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마음의 실천 철학

2012. 3. 3. 13:0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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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마음의 실천 철학

 

'난사람'이 아닌 '된사람' 되기

인류의 가장 큰 스승중의  한 분이신 부처님은

무지무명에서 헤매는 인류 중생들에게 해탈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스스로를 '길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부처님은

인간이면 누구나 '부처 그 자체'임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그 스스로가 부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망과 어리석음의 불길로

인간은 지옥의 불길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것을 슬퍼하시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중생들을 구제하기위해서 8만4천의 무진설법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8만4천의 사자후도

자기 자신의 마음을 깨닫는 것에는 미치지 못함을 아신 부처님은

'자등명 법등명(스스로를 등불로 밝히고 스스로 진리의 등불로 밝혀라)'를

말씀하시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덧없는 것이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하는

최후의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정신은 우리나라에도 2천년이란 세월 속에

문화,사상,풍속,언어,동작 속에 녹아흐로고 있습니다.

우리는 '난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된사람이 되기 위해'노력해야합니다.

우리는 '난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된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난사람'은 많은 것 같은데 '된사람'은 찾기가 지극히 어렵습니다.

신령한 영산인 히말라야는 항상 우리의 정신 속에 살아잇어야만 합니다.

지구 위에 우뚝 솟은 가장 높은 산이 있는 까닭은 '뛰어난 정신적 된사람'을

우리들에게 넌지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세상과 정토는 다르지 않다고 한 많은 선각자들의 글귀가 새삼스럽습니다.

'부처님은 세간과 다르지 않나니

세간을 떠나서 부처님법을 구함은 마치 토끼에게서 뿔을 구함과 같다'고

한 내용과 같습니다.

경허스님의

'세상과 청산은 어느 것이 옳은가.

봄볕이 있는 곳에 꽃피지 않는 곳이 없구나.'는

정토와 에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고달픈 중생사회 자체가 극락정토요,처처가 법당이요,

처처에 부처님 아니계신 곳이 없다는 뜻을 일깨워주는 말입니다.

청산은 언제나 내마음 속에 있는 것이지,

청산 속에서 나를 찾지 못한다면 청산 속에 있은들 이미 나는 청산밖에 있는 것이 아닌가!

숲 속에서 숲을 보지 못하고 산 속에서 산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여!

그대 이름은 때묻은 인간들이니라.

정신적 눈뜸, 자각의 길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길임을 자각합시다.

깨달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부처님은 길에서 낳으시고,길을 찾으시고,길을 가르쳐주시고,길에서 열반하시었습니다.

길이란 고정되어있거나 결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길에서 무아와 공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청산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계율 잘 지키기로 유명한 한 노스님이 계셨습니다.

그 상좌중의 한 젊은이와 같이 비오는 날 길을 떠나게 되었다.

물이 고인 웅덩이 앞에서 한 처녀가 고운 옷을 입고 오도가도 못하고 서있었습니다. 

젊은 상좌승은

'옳다 됐다.내가 업어서 건네 주어야지'하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스님이 먼저 "처자 내가 업어서 건네주지"하고

덥석 처녀를 업어서 건네 주었습니다.

실망한 젊은 상좌승은 얼굴이 퉁퉁 부어서 한참을 가다가 노스님께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나보고는 계율을 잘 지키라고 엄명하면서

스님은 처녀를 등에 업어서 건네줍니까?"하였습니다.

이 젊은 상좌승의 마음 속을 꿰뚫고 있는 노스님은

"이놈! 네놈은 아직도 그 처녀를 업고 다니느냐?"하였습니다.

벼락같은 호령에 그 젊은 상좌승은 확철대오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아직도 벗어버리지 못하고

아직도 너무도 많은 것을 이고 지고 업고 다니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금강경>이나 <천수경>을 독송하고,발원문을 읽음도 다 이와 같은 공부입니다.

길고 어두운 겨울은 겨울이 아닙니다.

봄을 준비하는 성스런 에비의 준비 기간입니다.

