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불교는 물론 대승불교도 훌륭한 불교다

2012. 1. 17. 00:0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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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불교는 물론 대승불교도 훌륭한 불교다.”

 

불자님들

임진년 새해가 밝은지 이제 보름이 되었습니다.

올해는 우리나라 뿐 만 아니라 러시아, 중국, 미국 등 나라에서

새로운 지도자를 뽑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총선과 대선이 있을 때 무수히 많은 공약과 슬로건이

나오지만 선거가 끝나면 흐지부지하기 일쑤입니다.

그리고 흑색선전이 난무하고 특히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옳다는 생각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상대를 무시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내 생각이 무조건 옳다.’는 생각이 갈등의 원인이요

비극의 원인임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특히 요즈음 불교계에도 소위 “근본불교만이 유일한 불교다.”라는 주장에 대하여

 “근본불교는 물론 대승불교도 훌륭한 불교다.”라는 주제로 가지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갈등의 원인은 ‘내 생각이 무조건 옳다는 것’

-중도의 원리를 깨치면 갈등은 저절로 해결돼

 

조선시대 퇴계 이황선생이 낙향하여 아이들을 가르칠 때입니다.

한 아이가 와서 “선생님, 저애가 나를 막 때려요. 저애가 나쁘지요?”

“그럼, 나쁘고말고.”이렇게 이황선생이 대답하였습니다.

이번에는 그 때린 아이가 와서 “선생님, 저애가 나를 막 놀려요.

그래서 한 대 때려주었어요. 저애가 나쁘지요?” “응, 그래”

이 말을 듣고 있던 이황선생의 부인이 “‘아니 당신은 이 아이의 말도 옳다.

저 아이의 말도 옳다.’라고 하는 데 도대체 무엇이 옳다는 말인가요?”라고 말하자,

“그래요. 당신 말도 맞소.”라고 대답했습니다.

 

자 이때 이황선생님의 입장에서 그 말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묻는 자 즉 말하는 입장에서는 다 옳다는 뜻입니다.

위에서 각각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옳다는 것입니다.

서로 자기가 옳다는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갈등은 필연적이요,

 투쟁은 불가피하며 결국 이로 인해 비극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갈등의 속성은 ‘나’라는 생각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아상(我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먼저 서로 생각이 다름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서로 생각이 다름을 존중하자는 뜻이며, 자기주장을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고

상대를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편협한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주장만 내세우면 결국 갈등이 생기고 싸움만 나게 됩니다.

자신이나 상대나 모두 한 뿌리로 태어난 같은 민족이요, 같은 국민이요, 크게는 같은 사람이요, 우주적으로는 같은 생명체입니다. 그래서 같은 뿌리로 볼 때 다 같이 평등합니다.

무엇을 주장하든지 다 평등하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한 뿌리란 평등한 생각이 동체대비사상이요 불교의 사상입니다.

따라서 각기 다른 주장을 각각의 입장에서는 일단은 다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체의 입장에서는 각자가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 양보해야 평화롭습니다.

 

이것이 중도의 원리입니다.

이것은 우주자연계의 질서원리를 뜻합니다.

지구와 같은 행성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습니다.

그리고 태양은 스스로 자전하면서 은하계를 향해 돌고 있습니다. 지구 주위를 달이 돌고 있습니다.

이것은 서로 당기는 힘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그것을 만유인력이라 합니다. 당기는 힘과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는 힘이 유지될 때 태양계가 유지됩니다.

이러한 이치는 미세한 물질세계인 분자세계나 원자나 전자나 중성자 그리고 더 작은 미립자의 세계에도 적용됩니다.

결국 자연계의 존재들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각자 자기의 맡은 바를 다 합니다.

 

 

그래서 이 우주질서가 유지됩니다. 부분이 모여 전체를 이루며 부분도 중요하고 전체도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있는 어떠한 존재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도 함께 중요합니다.

 

 

깨달은 자나 깨우치지 못한 자도 모두 같은 사람입니다.

사람인 점에서는 다 평등합니다. 그리고 모두 존중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남에게 주장은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억지로 강요하거나 남이 자기주장을 믿지 않는다고 화를 내거나 욕하거나 저주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한나라에 다양한 종교를 믿고 서로 공존하며

오순도순 사는 사회가 더 좋습니까?

아니면 자기 종교 믿지 않는다고 이교도를 미워하거나 아니면 죽이거나

못살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까?

 

근본불교와 대승불교가 모두 부처님의 중도사상을 잘 실천하며 오순도순 잘 살아가는 것이 좋습니까? 서로 싸우고 짝퉁논쟁을 하는 것이 좋습니까?

 

우리는 같은 불자로서 서로 상대를 존중하고 아끼고 격려하며 평등하게

잘 살아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정말 이 세상에서 경계해야할 것은 이 평등의 법칙을 어기고 무조건 자기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믿음이나 나의 생각이 옳다는 것에 집착하는 것에서 시작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변견(邊見)이라 합니다.

