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3. 23:44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무아윤회(無我輪廻)와 일념윤회(一念輪廻)
사람의 모든 행위는 몸이나 입으로 지은 육체적인 것이든 생각으로 지은 정신적인 것이든 어떤 원인이 되어서 과보를 만든다는 것, 선인(善因)은 선과(善果)를 맺고 악인(惡因)은 악 과(惡果)를 맺는다는 것 등이 윤회사상의 기본이다.
여기에는 업, 인과, 윤회가 한 뭉치로 얽혀 있다. 사람은 개인이나 단체로 업을 짓게 되는데 금생에 업을 짓고 금생에 바로 그 과보를 받거나 한 생에 짓고 금생에 바로 그 과보를 받거나 한 생에 짓고 다음 생에 받거나, 또 는 한 생에 짓고 정해지지 않은 어떤 내생에 받는다는 것이다.
윤회설은 부처님이 지어낸 것이 아니다. 당시 인도에 유행하던 힌두교의 설을 부처님께서 채용해 쓴 것일 뿐이다. 그런데 윤회설의 형태는 힌두교의 것과 유사하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르다.
힌두교의 것은 유아윤회(有我輪廻)인데 반해서 불교의 것은 무아윤회(無我輪廻)이기 때문이다. 힌두교에서는 변하지 않는 고정적인 것이 주체를 이루어서 윤회하지만 불교에서는 그 고정적인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무아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어떻게 무아윤회가 가능한가. 부처님은 촛불의 예를 든다. 촛불이 밤새도록 꺼지지 않고 타거나, 한 초에서 다른 초로 불이 옮겨 붙었을 때, 어떤 고정적인 불의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연료가 있으면 촛불이 유지되고 연료가 다 떨어지면 촛불도 꺼진다.
또 한 초에서 다른 초로 촛불이 옮겨졌다고 하더라도, 동일한 촛불의 주체가 이동된 것은 아니다. 연료만 떨어지면 언제든지 그 촛불은 없어지게 되고, 불이 없어진 다음에라도 다시 불을 켜서 초에 붙이면 촛불이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나라고 하는 영원한 주체가 없이 오직 업의 불길에 따라서 윤회 하게 된다는 것이다. 불교의 무아윤회를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일념윤회(一念輪廻)라 고도 할 수 있다.
불교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입장에서 만물을 파악하듯 이 윤회도 심리적인 면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원시불교의 기본 교리 가운데 하나인 12인연을 보자. 12인연은 윤회의 과정을 12단계로 나누어서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다. 무명 즉 미혹으로부터 행이라는 업이 일어나고, 이 업에서 인식이 생긴다.
이 인식으로부터 행이라는 업이 일어나고, 이 업에서 인식이 생긴다. 이 인식으로부터 정신과 육체가 생기고 마침내 생로병사우비고뇌의 고통을 받게 된다.
문제의 근원지는 바로 미혹으로 업을 짓는 마음일 뿐이다. 마음이 사람을 윤회하게 만든다. 윤회의 결과는 고통뿐이다.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윤회로부터 해탈하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무엇이 고통인가.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다.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이거나 또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이거나 인간의 모든 공통은 이 노병사(老病死)와 관계가 있다.
젊음을 누리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도, 더 늙기 전에 돈, 명예, 권력, 사랑 등을 잡으려고 하는 것도,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면서 무료함과 권태를 느끼는 것도 모두 늙음과 병듦과 죽음을 초조하게 의식하기 때문이다.
본인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윤회는 무의미한 반복을 만든다. 자신이 금생에 또는 다겁생래에 익혀왔던 업을 되풀이한다. 불나비가 억천만 번이나 불 속으로 뛰어들어 죽었던 일을 금생에도 또 반복하려고 한다.
자신의 과거만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것도 모방해서 반복하려고 한다. 남의 출세를 보고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 한다. 남이 장에 가니 나도 장에 가야겠다고 한다.
남이 차를 몰고 나와 거리를 주차장으로 만들 때 나도 그 대열에서 빠질 수 없다 고 한다. 남이 누리는 돈을 내가 못 누릴 이유가 무엇이냐고 대든다. 영화나 소설에서 보았던 온갖 멋있어 보이는 것은 다 맛보려고 한다.
남을 모방하는 일이 좋게 보이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고, 다시 근본적인 고통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남이 늙듯이 나도 늙고, 남이 늙음에 대해 서 저항하듯이 나도 저항하면서 죽어가게 된다.
금생에 자신을 반복하고 남을 모방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면, 이 반복은 세세생생 계속 이어지게 된다. 윤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윤회를 보고 그것을 무의미한 고통으로 깨달아야 한다.
진짜 고통은 실연하거나 매를 맞거나 수술을 받거나, 사업에 실패하는 것 등이 아니라, 노병사의 압박 속에 무의미한 반복을 계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참다운 생명, 우주의 법신을 모르는 일을 가장 큰 고통으로 아파해야 한다.
반복으로 이루어진 삶의 실상을 여실히 보게 되면, 자신을 포함한 모든 중생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생긴다. 자신의 미혹과 업과 윤회를 보는 것이 지혜이다. 무명이 지혜로 바뀔 때, 업은 수행으로 바뀐다.
바로 12인연의 역관(逆觀)이 벌어지는 것이다. "어리석음이 멸하면 업이 멸하고, 업이 멸하면 분별심이 멸하고... 결국 생로병사우비고뇌가 멸한다." 윤회 실상의 관찰에서 자리이타(自利利他)하려는 보살심이 생긴다.
누가 부처님에게 다짜고짜 "윤회가 있는지 없는지 '예스, 노'로 분명히 대답해 주세요."라고 여쭈었다고 치자. 부처님은 아마도 전유경(箭喩經)에서 썼던 침묵을 여기서도 되풀이 할 것 이다.
