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과 혜는 하나의 바탕이다

2012. 5. 11. 14:1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육조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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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과 혜는 하나의 바탕이다

             - 혜능대사의 육조단경중에서

 

 

혜능 대사가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도반들이여! 나의 이 법문은 정(定)과 혜(慧)를 가지고 근본으로 삼습니다.
여러분은 정(定)과 혜(慧)가 서로 다르다고 어리석게 말하지 마십시오.
정과 혜는 하나로서 둘이 아닙니다. 정은 혜의 바탕이요 혜는 정의 작용

이니, 혜가 있을 때에 정이 혜에 있고 정이 있을 때에 혜가 정에 있습니다.
만약 이 뜻을 안다면, 정과 혜를 함께 공부합니다.
모든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먼저 선정에 들고서 지혜를 낸다거나 먼저

지혜를 얻고서 선정에 들어간다거나 하면서 선정과 지혜가 각각 별도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진 자에게는 법에 2개의 모습이 있으니, 입으로는

좋은 말을 하면서 마음 속은 좋지 않아서, 공연히 정과 혜가 있다고 하지만

정과 혜가 평등하지 않게 됩니다.
만약 마음과 입이 모두 좋고 안팎이 한결 같다면, 정과 혜는 평등합니다.
스스로 깨달아 수행하는 것은 논쟁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앞이니 뒤니 하고 논쟁한다면, 어리석은 사람과 같아서 이기느냐

지느냐를 끊지 못하고, 도리어 아(我)와 법(法)을 더욱 내세워 사상(四相;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定慧一體第三
師示衆云: “善知識! 我此法門, 以定慧爲本. 大衆, 勿迷言定慧別. 定慧一體不是二. 定是慧體, 慧是定用, 卽慧之時, 定在慧, 卽定之時, 慧在定. 若識此義, 卽是定慧等學. 諸學道人, 莫言先定發慧, 先慧發定各別. 作此見者, 法有二相, 口說善語, 心中不善, 空有定慧, 定慧不等. 若心口俱善, 內外一種, 定慧卽等. 自悟修行 不在於諍. 若諍先後, 卽同迷人, 不斷勝負, 却增我法, 不離四相.

 

도반들이여, 일행삼매(一行三昧)라는 것은 모든 곳에서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항상 하나의 직심(直心)을 행하는 것입니다.
『유마경』에 말하기를 “직심(直心)이 도량이고, 직심(直心)이 정토이다.”

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마음은 삐뚤어지게 행하면서 입으로만 직(直)을 말하며, 입으로 일행삼매를

말하면서 직심(直心)을 행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다만 직심(直心)만 행할 뿐, 어떤 법에도 집착하지 마십시오.
어리석은 사람은 법의 모습에 집착하여 일행삼매를 가지고 말하기를,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망령되이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곧 일행

삼매이다.”라고 곧장 말합니다.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무정물(無情物)과

같게 되어서 도리어 도를 가로막는 원인이 됩니다.
도반들이여, 도는 모름지기 통하여 흘러야 하는데, 어찌하여 도리어

막히겠습니까? 마음이 법에 머물지 않으면, 도는 통하여 흐릅니다.
마음이 만약 법에 머물면, 이름하여 스스로를 얽어맨다고 합니다.
만약 늘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옳다고 한다면, 마치 사리불(舍利弗)

숲 속에 편안히 앉아 있다가 도리어 유마힐(維摩詰)에게 꾸중을 들은

것과 같을 뿐입니다.

 

善知識, 一行三昧者, 於一切處, 行住坐臥, 常行一直心, 是也. 如『淨名經』云: “直心是道場, 直心是淨土.” 莫心行諂曲, 口但說直, 口說一行三昧, 不行直心. 但行直心, 於一切法, 勿有執著. 迷人著法相, 執一行三昧, 直言坐不動妄不起心, 卽是一行三昧. 作此解者, 卽同無情, 却是障道因緣. 善知識, 道須通流, 何以却滯? 心不住法, 道卽通流. 心若住法, 名爲自縛. 若言常坐不動是, 只如舍利弗, 宴坐林中, 却被維摩詰訶.

 

도반들이여, 또 어떤 사람은 앉아서 마음을 보고 고요함을 관찰하면서

움직이지도 말고 일어나지도 말지니 이로 말미암아 공부가 이루어

진다고 가르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서 올바르게) 이해

하지 못하고 곧바로 집착하여 거꾸로 뒤집어집니다.
이와 같은 자가 많고, 이와 같이 서로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큰 잘못임을 알아야 합니다.

 

善知識, 又有人, 敎坐看心觀靜, 不動不起, 從此置功. 迷人不會, 便執成顚. 如此者衆, 如是相敎. 故知大錯.

도반들이여, 정(定)과 혜(慧)는 무엇과 같을까요?
등불과 그 불빛과 같습니다. 등불이 있으면 그 불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어둡습니다. 등불은 불빛의 몸체이고, 불빛은 등불의 작용입니다.
이름은 비록 둘이지만, 바탕은 본래 하나입니다.

이 정혜법(定慧法) 역시 이와 같습니다.

 

善知識, 定慧猶如何等? 猶如燈光. 有燈卽光, 無燈卽暗. 燈是光之體, 光是燈之用. 名雖有二, 體本同一. 此定慧法, 亦復如是.