다른 말로 아견(我見) 또는 아집(我執)이라 합니다.

이것은 무아(無我), 평등(平等)이라는 불교의 중심원리와 거리가 먼 생각입니다.

 

 

 

2. 근본불교의 중심원리는 무엇인가?

 

불교를 시대사적으로 원시불교(근본불교), 부파불교(소승불교), 대승불교(大乘佛敎)로 나눕니다.

원시불교를 다시 부처님 당시 직계 제자들이 있었던 불멸 후 30년까지를 대개 근본불교(根本佛敎)라 하고 부처님 입멸 후 백년까지를 협의의 원시불교라 합니다. 또 부파불교란 곧 소승불교로서 불멸 후 1세기부터 대승불교가 일어나기까지 4,5백년 사이를 말하고 또 대승불교는 서기전 1세기 무렵부터 일어난 새로운 불교를 말합니다. 따라서 근본불교(또는 원시불교)와 부파불교(소승불교)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부파불교시대에 있어서는 유견(有見) 아니면 무견(無見), 무견(無見)아니면 유견(有見) 변견(邊見)으로 각기 자기 교설을 주장한 소승불교로서 <중도사상>이 없습니다. 이에 반해 근본불교(根本佛敎)는 <중도사상>에 의하여 모든 교설이 설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승불교(부파불교)는 부처님의 중도사상에서 벗어나 변질된 불교라고 보는 것이 많은 학자의 주장입니다. 특히 근본불교사상에 대한 연구공적이 큰 일본학자 우정백수(宇井佰壽)박사라고 봅니다.

                                                                 (이상 성철(性徹)큰스님 백일법문 상권71P 참조)

 

 

 

 

◇ 중도사상은 불교의 독창사상입니다.

 

부처님께서 출가하셔서 처음에는 다섯 비구와 함께 고행주의 수행을 했습니다. 자기육신을 괴롭혀야 정신이 해탈한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고행주의)

그래서 6년의 혹독한 수행에도 결국 해탈하지 못하고, 더디어 몸을 괴롭히는 고행을 해야 정신적 해탈을 할 수 있다는 그 생각에 매어 육체를 괴롭혔고 그 결과 육체가 완전 무너지면 정신적 해탈도 할 수 없음을 깨우쳤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병(病) 따라 약을 주듯이 고행주의자인 다섯 비구에게 ‘고(苦)와 낙(樂)을 모두 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너희들이 세상의 향락만 버릴 줄 알고 고행하는 이 괴로움[苦]도 병인 줄 모르고 버리지 못하였지만, 참으로 해탈하려면 고(苦)와 낙(樂)을 다 버려야 한다.

이변(二邊=양극단)을 버려야만 중도를 바로 깨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양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정등각(正等覺)하였다.”는 이 초전법륜이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부처님의 근본법이라고 확증하고 있으며 이것을 부처님의 ‘중도대선언’이라고 합니다.

 

중도대선언[남전대장경] 율부 경전에 있는 것을 인용하였고, 한역 오분율, 사분율(四分律) 등에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어느 불교학자이든 간에 [율장의 초전법륜편]의 ‘중도대선언’을 불교의 근본 출발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율장보다 좀 더 앞선 경전인 [숫타니파아타]에서도 피안도품(彼岸道品)에서도 중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양극단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그 가운데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는 양극단을 여의고 동시에 전체적인 입장에서 양변을 융합해야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불교의 근본이 중도사상에 있다는 것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대승비불설(大勝非佛說) 시비는 이미 백 년 전에 끝났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 일본에서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 논란이 일어나 일본불교계에 큰 혼란을 겪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남방불교지역인 스리랑카 등에서 니까야 경전이 발견되어 서구 불교학자들에게 전해지면서 ‘대승불교(大乘佛敎)의 가르침은 불설(佛說)이 아니다.’라는 시비가 거세게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일본의 유명한 불교학자인 마애다(前田慧雲)는 대승불교의 원류를 찾으려고 시도했습니다. 그 첫 시도는 1903년에 간행된 ‘대승불교사론’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책에서 그 당시 불교학계에서 행해지고 있던 ‘대승은 붓다의 설이 아니다.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라는 설에 비판을 가하여 대승이 붓다의 설임을 학문적으로 논증하였습니다.

 

 

 

이 속에서 대승불교의 핵심중도사상에 있다는 것을 밝히고 대승경전과 근본경전을 비교연구하며 논증을 하였습니다.

 

또한 근본불교사상에 대한 연구공적이 큰 세계적인 대학자인 일본학자 우정백수(宇井佰壽)박사불교의 근본사상중도사상에 있음을 논증하였습니다.

