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란 무엇인가?-고잘미운동에 대한 변명

2012. 3. 10. 11:4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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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이란 무엇인가?-고잘미운동에 대한 변명

 

 

깨달음이란 말할 수 없는 것이지만, 굳이 말을 한다면 이 세상 모두가 진리의 나툼임을 아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진리의 나툼이란 낱낱의 생명체뿐 아니라 산하대지 두두물물 이 모두가 불교적으로는 부처의 진신 사리임을 뜻합니다. 따라서 깨달음은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져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말이 있는 곳엔 반드시 대립이 생기고, 생각이 있는 곳에도 반드시 그에 대한 반대 생각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마치 물질이 없을 때는 아무 일이 없지만, 물질이 일면 반드시 반(反)물질이 생기는 물리 현상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말이 일기 전,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일이라는 것은 세상을 육안이 아니라 깨달음의 눈으로 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깨달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 모두는 이미 깨달아 있습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미물도, 미물만이 아니라 온 우주가 다 깨달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온 우주에 충만합니다. 온 우주가 깨달음뿐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우주의 실상입니다. 우주는 모두 진리의 나툼, 진리 생명, 진신 사리의 현신인 것입니다.


따라서 깨달았으냐 못 깨달았느냐를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깨달았다고 보면 모두가 깨달았고, 못 깨달았다고 보면 모두가 못 깨달은 것이 우주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주우면 줍히고 안 주우면 못 잡는 것이 깨달음인 것입니다.

 

또 깨달음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것도 모두 비몽사몽의 우문입니다. 온 천지가 깨달음 투성이라 하더라도 내가 모르면 우주는 캄캄 암흑이기 때문입니다. 천하의 부처가 다 모여도 암흑 중생은 깨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암흑 중생이 부처가 아니면 모르되 암흑중생도 부처라,부처는 부처를 어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위대하므로 내 고집 피우면 세상이 못 당합니다.


모두가 깨달음뿐이구나! 하는 것을 알고 나면 할 일은 이 세상을 공경, 찬탄하고 섬기고 모시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실상 깨달음은 이렇게 공경, 찬탄, 섬김 속에 나타납니다. 마치 불(火)이라고 하는 것이 부싯돌을 부딪치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듯이, 깨달음도 이런 관계 속에 나타납니다. 너와 나의 마음이 만날 때, 그리고 그 마음이 모두가 대립없이 공경 찬탄으로 가득찰 때, 공경이란 부싯돌이 너와 나를 통해 불을 일으킬 때 비로소 보이지 않던 깨달음이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를 화엄경에서는 여래성기(如來性起), 또는 여래출현(如來出現)이라 불렀습니다.


제가 보현행원을 주장하고, 고잘미(고맙다, 잘했다, 미안하다)운동을 벌이는 것은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원과 함께 섬기고 모시며 매사에 감사하는 이 마음이 우리 안에 숨겨진 불성, 보이지 않는 깨달음을 현실로 꺼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아무 조건없이 세상을 향해 고잘미할 때, 우리 모두는 암흑중생이 아니라 모두가 위대한 부처임을 알게 됩니다. 내가 미워하고 내가 대립한 그 모든 일이 사실은 나의 착각이며 나의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음을, 내 마음에 고잘미의 꽃이 필 때 스스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이미 감사한 일로 가득 차 있으며, 틀리다고 생각한 이웃들의 모습이 사실은 모두 잘한 것이며 부족하다 생각한 모든 이웃이 내가 목숨 걸고 섬기고 모실 나의 스승님임을 고잘미를 통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깨달아서 아는 게 아니라, 감히 이루지 못할 엄청난 수행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세상을 향해 이웃을 향해 고잘미를 외쳤음에 불과한데, 이 어마어마한 사실을, 평생을 수행한 수행자도 모르는(?) 이 사실을 일개 암흑중생인 내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소박하고 단순한 일이, 얼마나 불가사의한 결과를 가져옵니까. 그래서 우리는 고잘미를 외치고 고잘미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고잘미는 착각 속에 사는 암흑중생들에게 깨달음을 눈앞에 나투는 행입니다. 섬기고 공양하는 이웃을 볼 때, 우리는 그 분이 살아있는 신이요 부처님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신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섬기지 않으니 있는 신을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내 교만, 내 자만으로 남을 공경하고 인정하고 찬탄할 줄 모르니, 아무리 불교 공부를 하고 아무리 기도를 하고 아무리 수행을 해도 넘치는 깨달음도 우리 옆에 있는 부처님도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깨달음을 찾아 없는 부처를 찾아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깨달음이 오지 않는다, 신이 오지 않는다며 한탄하고 절망합니다. 넘치는 깨달음, 멀쩡한 깨달음을 바보로 만들며 말입니다.


