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성불했으니 행불(行佛) 합시다/정무스님

2012. 6. 16. 08:5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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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을 찾아서] 정무 스님(조계종 원로의원, 안성 석남사 회주)
“모두 성불했으니 행불(行佛) 합시다”
2011년 06월 08일 (수) 13:45:12 글ㆍ사진=김성우(비움과소통 대표ㆍ논설위원) buddhapia5@hanmail.net

   
 

황사와 비가 연달아 봄날 하늘을 찌푸둥하게 하더니, 4월 28일 아침은 유난히 화창하다. 바쁜 일상에서 탈출해 모처럼 고요한 산사에 주석하는 선지식을 찾아나선 탓일까.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상중리에 위치한 석남사 가는 길은 313번 지방도로 주변에 벚꽃이 유달리 환하게 피어 나그네를 반긴다. 이윽고 마둔호수를 지나 상촌마을 뒤에서 산사로 이어지는 길이 보인다. 길옆에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고, 한껏 푸르름을 자랑하는 봄 풍경이 마음까지 저절로 맑히는듯 하다.


서운산(547m) 자락에 아늑하게 둥지를 튼 석남사는 어느 절 보다 편안함을 준다. 쌍둥이 처럼 귀엽게 서 있는 2기의 석탑(향토유적 제19호)과 무척 정감이 가는 보물 제823호 영산전을 지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대웅전에 들어가 부처님을 참배한다. 대웅전에서 산세를 바라보니, 절이 주변 봉우리에 연꽃처럼 둘러싸여 아늑하게 앉아있는 형상이다.

조계종 원로의원이자 석남사 회주이신 정무 큰스님을 친견하기로 한 약속시간이 남아 있어 도량 곳곳을 카메라의 눈으로 들여다 본다. 가지가지 고운 빛깔의 꽃들과 나뭇잎, 연못으로 구성된 아기자기한 도량이 불사에 공들인 큰스님의 정성을 가늠케 한다. 특히 금광루(金光樓)에 쓰여진 한글 주련은 정무 스님이 이 도량에 주석한 포부를 드러내는 듯하다.

 

‘서운산 아래/ 금광루에서/ 부처님 광명/ 다시 빛내리.’

종무소 건물의 주련 역시, 큰스님의 가풍을 단적으로 표현한 글귀다.
 

‘우주는 한 집안/ 중생은 한 가족/ 서로 원망 말고/ 은혜만 갚아라.’

 

도량은 아담하지만 절 주인의 뜻은 광대하고 실천행은 깊이가 있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잠시, 약수터에 앉아 돌 웅덩이 안의 개구리 두 마리를 들여다 보며 ‘내가 저 우물 안의 개구리로구나’하고 생각하고 있으려니, 정무 스님이 공양간에서 주지스님의 부축을 받으며 거사 두 분과 함께 나오신다. 인사를 드리니, 큰스님은 영산전 옆에 우뚝 선 부모은중경탑으로 안내한 후 자랑삼아 설명을 하신다.


이 탑은 세계에서 유일한 탑이여. 옛날에 없던 양식이라 문화재 당국에서 허가를 잘 내주지 않았지. 용주사에서도 그랬지만, 먼저 탑을 세우고 그 취지를 설명한 후 허가를 받았지.”

 

경로효친(敬老孝親) 사상의 실천이 절실한 말세 중생을 위해 세운 이 새로운 탑이 언젠가는 귀한 문화재가 될 날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큰스님이 머무는 요사채는 소박하다. 손수 우전차(雨前茶)를 우려 주시며 노스님은 선다일미(禪茶一味: 선과 차가 한 맛이다)의 법문을 하신다.


“차는 향과 빛깔과 맛을 함께 음미해야 해. 차의 빛깔은 녹색-황색-적색 순으로 좋지. 차는 혈관에 때 낀 것을 씻어내는 작용을 해. 병은 혈관이 탁해지는 데서 오는데, 차는 혈관을 맑게 해서 중풍과 같은 병을 예방하지. 몸에 탁한 기운을 씻어내듯이 탁한 마음을 씻어내는 게 수행 아니겠나.”