그래서 우정백수는 ‘첫째 부처님의 중요한 사적(史蹟)을 기초로 삼고, 둘째 부처님 당시의 인도 일반사상을 참고로 하고, 째 원시경전 가운데서 제일 오래된 부분이라고 인정되는 것을 종합하면 이것만은 꼭 부처님이 설했으리라고 믿어지는 공통된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다른 학자들도 부처님의 근본사상을 깊이 연구해보니 원시경전인 아함경전이나 대승경전도 아니고 그 [최초는 율장]에 있었습니다.

이 율장은 가필이 된 내용이 더러 있지만 가장 오래된 것을 찾아보니 부처님의 근본사상은 결국

[율장의 초전법륜]에 있었습니다.

 

 

율장의 초전 법륜편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세존(世尊)이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출가자는 이변(二邊)에 친근치 말지니 고(苦)와 낙(樂)이니라. 여래도 이 이변을 버린 중도를 정등각(正等覺)이라 한다.”

중도대선언은 [남전대장경] 율부 경전에 있는 것을 인용하였으며, 세계의 모든 불교학자는 율장의 초전법륜편의 중도대선언불교의 근본 출발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 이렇게 볼 때 불교의 근본 사상[중도사상]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승불교는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몇 백 년 뒤에 성립되었던 간에 또는 어떤 경전이든 [중도사상]에 입각해서 설법되어져 있다면 그것은 부처님 법이고 그렇지 않으면 부처님 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천태종, 화엄종이나 선종 등도 이 중도를 근본으로 삼았으므로 부처님의 근본사상그대로 이었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처음에는 학자들이 이 이치를 잘 몰라 대승불교를 의심하고 근본불교만이 불교가 아닌가하고 연구해 보았지만 부처님의 근본불교가 중도사상있다는 것이 판명이 된 뒤에는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은 이미 학계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대승경전은 모두 중도사상에 입각하여 설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이론은 일본의 명치(明治)말엽에서 대정(大正) 초기인 20세기 초엽에 성행했습니다.

 

 

4. 인도의 용수(龍樹)보살은 불교인이 아닌가?

 

인도에 있어서 용수보살이나 마명(馬鳴)보살이 주장한 대승불교운동은 무엇인가?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용수보살이 주창한 대승불교는 용수(龍樹)자신의 주장이므로 부처님의 불설(佛說)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용수보살은 그 당시 유행했던 부파불교의 모순점을 지적하여 근본불교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복구운동을 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세월이 지나면서 제자들이 각자 흩어져 살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어떤 자구 해석 등에 집착하여 각기 자기주장을 펴서 18개내지 20개 부파가 나누어져서 서로를 공격하고 헐뜯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각기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라고 하였지만 결국 모두 어느 한쪽에 집착한 변견이었으니 이것이 소승(부파)불교인 것입니다.

 

 

그 주장들은 대체로 보면 영원한 실체가 있다고 주장하는 유견(有見)과 없다는 무견(無見)을 주장하는 파가 있었습니다. 그 중 상좌부 계통은 유견(有見)을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부파불교시대에는 변견을 근본으로 삼고 시비를 일삼아 왔습니다. 그래서 불교 교리의 해석을 두고 극도로 복잡해지고 지루해졌습니다. 이 결과 불교를 믿던 대중이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용수보살이 대승불교를 선언하고 나선 것은 ‘삿된 것을 부수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

(破邪顯正)’는 것이었습니다.

용수보살은 변견(邊見)유견(有見) 무견(無見)을 부숴버리고 부처님의 바른 견해인 중도를 바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그 유명한 중론(中論)이요 대지도론(大智度論)인 것입니다.

 

그는 중도! 이것만이 부처님의 정통사상이라고 주장하여 부처님의 중도사상을 다시 부활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용수보살을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공격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변견에 머물러 있는 자들입니다.

 

근본불교도 훌륭합니다. 다만 부파불교는 부처님의 중도사상에 어긋난 변견에 속합니다. 아울러 부처님의 근본사상인 대승불교를 불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주장도 변견(邊見)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중도사상을 주장하는 근본불교도 중도를 근본으로 삼는 대승불교도 모두 다 훌륭한 불교입니다.

 

 

5. 대승경전에 나타난 근본경전의 내용

 

(1)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하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다.

요즈음 근본불교만이 오리지널 불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가 다 맞는 이야기가 됩니다.

근본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본래의 모습에 가깝게 전해져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경전은 후대에 다 만들어졌으므로 불설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아울러 영원한 불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영원한 나를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영원불멸의 신을 주장하는 기독교의 생각과 같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그들의 한 생각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 지구상의 어떤 문명과 문화도 홀로 독립해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종교도 알게 모르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불교는 인도의 바라문과 수많은 사상의 영향을 받아 태동한 것입니다.

