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법(觀心法)? 관심법(關心法)!

2012. 1. 28. 11:2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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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법(觀心法)? 관심법(關心法)!



옛날에 한 연못이 있었습니다.
그 연못에는 황금색 비늘을 가진 물고기가 살고 있었습니다.
다른 물고기들은 그를 부러워했지만 접근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늘 혼자였습니다.
황금물고기는 친구가 하나도 없어 슬펐습니다.

그즈음, 다른 연못에서 이사 온 물고기가
그의 아름다움에 반해 말을 걸어 왔습니다.
외로워하던 황금물고기는 그를 반갑게 맞았고,
둘은 곧 친구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사 온 물고기가 황금 물고기에게 부탁했습니다.
"친구야, 너의 아름다운 비늘을 하나만 내게 주렴.
그것을 간직하고 싶어."
그러자 황금물고기는 선뜻 자신의 황금 비늘 하나를 내주었고,
좋아하는 친구를 보면서 그도 기뻤습니다.

그것을 본 연못의 다른 물고기들은 너도나도
황금물고기에게 몰려와 비늘 하나만 달라고 졸랐습니다.
마침내 비늘을 다 주고 난 황금 물고기는
보통 물고기처럼 변했지만 주위에 많은 친구들이 생겨
더 이상 외롭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아침, 연못을 지나던 사람은 연못 전체가
무지개 빛으로 반짝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연못 속 물고기들이 하나씩 지니고 있는 황금비늘이
저마다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후 많은 사람들이 그 연못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보통물고기로 변한 황금 물고기가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가진 비늘의 아름다움에 취해 뽐내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마침내 황금물고기는 죽고 말았습니다.
연못의 물고기들도 하나둘 황금물고기와 같이 앓다가 죽어갔습니다.
어느 날 연못을 찾은 사람들은 자신을 코를 막고 돌아갔습니다.
그 연못은 더 이상 무지개연못이 아니었습니다.
죽은 물고기로 가득한 썩은 연못이었습니다.

법우님들은 어떤 물고기입니까.
마지막 비늘까지 나누어주던 물고기입니까.
마지막 비늘까지 얻고자 하는 물고기입니까.
우리들은 무언가를 나누어주기보다는
무엇인가를 얻고자 합니다.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타인이 관심을 가져주기를 더 원합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가미니, 내가 너에게 물을 테니 아는 대로 대답하여라.
어떤 사람이 게을러서 정진하지 않고,
게다가 산 목숨을 죽이며, 주지 않는 것을 가지고,
사음을 행하며, 거짓말을 하고, 그릇된 소견을 가지는 등
온갖 나쁜 업을 지으면서 살았다고 하자.
그가 죽을 때 많은 사람들이 와서
'당신은 게을러 정진하지 않고 그러면서 악업만을 행했습니다.
당신은 그 인연으로 목숨이 다한 뒤에는
반드시 천상에 태어나십시오' 라고 했다 하자.

가미니여,
이렇게 여러 사람이 축원했다고 해서
그가 천상에 태어날 수 있겠느냐"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 게으른 그가, 더구나 온갖 나쁜 업을 지은 그가
축원을 받는다고 해서 천상에 태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비유를 들면, 저쪽에 깊은 못이 하나 있는데
어떤 사람이 거기에 크고 무거운 돌을 던져 넣었다.
마을 사람들이 못가에 모여서'돌아, 떠올라라' 하고 축원을 하였다.
그 크고 무거운 돌이 축원을 했다고 해서
그들의 소원대로 떠오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중아함 가미니경>
포살(布薩)과 자자(自恣)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죄가 있으면
고백 참회하는 불교의식입니다.
이러한 의식도 타인과 자신에 대한
관심과 관찰이 있을 때에 반성과 참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난 한달 사이 세명의 어린 생명이 사라졌습니다.
물론 그 원인은 각기 달랐지만,
그들은 자신에 대한 관심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지금 법우님의 주위를 한번 둘러보세요.
아름다운 연못, 황금연못.
그곳이 정토가 아닐까요.
< 동 화 > 

 

관심(觀心)과 관심(關心)