 

마음은 본래 물과 같다. 물은 주변 상황에 따라 얼음이 되기도 하고, 수증기가 되기도 하지만, 물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그처럼 사람의 마음 또한 한결같이 변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이것이 곧 불성(佛性)이다. 물과 같이 변하지 않는 마음의 본성(本性)을 찾는 것이 수행이다. 그러나 수행은 다음 생을 위한 것도 아니고 전생의 업을 닦기 위한 것도 아니다. 수행은 바로 지금, 이 순간 궁극적인 행복(열반)을 체득하기 위함이라 하신다.

 

부처님오신날을 눈앞에 두고 큰스님을 친견했으니, 부처님 오신 뜻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께서 이 땅에 출현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상실(喪失)한 자아를 찾아주려고 오셨지. 잘 살고 못 사는 것 보다 어떻게 살아야 바르게 사는가. 자기를 찾아라. 이 자기가 뭐냐? 이 뭣고?”

 

정무 스님은 안으로는 ‘이 뭣고?’ 화두를 갖고 살되, 밖으로 그 무엇을 구하고 찾는 것은 틀렸다고 강조한다. 안으로 자성을 찾되 부모와 자녀, 백성을 위해 사는 것이 부처님께서 제시한 진리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놈은 나쁜 놈이여. 그래서 나는 ‘~을 위하여 살자’고 말하지. 이웃과 국가를 위해 살자는 거여. 취미와 오락, 욕망을 쫓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불자의 길과는 더욱 멀어지지.”


불교의 목적은 ‘나’를 찾는 길인 동시에, 모두를 위한 길이란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한 곳에 치우치기 마련이다. 수행과 보살행을 더불어 실천하는 것이 불교의 본뜻임을 알면서도 어느새 자기 합리화에 빠진다. 결국엔 불심(佛心)이 아닌 이기심(利己心)에 끄달린 삶 아닌가.

 

“부처님은 80년 세월, 그해 2월 보름까지 걷고 또 걸으셨어. 마지막엔 이렇게 말씀하셨지. ‘아난아, 수레가 낡았구나. 자리를 깔아라. 이 가짜 육신을 벗어야겠다.’ 이 육신을 짊어지고 사는 동안이 자기들이여.”


그렇다면 인생이란 과연 무엇일까? 정무 스님은 “모른다!” 이것이 정답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한다. 모르는 것, 그래서 화두의심이 생기고 ‘이 뭣고?’하고 참구하는 것이 정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말씀이다.

 

“오늘날 정신과학에서는 싯다르타 태자처럼 6년 만에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실상(實相)자리에 들어간 경지는 어떤 사람도 이루지 못한다고 해.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게 있어.

 

싯다르타 태자처럼 그렇게 할 사람도 없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는 말이지. 싯다르타 태자가 부처님 되는 그 순간, 일체중생이 다 성불했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행불(行佛)하자, 부처님 행한 대로 따라만 가면 된다는 것이지. 그래서 나는 ‘성불하세요’라는 인사 보다는 ‘행불하세요’라고 말해. 부처님께서 성불한 내용은 팔만대장경에 이미 다 말했잖아. 우리가 그대로 부처님 정법에 따라 살면 되는 거야.”

 

이 부분에서 오늘 법문은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 또 무엇을 첨언할 것인가. 그러나 부처님께서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에게 다 부처의 씨앗이 있다 해도 진짜로 믿는 불자는 많지 않은듯 하다. ‘아, 저렇게 바보 같은 사람에게, 저 난폭한 사람에게, 저 형편없는 사람에게, 나같이 나약하고 게으른 사람에게 무슨 부처의 성품이 있다는 거야.’라고 늘 사람을 폄하하던 오래된 습관 때문이다.

 

 잘못된 식습관으로 병이 생기듯 잘못된 마음의 습관, 고정관념과 선입관이 큰 병통이다. 사고방식이라는 것이 어릴 때부터 꾸준히 길들여온 것이기에 하루아침에 어떻게?해볼 도리가 없다. 예부터 조사스님들께서 ‘번뇌가 곧 깨달음’이라 하셨고, ‘한마음 돌리니 삼계가 열반’이라고 하셨듯이, 깨달음이란 그래서 의식의 대전환이요 진정한 자기 혁신이 아닐까.

   
 

부처님오신날에 꼭 맞는 법문을 주셨으니 화제를 돌려 큰스님의 공부과정을 여쭈었다.
“큰스님께 가장 큰 영향을 준 선지식은 어느 분이십니까?”


