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4. 27. 23:47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염불 불보살 이야기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그 분을 염(念)하며, 다작가경(깃발경,S11.1.4)
두려움이 닥쳤을 때 누구를 생각해야 할까. 어떤 이는 무의식적으로 ‘하느님’을 생각한다고 한다. 그런 하느님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일신하고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신교에서는 이를 적절히 활용하여 선교에 이용하고 있다.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무의식적으로 하느님을 떠 올리는 것은 틀림없이 자신들의 유일신이라는 것이다.
오랜 옛날 신들의 전쟁이 일어 났는데
불자들은 두려움이 닥쳐 왔을 때 누구를 찾아야 하는가. 당연히 부처님을 찾아야 한다. 그런 부처님은 어떤 분일까. 초기경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오랜 옛날에 하늘사람과 아쑤라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그때 수행승들이여, 하늘 사람들의 제왕 제석천이 도리천 하늘 사람들에게 말했다.
‘벗들이여, 하늘사람들이 전쟁에 말려들어 공포나 전율이나 털이 곤두서는 두려움이 생겨나면 그때 나의 깃발을 쳐다보아라. 그대들이 나의 깃발을 쳐다볼 수 있다면 공포나 전율이나 털이 곤두서는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이 만약에 나의 깃발을 쳐다볼 수 없다면 빠자빠띠의 깃발을 쳐다보아라. 그대들 하늘사람의 제왕인 빠자빠띠의 깃발을 쳐다볼 수 있다면 공포나 전율이나 털이 곤두서는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이 만약에 빠자빠띠의 깃발을 쳐다볼 수 없다면 바루나의 깃발을 쳐다보아라. 그대들 하늘사람의 제왕인 바루나의 깃발을 쳐다볼 수 있다면 공포나 전율이나 털이 곤두서는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이 만약에 바루나의 깃발을 쳐다볼 수 없다면 이싸나의 깃발을 쳐다보아라. 그대들 하늘사람의 제왕인 이싸나의 깃발을 쳐다볼 수 있다면 공포나 전율이나 털이 곤두서는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다.’
(다작가경-깃발경-Dhajaggasuttaṃ- The Flag on Top, 상윳따니까야 S11.1.3, 전재성님역)
상윳따니까야 삭까상윳따의 다작가경(S11.1.3)에 따르면 아주 오랜 옛날에 신들의 전쟁이 일어났었다고 한다. 하늘사람(도리천)과 아수라의 전쟁이다.
세상도표
그런 신들은 어떤 세상에 속할까. 세상도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존재의 세계
빠알리어 용어 출처 : A Comprehensive Manual of Abhidhamma
세상도표를 보면 모두 31개의 세상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리천은
이와 같이 하늘사람(도리천)과 아수라와의 신들의 전쟁이 하늘에서 벌어진 것이다. 도리천은 삼심삼천(三十三天, tāvatiṁsa, 따와띵사)을 말한다. 욕계천상으로서 사대왕천 바로 위이다. 그런 도리천은 보시하고 계를 지키고 믿음이 있는 자들이 가는 천상으로서 수명은 1000천상년으로 되어 있다. 인간년으로 따지면 수명이 3천6백만년이다. 도리천에서 가장 높은 자는 제석천이다.
제석천은 수
제석천의 깃발
싸우기 좋아하는 아수라가 전쟁을 걸어 왔을 때 하늘사람(도리천)의 제왕 제석천은 도리천의 천신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두려움이 생겨나면 그때 나의 깃발을 쳐다보아라”라고 말한다. 이는 자신의 군대가 반드시 이길 것임을 말한다. 자신의 깃발을 보면 털이 서는 것 같은 공포나 전율이 사라질 것이라 한다.
빠자빠띠의 깃발
그래도 공포가 일어난다면 이번에는 ‘빠자빠띠의 깃발’을 쳐다보라고 한다. 주석에 따르면 빠자빠띠는 베다시대의 신으로서 ‘생명의 아버지’ 또는 ‘창조주’라 한다. 오늘날 유일신교와 같은 위치라 볼 수 있다.
유일신교도들이 두려움이 일어나면 하나님 아버지를 찾듯이, 제석천은 도리천 존재들에게 생명의 아버지이자 창조주인 빠자빠띠를 찾으라고 한다. 그러면 털이 서는 듯한 두려움과 공포가 가라 앉을 것이라 한다.