그러나 윤회사상이나 해탈사상 등도 이미 고대 인도에 그 기반이 있었 습니다. 이러한 토대위에 부처님은 위없는 깨달음을 여신 후 연기의 이치삼법인의 이치중도의 원리해탈 열반의 의미다시 정립하신 것입니다.

윤회사상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서 오직 근본불교의 경전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그 주장에 앞서 대승불교가 왜 생겨났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잘 알아야 합니다.

적어도 80화엄경 정도는 잘 읽어 보아야 합니다.

화엄의 이치를 터득하였다면 대승이니 근본이니를 따지지 않게 됩니다. 진리에는 시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있다면 중생들의 생각의 차이가 있을 뿐!!

 

 

(2) [대승불교는 왜 생겨났는가?]

 

초기불교가 발달하면 극단적인 분파주의가 생겨났습니다. 각 계파 간에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여 교단이 분열되고 드디어 서로 반목하고 심지어 싸우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 분파주의가 왜 나왔습니까?

극도의 분파주의 결과 불교가 대중들에게서 멀어졌고, 이에 불교 중흥을 위해 나타난 운동이 바로 대승 불교 운동이요, 대승보살 사상입니다

분파주의는 한마디로 자기가 옳다는 생각입니다.

 

“ 다른 사람의 생각은 그러다. 내가 오리지널이다. 내가 불설에 더 가깝다. 따라서 내 주장만이 옳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은 짝퉁이다.”라는 생각에 불이 붙어 상대의 좋은 점을 보지 못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극도로 분파되었던 시대는 물론 지금 이 시대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직 자기 생각만이 개혁불교라 생각하고내식대로 개혁해야 만 옳고 그 길만이 유일한 길이다.”라는 생각에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입장에서는 아무리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타당하고 좋은 것이 있다고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마치 광신적인 기독교인들이 그들 외 에도 훌륭한 가르침이나 진리가 있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한마디로 소귀에 경 읽기와 같습니다.

 

 

(3)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연기의 가르침입니다.]

연기(緣起)란 무엇인가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어지면 연하여 저것도 없어진다.

따라서 모든 것은 연하여 의지하여

존재하므로 고유한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또한 만들어진 어느 것도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고정불변의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아(無我)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인데도

사람들은 영원함을 갈구하고 자기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실현할 수 없는 욕망 때문에 사람은 고통에 쌓이게 된다.

무상, 무아, 일체개고 이것이 삼법인이요, 불교 가르침의 원리입니다.

그리고 이 무상(無常)이나 무아(無我)연기법(緣起法)을 관통하는 일관된 사상은 바로

중도(中道)사상입니다.

 

◇ 부처님의 가르침을 근본 경전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타당하고 찬성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이 이 현대에 맞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 그러나 부처님은 무엇보다 대중의 화합을 중시했습니다.

대중화합도 중도사상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극단적으로 주장하였던 계율주의 데바닷다를 교단에서 내보냈던 것입니다. 하물며 어떤 계율이 옳니 그르니 하는 극단적 분파주의가 사실은 더 불교의 단합을 저해하는 일이지요.

그래서 초기(소승)불교가 점점 대중으로 부터 멀어진 것이지요.

 

 

세상은 무상(無常)합니다. 그래서 역사가 생겨난 것 아닙니까?

 

초기(소승)불교가 점점 대중으로 부터 멀어진 것이 원인이 되어

대승불교가 태동하게 된 것이지요.

그 당시 인도 대중의 지지를 얻어 나온 것이 대승불교 아닙니까?

그러나 이 대승경전의 모태는 바로 근본경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지나치게 분파되어가는 변견(邊見)에 근거한 주장을 인정하지 않은 것 뿐 입니다.

대승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 부처님의 마음을 찾으려고 한 것입니다.

오직 부처님의 마음을 알기에 힘을 기울인 것이지요.

부처님의 사리탑을 중심으로 부처님의 정신을 마음을 닮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처럼 평생 수행하며 중생을 교화하며 중생을 위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기로 하였습니다. 이들을 우리는 보살이라 합니다.

이 보살은 삼보에 의지하여 부처님의 한없는 자비심을 가슴에 안고

위로는 보리(도/해탈)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일에 온갖 힘을 쏟았습니다.

이들을 대승보살이라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가장 중요하게 보는 풍토가 전개 된 것입니다.

이 마음이 다름 아닌 자비(慈悲)라는 마음입니다.

 

 

(4) 대승보살의 마음 한없는 자비심의 발로인 것입니다.

 

[자비(慈悲)]

자(慈)는 조건 없이 주는 사랑의 마음을 말합니다.

