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이 곧 수행… 생명은 곧 깨달음 / 금산사 회주 월주스님

2012. 6. 29. 10:2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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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이 곧 수행… 생명은 곧 깨달음 / 금산사 회주 월주스님

 

 



‘NGO스님”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불교계 원로 월주스님은 “세계가 한가족이 된 지구촌 시대에는 인류가 공존공생하며 서로 베풀고, 용서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불교적 실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상훈기자
서울 수유동 삼각산 화계사에서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이 땅에 돈 벌러 왔다가 산업재해로, 폭행으로, 혹은 자살로 죽어간 이주노동자 3000여명의 넋을 위로하는 천도재였다. 날씨는 잔뜩 흐렸다. 추풍에 노랗게 낙엽 날리는 고목 느티나무 아래 네팔, 필리핀, 스리랑카, 버마, 방글라데시, 몽골,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젊은이 500여명이 모여들었다.

불법체류자로 강제 단속에 쫓기면서 온갖 차별과 멸시 속에 숨죽여 살고 있는 젊은이들이 슬픔 가득한 얼굴로 ‘친구’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무릎을 꿇었다. 억울한 영혼들의 참았던 울음인 듯, 기어코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오늘의 이 인연으로 살아있는 우리는, 당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주노동자들을 이웃으로 맞이할 것입니다.”

이날 ‘동체대비(同體大悲)’와 ‘동사섭(同事攝)’을 설하는 월주(月珠·72) 스님의 법어는 간곡하고도 간절했다. 저녁 7시 스님의 주석처인 서울 구의동 아차산 영화사 회주실에서 스님과 마주 앉았다. 동체대비와 동사섭에 대해 물었다.

“천지중생이 나와 한 몸이라는 것을 알고 자비심을 일으키는 것이 동체대비입니다. 동사섭은 불교 연기법의 세계관에 따라 모든 중생과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과학과 문명, 통신과 교통의 발달로 지구촌은 이미 한 마을이 됐습니다. 말과 피부가 다르다고 이주노동자를 괴롭히고 부당한 대우를 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상처와 아픔은 지난 세기 우리 동포들이 일본과 러시아, 미국에서 겪은 일 아닙니까.”

월주스님은 최근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재조사를 통해 ‘특정 종단에 대한 국가권력 남용의 대표적 사건’이라는 결론을 내린 ‘10·27 법난’의 최대 피해자이기도 하다. 법난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직에서 쫓겨나는 아픔을 겪었고, 이제서야 명예회복의 길이 열렸으니 스님의 감회가 남다를 터.

“분하고 억울한 마음보다는 그들에게 연민을 느낍니다. 그렇지만 정권이 불교를 유린한 사건의 진상은 낱낱이 밝혀 역사의 본보기로 삼아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든 종교와 정치는 똑같이 정통성과 도덕성이 바탕이 되어야 해요. 버마 독재정권도 민주화를 외치는 승려들을 탄압하고 있지만 역사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법난 이후 월주스님의 활동은 사회복지와 사회개혁운동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지금도 불교계의 ‘현실참여’ ‘시민사회운동’, 또는 ‘종교간 대화’의 선두에는 언제나 스님이 있다. 스님이 수행에서 ‘이타행’으로 마음을 바꾼 것도 법난과 무관치 않다.

스님은 법난을 겪은 뒤 미국으로 떠나 3년을 지냈다. 미국과 캐나다, 남미, 유럽을 여행하면서 현지 한국 사찰에서 설법하고 독서하고 참선하는 나날이었다. 선진국들은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단체들이 소비자운동, 청소년 선도, 빈곤 구제, 공해 추방 등 사회복지운동을 활발하게 펼치면서 신자들을 모으고 있었다.

“나 혼자 성불하겠다고 선방에 앉아 있는 것보다 중생 속으로 뛰어들어야겠다는 원력을 세웠습니다. 불교의 대승보살도와 보현사상은 중생제도가 먼저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원효스님도 ‘본래의 청정한 마음으로 돌아가 중생에게 풍요로운 이익을 준다(歸一心源 饒益衆生)’고 했지요.”