바루나의 깃발
그래도 두려움이 일어나면 어떻게 할까. 제석천은 이번에 ‘바루나의 깃발’을 들고 나온다. 바루나는 누군일까. 생명의 아버지이자 창조주인 빠자빠띠보다 더 높은 존재임에 틀림없다. 주석에는 ‘사법신(司法神)’으로 되어 있다. 베다시대 아리안족에게 있어서 ‘최고의 신’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최고의 신 바루나의 깃발을 보면 두려움과 공포가 사라질 것이라 한다.
이싸나의 깃발
바루나 깃발을 찾아도 두려움이 일어나면 어떻게 할까. 이번에는 ‘이싸나의 깃발’을 쳐다 보라고 한다. 이싸나는 앞서 언급된 제석천이나 빠자빠띠, 바루나 보다 더 높은 신임에 틀림없다.
이들 신들의 깃발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빠자빠띠 등의 신들은 결코 나오지 않는다. 다만 깃발만 보여줄 뿐이다.
어리석은 제석천
이렇게 깃발만 보여주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은 공포와 두려움은 여전할 것이라 한다. 부처님은 왜 그렇게 말씀 하셨을까. 경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하늘사람의 제왕인 제석천의 깃발을 쳐다보더라도 하늘사람의 제왕인 빠자빠띠의 깃발을 쳐다보더라도 하늘사람의 제왕인 바루나의 깃발을 쳐다보더라도 하늘사람의 제왕인 이싸나의 깃발을 쳐다보더라도 공포나 전율이나 털이 곤두서는 두려움이 사라지기도 하고 사라지지 않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늘사람의 제왕인 제석천은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두려워하고 전율하며 불안해하고 비겁하기 때문이다.
(다작가경-깃발경-Dhajaggasuttaṃ- The Flag on Top, 상윳따니까야 S11.1.3,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제석천의 깃발, 빠자빠띠의 깃발, 바루나의 깃발, 이싸나의 깃발을 쳐다 보더라도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하늘사람 제석천의 문제로 보고 있다. 하늘사람(도리천) 제석천은 신들의 제왕이긴 하지만 탐진치를 벗어나지 못한 중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어리석은 제석천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주석에 따르면 제석천은 완전히 깨달은 자가 아니며 전생의 공덕(業)에 의해 신들의 제왕으로서 생존하는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그 공덕이 다하면 그는 새로운 존재로 윤회해야 한다. 그래서 제석천은 두려움 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존재하지도 않고 실체도 없는
이렇게 두려움에서 자유롭지 못한 하늘의 제왕 제석천은 어리석은 중생일 뿐이다. 그런 자가 다른 천신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생명의 근원 또는 창조주라 불리우는 빠자빠띠, 바루나, 이싸나 등의 깃발을 보라고 하지만 이는 공포와 두려움을 해결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명의 아버지 또는 창조주 , 최고의 신 등으로 불리우는 빠자빠띠, 바루나, 이싸나는 깃발만 있을 뿐이지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고 실체도 없는 것과 같다. 단지 베다시대부터 구전 되어온 신의 이름일 뿐이라는 것이다.
두려움이 생기면 그때는
그렇다면 삶의 과정에 있어서 두려움과 공포,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쳤을 때 부처님은 어떻게 하라고 말씀 하셨을까. 초기경에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나는 너희들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숲속에 들어가 나무 아래서나 빈 집에서 머물 때 공포나 전율이나 털이 곤두서는 두려움이 생겨나면 그때는 나를 생각하라.
‘이처럼 세존께서는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지혜와 덕행을 갖춘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아는 님, 위없이 높으신 님,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님,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깨달은 님, 세상에 존귀하신 님이다'
라고.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진실로 나를 생각하면 공포나 전율이나 털이 곤두서는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다.
(다작가경-깃발경-Dhajaggasuttaṃ- The Flag on Top, 상윳따니까야 S11.1.3,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삶의 과정에서 두려움과 공포,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쳤을 때 있지도 않은 빠자빠띠, 바루나, 이싸나라 불리우는 생명의 아버지 또는 창조주를 찾지 말고 부처님의 덕성을 생각하라고 말씀 하셨다.
불수념 정형구
그래서 부처님은 두려움이 일어날 때 마다 다음과 같이 명호하라고 말씀 하셨다.
“Itipi so bhagavā 이띠삐 소 바가와 arahaṃ 아라항 sammāsambuddho 삼마삼붓도 vijjācaraṇasampanno 윗자짜라나삼빤노 sugato 수가또 lokavidū 로까위두 anuttaro 아눗따로 purisadammasārathi satthā 뿌리사 담마사라티 삿타 devamanussānaṃ 데와마눗사낭 buddho 붓도 bhagavā” 바가와
“이처럼 세존께서는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지혜와 덕행을 갖춘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아는 님, 위없이 높으신 님,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님,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깨달은 님, 세상에 존귀하신 님이다”
“That Blessed one is worthy, rightfully enlightened, is endowed with knowledge and conduct, well gone, knower of the worlds, is the incomparable tamer of those to be tamed, is Teacher for gods and men, enlightened and blessed.”
