도 없는 세상보는 눈은
전수(傳授)가 아니요, 생성(生成)이다.

씨눈이 틔여서 나무로 크는 줄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씨눈 어디에 나무가 들어 있는 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알밤을 그려놓고 이러쿵 저러쿵 밤나무의 원초를 주장하고
정자 난자를 그려놓고 인간의 태초를 해설하나
공허하기 짝이 없듯이 세상보는 눈도 딱 집어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쁜 년이 바람나면 여러 사내 신세 망치 듯
유식한 놈에게 세상 보는 눈이 잘못 박히면
여러 사람에게 해독을 끼친다.

세상이 시끄러운게 어디 못 배운 사람이 많아서 그런가.
잘못 배운 놈들이 많아서 탈이지.

오욕칠정으로 범벅이 된 사회생활을 하면서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빈 말이다.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으로 사람을 보고 시대를 보고
역사를 보면 무위(無爲)의 자유를 찾게 된다.

저 이름 모를 들새의 날개만큼만 세상 보는 눈을 높혀 보자.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계산된 허무이지만
빈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자유스러운 자유인가.


모셔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