깨달음, 신, 부처는 모두 관계(緣起) 속에서 나타납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명상한다고, 머릿속에 의심한다고, 절 열심히 한다고, 기도 열심히 한다고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깨달음은 오직 우리들 구체적 삶 속에, 만남 속에 나타납니다. 서로 공경하고 찬탄하며 섬기고 모실 때, 우리 모두가 스스로 살아있는 부처요 귀하기 이를 데 없는 소중한 존재이며,  이 세상이 본래가 완전한 깨달음의 세계임을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법(佛法)은 세상 속에 있으며, 세상을 떠나 깨달음은 찾을 수 없다는 가르침(佛法在世間, 不離世間覺)의  소식입니다.

 

 

 

*이태석신부님을 보고 많은 분들이 눈물짓는 것은, 신부님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부님이 보이신 그 사랑의 본질이 <고잘미섬모>입니다.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을 찬탄하며 남수단의 고통받는 이웃을 섬기려 가신 것이 신부님 삶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신부님의 삶 속에서 주님을 보고  주님의 끝없는 은혜를 봅니다.


**고잘미운동을 그저 기독인들의 맹신과 비슷한 것으로 보는 분들은, 스스로 고잘미의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반증일지 모릅니다. 아무리 고잘미를 아신다고 그 분들이 말씀해도, 또 이미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은 그 분들의 착각일 수 있습니다.

진실로 고잘미를 실천하고 고잘미의 세계를 아시는 분들은 고잘미의 참뜻을 참으로 아시리라 봅니다. 그리고 참으로 아시는 분은, 기독교의 맹신과 고잘미운동이 어떻게 다른가도 아실 것입니다. 하지 않기 때문에, 내 마음에 교만과 자만이 가득하기에 고잘미의 뜻을 알 수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고잘미는 교만하신 분은 결코 아실 수도 하실 수도 없을 것입니다. 고잘미는 이미 나 없는 자리, 내 욕심, 내 모든 상이 무너진 곳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제 말씀이 의아하신 분들은 화엄경에 나오는, 화엄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한번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희가 고잘미를 외칠 때, 그리고 고잘미운동을 할 때 저희는 <고잘미가 최고>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현재 우리 현실에 <고잘미만한 것이 없다>라고 말씀드리려 노력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엔 고잘미 최고! 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 일은 알 수 없으니까요. 만약 그랬다면 사과 드리며, 이에 대한 변명을 조금 드리고자 합니다.


1.고잘미가 최고!라는 마음은 배타적 마음입니다. 배타적 마음에는 미안하지만 고잘미가 이미 없습니다. 따라서 고잘미를 하는 분이 고잘미만이 최고, 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고잘미를 정말로 하는 분이 아니라 할 것입니다. 무늬만 고잘미인 것입니다.

 

또 제대로 고잘미를 하시는데도 고잘미만 최고, 라고 외친다고 만약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본인이 그렇게 생각한 것이지 고잘미를 말씀드리는 분의 잘못은 아니라 봅니다. 참으로 고잘미운동을 하시는 분은 결코 고잘미만 최고고 다른 것은 열등하다(?) 말씀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해하지 않으시길 바랄 뿐입니다.

 

2.고잘미가 최고, 라고 하는 것과 <고잘미만한 것이 없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마음일 것입니다. 전자는 잘난 마음, 배타적 마음이지만, 후자는 오직 섬기는 마음뿐일 것입니다. 섬기는 마음뿐이라는 것은, 더 나은 가르침이 나타나면 언제든 당신의 주장을 철회할 자세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 부분도 잘 아시면 좋겠습니다.

 

 

 

[ 산은 구름을 탓하지 않는다 / 법정스님 ]

 

 

아무 자취도 남기지 않는

발걸음으로 걸어가라

치는 모든 일에 대해

어느 것 하나라도 마다하지 않고

정하는 대장부(大丈夫)가 되어라

 

무엇을 구(求)한다, 버린다 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는 인연 막지 않고

가는 인연 붙잡지 않는

대수용(大收容)의 대장부가 되어라.

 

일체(一切)의 경계에 물들거나

집착(執着)하지 않는 대장부가 되어라

 

놓아 버린 자는 살고 붙든 자는 죽는다

놓으면 자유(自由)요, 집착함은 노예(奴隸)다.

왜 노예로 살려는가?

 

살아가면서 때로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있고

설상가상(雪上加霜)인 경우도 있다.

그런다고 흔들린다면

끝내는 자유인이 될 수 없다.

 

이 세상에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데 무엇에 집착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