스님은 1980년대 말 ‘중생 속으로’ 또 한 번의 ‘출가’를 단행한다. 지역감정해소국민운동본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불교인권위원회 등의 공동대표나 이사장 등을 맡으며 시민사회운동을 본격화했다. 90년대 후반 이후에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 위원장,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나눔의 집’ 이사장, 지구촌공생회 대표이사 등으로 활동했다. 선 수행 위주의 불교 풍토에서 수많은 단체에 이름을 내다보니 공명심이 앞서는 게 아니냐는 오해가 따르기도 한다.

“한국불교는 오랜 세월 개인 수행에만 치중하느라 보살도를 실천하는 중생제도를 제대로 펴지 못했지요. 시대는 바뀌었고, 산중 사찰은 세속의 삶과 훨씬 더 가까워졌습니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을 피하지 않았고, 불교계가 취약한 사회참여 부분을 내가 나서서 메우다보니 숱한 직책을 갖게 됐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따지고보면 깨달음을 사회화하는 한 가지 일을 하는 겁니다.”

스님은 ‘보살행’과 ‘깨달음의 사회화’를 거듭 강조했다. 대승불교 보살사상의 핵심인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한다)’ ‘자미도 선도타(自未度 先度他·자신을 건지지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먼저 제도한다)’가 자신의 서원이자 회향(回向·사회화)이라고 했다.

“불교는 소외된 중생들이 겪는 질병, 빈곤, 무지, 인권탄압 등의 사회고(社會苦), 남북분단과 환경파괴 등의 시대고(時代苦)를 덜어주는 일에 더욱 앞장서야 합니다. 모든 진리는 항상 현실 가운데서 실현돼야 합니다. 산중이 아니라 진흙탕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이치입니다.”

지구촌공생회 봉사활동을 위해 미얀마 파간을 찾은 월주스님.
스님은 현재 자신이 설립한 국제구호 단체인 ‘지구촌공생회’ 활동에 집중적으로 열정을 쏟고 있다. 지구촌공생회는 2003년부터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몽골,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아프리카 케냐 등에서 긴급구호와 유치원·학교 설립 등 교육지원사업을 펼치며 지구촌의 음지를 보살피고 있다. 중국의 조선족과 러시아 연해주, 볼고그라드의 고려인들 돕기에도 나서고 있다. 캄보디아의 경우 1000개를 목표로 지금까지 270여개의 우물을 팠다.

“그곳 사람들이 웅덩이에 고인 물을 마시고 병을 얻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가장 열악한 곳에 가장 절실한 일을 해주는 것이 지구촌공생회의 목표입니다. 감로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생명의 물’을 주는 것이 먼저입니다. 진정한 봉사는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찾는 일입니다.”

월주스님은 불교계 원로인 법주사 조실 혜정스님과 동향의 친구이자 도반이다. 스님은 서울에서 중학교에 다니다가 6·25전쟁이 터져 낙향했다. 법주사로 먼저 출가한 혜정스님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전쟁 직후의 사회와 삶에 대한 회의를 달랬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법주사에서 당대의 선지식 금오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금오스님은 제자들을 거칠게 몰아붙인 선사로 유명하다. 그는 스승에게 시심마(이뭐꼬) 화두를 받아 참선수행을 시작했다. 스승은 참선, 계율, 보살행의 세 가지를 항상 점검하면서 추상같은 질책으로 제자들의 분심을 일으켰다. 특히 참선에는 추호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았다.

스님은 어느날 지나가는 스승에게 합장 반배로 인사를 드렸다. 스승은 인사를 받지 않고 호통을 쳤다. “이놈아, 더 숙여라.” 머리가 땅에 닿도록 숙였는데도 계속 “더 숙여라” 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제자의 아만심을 없애주려는 스승의 배려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는 선학원, 조계사, 동화사, 금산사 등의 사찰에서 정진하고 때로는 사찰 주지와 총무원 집행부 소임을 맡았다. 60년대 한국불교 정화운동에서도 스승을 도와 큰 역할을 했다. 스님은 금오스님의 제자들인 이른바 ‘월자문중’의 구심점으로 두 차례 총무원장을 지내는 등 막강한 종단권력을 구축하기도 했다.