 

도반들이여, 본래의 바른 가르침에는 돈(頓)과 점(漸)이 없고, 사람의

성품에 스스로 날카로움과 둔함이 있을 뿐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점차로 계합하고 깨달은 사람은 즉각 닦지만, 본래의

마음을 스스로 알고 본성을 스스로 보면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돈과 점이라는 가명(假名)을 세우는 것입니다.

 

善知識, 本來正敎, 無有頓漸, 人性自有利鈍. 迷人漸契, 悟人頓修, 自識本心, 自見本性, 卽無差別. 所以立頓漸之假名.

 

도반들이여, 나의 이 법문(法門)은 원래부터 무념(無念)을 종(宗)으로 삼고,

무상(無相)을 체(體)로 삼고, 무주(無住)를 본(本)으로 삼습니다.
무상(無相)은 모습 속에서 모습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무념(無念)은 생각 속에서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무주(無住)는 사람의 본성입니다.

 

善知識, 我此法門, 從上以來, 先立無念爲宗, 無相爲體, 無住爲本. 無相者, 於相而離相. 無念者, 於念而無念. 無住者, 人之本性.

 

무주는 세간의 선과 악, 아름답고 추함, 원수와 친구를 구별하여 말하고,

부딪히고, 찌르고, 속이고, 싸울 때에도 모두를 공(空)으로 여겨 해 끼칠

생각을 하지 않고 순간순간 속에 앞의 경계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앞 순간과 지금 순간과 뒷 순간이 순간순간 이어져서 끊임이 없다면,

 이것을 일러 속박이라고 합니다.
모든 법 위에서 순간순간 머물지 아니하면 속박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무주(無住)를 근본으로 삼습니다.

 

於世間善惡好醜, 乃至寃之與親, 言語觸刺欺爭之時, 竝將爲空, 不思酬害, 念念之中, 不思前境. 若前念今念後念, 念念相續不斷, 名爲繫縛. 於諸法上, 念念不住, 卽無縛也. 此是以無住爲本.

 

도반들이여, 밖으로 모든 모습에서 벗어나는 것을 일러 무상(無相)이라고 합니다.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법의 바탕은 깨끗합니다.

이 때문에 무상을 바탕으로 삼습니다.

 

善知識, 外離一切相, 名爲無相. 能離於相, 卽法體淸淨. 此是以無相爲體.

 

도반들이여, 모든 경계 위에서 마음이 물들지 않은 것을 일컬어 무념

(無念)이라 합니다. 스스로의 생각 위에서 항상 모든 경계를 벗어나므로,

경계 위에서 마음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善知識, 於諸境上心不染, 曰無念. 於自念上, 常離諸境, 不於境上生心.

 

만약 단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아니하여 생각이 모두 끊어져 버린다면,

한 생각 끊어져서 곧 죽어 다른 곳에서 태어나니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도를 배우는 자는 잘 생각하십시오.
만약 법의 뜻을 알지 못한다면, 스스로의 착각을 오히려 옳다고 여겨

다시 타인에게 그 잘못을 권하기도 하니, 이것은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그 까닭에 무념(無念)을 세워서 으뜸[宗]으로 삼습니다.

 

若只百物不思, 念盡除却, 一念絶卽死, 別處受生, 是爲大錯. 學道者思之. 若不識法意, 自錯猶可, 更勸他人, 自迷不見, 又謗佛經. 所以立無念爲宗.

 

도반들이여, 어떻게 하여 무념(無念)을 세워 으뜸으로 삼는가?
다만 입으로만 견성을 말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경계 위에서
생각을

일으킨다. 생각 위에서 곧 잘못된 견해를 일으키니 모든 번뇌망상이

이로 말미암아 생긴다. 자성에는 본래 얻을 수 있는 하나의 법도 없다.
만약 얻는 것이 있어서 헛되이 화복(禍福)을 말한다면, 이것이 바로

번뇌요 삿된 견해이다. 그러므로 이 법문에서는 무념을 세워서 으뜸으로 삼는다.

 

善知識, 云何立無念爲宗? 只緣口說見性, 迷人於境上有念. 念上便起邪見, 一切塵勞妄想從此而生. 自性本無一法可得. 若有所得, 妄說禍福, 卽是塵勞邪見. 故此法門, 立無念爲宗.

 

도반들이여, 없다는 것은 무슨 일이 없다는 것이고, 생각한다는 것은 무슨

물건을 생각한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은 두 개의 모습이 없다는 것이며,

모든 번뇌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진여(眞如)인 본성(本性)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진여는 곧 생각의 바탕이며, 생각은 곧 진여의 작용이다.
진여인 자성이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고, 눈․귀․코․혀가 생각을 일으킬

수는 없다. 진여에는 자성이 있는 까닭에 생각을 일으킬 수 있다.
진여가 없다면 눈과 귀, 색깔과 소리가 즉시 소멸될 것이다.
도반들이여, 진여인 자성이 생각을 일으키니, 육근(六根)이 비록 보고․

듣고․느끼고․알고 하지만, 온갖 경계에 물들지 아니하고 진성(眞性)은

늘 자재(自在)하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모든 법의 모습을 잘 분별하면서도, 근본바탕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이다.”

 

善知識, 無者無何事? 念者念何物? 無者, 無二相, 無諸塵勞之心. 念者, 念眞如本性. 眞如卽是念之體, 念卽是眞如之用. 眞如自性起念, 非眼耳鼻舌能念. 眞如有性, 所以起念. 眞如若無, 眼耳色聲當時卽壞. 善知識, 眞如自性起念, 六根雖有見聞覺知, 不染萬境, 而眞性常自在. 故云: ‘能善分別諸法相, 於第一義而不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