이것이 ‘불수념’이다. 부처님을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을 계속해서 생각하면 그 어떤 두려움이나 공포도 사라질 것이라 한다.
가르침과 상가를 생각함
그런데 부처님은 부처님의 열가지 명호만 이야기 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다음의 두가지에 대하여 더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만약에 나를 생각할 수 없다면 그때는 가르침을 생각하라.
‘세존께서 잘 설하신 이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 유익한 것이고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것이고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것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라고.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진실로 가르침을 생각하면 공포나 전율이나 털이 곤두서는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다.
만약에 가르침을 생각할 수 없다면 그대들은 참 모임에 관해 생각하라.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훌륭하게 실천한다.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정직하게 실천한다.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현명하게 실천한다.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조화롭게 실천한다.
이와 같은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참 사람으로 이루어졌으니 공양받을 만하고 대접받을 만하며 보시받을 만하고 존경받을 만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이다’
라고.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진실로 참 모임을 생각하면 공포나 전율이나 털이 곤두서는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다.
(다작가경-깃발경-Dhajaggasuttaṃ- The Flag on Top, 상윳따니까야 S111.3,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부처님(Buddha)과 가르침(Dhamma)과 성스런 상가(Sangha)에 대한 것이었다. 불법승 삼보를 말한다. 부처님은 두려움과 공포, 외로움, 슬픔 등 우리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불법승 삼보 중의 하나를 생각하면 두려움 등이 사라질 것이라 하였다.
법수념 정형구
그 중에 가르침에 대한 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서 이 문장을 생각한다면 두려움 등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씀 하셨다.
“svākkhāto bhagavatā dhammo 스왁캇또 바가와따 담모 sandiṭṭhiko 산딧티꼬 akāliko 아깔리꼬 ehipassiko 에히빳시꼬 opanayiko 오빠나이꼬 paccattaṃ veditabbo viññūhī” 빳짯땅 왜디땁보 윈뉴히
“세존께서 잘 설하신 이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 유익한 것이고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것이고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것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The Teaching of the Blessed one is well declared, results are here and now, time does not matter, is inviting to investigate, the leading is inwards and should be realized by the wise personally.”
승수념 정형구
부처님은 상가에 대해서도 말씀 하셨다. 그런 상가는 어떤 상가일까. 한마디로 성스런 상가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여 도(magga)와 과(phala)를 이루신 성자들을 말한다. 성스런 상가를 생각하는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supaṭipanno bhagavato sāvakasaṅgho. 수빠띠빤노 바가와또 사와까상고 Ujupaṭipanno bhagavato sāvakasaṅgho. 우주빠띠빤노 바가와또 사와까상고 Ñāyapaṭipanno bhagavato sāvakasaṅgho. 냐야빠띠빤노 바가와또 사와까상고 Sāmīcipaṭipanno bhagavato sāvakasaṅgho. 사미찌빠띠빤노 바가와또 사와까상고
Yadidaṃ cattāri purisayugāni, 야디당 짜따리 뿌리사유가니 aṭṭha purisapuggalā, 엣타 뿌리사뿍갈라 esa bhagavato sāvakasaṅgho 에사 바가와또 사와까상고 āhuneyyo 아후네이요 pāhuneyyo 빠후네이요 dakkhiṇeyyo 닥키네이요 añjalikaraṇīyo 안잘리까라니요 anuttaraṃ puññakkhettaṃ lokassā” 아눗따랑 뿐냐켓땅 로깟사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훌륭하게 실천한다.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정직하게 실천한다.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현명하게 실천한다.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조화롭게 실천한다.
이와 같은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참 사람으로 이루어졌으니 공양받을 만하고 대접받을 만하며 보시받을 만하고 존경받을 만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이다”
“The Community of bhikkhus of the Blessed one have entered, the correct path, the straight path, the wise path and the path of mutual understanding. They are the four pairs of the eight Great Beings.
These disciple bhikkhus of the Blessed one are worshipful, worthy of hospitality, worthy of gifts and suitable to be worshipped with clasped hands. They are a field of merit for the world.”