“그야 전강 큰스님이시지. 벌써 60년 전 이야기야. 고향인 군산 은적사에 전강 스님이 주석할 때 뵙게 되었지. 전강 스님은 판치생모(板齒生毛: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묻자, 조주 선사가 ‘앞 이빨에 털이 났다’고 답한 공안) 화두로 참 자아를 찾으라고 가르치셨어. 참선은 의식집중을 통해 5식(識)-6식-7식-8식을 차례로 투과(透過)할 수 있는 대단한 방법이야. 부처님도 죽음직전에서 우유죽을 드시고 살아나셨듯이, 의식의 죽음과도 같은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투과하는 것이지. 이런 점에서 참선은 ‘죽음 연습’이라고도 할 만하지.”

 

정무 스님은 전강 스님의 법제자로서 인천 용화사에 주석하는 송담 스님과는 절친(切親) 중의 절친이다. 두 분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은적사에서 전강 스님을 처음 뵈었을 때 나는 군산의 야간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막 송담 스님이 10년 묵언(默言)을 마칠 때 였어. 나만 보면 ‘아~ 이 선생이 빨리 머리를 깍아야 할텐데…’ 하시는 거야. 송담 스님, 능파 스님과는 그 때 한창 어울려서 경치 구경도 하고 수행도 하며 지냈지. 그뒤 출가를 하게 된 과정도 전생에 하던 일 계속 하는 것이라 절로 절로 이어진 것 같아.”

 

강산이 여섯 번 바뀌는 세월이 흐른 뒤 송담 스님은 한국의 간화선을 대표하는 선지식이 되었고, 정무 스님은 원로의원이자 대종사로서 조계종의 포교방향을 제시하는 지남(指南)이 되었다. ‘왕대 밭에서 왕대 난다’는 속담 처럼, 근현대의 대표적인 선승(禪僧)인 전강 스님 문하에서 걸출한 고승들이 배출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석가모니부처님이 깨달은 날 일체중생이 함께 성불했으니 ‘날마다 부처님오신날’이건만, 모양과 개념에 집착하는 중생에게는 4월 초파일이란 기념일이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불자들에게 당부하실 말씀을 여쭈었다..


“스님은 스님 노릇, 신도는 신도 노릇, 부모는 부모 노릇, 자식은 자식 노릇 잘하면 돼. 그러려면 종교가 타락해 성인의 본뜻을 등지고 형식적으로 신앙 하는 것을 자각하고 개선해야 되겠지. 예를 들어, 사람에 따라 등값을 따로 매긴다면 등장사나 다름 없자나. 시주돈이나 천도재 비용도 마찬가지야. 나는 중이 되고 난 뒤 ‘시주 하라’ 한 적도 없고, 등값을 매긴 적도 없어. 내가 용주사와 신륵사를 비롯해 다섯 군데의 주지를 했지만 불사금으로 힘든 적이 없었어. 돈이 있다면 쓰고 남은 돈으로 불사도 하고 이웃도 도우면 힘들 일이 없지.”

 

정무 스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인생을 사는 이유를 ‘빚 갚으러 왔다’고 하신다. 빚은 은혜와 원수 두 가지다. 그런데 살다 보면 이 둘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마치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하나이자 둘이다. 늘 정신 바짝 차리고 살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정무 스님이 선물로 주신 <인생 졸업장>이란 저서 뒷표지의 글귀가 더욱 사무친다.


“이 세상 어떤 사람이 가장 거룩합니까? 없다. 단, 거룩한 삶만 있을 뿐이다.
이 세상에서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남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누가 건강한 사람입니까? 바르게 사는 사람. 산삼을 먹는 사람 보다 산삼을 캐는 사람이 건강하다.”


큰스님 친견이 봄나들이처럼 흥겨운 하루다. 남쪽에서 저절로 훈풍이 불어오는구나.

 

 정무 스님은
1931년 전북 군산에서 출생했으며, 전북대 수의학과 졸업 후 고등학교 국어교사를 했다. 1958년 은적사에서 전강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5년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김제 부흥사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했으며,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용주사ㆍ신륵사ㆍ영월암 주지,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지도법사를 역임했다. 포교 활성화에 기여한 공로로 1977년 종정 표창을 받은 데 이어 2007년 포교대상을 받았다. 2007년 조계종 원로의원에 선출됐으며, 이듬해 조계종 최고 품계인 대종사를 품수했다. 현재 석남사 회주로 주석하며 출ㆍ재가 교육에 심혈을 쏟고 있다.
 

