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2. 17. 04:45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유마경
행복한 삶으로 가는 길
<유마경>에 “심청정법계정(心淸淨法界淨)이라는 말이 있어요.
마음이 깨끗하면 세상이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자기 마음속에 항상 불평불만이 가득 차 있으면 세상의 모든 것이
못마땅하기 마련이고, 세상이 못마땅한데 어디에 행복이 존재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깨끗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셨기 때문에
일체중생들이 자기와 똑같은 고귀한 존재임을 보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왕자 출신이다. 나는 깨달은 부처다.’ 이런 때가 마음에 끼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중생들이 자기와 동등한 고귀한 존재임을 인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實有佛性)이라, 본래 모든 생명체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일체 모든 준동함령이 근본적으로 동일한 생명체, 즉 불성(佛性)을 갖추고 있어
조금도 차별이 없습니다. 따라서 깨끗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더불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공생의 방법입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볼 수 있고,
진실을 보게 되므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므로
악업을 짓지 않고, 선업만을 짓게 되어 이상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국 당나라 때 유명한 시인 백낙천이 도림선사를 찾았습니다.
백낙천이 물었습니다. “불법의 큰 뜻이 무엇입니까?”
도림선사가 답했습니다.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其意)
시제불교(是諸佛敎)니라”
즉 불교의 근본은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선한 일을 행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악업을 짓고 불나비처럼 스스로 지옥고를 자초하는 까닭은
우리의 마음이 탐진치 삼독심으로 더럽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때를 벗기고 다 같이 잘사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육바라밀은 바로 이 마음의 때를 벗기고 청정본연의 본심을 회복하기 위한 방법이요,
수단입니다. 번뇌. 망상의 늪을 헤치고 탐진치 삼독의 바다를 무사히 건너
마침내 열반의 큰 행복의 언덕에 도달할 수 있는 뗏목과도 같습니다.
“불타여, 길을 가는 나그네가 목적지에 이르고
안 이르고 상관없이 저는 다만 길을 가리켜 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목련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을 때 부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목련이여, 나도 역시 마찬가지다. 분명히 열반(행복)은 있고 열반(행복)으로
가는 길도 있고, 그 길을 교섭하는 나도 있건만 사람들 가운데는 바로 행복에
이르는 사람도 있고 못 이르는 이도 있다. 그것은 나로서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나는 다만 길을 가리킬 뿐이다.”
분명 우리에게는 행복이라는 것도 있고, 행복에 이르는 길도 있고, 그 길을
가르쳐 주시는 부처님도 계십니다. 그러나 이 행복을 성취하고 못하고는
각자의 믿음과 정진, 노력의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부처님과 같은 청정본연의
마음을 회복하여 행복의 길을 갈 수 있을까요?
부처님께서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여섯 가지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이 여섯 가지의 길을 걸으면 스스로의 마음이 청정하게 되고,
무량공덕을 지어서 마침내는 행복 열반에 이르러 성불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여섯 가지의 길이 바로 육바라밀(六波羅蜜)입니다.
육바라밀은 너와 나의 세계, 우리의 세계에서 어떻게 수행함으로써 마침내
행복 열반의 경지인 청정본연의 자성으로 돌아가느냐 하는 방법을 밝힌
수행법입니다. 그러므로 이 육바라밀은 자리이타(自利利他)를 실천하는
보살이 닦아야 하는 것을 밝힌 보살의 길입니다.
그 첫 번째는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입니다.
보시(布施)는 남에게 베풀어 주는 것, 바라밀(波羅蜜)은 저 언덕에 이르는
것이므로 보시함으로써 행복을 얻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는 바로 우리의 이상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저 언덕이 되는 것입니다.
바라밀이란 바로 이러한 이상적인 곳에 도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보시바라밀은 베품을 통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지요.
동서고금을 통해 욕심 많은 사람치고 행복하게 산 사람 없고, 위대한
성인들치고 부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재산이라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움켜쥐고 자기 혼자만 갖겠다는 생각이 나쁜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는 절대로 행복해질 수도 행복 열반의 저 언덕에 도달할 수도
없습니다. 성경에서도 부자가 천국에 나기는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기
보다도 힘들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이란 아무리 많이 소유해도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글세방에 사는 사람은 전세방만 얻었으면 하는 소원을 갖지만
전세방을 마련하게 되면 독채 전세를 얻고 싶은 욕망이 솟아나고
전세 독채를 얻고 보면 작은 아파트가 소원입니다.