삶의 의미를,삶의 가치를,삶의 환희를 음미하며 기다리는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어두운 회색의 상념을 가진자에게는 인생의 겨울은 길고 긴 것이며,

공허한 것이며, 무의미한 무상의 쓴 맛일 뿐입니다.

그러나 회색빛 희뿌연 적막속에서 아침의 밝음은 예비되어 있듯이

겨울의 갈색,회색빛 속에서 우리는 몸의 밝은 햇살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사람들은 봄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몸이 오기까지의 인고의 아름다움과 고통의 성스러움을 잊고 있습니다.

한 번 밝으면 한 번 어두운 것이 인생이고 자연의 섭리이거늘

어리석은 범부들의 생각은 영원한 봄만을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고정된 사유, 사고방식의 늪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아요,공이요,반야입니다.

'벚꽃 가지를 부러뜨려 봐도 벚꽃은 없네.

그러나 봄이 되어 햇살이 따스해지고

마음에 봄이 오면 메마른 가지에 벚꽃이 핀다네.' 인생의 봄은 결코 긴 것이 아니다.

인생의 봄을 기다림은 즐겁고 신나는 일입니다.

기다리는 행복과 기다리는 인고속에서

언젠가는 따스한 햇살이 내게도 비치리라는 염원을 갖고 기도합시다.

독경을 하며 불보살전에 절을 합시다.

나는 저 낙목한천의 왕자들처럼은 못하지만 그 흉내라도 냅시다.

흉내를 내다 보면 불보살의 얼굴을 닮아가고 그 정신을 닮아 갈 것입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꿈속의 일이로다.

북망산 아래

누가 너이고 누가 나이더냐.

(경허스님의 '시비를 말라'에서)

우리는 맑은 바람,기름진 흙,깨끗한 물,따스한 기후,적적한 공간,좋은 생각의 6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본성이 밝고 맑다는 부처님 말씀은 백 번 천 번 지당한 말씀입니다.

이 6대를 법계로 본다면 법계에는 법성이 있는데

이 법성을 일러 개개가 불성이 있습니다.

불성을 깨달아야 한다고 한 것으로부터

동체대비의 원만성품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고 억압할 수 없고

자유로운 저 흙과 물과 바람과 기후와 공간과 생각속에서

만유는 그 생과 멸의 인연의 꽃과 열매를 다양하게 맺고 있습니다.

연생연멸의 세계,  

그 위대함이여! 무주상의 보시요,지계요,인욕이요,정진이요,선정이요,

지혜의 세계이며 4무량의 세계입니다.

마음으로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

'세상은 마음으로 보는 것이지,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보면 천년이고 만년이고 가지만 눈으로 보면

그림자 사라지고 나면 마음밖에 남는 것 하나 없네.'

이 것은 주관의 상대성 세계에서의 중요한 인식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친구도,대상도,애인도 마음으로 보아야 제대로 보이지

우열로,차별로,이기적으로 보는 것은 이미 영원성이 결여된 것입니다. 

부처님 경전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소치는 사람이 채찍으로 소를 몰아 목장으로 돌아가듯,

늙음과 죽음도 또한 그러하네.

사람의 목숨을 끊임없이 몰고가네.

무엇을 웃고 무엇을 기뻐하랴!

세상은 끝이 없이 타고 있는데,

그대들은 어둠속에 덮여 있구나.

그런데도 어찌하여 등불을 찾지않는가!'

등불! 마음의 등불은 가꾸고 켜는 자의 것입니다.

기다리고 참고 무엇인가 끊임없이 찾는 자에게

마음의 등불은 켜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흔히 입춘대길이라고 글을 써주기도 하고 써붙여 두지만,

마음의 따스함,마음의 정겨움,마음의 부드러움,

마음의 여백,마음의 행복감,마음의 넓은 아량,마음의 정열 등이

봄을 만드는 봄의 전령이지 봄이 온다고 봄은  아닌 것입니다.