 

 

 

15분의 선물

 

 

 

학교법인 성신학원의 조하급 이사장님께서 이번에 ‘15분의 선물’이라는 책을

내셨습니다. 조이사장님이 예쁘게 사인을 하여 저에게 책을 보내주셨네요.

책에는 평생을 교육자로 살아오신 조이사장님이 그동안 쓰신 글들이 담겨있는데,

아무래도 학생들에게 당부하는 글들이 많겠지요?

잠시 조이사장님이 책 머리에 밝힌 소감을 인용해보지요.

 

 

 

급격히 변하는 청소년 문화를 보면서 나는 무엇을 했는지 안타깝게 돌아볼

때가 많다. 40여년 학교 현장을 지킨 사람으로 그들의 인격 형성에 얼마의

도움이 되었을까?  생각할수록 부끄럽다.

 

 

그동안 학생들 미래의 넓은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러온 이야기들을

모아 엮어보자는 권유들을 늘 주저함으로 미뤄온 이유였다.

 

나의 삶은 거의 청소년들의 입시와 함께 한 날들이었다. 어두운 하늘에 별빛이

내리던 그들의 자율학습 현장은 아직 내 머리에 남아있는 기억들이다.

 

 

밝은 미래세상으로 나아가는 우리 청소년들이 그들의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이야기, 아직 다하지 못하고 남은 이야기들을

그들 앞에 내어놓는다.

 

 

 

책을 읽으면서 평소에 조이사장님을 뵈면서 느꼈던 조이사장님의 교육철학을

다시 만나서 반가웠고, 또 조이사장님에 대해 그동안 몰랐던 면도 새로 알게 되어

좋았습니다. 조이사장님은 ‘15분의 선물’에서 여러 예화와 경구를 인용하면서

학생들에게 필요한 말씀들을 해주시고 있는데, 책을 보면서 제가 마음에 들어

밑줄을 쳐놓았던 것 중 여러분들과 같이 나누고 싶은 것 몇 가지를 아래에

적어봅니다.

 

 

 

 

1. 어차피 삶은 완성하는 것이 아니고 성실하게 살아가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성실한 삶이 모였을 때 나름대로의 결실의 보람을 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작은 것이 쌓이고 쌓여서 큰 것이 된다는 평범한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2. 「아침은 먹었는가?」 붓다가 물었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침 먹은 접시는 씻었는가?」 붓다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는 또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습니다.

붓다는 그 사람이 입을 열기 전에 다시 물었습니다.

「씻은 그릇들은 잘 말렸는가?」

 네, 네. 이 사람은 참지 못하고 재빨리 대답했습니다.

자, 이제 제 의문들에 대한 답을 주시겠습니까?

 

「자네는 이미 답을 얻었네.」 붓다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그를 내보냈습니다.

이 사람은 돌아가 한참을 고심한 끝에 마침내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붓다는 그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눈앞에 있다는 것’임을 일깨워

준 것입니다. 즉, 모든 열정을 현재에 집중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3. 여러분들은 지식만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고 대상 자체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노벨상을 수상한 하바드 대학의 윌슨이라는

분은 소아마비로서 그에게는 개미가 유일한 친구였습니다.

그분은 어릴 때부터 개미와 대화를 하며 그들의 행동을 애정으로 관찰하다가

개미 연구의 대가가 되었습니다. 그분의 위대한 과학적 지식은 먼저 개미와

같은 하찮은 대상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지식이 지식 자체에 머물러서는 얄팍한 인간만을 만들 뿐입니다. 지식은

사랑과 함께 가야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단지 건조한 지식에만 머물지 말고

다양한 심미적 체험과 도덕적 자각을 두루 추구하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4.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내일은 전혀 다른 시간입니다.

흘러가는 시간은 바람과 같아서 다시 움켜쥘 수 없습니다. 오늘의 시간을

앞에 두고 내일 할 것이라 미루는 어리석음은 없어야 합니다.

지금 자기 앞에 놓여진 길을 최선을 다해 걸어가는 것만이 우리 삶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즉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삶인 것입니다.