그러나 작은 아파트가 생겼다고 해서, 소원성취 했다고
행복한 마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잠시 잠깐이고 더 넓은 아파트, 단독주택을 소원하게 됩니다.
우리가 부처님과 똑같은 청정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부처님과 달리 불안과 공포, 근심, 걱정으로 날을 보내는 이유는
우리 마음을 세 가지의 독한 독이 뒤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 탐심(貪心)이 으뜸가는 범인이므로 탐심을 걷어내지 않고는
본래의 깨끗한 마음을 되찾을 수 없습니다.
이 청정 본래심을 찾지 않고는 행복 성불을 바랄 수가 없습니다.
남에게 베풀어 주는 행위는 단지 남을 돕는다는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자기의 청정 본래심을 되찾기 위해서도 꼭 필요합니다.
육바라밀 가운데 보시바라밀을 맨 앞에 둔 것은 사람은 누구나,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들도 탐심이 가장 뿌리가 깊기 때문입니다.
개가 뼈다귀를 놓고 서로 으르렁대고, 숲속의 맹수들도 자기의 사냥감을
다른 짐승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온갖 지혜를 다 짜낸다고 합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자기 자식, 자기 새끼에게만은 아낌없이 베풀어 줍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자식이나 자기의 새끼는 자기 자신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생각이 부처님의 동체대비(同體大悲)심입니다.
그 결과나 그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내 몸 같이, 내 친자식처럼 생각하는
마음으로 이웃과 사회의 그늘지고 구석진 곳의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
행동이 진정한 보시바라밀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살은 마땅히 머무름 없이 보시할지니,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에 머문바 없이 보시하라.”<금강경>
그러나 물질만이 보시는 아닙니다. 바른 삶의 길로 인도하는 것도 보시(布施)요,
두려움에 떠는 사람에게 그 공포로부터 헤어나게 하는 것도 보시바라밀입니다.
다음은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입니다.
지계(持戒)란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삿된 음행을 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 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육조 혜능대사께서는 심지무비자성계(心知無非自性戒)라 하셨습니다.
마음에 그릇된 생각이 본래 없는 줄 알면 그것이 곧 자기 성품의 지계라는 말이지요.
우리 마음의 근본 성품은 본래 아무런 그릇됨이 없이 청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마음으로 돌아가 오직 깨끗한 그 마음을 낸다면
이것이 바로 진정한 지계바라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살은 단지 자기 자신의 청정함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고
다른 이의 파계도 이를 적극적으로 방지하겠다는 결심을 가져야 합니다.
부처님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살생을 범하고 도둑질을 하고 온갖 행위의 결과로 과보를 받는 사람들을
보고 깨달음을 얻어, 중생들의 이런 불행을 돕겠다는 서원을 일으키는 것이
지계바라밀을 닦는 마음이다.”<대품반야바라밀>
다음은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입니다.
인욕이란 참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참는 노력이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농부는 씨를 뿌리고 수확을 거둘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꿰어서 쓸 수는 없습니다.
인욕바라밀은 참기 어려운 것을 능히 참는 수행입니다.
남에게 분한 일,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것을 참고 견디고 상대를 용서해
주는 마음입니다. 옛말에 참을 인(忍)이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욕은 성내는 마음을 다스려 잠재우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독이 되는 진심(嗔心)을 억누르는 것은 인욕바라밀입니다.
인욕바라밀은 ‘나’라는 것에 집착해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혜로운 눈으로 보면 ‘나’라는 것은 인연의 소산일 뿐 실체는 없습니다.
그런 ‘나’에 집착해서 자존심을 내세우고 남이 나를 알아주기만을 바라는
나머지 남이 나를 무시한다거나 알아주지 않을 때
성을 내기도 하는 데, 성을 내는 것은 아상(我相)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래는 나라는 것도, 나의 것이라는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옛날 가리왕이 내 몸을 마디마디 잘랐을 때에, 내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더라면 응당 분한 마음이 일어났으리라.
그러나 내게는 그런 마음이 없었느니라.”
또 화엄경에서는 “보살은 무량겁을 지내더라도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고로
능히 그 고통을 참는다.”고 하셨고, <법구경>에서는 “분하고 성내면
법을 보지 못하며 분하고 성내면 도를 알지 못하느니
능히 분노심을 제거하면 복과 선이 항상 몸에 따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은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입니다.
