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차쌍조(雙遮雙照)

2011. 11. 7. 09:1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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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차쌍조(雙遮雙照)

 

 

 

원융사상에 투철한 천태교학의 중도설은

삼제원융(三諦圓融), 일념삼천(一念三千)등의 대표적인 교리에서도 드러나지만

한편으로는 쌍차쌍조(雙遮雙照)로도 이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불교 여러 종파의 중도설을 말하면서

쌍차 쌍조가 중도의 근본 내용임을 누차 말하였는데,

이 쌍차 쌍조를 누구보다도 능란하게 구사하며

중도를 밝힌 이가 바로 천태 지자스님입니다.

 

천태스님은 이 차 · 조(遮照)를 여러 곳에서 설하였지만,

그 차조에 입각한 중도설의 연원은 다른 대승경전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미 대승경전인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에서

쌍조이제(雙照二諦)에 따른 중도관을 설하고 있으며,

천태스님도 차.조에 의한 중도설을 논하면서

그 경증(經證)으로 이 영락경의 경문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쌍차와 쌍조를 종횡으로 구사하여

원교의 중도관을 다양하게 설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이미 밝고 청정하여 쌍으로 양변을 차단하고 바르게 중도에 들어가서

쌍으로 이제를 비추니 부사의한 부처님 경계를 구족하여 줄어듬이 없느니라.

 

心旣明淨에 雙遮二邊하고 定入中道에 雙照二諦하니 不思議佛之境界를 具足無滅하니라.(摩詞止觀;大正藏 46. p.17 上)

 

 

중도의 내용은 쌍차쌍조로 그것은 부사의한 부처님 경계이지 보살의 경계는 아닙니다.

위에서 '쌍으로 양변을 차단하여 바르게 중도에 들어간다'고 하니

혹시 잘못 이해하여 쌍으로 양변을 차단하는 것과

따로 중도가 있는 것같이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표현은 구름이 걷히니 해가 드러난다는 식입니다.

 

구름이 걷히면 해가 드러나고 해가 드러나면 구름이 걷히는 만큼,

쌍차와 쌍조에는 절대로 간격이나 거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언어로써 표현하자니 쌍차쌍조이지, 실상을 알고 나면

쌍차가 곧 쌍조이고 쌍조가 곧 쌍차로서

언제든지 차조(遮照)가 동시이며 그 둘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알아라.

종일토록 말해도 종일토록 말하지 않은 것이고

종일토록 말하지 않아도 종일토록 말한 것이며

종일토록 쌍차하여도 종일토록 쌍조한 것이다.

깨뜨린 즉 세우는 것이요 세운 즉 깨뜨리는 것이다.

 

當知하라 終日說終日不說하고 終日不說終日說하여 終日雙遮終日雙照하니 卽破卽立이요 卽立卽破니라(摩詞止觀; 大正藏 46p,56上)

 

 

 

'종일토록 말함'은 쌍조이다.

아무리 쌍조하여도 그 자취가 적정하여 설한 것이 없기 때문에

종일토록 말하여도 아무말도 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또 '종일토록 말하지 않음'은 쌍차이다.

종일토록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말한 것이 됩니다.

이와같이 쌍차가 쌍조이고 쌍조가 쌍차가 되니

대광명이 적적한 가운데 미진수의 불찰을 덮고도 남으나

그 자체는 공공적적(空空寂寂)해서 한 가지 상도 볼 수 없습니다.

 

'깨뜨리는 것'이란 곧 차며

'세우는 것'이란 곧 조(照)입니다.

 

그러므로 '깨뜨린 즉 세우는 것이요, 세운 즉 깨뜨린 것이다'는 뜻은

아무리 쌍차를 해도 쌍조이고 쌍조를 해도 쌍차라는 말입니다.

 

차가 즉 조고 조가 즉 차로서 허공을 두쪽 내면 냈지

이것들은 원융하여 결코 두쪽을 낼 수 없습니다.

 

색(色)과 공(空)이 원융하고 선(善)과 악(惡)이 무애하며

시(是)와 비(非)가 원융하고 중생(衆生)과 불(佛)이 무애해서,

끝없는 시방의 허공계를 아무리 둘러봐도 오직일심법계(一心法界) 이외에는

아무 것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무장애법계(無障碍法界)입니다.

이것은 언제든지 쌍차쌍조가 근본이 되며

이 쌍차쌍조인 중도를 떠나서는 절대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중도관이라 함은 중(中)은 둘이 아님을 뜻으로 삼고

도(道)는 능통함을 이름하며

하나의 참된 도리(一實諦)를 비추어 공허하게 통하여

걸림이 없는 것을 중도관이라 한다.

 

그러므로 경에 말하기를 앞의 두 가지 관(觀)은 방편도이니

두 공관으로 인하여 중도에 들어가서 이제를 쌍조하고

마음마음이 적멸하여 자연히 일체지의 바다에 들어 간다고 한다.

 

中道觀者는 中以不二爲義하고 道是能通爲名하니 照一實諦하여 虛通無滯를 名中道觀也라 故로 經云 前二觀은 爲方便道라 因是二空觀하여 得入中道하여 雙照二諦하고 心心寂滅하여 自然流入薩婆苦海라하니라.(維摩經玄疏1 ;大正藏 38, p.525 下)

 

 

'중(中)은 둘이 아니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다 원융하다는 말이며,

'능통하다'라는 것은 일체가 막힌 데 없이 무애하다는 말입니다.

 

'하나의 참된 도리(一實話)'는 자성 · 법계 · 법성 · 진여 등을 말하는데,

무애자재한 중도의 대지혜가 걸림없이 하나의 참된 도리를 비추는 것을

중도관이라 합니다.

 

'이제를 쌍조한다'에서 쌍조는 명 · 암을 떠난 자리에서 하는 말입니다.

이것을 보통 중생이 보는 명암(明暗)을 말하는 것이라거나,

전지로 불빛을 비추듯이 비추는 것으로 알면 참으로 중도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쌍조이제가 되면 대적멸 대적정 삼매를 얻어

자연히 일체지를 구족한 부처님의 바다에 들어가 유희하기 때문입니다.

 

 

 

지귀(志鬼)의 사랑 - 정민호

 

지귀는 거지 같은 사나이다

옷에 말똥 냄새를 풍기는 천인 중의 천인

그런 주제에 여왕님을 사모하다니,

죽을 듯 살 듯 날뛰며

혼자 울며불며 다니다가

왕의 행차를 기가리다가 돌탑 아래서 잠이 들었다.

 

여왕은 소문 듣고 자기 팔에 금팔찌를 풀어

사나이의 가슴에 풀쩍 던져 주었다.

누더기를 입은 사나이의 가슴은

온통 금빛 찬란한 아침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모르고 잠을 자는 지귀,

억울하고 애석하여 후회로 가득 찬 그의 가슴은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가슴 태우는 지귀는 심화(心火)가 번져

온몸 가득 불이 타기 시작했다.

 

불꽃은 번져 탑을 두르다가

탑은 불덩이가 되어 사랑을 태우고

선덕의 가슴을 태우고

신라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나서

온 산천에 불이 붙어 타기 시작했다

지귀(志鬼)는 거지같은 사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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