이와 같이 불법승 삼보에 대하여 늘 생각하고 있으면 그 어떤 두려움이나 공포로 부터도 벗어날 것이라 한다. 이렇게 붓다와 담마와 상가에 대하여 늘 생각하는 것을 수념 (隨念, ānussati-아눗사띠)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에 대하여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을 ‘붓다눗사띠 (buddhānussati , 불수념)라 하고, 담마에 대하여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을 ‘담마눗사띠 (dhammānussati , 법수념)’라 하고, 상가에 대하여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을 ‘상가눗사띠 (saṅghānussati , 승수념)’이라 한다.
공덕을 대상으로 한 마음챙김(알아차림)
이와 같은 수념은 초기불교에서 40가지 사마타 명상주제에 속한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를 대상으로 마음집중을 하여 삼매에 들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수념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이점은 무엇일까.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1)부처님에 대해서 일어난 계속해서 생각함(隨念)이 부처님을 계속해서 생각함이다. 부처님의 공덕을 대상으로 한 마음챙김의 동의어이다.
(2)법에 대해서 일어난 계속해서 생각함(隨念)이 법을 계속해서 생각함이다. 잘 설해졌음 등의 법의 공덕을 대상으로 한 마음챙김의 동의어이다.
(3)승가에 대해서 일어난 계속해서 생각함(隨念)이 승가를 계속해서 생각함이다. 좋은 길에 들어섬 등의 승가의 공덕을 대상으로 한 마음챙김의 동의어이다.
(청정도론, 제7장 여섯 가지 계속해서 생각함, 1절)
청정도론에 따르면 수념하는 것에 대하여 공덕을 대상으로 한 알아차림(마음챙김, sati)라 하였다. 부처님의 열가지 공덕을 늘 생각함으로서 알아차리는 것이다.
두려움과 공포가 사라지는 이유
지금 두려움과 공포가 일어 났을 때 “이띠삐 소 바가와 아라항 삼마삼붓도..(이처럼 세존께서는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시고..)” 부처님의 공덕을 계속해서 생각하면 두려움과 공포가 즉시 사라질 것이라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두려움이나 공포 다음에 ‘다음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일 밖에 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음 마음이 일어난 순간 사라지게 되어 있다. 따라서 두려움이 일어 났을 때 “부처님은 아라한 이시고..” 하여 열가지 명호를 하게 되면, 두려움을 두려움이라고 아는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에 두려움은 사라지는 것으로 본다. 이는 알아차림에 해당된다. 불수념을 ‘붓다눗사띠 (buddhānussati)’라 하는데 사띠(알아차림, 마음챙김)가 들어가 있는 이유가 된다.
담마의 공덕을 계속 생각하는 담마눗사띠나 상가의 공덕을 계속해서 생각하는 상가눗사띠 역시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한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벗어 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의 공덕을 계속하여 생각함으로서 알아차리는 방법은 실체도 없는 신에게 의존하여 두려움과 공포를 벗어나려는 것과 다르다. 구전으로만 전해져 오는 신에게 의존하여 두려움과 공포를 벗어나려 하지만 그 두려움과 공포를 계속해서 생각하는 한 결코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 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두려움과 공포가 두려움과 공포인줄 알아차리면 그만이다. 그런 두려움과 공포 그 자체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하나의 현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모든 현상은 무상하고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번뇌 다한 그 분을 염(念)하면
그렇다면 두려움과 공포는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으로 탐욕에서 떠나고 분노에서 떠나고 어리석음에서 떠나서 두려움이 없고 전율이 없고 불안이 없고 비겁함이 없기 때문이다."
(다작가경-깃발경-Dhajaggasuttaṃ- The Flag on Top, 상윳따니까야 S11.1.3, 전재성님역)
이말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서 떠나 있으면 두려움과 공포가 있을 수 없다는 말과 같다.
모든 번뇌가 다한 부처님이나 아라한에게 있어서 두려움과 공포라는 번뇌가 있을 수 없다. 두려움과 번뇌는 탐진치로 대표 되는 범부들에게나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탐진치에 찌들어 사는 사람들이 두려움과 번뇌가 일어날 때 번뇌 다한 부처님이나 아라한을 늘 생각하고 지금 여기서 알아차림을 유지한다면 결코 두려움이나 번뇌가 일어 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개송으로 정리 해 주셨다.
“숲속의 나무 밑이나 빈집에서 수행승들이여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을 생각하라. 그대들에게 공포는 사라지리라.
만약에 이 세상에서 최상이며 인간 가운데 황소인 깨달은 님을 생각할 수 없으면 그때는 해탈로 이끄는 잘 설해진 가르침을 생각하라.
만약에 해탈로 이끄는 잘 설해진 가르침을 생각할 수 없다면 그때는 최상의 복전이 되는 참 모임에 관해 생각하라.