마음의 발고 맑은 봄이 진짜 봄 아니겠습니까?

좋은 경전을 읽고 108배라도 합시다.

긴긴 어둠을 몰아내고 밝고 맑은 마음의 햇살을

절과 기도와 참선과 법문을 통해 마음의 창을 활짝 열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상의 보람된 일을 찾아냅시다.

이웃을 돕고 외로운 이를 외롭지 않게

어려운 이들에게 마음의 빗장을 풀도록 도와줍시다.

마음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줍시다.

그러면 봄은 올 것입니다.행복이 올 것입니다.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놓아버립시다.행동으로 보입시다.

실천으로 옮깁시다.마음의 가난한 이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빈 마음을 부처님 마음으로 가득 채워 드립시다.

그 것이 우리가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마조스님이 좌선만 하고 있을 때,

그의 스승 회양은 그의 제자 곁에서 기왓장을 갈고 있었습니다.

화가 난 마조가 그의 스승 회양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기왓장을 갈아서 무엇을 할 것입니까?"

이에 스승은 대답하였습니다.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까 하네."

이에 마조가 빈정거리며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기왓장이 거울이 되겠습니까?"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스승 회양이 일갈하였습니다.

"기왓장이 겨울이 될 수 없듯이 좌선으로는 부처가 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제자의 질문에 스승은 대답하였습니다.

"소가 수레를 끌고 가는데 만약 수레가 앞으로 나아가지않는다면

그 때는 수레를 다그쳐야 하겠느냐,아니면 소를 다그쳐야 하겠느냐?"

스승은 다시 덧붙여 말했습니다.

"그대가 지금 좌선을 익히고 있는 것인지

좌불을 익히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 없군

혹시 좌선을 익히고 있는 중이라면 선이란 결코 앉아있는 것이 아니며

좌불을 익히고 있는 중이라면 부처는 원래 정해진 모양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게."

이 한마디에 마조는 마음 속에 불화살을 맞고 깨우친 것입니다.

若人欲了知(약인욕료지) 三世一切佛(삼세일체불)

應觀法界性(응관법계성)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

만일 사람이 과거,현재,미래, 삼계일체의 부처를 요달해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본성을 觀해서

일체의 모든 것이 오직 마음이 지었음을 알아야 한다.

 

만법귀일의 게송입니다.

나무사람 나무처럼 무량한 정을 주는 것은 이세상에서 찾기 드물다네.

6대로 이루어진 모습은 같아도 모양은 인간과 다르다네.

그런데도 인간은 그 나무의 그늘에서 쉬고 싶고,

꽃과 열매를 공짜로 얻는다네.

나무는 언제나 관세음보살처럼

천수천안으로 중생들을 굽어본다네.

나무는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맑은 산소를 발산해준다네.

사람이 도끼로 찍고,가지를 부러뜨려도

나무는 불평 한마디 안한다네.

나무는 언제나 위로는 밝은 태양을 향해 두손 모으고

아래로는 맑은 샘 찾아 끊임없는

생명의 산소를 무상으로 공급해준다네.

나무는 인간에게 말없이 말없이

언제나 6바라밀의 공덕을 가르쳐주고 있다네.

나무는 인간보고 나무사람 되어보라고 권하고 있네.

무량한 자비희사의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 곳엔 언제나 있다네.

늘 복전을 결심하고 실천하는 나날입니다.

즐거운 설날이 지나고 따스한 봄볕은 내리비치고

밝고 맑은 마음으로 새옷을 갈아입는 날이 입춘입니다.이 마음이 복전입니다.

복전은 복과 지혜를 의미합니다.흔히 복덕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복은 넉넉하고 여여하고 아름다운 심성에서 오는 것이고

덕은 이 복을 바탕으로 슬기와 지혜가 번뜩이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복은 정진과 노력을 통해 불러오는 것이지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오는 복은 빚이요 갚아야 할 것들이며, 세상은 공짜가 없는 법입니다.

