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이 많지 않으니 베풀며 사랑하자 / 설우스님

2013. 10. 26. 00:0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육조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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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능은 생활고로 힘든 서민들 마음 열 법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살았다

 

혜능스님은 오도송에서,

1. 성품이 어찌 본래 청정함을 알았겠습니까?

2. 성품이 어찌 본래 나고 죽는 생멸 없음을 알았겠습니까?

3. 성품이 어찌 본래 스스로 공덕이 구족한 것을 알았겠습니까?

4. 성품이 어찌 본래 스스로 동(動)하고 흔들림 없는 줄 알았겠습니까?

5. 성품이 어찌 본래 만법을 만들어내는 줄 알았겠습니까? 라고 했다.

 

이것이 육조혜능 사상의 정의가 될 뿐 아니라 바로 골수라고 할 수 있다.

신수스님은 허공에다 분별망상의 업장을 세우고 인정하면서 방편으로 닦음의 차제를

말하고, 혜능스님의 남종선 사상은 닦고 증득하는 것을 빌리지 않는다는 것을 밝혔다.

신수스님은 거울을 닦아야 함을 말했고, 육조는 불성은 항상 청정해서 어느 곳에

티끌 먼지를 어떻게 세울 수 있는 것인가를 말한 차이점이다.

중요한 점은 <단경>에서 말하는 조사선의 경지인 참선은 닦음도 빌리지 않는 입장에서

보면, 수행을 부질없는 닦음이라는 단견에 떨어질 수 있다.

이런 조사선 사상적 정립은 대단히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잘못 들으면 애써 정진할 일이

없는 단견에 빠져 법상(法相)에 집착하게 된다. 법의 원리만 생각하고 생활 속에서

인연관계의 서로 상생하는 생명세계 순환관계를 무시하는 선병(禪病)에 걸린다.

그래서 혜능스님은 진정으로 대발심하지 않으면 <단경>을 설하지 말라고 했다.

 

이러한 것을 알기 때문에 신수스님은 마음이 공적한 줄 알려면 공적한 마음을 닦으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신수스님의 법문은 의의가 있다. 물 위에 뜬 달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물 위의 달을 건지려고 애를 많이 쓸 때, 어느 날 문득 허공의 진달(眞月)을 보고

자신이 스스로 어리석어 실체성이 없는 물 위의 망념의 달에 속은 줄 깨닫게 된다.

비유하자면 나무 속에 불이 있다. 이것을 불성이라고 하자.

나무의 불기운에 대해 혜능스님은 자신에게 갖추고 있는 불기운을 온전히 믿어서

바로잡아 쓰라는 최상승법을 설했다면, 신수스님은 그 불기운을 찾기 위해 나무를

문질러 마찰력에 의해 불이 일어나고 그 불이 일어남과 동시에 나무에 본래 불이

있었음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신수의 점수법이다.

 

<단경>의 돈법은 비벼서 불이 일어나게 하는 닦음의 점수법을 인정하지 않고 불 자체가

우리에게 지금 활활 타고 있으니 있는 그대로 생활에서 활용해 쓰라는 최상승 돈오법을

요구했다. 그대로 잘 쓰라는 것을 <단경>에서는 지혜로써 관(觀)하라고 했다.

이러한 최상근기 기준은 <단경>의 말씀, 돈오법의 종지(宗旨)를 100% 믿는 믿음에서 나온다.

믿음이 신만(信滿)되어 있다는 것은 남종선의 종지(宗旨)를 믿는 의지가 조금도 빈틈이

없는 것을 신만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은 이러한 소리를 들으면 초발심 그대로 정각(正覺)을

이룬다.

<단경>에서는 남은 세월이 많지 않은데, 닦음으로 인해 너무 많은 세월을 보내지 말라고 했다.

혜능스님은 여기에 대해 지금 그대들이 조금도 어리석음이 없는 부처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의 삶을 살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는 보살행을 실행하는 것을 말한다.

왜 혜능스님은 이러한 법(法)을 설했을까?

 

생명세계에서 모두가 다 같이 행복하지 않고, 빈부격차 그리고 소외된 어려운 이들에게

다 같이 마음을 열 수 있는 반야지혜를 알려서 등줄기 땀으로 젖은 빈궁한 사람들에게도

공부할 방법을 찾은 것이다. 혜능스님은 생활 고(苦)에 힘든 일반 서민들이 마음을 열 수

있는 법이 무엇인가를 많이 생각하고 살아온 것이다.

결국 혜능스님은 마음은 본래 열려 있고, 모든 반야지혜가 갖추어져 있으니 자신을 너무

비하하지 말고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보살행을 하면서 살라는 의미로서 생이 많지 않으니

베풀고 사랑하고 이타행으로 살자는 것이다.

 

 

- 설우스님/청주 법인선원장

 

[불교신문2949호/2013년10월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