“내게 관심을 가져 주십시오.”
“그렇게 관심이 없을 수가 있습니까?”
“그건 좋은 관심사인데!”
“그는 이 일에 관심이 깊다.”
관심이란 말은 이렇게 “마음을 둔다.” “생각을 간직하고 대한다.”등으로 사용된다. 이럴 경우 관심은 한자로 빗장관(關)자관심(關心)을 말한다. 반면 관심에는 볼 관(觀)자를 사용한 관심(觀心)이 있다. 문자 그대로 “마음을 관찰하여 본다.”를 관심(關心)이라고 한다.
빗장관자 관심은 우리들이 생활해 가면서 밥을 먹고, 잠자는 일만큼 있다가 없어지고 없었다가 생겨난다. 생활한다는 자체가 관심있는 것을 행하는 동작의 연속이라고 할 정도로 우리는 관심에 따라 산다. 관심이 있는 일을 하고 하루하루를 지내며 보람 있는 생활을 한다고 흡족해 하고, 관심도 없는 일에 정신력과 육체적 힘을 쏟으면서 살아갈 때 우리는 불평한다.
직장인들은 자기의 관심과 부합되는 부서에서 일을 하면 능률이 오른다. 반면 무관심한 부서에 발령을 받아 근무하면 능률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현명한 경영자는 인재를 그 인재가 관심을 두는 자리에 배치하여 본인과 기업의 능률을 동시에 올린다.
그 많은 관심사들 중에서 우리는 꼭 관심을 두어야 할 것에 관심을 두지 못하고 지낸다. 그것은 다름 아닌 관심(關心)하는 일이다. 남의 일에는 관심을 두면서 내 마음에 관해서는 관심(觀心)을 게을리 한다.
“지금 나의 마음은 어느 상태에 있는가?”
“나를 주관하고 나를 오늘의 나로 만들어 온 나의 마음은 도대체 어떤 마음이었으면 앞으로 어떻게 내 앞에 나타날 것인가?”
“도대체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마음아! 너는 과연 나의 주인 노릇을 할 자격이 있는 마음인가?”
등이 관심(關心)을 해 볼 기회를 게을리 한다.
관심(觀心)을 관심(關心)과 달라서 매우 힘든 작업이다. 마음이란 것 그 자체의 규명도 어렵거니와 마음을 마음이라고 보는 그 마음도 역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달마조사(達磨祖師)는 그의 저서『혈맥론(血脈論)』에서 말한다.

심심심난가심(心心心難可心)
관시편법계 작시불용침(寬時遍法界 窄時不容針)
아본구심불구불 요지삼계공무물(我本求心不求佛 了知三界空無物)
약욕구불단구심 단추심심심시불(若欲求佛但求心 但追心心心是佛)

마음을 마음이라고 보는 그 마음이 찾기 어렵다.
마음은 넓어질 경우 전 우주를 뒤덮고
좁아질 경우엔 바늘구멍 하나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다.
나는 마음을 찾을 뿐 결코 부처되기를 찾는 것이 아니다.
우주란 텅 비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알아라.
부처가 되기를 원하는가? 마음을 다만 구하라
마음을 마음이라고 하는 이 마음이 곧 부처다.

중국 선종(禪宗)의 제 2조인 혜가(惠可) 스님이 달마조사에게 관심(觀心)하는 법을 물은 적이 있다. 그에 대한 달마조사의 대답은 명료했다.
“마음을 본다는 일, 즉 관심(觀心)하는 것은 모든 것의 전부이고, 모든 행위 모든 변화의 근본이다. 모든 것은 마음으로부터 생긴다. 마음을 알면 만행(萬行)을 다한 것이다.” “〔觀心一法總攝諸行, 心萬法之本, 一切諸法, 唯心所生, 若能了心, 萬行具備〕”
이 말대로라면 관심을 할 수 있으며 부처님과 만날 수 있고 부처가 될 수 있다.

 

 관심(觀心)과 관심(關心)

관심(關心)과 무관심(無關心)이란 말은 살아가면서 숱하게 들어온 말이면서 숱하게 뱉은 말이기도 하다. 가정과 직장, 사회생활을 하면서 관심의 중요성에 대한 말을 하면서도 나 자신은 사람이든 사물이든 어떤 대상에 대해 무관심하였으니 이율배반이라고 할 수 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잔정이 없다'느니 '무관심하다'느니 하는 말을 종종 들어왔지만 내 아집과 잘못된 사고방식으로 잘 고쳐지지 않았다.
몇 년 전 '태조 왕건'이란 연속극에서 '궁예'가 '관심법(觀心法)'이란 말을 사용하여 상대방을 주눅들게 하는 장면을 보고 속으로 웃은 적이 있었다. 웃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궁예'가 말하는 상황을 떠올려 보면 '관심법'이란 말의 사용이 일리가 있어 보이고 음미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관심(觀心)이란 한자어의 뜻을 떠올려 보면 '마음을 본다'에서 나온 말 같다. 나의 마음을 본다고도 할 수 있고, 남의 마음을 볼 수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관심이란 말은 나의 마음을 통하여 어떤 대상에 대해 갖는 나의 마음 작용으로 볼 수 있다. 나의 마음 작용에 의해 상대방의 마음을 본다고 해도 될 것 같아 '궁예'가 사용한‘관심법'도 크게 어긋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어냐는 물음에 '무관심'이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무관심이 그렇게 무서운 것인지 실감이 나지 않지만 무관심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식물이나 동물에게 관심(關心)을 보이는 경우와 보이지 않는 경우는 큰 차이가 있다고 하며, 관심의 유무에 따라 반응이나 성장속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바위나 나무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정성을 다하였더니 소원하는 바가 이루어졌다는 말도 들었다. 그런 대상에 대해 정성을 다하는 것은 관심(關心)이나 관심(觀心)의 또 다른 표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바위나 나무 자체가 그 어찌 인간에게 물질적이거나 정신적인 소원을 들어줄 것인가. 어떤 대상에 대해 자신의 마음을 일심으로 원(願)을 하다보면 자신의 마음이 부지불식간에 안정되고 깨끗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 결과, 분석력이나 판단력, 결단력 같은 정신작용이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소망하는 일들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아마 맞을 것 같다.
앞으로는 어떤 대상이라도 관심(關心)을 가져주는 다정다감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최소한 무관심한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내 마음을 바르게 관심(觀心)하고 튼실하게 해야 할 것 같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관심(關心)이야말로 '사랑'의 시작이면서 끝이라는 사실을 깊이 새겨야 할 것 같다.
(경남일보 '경일춘추' 졸작) -작가 류준열-

 

관심(關心)과 관심법(觀心法)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 것이 곧 인연이다.
더러는 우연도 있고 필연도 있지만 모두가 소중한 것들이다.