인생의 길은 매우 짧고 덧없는 길이라고들 하지만

이 짧고 덧없는 무상의 길에서 영원으로 가는 마음의 길을 찾아갑시다.

노력하는 자에게 길은 보이고, 기다리는 자에게 밤은 끝나고 새벽은 오리니

밝고 맑음은 기다리고 인고하고 인욕하고 정진하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부처님의 선물인 것을 깨달아갑시다.

네 이웃이 이웃이 아니고 먼 산이 먼 산이 아닙니다.

처처에 꽃 피는 싹이 있거늘 뉘 있어 메마른 사바라 하겠습니까.

자기 자신과 이웃을 잘 보살필 때 사바는 정토가 되는 것임을 생각합시다.

여실지견해서 여여해집시다.세상과 청산은 둘이 아니니

봄볕같은 마음이 있는 한, 꽃 피지 않는 곳이 없을 것 입니다.



 

 

 

 

 

 

 

 

불교는 마음 수양의 종교가 아니다
                         사회적 실천 수반돼야 진짜 불교다

 

탁효정

“요즘 흔히 이야기하는 불교가 진정한 의미의 대승불교일까요?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불교를 연기, 무아, 공의 세계를 잘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00년전 이에 대한 반성으로 보다 진전된 불교이론이 제기됐고 대승불교가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보디사트바를 지향하던 대승불교의 노력들은 어디에 가고, 지금 21세기에 연기론만 강조하는 불교만 남게 되었는가 돌이켜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2월 18일 열린 불교평론 ‘열린논단’의 16번째 논자로 나선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은 “지금의 한국불교는 대승불교가 아니다”라는 주장으로 논단을 열었다.

현응 스님은 최근 재출간된 『깨달음과 역사』를 통해 대승불교의 현재성을 다시 한번 제기한 바 있다. 이날 ‘열린논단’의 논자로 초대된 이유 또한 불교계 대표 논객으로서, 또한 조계종 교육원장으로서 승가교육의 일대 혁신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현응 스님이 추구하는 대승불교의 의미를 여러 학자들과 함께 경청하고 논의하기 위함이었다.

현응 스님은 “한국불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선불교는 엄밀히 말해 대승불교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대승불교의 지향점은 깨달음의 추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자들이 정토를 구현하고자 하는 사회적 실천에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의 한국불교는 사회적 실천은 생략된 채 깨달음에 대한 것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이는 비단 한국불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본불교, 남방불교 등 대다수 불교국가에서도 똑같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반야의 세계를 시적(詩的)으로 표현한 것이 선불교입니다. 선불교가 연기의 세계에만 머물러 있는 이상 이 또한 대승불교의 정신을 구현한 불교는 아니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현응 스님은 왜 지금의 시점의 시점에서 대승불교의 정신을 강조하는 것일까.

“인류사회는 근대를 거쳐 20세기, 21세기를 맞아 인문, 사회, 자연과학 등이 고도로 발달되어 있습니다. 이런 시대를 맞아 불교는 연기론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역사이론을 펼치는 단계가 되어야 하는데, 현대불교가 역사성과 사회성을 외면하고 연기론적 범주에만 머무는 것은 불교의 퇴보라고 생각합니다. 대승불교의 역사적인 실천론을 되찾을 때 21세기를 주도하는 사상으로서의 불교가 재탄생할 수 있습니다.”

현응 스님은 “불교의 사회적 실천론, 즉 불교도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방법론을 모색한 것이 바로 대승불교가 발발한 취지”라고 설명했다.

“불교가 말하는 무상, 무아, 공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면 실재성의 근거를 상실하기 때문에 삶의 동기와 행동의 당위성 및 필요성이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알 수 없어 놀라고 두려워하고 허둥대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는 실재론에 서있는 다른 종교와 대항할 적극적인 연기적 역사관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내부적으로도 연기론을 이해한 불교도들에게 보다 진전된 불교이론을 펼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대한 해답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대승불교입니다.”