비(悲)는 중생의 고통을 없애 주려는 연민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너와 내가 서로 의지하여 있고, 일체가 다 연기해 있으므로

너와 내가 평등하고 무아(無我)인 것입니다. 무아이므로 공(空)인 것이요,

이 공성(空性)의 마음을 깨닫는 것이 바로 성불(成佛)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자비심은 무아(無我)를 직접 몸소 체험하고 체득하는 것이 바로

대승불교 사상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래서 깨우친 것을 몸소 실천하며 또 실천하면서 체득하는 것입니다.

 

● 그래서 니까야 경전을 다 읽고, 대승경전을 다 읽는다 해도 자비심의 마음을 일어나지 않으면 헛공부하는 것이 됩니다.

 

자비로운 마음,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 배려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오히려 상대를 미워하고 독설을 퍼붓고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헛공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들이 불교교리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자기 주장만하고 있을 때 ‘음 저자는 기독교에 미쳐있구나!’하고 말합니다.

그래서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 생각에 빠져 있는 자를 우리는 미친 자라고 합니다.

 

시대의 흐름을 무시하고 무상(無常)의 도리를 무시하고 무아(無我)의 도리도 무시하고 평등의 도리도 무시하고 ‘오직 자기 생각만 옳다.’는 사람은 신앙의 자유나, 헌법조차도 무시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을 우리는 어리석은 자요, 광신자라 합니다.

광신자는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광신자체가 변견(邊見)이요, 변견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승불교는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까지 이어지면서 이 지역 많은 대중들의 호응을 얻으면 천년의 세월을 부처님의 자비심을 심어주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 부처님께서 모든 것은 변화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 시대와 그 지역에 맞는 교화법이 나온 것이지요.

그러므로 근본불교가 스리랑카나 남방불교 쪽에 자리를 잡아 면면히 부처님의 자비의 말씀을 이어왔다면, 대승불교는 북방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이지역의 민족들에게 부처님의 자비심을 심어온 것 아닙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비의 가르침입니다.

 

 

(5) 달라이라마는 말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잘 배워가는 길은 "배려와 착함"이 라고 합니다.

따라서 근본불교도 훌륭하고, 대승불교도 훌륭한 것입니다.

 

◇ 어떤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이나 가치관을 이 삼법인과 중도사상에 비추어 보아 어긋나면 그 견해는 자기중심적인 변견(邊見/아전인수)로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이러한 점을 고려하지 않고

“근본불교만이 오리지널 원조 불교이며 대승불교는 짝퉁이다.”라는 자기 생각에만 머물러 있는 다는 것은(집착=法執) 삼법인에 비추어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

근본(원시)불교의 지나친 분파작용 때문에 대승불교가 태동되었다.

근본(원시)경전도 훌륭하고, 대승불교도 훌륭합니다.

 

 

(6) 대승불교도 근본불교를 바탕으로 성립했습니다.

근본경전 속의 중요내용이 다 녹아 있습니다.

대승경전의 모든 곳에서 삼법인에 어긋나는 것은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다 녹아 있으며

자비와 평등을 가르치는 훌륭한 경전이요

무상(無常)무아(無我)일체개고(一切皆苦)사성제(四聖諦)

그리고 십이연기(十二緣起)중도(中道)의 가르침이 모두 녹아져 있습니다.

 

 

[예1] 여벌유자법상응사(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금강경)

금강경에 뗏목의 비유가 나오는데,

이는 맛지마니까야에 있는 알라갓두빠마경(Alagaddūpama Sutta,

뱀에 대한 비유의 경, MN22/ 전재성 역)에 있는 내용과 매우 유사 합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이 그 뗏목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그 사람은 저 언덕에 도달하였을 때

‘이제 나는 이 뗏목을 육지로 예인해 놓거나,

물속에 침수시키고 갈 곳으로 가면 어떨까?’라고 생각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해야 그 사람은 그 뗏목을 제대로 처리한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건너가기 위하여, 집착하지 않기 위하여 뗏목의 비유를 설했다.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뗏목에의 비유를 아는 그대들은

가르침마저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가르침이 아님 것임에랴!

 

 

● 금강경에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여벌유자 법상응사 하황비법)’이 있습니다.

이를 해석하면 “뗏목의 비유로 알아들어서 물을 건넌 뒤에 뗏목을 놓고 가듯이

법에 대한 집착을 벗어야 하리니 하물며 법 아닌 것이야 말해 무엇 하리요”라는 의미입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니까야’의 내용과 거의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해설]

<무주상보시를 하되 처음에는 상이 있는 보시를 하다가 나중에는 보시하는 일이 박 먹듯이 일상화 되면 내가 보시한다는 상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보시했다는 것에 저절로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이때 무주상 보시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진리를 설한 것이며,

무주상보시를 하였다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보시를 계속 행해야 하지, 무주상 보시만을 강조해서 무주상보시가 되지 않으면 보시의 공덕이 없다는 생각을 일으키거나,

보시하고 자랑하는 사람을 막는 행위는 바로 무주상보시란 말 자체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법집(法執)이라 합니다. 그래서 이 법집을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시자체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즉 진리 자체를 포기하라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근본불교를 주장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집착한

나머지 대승불교를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법집(法執)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냥 근본불교를 실천하고 행하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대승불교에 집착하고 근본불교를 소승이라 몰아세우는 것도

법집(法執)에 해당합니다.