자그마한 체구에 정정한 얼굴,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스님은 인터뷰 내내 진지한 모습이었다. 70대 노인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어찌보면 얼굴이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를 닮은 듯도 하다. 실제로 그는 간디를 존경한다. 스님은 지난해 ‘인도 성지 순례기’라는 책을 두 권으로 펴냈다. 스님은 21년 전 미국에서 돌아오는 귀국길에 석가모니의 행적과 간디, 라마크리슈나, 암베드카르 등 인도의 여러 성자들의 유적지를 순례했다. 지난해에 다시 한 번 인도를 찾아 한 달을 머문 뒤 그 감동을 책에 담았다.

스님은 늘 바쁘다. 불교계와 나라의 원로로 많은 직책을 맡아 활동하다보니 찾는 사람도 많고, 오라는 곳도 많다. 김제 금산사와 영화사의 회주를 겸하고 있어 틈틈이 서울과 지방을 오간다. 그렇게 바쁜 중에도 화두참선을 멈추지 않는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1시간 넘게 좌선을 하고, 움직일 때도 행선(行禪)으로 화두를 참구한다고 했다. 스님에게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불교에서 배울 만한 지도자의 덕목에 대해 물었다.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계율인 육화경(六和敬)은 불화나 분열을 막는 여섯 가지 덕목을 담고 있습니다. 그중에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의견을 조정해 바른 견해로 타협을 이끌어내는 견화동해(見和同解), 모든 이익을 균등히 나누어 갖는 이화동균(利和同均)은 정치인들이 되새길 만한 말씀입니다.”

어느새 두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나 스님은 조금도 피곤한 기색이 아니었다. 스님은 “넘치는 것을 모자라는 곳에 조금씩 옮기는 일, 그것이 수행이고 봉사이자 바른 삶”이라며 자신이 좋아하는 ‘신심명’ 첫 구절을 들려줬다.

至道無難(지도무난·지극한 도는 그리 어렵지 않으니)/唯嫌揀擇(유혐간택·단지 헛된 분별심을 내려놓고)/但莫憎愛(단막증애·밉다 곱다 하는 마음이 없으면)/洞然明白(통연명백·단박에 오롯이 알게 되리라).

▲ 월주스님은

1935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서울 중동중학교를 다니다 6·25전쟁으로 중퇴하고 낙향했다. 정읍농고 2학년에 재학중인 54년 법주사에서 금오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금산사, 개운사, 영화사 주지를 지냈다. 80년 조계종 제17대 총무원장, 94년 조계종 개혁 당시 제28대 총무원장을 지냈다. 현재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 위원장, 나눔의 집 이사장, 지구촌공생회 대표이사 등을 맡고 있다. 2000년 국민훈장 모란장, 2005년 조계종 포교대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보살사상경구선집’ ‘보살사상’ ‘보살정로’ ‘인도성지순례기’가 있다. 전 조계종 포교원장 도영스님,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을 이끌고 있는 도법스님 등이 제자다. 현재 금산사·영화사 회주.


〈김석종 선임기자 sjkim@kyunghyang.com

 

 

 

[염화실의 향기]“부패집단 매도 10·27법난 늦게나마 명예회복”

법난 당시 총무원장 월주스님

월주스님은 27년 전 신군부가 저지른 10·27 법난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80년 통합종단의 총무원장으로 취임한 그는 법난에 의해 6개월 만에 총무원장직을 사퇴했다.

“신군부는 전두환 장군을 대통령 후보로 지지한다는 광고를 내라고 여러 차례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정교분리 원칙을 지켜야 한다며 거절했어요.”

스님은 또 “문공부에서 ‘국보위’ 방침이라며 종교단체자율정화지침서를 나눠줬지만 관권 개입의 문제를 지적하며 ‘소신껏 해나가겠다’고 했다”면서 “이런 일련의 일들이 신군부측의 미움을 샀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방부 과거사위 역시 조사결과 발표에서 ‘신군부가 조계종에 갖고 있던 부정적 평가’ 때문에 이 사건이 시작됐다고 밝혔다. 당시 대대적인 사회정화운동을 통해 정권 안정을 꾀하던 신군부는 종교계, 그 중에서도 조계종을 ‘정화 대상’으로 지목했던 것이다.

“총칼로 정권을 잡은 정통성 없는 신군부가 사회정의 실현을 구실로 삼아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인 불교계를 부패집단으로 몰아 종헌과 종권을 단절시킨 훼불사건입니다.”