즉, “연기론적 세계관을 가진 불교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내놓은 것이 바로 대승불교였다는 것이다.

현응 스님은 “대승불교의 입장은 보살을 실천적 삶의 주체로 내세우는데 있다”며 “깨달음(보디)과 역사(사트바)가 결합된다는 보살사상이야 말로 대승불교의 입장을 가장 적절히 드러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스님은 “근대 이후에 역사철학, 사회철학과 같은 학문적 영역에서는 대승불교가 말하고자 하는 사회적 실천론을 담고 있는데 비해 불교는 여전히 기원전 500년에 머물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응 스님의 이야기는 현재 한국불교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스님은 “최근 불교 포교의 방향과 내용이 대개 심리치료나, 마음수양, 그리고 명상으로 흐르는 것이 대단히 안타깝다”며 “불교는 개인의 몸과 마음에 한정지을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으로 확장되어야 하며, 이때 비로소 불교가 21세기를 주도하는 사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에 위빠사나 열풍, 간화선 대중화 등 불교계 안팎에서 붐을 일으키고 있는 것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몸과 마음에 대한 관찰에 한정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스스로 대승불교의 정신을 포기하고 불교의 바운더리를 마음수양으로 한정하는 행위들입니다. 인류사회가 고도로 발달된 시대를 맞아 불교는 연기론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역사이론을 펼치는 단계가 돼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불교가 역사성과 사회성을 외면하고 연기론적 범주에만 머무는 것은 불교 스스로 퇴보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현응 스님의 비판은 한국불교의 간화선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한국불교의 간화선은 노장사상과 도가의 신선술에 물들어 있습니다. 선불교는 무상·무아·연기·공을 통찰하는 것으로, 이는 보리의 영역입니다. 마음을 고도로 집중하면 선정력을 키울수 있을지 모르지만, 선정력은 연기를 통찰하는 것과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깨달음은 연기를 잘 이해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그 어떤 경지나 신비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이란 삶의 영역이 공(空)임을, 비실재(無我)임을, 가설적이요, 환상적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스님은 “깨달음을 경지론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교가 노장사상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라며 “이는 중국의 격의불교의 단계에서 이미 발생한 문제로, 도가의 신선술, 연단술로 깨달음을 설명한 데서 비롯된 문제”라고 지적했다.

스님은 그 한 예로 지리산 개운조사를 들었다. 개운조사는 선방 스님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는 인물로 지리산 부근에 살고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봉암사 환적대에도 공부한 적이 있는 신선 같은 인물로, 몸을 잘 수련해서 불로장생의 몸을 이루었고, 아마 살아있다면 200살이 넘었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가끔 공부 잘 하는 스님들 앞에 한번씩 나타난다는 전설 속의 인물이다.

현응 스님은 “개운조사파들은 참선 수행자가 자신의 몸 하나 맘대로 못하면 평생 참선을 할 필요가 무엇이 있냐고들 하는데, 죽을 때가 되면 죽어야 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라며 “개운조사의 수행법들이라는 것들이 지금까지 선방에 전승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라고 비판했다.

스님은 “한국 선방 공부의 내용 잘 들여다보면 화두뿐만 아니라 묵조선, 위빠사나 등 나름의 수행을 하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 화두수행을 권장하고 있는데, 간화선 내용 잘 들여다보면 어떤 경지에 도달해 그 경지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라며 “이는 깨달음에 대한 커다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고, 선방의 구참들 또한 이 문제를 줄곧 지적해오고 있다”고 말했다.

현응 스님은 “깨달음은 연기를 잘 이해하는 것이고, 여기에는 어떤 신통력이나 다른 차원의 경지는 없다”고 지적했다.