만동자는 부처님께 이런 물음을 사뢴다. "세상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끝이 있는가, 없는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마는가? 정신과 육체는 하나인가, 둘인가?" 부처님의 대답은 침묵이었다. 대신 화실 맞은 사람의 비유를 들어 주셨다.
화살을 맞은 사람이 먼저 화살을 뽑고 독을 제거할 생각은 아니하고, 쏜 사람, 화살이 날아온 방향, 화살의 재질 등에 대해서 먼저 조사해야겠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조사가 끝나기 전에 죽게 될 것이라는 말이 다.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대해서 답하기를 거부하신 부처님은, 윤회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대답 하지 않으실 것이다. 부처님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말씀한 윤회는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의미의 윤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무아윤회와 일념 윤회로 공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 미혹한 마음으로 고통을 일으킨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현재의 우리에게 실체적인 내가 있다는 전제를 깔고 윤회가 실제로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만약 부처님께서 우리의 물음에 대답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물질 제일주의를 인정하는 셈이 될 것이다.
중국의 천태 대사는 부처님의 일념윤회를 아주 기묘하게 풀이했다. 윤회의 단계들이 서로 상대의 것을 자신에게 품고 있는 호구설(互具說)이다.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성문, 연각, 보살, 부처까지 십계(十界)가 있는데, 사람이 한 마음을 먹는 순간 그 마음은 10 계의 하나에 빠질 수밖에 없고, 그 한 단계는 다시 다른 10계를 자신 속에 포함한다는 것이다.
일념 속에 윤회의 단계인 10계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일념 속에서 지옥으로 부터 부처까지 한꺼번에 윤회한다는 것이다. 일념윤회를 응용해서 천태대사는 일념삼천관법(一念三千觀法)을 만들어 냈다.
서로 얽힌 상태에 있는 십계윤회와 모든 사물의 형상, 성품 몸체 등을 곱하기 하는 식으로 3천이라는 숫자를 만들기는 했지만, 그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사람이 한 생각에 많은 세계를 윤회 할 수 있으니, 그 실상을 여실하게 관찰해서 윤회로부터 벗어나라는 가르침을 살펴야 한다.
일념에 모든 세계를 윤회할 수 있다면 일념에 모든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 악업을 짓는 순간에는 부처의 자리에 있더라도 윤회하게 되고 수행의 순간에는 지옥에 있더라도 부처의 세계에 노닐게 된다.
무아와 일념의 상태에서 벌어지는 윤회를 있는 그대로 관찰할 때, 윤회는 그대로 열반이 된다. 생사와 열반의 불이(不二)를 얻기 위해서 저 윤회를 자세히 봄직 하지 않은가.
▲ 김지, 동자견려도 조선 16세기, 111.0 x 46.0cm 삼성미술관 리움
작년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었네 / 향엄지한(香嚴智閑?~898)
거년빈미시빈 去年貧未是貧 작년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었네.
금년빈시시빈 今年貧始是貧 금년의 가난이 진짜로 가난일세.
거년무탁추지지 去年無卓錐之地 작년에는 송곳 꽂을 땅이 없더니
금년추야무 今年錐也無 금년에는 송곳마저 없어져 버렸네.
가난 타령을 한 이시는 오도의 경지를 가난에 비유 읊은 시이다.
도를 닦는 공부는 비우고 비워 가는 공부라 한다.
노자의 <도덕경>에도 학문은 날로 더해 가는 것이요,
도는 날로 덜어 가는 것이란 말이 있다(爲學日益 爲道日損).
학문이란 욕망을 더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온갖 허위와 번뇌가 일어나는 반면,
도란 지식을 덜고 욕망을 없애며 마음을 비움으로써, 하는 것이 없는 경지,
곧 무위(無爲)에 이르는 것이라 하였다.
깨달음의 상태를 무의 상태 혹은 공의 상태로 표현해 온 것은 선가(禪家)의
일반적인 묘사였다. 마치 꿈에서 깨어나면 꿈속에 있었던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깨닫고 보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영가(永嘉)스님의 증도가에도, "꿈속에선 육취가 분명하더니 깨닫고 나니
공하고 공해져서 아무것도 없네(夢裏明明有六趣 覺後空空無大千)"라고 하였다.
아공(我空), 법공(法空)이라는 말도 이러한 연유로 생긴 것이다.
작년에 깨닫고 비로소 주객이 모두 없어진 것을 체험하였다. 다시 말해 무를
체험하고 공을 체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에 깨달았다는 희열감 내지
충만감이 꽉 차 있었는데, 금년에는 그것마저 사라져 버리더라는 말이다.
어떤가? 깨닫고 나서 깨달았다는 기쁨이 남아 있는 상태가 좋은 것인가?
그것마저 없어진 것이 좋은 것인가?
공부가 깊어지면 깨달았다는 것도 없어지는 것이다.
이 시의 작자는 향엄지한(香嚴智閑?~898)스님이다.
전등록에 나오는 이 시는 그의 오도송 격이다. 향엄은 당나라 때 스님으로,
처음 백장(百丈)문하로 출가했으나 후에 위산 영우(靈祐)스님에게 가서 공부를
하다가, 공부가 되지 않아 울면서 떠났다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산중에서 풀을 베다가 자갈을 집어 던졌는데 그 돌이 날아가
대밭의 대나무에 맞아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한다. 그때의 오도송이
별도로 전해진다. 돌이 대에 부딪치는 소리에 깨달은 순간을
"한번 부딪치는 소리 듣고 모든 것 다 잊었네(一擊忘所知)"라고 읊조렸던 것이다.
그는 위산의 법을 전해 받은 제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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