스님은 27일 새벽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 23일간 조사를 받았다. 보안사는 불교계 수장의 승복을 벗기고 죄수복을 입힌 뒤 독방에서 하루 5~6시간만 재우면서 조사를 벌였다. 몇몇 스님들의 부정축재가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됐지만 모두 과장, 왜곡, 허위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스님은 “나 자신의 수치심과 모멸감보다는 성스러운 법당이 군·경의 군홧발에 짓밟혔다는 사실이 몹시 괴로웠다”면서 “당시 신군부의 일방적인 발표 때문에 불교계가 부패한 집단으로 매도됐지만 이번 발표로 불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오해가 풀리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어머니 / 시인 박동규  
            내가 초등학교 육학년 때 육이오 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집 지키고 있어>

            하시고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셨다. 그 당시 내 여동생은 다섯 살이었고

            남동생은 젖먹이였다. 인민군 치하에서 한 달이 넘게 고생하며 살아도

            국군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서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우리 삼 형제와 어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남쪽으로

            향해 길을 떠났다. 일주일 걸려 겨우 걸어서 닿은 곳이 평택 옆 어느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인심이 사나워서 헛간에도 재워주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 집 흙담 옆 골목길에 가마니 두 장을 주워 펴놓고 잤다.

            어머니는 밤이면 가마니 위에 누운 우리들 얼굴에 이슬이 내릴까봐

            보자기로 씌어 주셨다.
            먹을 것이 없던 우리는 개천에서 작은 새우를 잡아 담장에 넝쿨을 뻗은

            호박잎을 따서 죽처럼 끓여서 먹었다.

            삼일 째 되는 날 담장 안집 여주인이 나와서 우리가 호박잎을 너무 따서

            호박이 열리지 않는다고 다른데 가서 자라고 하였다. 그날 밤 어머니는

            우리를 껴안고 슬피 우시더니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다시 서울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기다리자고 하셨다.


            다음날 새벽 어머니는 우리들이 신주처럼 소중하게 아끼던 재봉틀을

            들고 나가서 쌀로 바꾸어 오셨다. 쌀자루에는 끈을 매어서 나에게

            지우시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과 보따리를 들고 서울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평택에서 수원으로 오는 산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가고 있을 때였다.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 내 곁에 붙으면서

            <무겁지. 내가 좀 져 줄게 하였다. 나는 고마워서 <아저씨, 감사해요>

            하고 쌀자루를 맡겼다.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길이 빨랐다. 뒤에 따라 오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으나 외길이라서 그냥 그를 따라갔다. 한참을 가다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나는 어머니를 놓칠까봐 <아저씨, 여기 내려주세요. 어머니를

            기다려야 해요>하였다. 그러나 청년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따라와>하고는 가 버렸다. 나는 갈라지는 길목에 서서 망설였다.

            청년을 따라 가면 어머니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앉아 있으면 쌀을 잃을

            것 같았다.  당황해서 큰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 하고 불렀지만

            청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즈음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다.
            길가에 울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첫마디가 <쌀자루는 어디 갔니?>하고

            물으셨다. 나는 청년이 져 준다면서 쌀자루를 지고 저 길로 갔는데,

            어머니를 놓칠까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했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한참 있더니 내 머리를 껴안고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하시며 우셨다. 그날 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농가 마루에서 자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셔서 새끼 손가락만한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얻어

            오셔서 내 입에 넣어 주시고는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아버지를

            볼 낯이 있지>하시면서 우셨다.

            그 위기에 생명줄 같았던 쌀을 바보같이 다 잃고 누워 있는 나를 영리

            하고 똑똑한 아들이라고 칭찬해 주시다니. 그 후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결국은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소박한 욕망이 그 토양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때는 남들에게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바보처럼

            보이는 나를 똑똑한 아이로 인정해 주시던 칭찬의 말 한 마디가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탱크와 피난민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신 박동규님의 글입니다.


            이글 속의 “어머니”는 시인 박목월님의 아내가 되십니다.
            절박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야단이 아니라 칭찬을 해 줄 수 있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칭찬 한마디가 우리 아이들의 인생을 아름답게

            변화시켜 주리라 믿습니다.
            - 동덕여대 아동학과 교수 우남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