그냥 대승불교를 실천하고 행하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화엄의 도리입니다.

 

 

 

[예2]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잡아함경 228. 포말경(泡沫經)에

“~일체 물질 무더기는 사납게 흐르는 물살에서 생긴 물방울처럼 덧없고

실체가 없고, 일체느낌 무더기는 사납게 흐르는 물 위의 물거품처럼 덧없고 실체가 없으며, 일체의 생각무더기는 늦봄과 초여름 한낮의 아지랑이처럼 덧없고 실체가 없고, 일체 지음의 무더기는 속심이 없는 파초무더기처럼 덧없고 실체가 없고, 일체식 무더기는 마술쟁이가 부리는 마술처럼 실체가 없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금강경의 다음구절과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과 유사합니다.

즉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 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도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해야한다”라고 설명한 것과 유사합니다.

 

 

[예3]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 以生其心)

금강경 사구게 중에

‘應無所住 以生其心(응무소주 이생기심)’라는 게송이 있습니다.

직역하면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생각을 내라”고 되어 있으며

“어떠한 생각도 집착을 하지마라.”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을 일으키더라도 그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 됩니다. 또 이것은 이미 지나간 생각에 매이지 말고, 현재 생각

순간순간 알아차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상응부경(잡아함경), 아란냐경(Aranna Sutta, 숲속의 경)

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 지나간 과거를 슬퍼하지 않고

오지 않은 미래를 열망하지 않고

현재에 충실하기 때문에 얼굴빛은 그렇게 평온하다네.”

<상윳따니까야1, 데와따 상윳따, 아란냐경(Aranna Sutta, 숲속의 경)>

 

 

이 경전도 바로 지나간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다가올 미래를 미리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금강경의 ‘應無所住 以生其心(응무소주 이생기심)’란 게송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예4]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금강경의 사구게 중에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 행사도 불능견여래)’가 있습니다.

“만약 색으로 나를 보려하거나, 소리로서 나를 구하려 한다면

그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하는 사람으로 결코 여래를 볼 수 없다.”라는

뜻입니다.

이 게송도 다음과 같이 초기경전인 니까야에 뜻이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본다.”

왁깔리라는 비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거나 수행을 하는 것보다 부처님의 거룩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부처님은 이러한 왁깔리를 깨우쳐주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왁깔리여, 그만 하여라. 그대가 이 썩어문드러질 이 몸을 봐서 무엇을 하겠는가? 왁깔리여,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왁깔리여, 법을 볼 때 나를 보고 나를 볼 때 법을 보기 때문이다.

                                                            (왁깔리 경(S22:87) §8/ 각묵스님 강의 참조)

 

 

그리고는 오온의 무상, 고, 무아의 삼법인을 설하시고 염오, 이욕, 해탈, 해탈지를 설하셨습니다.

 

 

 

 

[예5] 금강경 제13품

또 이 경전과 뜻이 통하는 금강경 제 13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느냐?”

“붓다시여,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삼십이상은 곧 삼십이상이 아니고,

이름이 삼십이상일 뿐입니다.”(금강경 제13품)

 

 

◇ 이와 같이 초기경전의 주요 내용들이 대승경전에 그 핵심은 다 전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법인, 12연기, 윤회, 중도의 가르침 등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초기경전은 물론 대승경전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원리가 빠진 경이 있다면 그것은 불경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부처님의 사상과 가르침이 그대로 녹아있는 대승경전은 그대로 불경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현재 불교학자들의 다수 의견입니다.

 

 

 

 

◇ 법구경에 이르기를

 

“모든 악을 짓지 않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해,

스스로 그 듯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의 가르침이다.”

諸惡莫作 諸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그렇습니다.

비록 대승불교 경전이 후대에 만들어 졌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자비사상이 녹아져 있고, 더구나

삼법인, 12연기, 윤회, 중도의 가르침 등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녹아져 있다면, 또 위 법구경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모든 악을 짓지 않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해,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의 가르침이다.”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경전(근본경전) 만이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법에 집착하고 법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어리석은 자요, 불교교단의 분열을 획책하는 자요,

누에고치가 자신의 틀 속 에 박혀 나오지 않듯 자신의 주장에

광신하는 자입니다.

 

 

(7) 불성(佛性)이라는 것은 그것을 진리자체를 말한다.

 

◇ 근본불교만이 유일한 불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승불교와 기독교의 교리가 유사하다고 주장합니다만 그것은 크게 잘 못 생각한 것입니다.