스님은 이어 “불교가 2500년 내려오는 과정에서 잘못 전승된 것들이 많아 용어 하나하나에서부터 바로 잡아야 할 것이 너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불교가 한반도에 1700년전 유입된 이래 가장 전성기 시대를 맞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수십년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며 복을 비는 것이 불교라고 생각했고, 스님들조차 소수의 엘리트들만 절에서 일부 스님들에게 글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사찰도 대형화되고 스님들도 대학에 다니면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일반인들도 라디오, 텔레비전을 통해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시점에서 대승불교의 취지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하고 이를 현대문명과 접합한다면, 불교야말로 인류사회에 도움이 되는 종교가 될 것입니다.”

현응 스님은 “불교의 역사적 실천, 사회적 실천을 '승단'이라는 틀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며 “앞으로 승단의 필요성은 점점 더 줄어들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스님은 “불교의 사회적 실천은, 이 세계가 허망한 것임을 알고 무연자비(無緣慈悲)의 역사적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라며 “연기의 체득을 통해 개개인이 각각의 분야에서 남에게 덜 상처주고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구현해나가는 것,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이 사회와 부합하는 내용들을 고찰하고 이 시대에 맞는 보살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바로 대승불교의 사회적 실천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현응 스님은 “불교가 마음을 다스리는 종교에 머무르면 안된다”고 다시 한번 강조하며, “대승의 취지를 받아들이고 현실화되기에 1700∼80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 시대야말로 대승불교를 구현할 좋은 시절이 왔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로 이날 발표를 마쳤다.

 

 실천불교(實踐佛敎)

불교는 실존적 삶의 철학입니다.

어떤 종교이든 간에 종교는 아는 것 보다 실천을 잘 해야 합니다.

물론 학문적 지식과 실천수행이 겸전하면 금상첨화이겠으나 불교라는 학문은 특히 난해하고 어려운 철학입니다.

평생을 공부해도 부족한 학문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에 학문적 철학적 지식이 없이는 불교를 할 수 없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교에 의한 구제가 불가능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사실은 그 정반대입니다.

학문은 학자에게 맡기면 그만입니다.

실천만이 성불의 첩경입니다.

그러면 [실천은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과제가 됩니다.

그에 대한 답으로서 출가하지 않고 견성에 이른 유마거사의 [생활불교]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생활불교란 불교를 생활화한다는 뜻입니다.

흔히들 종교생활을 현실생활과 분리하여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은 어쩌다가 한번씩 시간을 내어서 사찰에 나오는 것만을 종교적 실천행위로 생각하고 종교생활을 할 시간이 없다고 곧잘 말합니다.

이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고 부처님의 마음을 받아 섬기면서 바르게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생활불교인 것입니다.

불교의 실천을 불공이라 합니다.

그런데 불공의 뜻도 옛날과는 다릅니다.

생활불교에 있어서는 [생활시불공](生活是佛供)입니다.

즉 불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의 참된 생활 그 자체가 불공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생활] 입니다.

물론 참되지 않은 생활은 불공이 될 수 없습니다.

자비로운 마음가짐과 욕심부리지 말고 웃으며 진언행과 더불어 마음속에 항상 부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 곧 불공의 요체입니다.

불공에는 때와 장소가 없습니다.

[시시불공 처처불공](時時佛供 處處佛供)입니다.

절에 가서 불상앞에 공양불을 올리는 것만을 불공으로 생각하는 것은 옛날 이야기 입니다.

아무때 어느곳에서나 부처님을 염하며 그분의 거룩하신 사상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때와 장소를 특별히 정하여 불공을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속일여](眞俗一如)입니다. 진리의 세계는 곧 세속의 세계입니다.

도의 세계는 마치 산중이나 절간에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던 것이 종래의 불교관이었습니다.

불타의 법계는 중생계입니다.

대승은 중생심이라 했습니다.

불자(보살) 의 도량은 선방이 아니라 세속의 진토입니다.

삶은 정진입니다.

참된 생활 훌륭한 성공은 곧 현대적의미의 성불입니다.

중생은 불의 지혜와 자비를 먹고 삽니다.

20세기를 살아가는 불자상은 모름지기 중생자신입니다.

생활자체가 불공이어야 합니다.


함께 참여하셔서 실천하는 불자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