관심(關心)이란 것은 어떤 것에 마음이 끌려 생각이 머무는 것을 말한다.
관심이 있는 것들이 나와 연결되어지면 그 때는 서로 관련 있는 상관관계가 된다.
그런 관계 속에서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계속해서 관심을 갖고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관심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감각을 최대한 사용해야한다.
감각은 흔히들 오감이라고 말한다.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며 느끼는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오감에 의존하면서 퇴화되어 버린 육감도 함께 사용해야 한다.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와 같은 것이라 할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얼마나 많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가족과 친구, 직장과 일, 그리고 취미 생활...
수없이 많은 관계를 형성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관계, 그런 인연을 계속 유지하려면 지속적인 관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여야 한다.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 정비공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글이다.

정말 멋진 말이다.
살아가면서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을 만나지 못할 것 같다.
마음이 때 묻지 않도록 늘 닦아주며 느슨해지는 마음을 조이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생각들과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굳은 마음위에
기름을 치는 일이야 말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르겠다.

또 하나
예전 TV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궁예가 들먹였던 관심법(觀心法)이 생각난다.
궁예는 세력이 확장되면서 차츰 독선적 전제주의로 변해 가게 되고
주변의 사람들을 믿지 못하게 되니 관심법을 활용한다.
자신이 미륵불이므로 모든 사람들의 내면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은 실상이야 어떠하든지
자신이 느끼고 생각한대로 풀어가니
결국엔 신하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게 되고 민심이 떠나게 되고
주변엔 아무도 없는 고립무원의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어쩌면 궁예의 관심법이란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타심통(他心通)이 아닐까 싶다.
타심통이란 말 그대로 상대방의 생각을 알아 낼 수 있는 능력이다.

하지만 관심법(觀心法)이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자신의 성격이나 생각, 감정 등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마음수양법이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밝고 맑은  거울처럼 다듬으면
다른 사람의 마음도 비추어 볼 수 있게 되니
다른 사람의 잘못된 생각이나 판단을 알 수 있게 되고
이를 통하여 바른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는 게 바로 관심법이다.

일과 사람에 있어서도 그렇다.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 원인을 다른 것에서 찾으려 한다.
누구라도 어린 날에 형제들 혹은 친구들과 싸워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왜 싸웠냐?’고 어른들이 물으면 대부분 하는 말.
나는 가만있었는데 저 애가 먼저....
나 역시 그랬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께서 하시던 말씀은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하셨다.
조금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너도 똑같으니까 싸웠다는 말씀이셨다.

좋은 가정, 좋은 직장은
늘 칭찬과 격려가 앞서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채워준다.
구성원 모두가 각각의 존재 가치를 인정해주고 사랑하게끔 한다.
모두가 정해진 일은 있지만 애써 구별하진 않는다.
순간순간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누구나 먼저 시작하는 것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의 형편과 처지를 돌아보는 것이다.
내가 싫고 힘들다면
누군가 그 일을 해야 하는 사람도 똑같이 싫고 힘들 것이라는 것이다.

가정은 하루를 시작하고 마치는 곳이다.
늘 기분좋은 웃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돌아오면 언제나 편안하고 행복한 느낌이 들어야 한다.
직장은 일을 하는 곳이다.
일은 무엇을 하든지 힘이 들게 마련이다.
하지만 기왕에 해야 하는 일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이 좋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 중에 한사람은 늘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이건 취미 생활이라고...”
좋아서 하는 게 취미생활이다.
얼마나 멋진 생각인가?
일을 함에 있어서 그런 마음이라면 늘 새로운 힘을 낼 수 있을 것이다.
더 많은 관심과 애착을 갖고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가?
몸이 힘든 건 참을 수 있어도 마음이 힘든 건 참을 수 없다는데
우리는 스스로 그렇게 힘들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겠다.

관심은 상대를 통하여 나를 다듬어 가는 것이며
관심법은 나를 다듬어 상대를 발견하는 것이다.

 

관심(觀心)....마음의 본성(本性)을 살핌

 

관심(關心)....어떤 일이나 대상(對象)에 흥미(興味)를 가지고 마음을 쓰거나 알고 싶어하는 상태(狀態)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위의 두가지 관심이 다 필요합니다.

 

상대방을 관심(觀心)있게 관찰하여야 하고,

상대방으로부터 관심(關心)을 받을 수 있는 생활태도가 필요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