 

 

불성(佛性)이라는 것은 그것을 진리자체를 말합니다.

그런데 진리는 영원하여 변함이 없습니다.

를 들면 불교에서 무상(無常)이라고 할 때 유위법으로 만들어진 어떠한 것도

영원한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때 이것은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변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불성은 공성(空性)을 뜻하며 그것은 무아(無我)요,

평등이요, 중도를 뜻하며 그 내용은 자비(慈悲)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과법칙이 적용됩니다.

단순하게 있다(有) 없다(無)를 떠난 인연에 의하여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 자체가 바로 공성(空性)입니다.

 

 

그래서 대승불교는 창조주로서의 신을 믿지 않습니다.

대승불교에 수많이 등장하는 신들은 모두 불성을 지니며, 공성이요, 무아요 자비의 화신으로 인과의 법칙에 따라 스스로 닦아 그 지위에 오른 자입니다.

결코 하늘의 계시에 의해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 창조된 것이 없습니다.

 

80화엄경을 다 읽어 보면 화엄경에 나오는 신의 개념은 기독교의 개념과 전혀 다릅니다.

지금까지 근본불교 학자들은 이점을 그 구분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 신의 개념 속에 근본불교는 물론 대승불교의 모든 가르침이 다 녹아 있습니다.

 

그래서 근본불교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화엄경 공부를 깊이 하여 그 이치를 잘 터득하면, 그동안 대승불교에 무지하였던 점을 석고대죄를 자청하고 결코 불교 원조 운운하는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기독교인들이 불교의 핵심인 무아(無我)나 평등성 중도의 이치를 체득하지 못하고 글자하나 문맥하나 붙들고 늘어지는 것과 같이 대승불교의 진수를 체득하지 못하고 잘 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일부 근본불교 학자들이 하루 빨리 부처님의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대승불교와 불교전체를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 그러나 기독교인이 주장하는 하느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는 창조론이며, 인과법칙도 무아도 공성과도 거리가 멉니다. 또 윤회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이 있을 뿐입니다. 이점을 유념하셔서 스스로 대승불교가 기독교와 같다는 우스꽝스러운 말을 하는 것은 부처님의 제자로서

실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대승경전 공부를

평생 해 보아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할 용기가 없으면 이제 대승비불설이라는 시비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에는 시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있다면 중생들의 생각의 차이가 있을 뿐!!

 

 

 

(8)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분열이 아니라 화합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걱정하신 것이 바로 교단의 분열이요, 불협화음인 것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율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바닷다에게

“데바닷다여~교단에는 계율과 규칙은 본질적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화합을 중시한 부처님에 반발하여 원리주자 데바닷다가 교단을 떠났던 것입니다.

이제 근본불교만 옳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마치 부처님 당시 원리주의 자 데바닷다와 너무 흡사합니다. 또 기독교인이 그들만이 유일한 신을 주 장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또한 대승불교가 더 훌륭하다고 보는 사람들도 이젠 정신 차리고

근본불교 경전을 많이 공부하셔야 합니다.

이 시대에 가장 적합한 전법의 지침이 나와 있는 근본 경전을

귀하게 여기고 생활법문에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9) 우리나라 불교는 통불교입니다.

 

근본불교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학자나 사람들은

원효스님의 화쟁사상과 태우보우 스님의 통불사상을 통찰하시고

자신이 가진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부처님의 길이요,

대중의 스승이 될 수 있는 길임을 깊이깊이 통찰하시고

이시대의 데바닷다가 되지 않으시길 진심으로 기원 드립니다.

 

 

근본 불교 만이, 대승 불교 만이 바른 불교라는 주장도

‘하나의 생각에 불과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법집(法執)이라 합니다.

대승불교경전도 훌륭한 경전이고

근본불교경전도 훌륭한 경전입니다.

 

이제는 대승불교와 근본불교가 모두 힘을 합하여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바른 진리를 전해주도록 노력합시다.

저 집단적 광기를 번득이는 유일신을 믿는 자들에게

부처님의 바른 진리로 교화하도록 합시다.

 

이제 더 이상 교단의 분열을 조장하는 일체의 행위를 삼가도록 합시다.

 

 

 

6. 진리는 억지로 주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최근에 어떤 이가 기독교를 믿다가 불교로 개종한 사람이 있는데, “왜 기독교를 믿지 않게 되었는가요?”라고 했더니 “목회자들이 교회 가서 설교할 때나 들을 때 하고 실제 바깥에서 나와서 행동하는 것이 너무 달라요. 위선자들이 가득해서요. 목사들이 교회 돈을 자신들의 가족을 위해 함부로 펑펑 써버려요. 가난한 사람은 무시하고요.”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위 이야기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문제로 삼은 것이 아니라 목회자들이 종교 따로 실제 행동 따로 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 위와 같이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바와 현실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을 일으키고 종교를 바꾸는 일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위 사례에서 목회자들이 종교생활이나 일상생활이나 다 같이 착한 일 하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였다면 그 사람은 종교를 바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 이기심이 가득한 세상 기독교가 치성한다.