 

 

 

5. 왜군에게 연전연패하고 남아있는 12척의 거북선을 보고 대부분은 겨우 이것

밖에 안 남았구나 했겠지만 이순신 장군은 아직도 12척이나 남았네 했답니다.

이러한 긍정의 삶의 태도는 스스로에게 무한한 힘을 내게 합니다.

긍정하는 사람은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언제나 기쁨에 넘칩니다.

 

 

 

6. 독서의 힘을 길러야 합니다.

독서는 주위의 보잘 것 없는 경험들로부터 나를 들어 올려 미처 접하지 못한

세상의 모든 것에까지 인도해 줍니다. 독서를 통해 세상을 바르게 보는 눈을

기르게 되며 그 속에서 나를 찾고 과거와 만나며 미래를 내다보게 됩니다.

독서의 힘을 통해 여러분은 참된 역사의식과 정의로운 신념을 갖게 될 것입니다.

 

 

 

7. 헬렌 켈러는 자서전에서 자신이 읽은 책과 교육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교육이란 우리가 시골길을 산책할 때 오감을 활짝 열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우리 안에 찾아드는 갖가지 인상들을 받아들이는 것과 꼭 같다.

그렇게 우리 안에 들어온 지식은 차고 넘쳐 깊이 있는 사고의 물결을 이루고

밀물처럼 밀려와 소리 없이 보이지 않는 영혼을 적신다.”

 

 

 

8. 줄탁동시란 말은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으로, 병아리가 알 속에서 나오려면 먼저 스스로 알을

깨기 위해 부리로 알을 쪼아야 합니다. 그러면 알을 품던 어미닭이 소리를

알아듣고 동시에 밖에서 알을 쪼아 안팎에서 서로 쪼아댑니다. 여기서 병아리는

 깨달음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수행자이고, 어미닭은 수행자에게 깨우침을

일러주는 스승입니다.

 

 

 

9. 새 술은 새 부대에란 말은 포도주에서 나온 말입니다.

옛 유태인들은 포도주를 만들 때 포도즙을 양가죽 부대에 담아서 자연적으로

발효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발효가 끝난 포도주는 헌 가죽부대에 그냥

담아두어도 괜찮지만 새로 발효되거나 한참 발효 중인 포도주는 그 발효 때

작용하는 화학변화 때문에 가죽부대를 침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발효 중인

새 술을 헌 가죽부대에 담아두면 부대가 찢어지고 술도 다 쏟아지게 마련입니다.

차라리 헌 부대자루에 그냥 남아있는 묵은 포도주만 못하다는 말입니다.

 

 

 

10. 사람들의 가슴엔 두 개의 저울이 있습니다. 타인에게 주는 것의 무게를

다는 저울과 타인에게 받는 것의 무게를 다는 저울. 사람들은 주는 것의

무게를 다는 저울엔 언제나 넉넉하여 그 저울의 바늘을 실제보다 늘려서

말하기를 좋아하지만 받는 것의 무게를 다는 저울엔 늘 인색하여 줄여서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남아서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에도 나눌 수

있는 것. 그것처럼 사람 사는 세상의 마음을 확 펴주는 것은 없습니다.

무엇을 나눈다는 것, 나의 것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눈다는 것. 일방적으로

주는 행위가 아니라 줌으로써 오히려 더 큰 보람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의미있는 인생입니다.

 

 

 

어떻습니까? 평생을 교육에 바쳐온 노교육자의 인생에 대한 혜안이 비치지

않습니까? 조이사장님은 고지식한 교육자는 아닙니다. 유머도 있으시고,

 예술가적 기질도 풍부하십니다. 조이사장님의 막내 동생이 지금은 목사가

되신 ‘이 밤을 다시 한 번’의 가수 조하문씨인데, 형제들에게 그런 풍류의 피도

들어있으신 모양이에요.

 

 

책 제목 ‘15분의 선물’은 책 속에 나오는 글 중 어느 한 글의 제목입니다.

영국의 넬슨 제독은 자신의 성공은 늘 15분 먼저 서둘렀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군요. 조이사장님이 이 15분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다시 인용하며 제 얘기를

마치겠습니다.

 

 

 

늘 15분 일찍 서두르는 사람이 된다면 남에게 신뢰받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15분이라는 시간이 여러분에게 많은 것을 선물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부터 남보다 15분 먼저 서두르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1

5분! 그리 어려운 일 아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