정진이란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 자신을 갖고 게으름
없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정진바라밀입니다.
정진이 없으면 사회생활도 가정생활도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옛말에 “성심소도(誠心所到)에 금석가투(金石可透)”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지극한 마음으로 하는 일은 쇠나 돌도 뚫어 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도 있고,
공양(供養) 가운데 최상은 정성(精誠)이다. 라는 말도 있습니다.
보시나 지계, 인욕도 정진이 뒤따르지 않고 한두 번으로 그친다면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
데도 매사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낙오자가 되기 십상이지요.
낙오자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서 생활한다면 아무리 지식이 많고
계행이 청정하고 보시할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여도
결국은 남에게 신세만 지고 살게 됩니다.
그러나 정진바라밀은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게으른 사람을 교화하여 정진하도록 하는 마음도 가져야 합니다.
다음 다섯째는 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입니다.
선정(禪定)은 마음이 안정되어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되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도 부처와 똑같은 지혜와 덕성을 갖추고 있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근본성품에 있어서는 부처님과 중생의 차별이 없습니다.
단지 번뇌 망상으로 자기 자신에게 간직된 불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온갖 경계에 끄달려서 살고 있을 뿐입니다.
선정바라밀은 이처럼 주변 경계에 미혹(迷惑)되는 마음을 근본으로 되돌리는
수행입니다. 마치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에서는 바다의 본모습을 발견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리는 한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을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정바라밀은 앞서 보시. 지계. 인욕. 정진의 수행으로 마음의 때를
씻어내고 깨끗해진 마음을 잔잔한 호수처럼 안정되게 유지하는 수행입니다.
다시 말해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등을 통하여
얻어지는 결과가 선정(禪定)이라는 매우 안정된 마음의 상태라는 말입니다.
옛 스님께서는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라고 하셨는데, 평상심은 변함없는 마음,
굴곡이 없는 마음, 보고 듣고 맛보아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일컫는 말입니다.
아무리 물이 맑아도 바람이 거세게 불어 물결이 출렁거리면
바다 밑은 보이지 않듯이 보시. 지계. 인욕. 정진바라밀을 수행하여
마음이 티끌 한 점 없이 맑아졌다고 할지라도
마음이 산란하면 마음의 근원인 진심(眞心)에 이를 수 없으므로
선정바라밀은 성불을 위한 마지막 수행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끝으로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입니다.
지혜바라밀은 또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라고도 합니다.
반야바라밀은 지혜로운 삶, 해탈의 삶, 즉 행복한 삶을 뜻합니다.
반야는 부처님과 똑같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지혜로, 부처님은 이 지혜를
깨달아 부처님이 되셨고 중생들은 이 반야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뒤바뀐
생각으로 세상을 보고, 뒤바뀐 가치관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까닭에 생사
윤회를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반야바라밀은 곧 성불, 참 행복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떤 것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는 것이 반야바라밀의 특성이다.
반야바라밀이 어떤 것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는 것처럼 법(法)도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공(空)이며 실체로서의 존재를
떠나 있기 때문이다.” <반야바라밀경>
중생들은 지혜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현상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고
있습니다. 이른바 전도망상입니다. 그러나 지혜로 보면 일체 법은 모두가
실체가 없는 공한 모습이므로 그 무엇에도 집착할 것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제법공상(諸法空相)을 깨달아 집착을 여의면 모든 근심. 걱정
으로부터 해탈하여 자유자재한 참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피안(행복의 언덕)에 이른다.” 라고 했습니다.
육바라밀은 우리 불자들이 실천을 통하여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
(下化衆生), 즉 위로는 지혜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염원을 달성하는 최선의 길입니다. 이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겸한
수행이며, 관념적인 이론이 아닌 행동철학이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왕자의 자리도 버리셨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값진 진리의 길을 발견하시고 법왕(法王)이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에게 자신께서 성취한 깨달음, 즉 참 행복에 이를 수 있도록
여섯 가지 보살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바로 참 행복에 이르는 육바라밀입니다.
우리 다 같이 육바라밀을 실천하여 바라밀다(波羅蜜多)를 이루는,
즉 고통의 이 언덕에서 행복의 저 언덕에 오르도록 합시다.
성불하십시요 ()
옮긴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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