 

불교적인 입장에서 “종교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반드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욕심을 버려 마음을 고요히 하여 자신의 고통을 해소하여 마음의 안정과 행복을 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의 욕심을 버리지 않고 또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위하는 것 보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모두 성취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기독교가 극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하느님만 믿으면 모든 것을 다 해결해준다는 맹목적 믿음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고 살다가 위 두 번째 사례처럼 또 원하는 것을 충족할 수 없으면

“음, 하느님 믿어도 소용없네.”라고 또 불교 쪽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때가 중요합니다.

 

 

“종교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반드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욕심을 버려 마음을 고요히 하여 자신의 고통을 해소하여 마음의 안정과 행복을 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게 해주면 이제는 종교를 바꾸려 하지 않게 됩니다.

이와 동시에 항상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욕심을 비우고 사회를 위해 적극적으로 봉사하는 모습을 보이면 저절로 불자들이 신심이 나서 불교를 배우고 믿고 또 실천을 잘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내가 깨달아 변화하여 합니다. 그리고 실천을 해야 합니다. 나도 살리고 남도 살려 오순도순 잘 사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바로 불교를 잘 실천하는 것입니다.

 

 

 

7. 이제 대승비불설 (짝퉁논쟁) 논란 그만합시다.

 

 

이미 100년 전에 대승비불설이 시작되어 이제 그 시비가 끝났습니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 일부 근본불교를 주장하는 자들이 다시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 취지가 순수한 것이라면 점잖게 한 마디 합니다.

 

‘부처님의 중도사상에 근간을 둔 근본불교나 대승불교 모두 훌륭한 불교다.’라고 인정하면 변견(邊見)에 물들지 않은 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정법이란 이름으로 대승불교를 무너뜨리고 우리나라에서 자신들의 주도권을 쥐어보려는 생각이라면 그것은 확실한 변견(邊見)에 깊이 물든 자요, 이 시대에 갈등을 조장하는 자요, 또 기독교도와 다름없는 흑백논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활동을 극대화할수록 불교의 내분을 보고 기독교인들이 크게 손뼉을 치고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스스로 자신의 일에 충실하여야 합니다

.

문자하나 하나 자구 하나하나에 얽매어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담마(진리)를 실천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대승이다 아니다. 소승이다 아니다. 근본불교다 아니다. 내가 진짜 불교를 한다. 아니다. 내가 원불교다. 아니다. 내가 옳다 그러다.” 라는 시비를 하는 시간에 열심히 수행정진하고 또 한편 중생을 제도하는 일에 매진합시다.

 

 

8. “깨우침 없이 입으로 말만 하는 자는 미친 자이니라.”

 

부처님은 위없는 깨달음을 여신 후에 49년간 중생의 근기에 따라 방편설법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들은 먼저 깨우치기 위해 수행정진 하는 것이 순서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종의 조사인 현수(賢首)스님은

“마음에 깨우침이 없이 (머리로 알음알이로 알고) 입으로 말하는 것은 곧 미친 사람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대승비불설(大勝非佛說)]이라고 하는 사람들 !

이제 어리석은 주장을 그만들 하시고,

깨닫지 못하고 말하면 미친 짓이라는 현수(賢首)스님말씀을 되새겨 봅시다.

 

그리고 ‘근본불교다 대승불교다.’라는 일체의 시비 없이 오로지 수행과 동시에 중생제도에 여념이 없으신 [법륜스님] 같이 훌륭한 전법 자가 이 땅에 많이 있습니다.

 

 

지구전체로 볼 때 기독교가 쇠퇴해지고 있습니다. 서구는 물론 중국에서도 불교가 다시 흥기하니 우리나라만 보고 섣부른 판단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제는 불교를 스스로 망해간다고 입버릇처럼 하는 태도는 이제 그만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구업을 짓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대승비불설(大勝非佛說) 시비는 접어 두시고 오직

수행과 동시에 중생을 제도하는 일에 모범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대승경전도 좀 깊이 연구해 보시길 간곡하게 권해 드립니다.

 

 

끝으로 위 글은 성철(性徹)큰스님 [백일법문 상하권]/ 시즈타니마사오 및 스구로 신죠(문을식 옮김)가 지은 [대승불교]/ 맛지마니까야에 있는 알라갓두빠마경(Alagaddūpama Sutta, 뱀에 대한 비유의 경/ 전재성 역)/왁깔리 경, 각묵스님 강의 등 및 기타 대승경전, 근본경전을 참조하였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살기 좋은 세상, 정토를 꿈꾸는 사람들의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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