이와 같이 그대들이 깨달은 님과 가르침과 참모임을 마음에 새기면 공포나 또는 전율이나 털이 곤두서는 두려움이 사라지리라.”
(다작가경-깃발경-Dhajaggasuttaṃ- The Flag on Top, 상윳따니까야 S11.1.3, 전재성님역)
왜 깃발만 보여 주는가
삶의 과정에 있어서 생기는 두려움과 공포는 번뇌에 해당된다. 그런 번뇌 자체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모든 현상이 일어나면 사라지듯이 번뇌 역시 일어나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뇌로 가득찬 사람들이 만든 개념으로 두려움과 공포 같은 번뇌를 해결하고자 한다.
경에서 윤회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 하늘사람(도리천)인 제석천은 자신의 깃발을 보면 번뇌가 사라질 것이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움과 공포가 계속 되었을 경우 자신보다 더 높은 신의 깃발을 보라고 한다. 경에서 말하는 빠자빠띠의 깃발, 바루나의 깃발, 이싸나의 깃발이다.
깃발로 언급된 신들은 생명의 아버지, 창조주, 최고의 신 등으로 불리운다. 하지만 그 모습은 보여 주지 않는다. 다만 깃발만을 보여 준다. 그 깃발을 보고서 안심하라고 제석천은 말한다.
그렇다면 제석천은 생명의 아버지, 창조주, 최고의 신 등으로 불리우는 빠자빠띠, 바루나, 이싸나를 왜 보여 주지 못하였을까. 그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깃발만 보여 준 것이다.
오로지 깃발로만 존재할 뿐
오늘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이나 하나님, 알라 등은 결코 보여 주지 않는다. 다만 그런 신이 있다는 말만 전하는 것이다. 이는 경에서 말하는 ‘깃발’과 다름 없다. 이런 현상은 불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일부 불교전통에서 볼 수 있는 ‘진아(眞我,참나)론’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은 개념은 고유성이 없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다만 이름과 명칭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다작가경(깃발경, S11.1.3)에서와 같이 생명의 아버지 또는 창주주라 불리우는 빠자빠띠의 깃발 같은 것이다. 오로지 깃발로만 존재할 뿐 실체가 없는 것이다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그런 말 또는 깃발을 보고서 두려움과 공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번뇌로 가득찬 사람들이 만든 실체가 없는 개념 그것도 깃발만 보면 안심될 것이라 하지만 이는 더욱 더 번뇌만 가중 시킬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번뇌가 다한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번뇌가 다한 제자들을 생각하라고 하였다.
두려움이나 공포 같은 번뇌가 발생하였을 때 번뇌 다한 자들을 생각하면 번뇌가 사라질 것이라 하였다. 그런 번뇌 다한 부처님에 대하여 우리는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지혜와 덕행을 갖춘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아는 님, 위없이 높으신 님,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님,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깨달은 님, 세상에 존귀하신 님”
이라 부른다.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는 노래
이런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는 노래가 있다. 부처님의 아홉가지 덕성을 찬탄하는 게송이다. 부처님의 열가지 덕성중에 일반명사인 붓다만 빠진 것을 말한다. 이를 나와구나가타(Nava Guṇa Gāthā) 라 한다.
빠알리어 자막버전 구공덕게(Nava Guṇa Gāthā)
음성 02-hymn-02.mp3 Nava Guna Gatha(The Nine Virtues of the Buddha, 6분 27초)
삼보의 공덕을 찬탄하는 노래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에 대하여 찬탄한 노래가 있다. 숫따니빠따에 실려 있는 라따나경(보배경, 寶石經, Sn 2.1)이 바로 그것이다.
빠알리어 자막판 라따나경(Ratana Sutta, 보배경, 寶石經)
음성 http://buddha.goodweb.cn/...ijing_huanghy.mp3 更多热门歌曲>>
완벽한 무대는 없다
사람들은 선택의 순간에 참으로 많은 갈등을 한다 . 만약 여러 가지 일들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다면 ,
건널목의 중간에 서서 되돌아가야 할지 나아가야한지 모른다면 , 그때는 단 51퍼센트에 자신을 걸어보는 것도 괜찮다 .
사람들은 지나치게 욕심이 많다 . 처음부터 100퍼센트의 조건으로 시작되는 일은 얼마 되지 않는다.
완벽한 무대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
- 홍신자(무용가,명상가)
스트레스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품는다면
제바달다는 부처님의 사촌이자 사랑하는 제자였습니다 .
만약 회사에서 상사가 스트레스를 많이 주거나,
- 손기원(지혜경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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