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7. 00:13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숭산스님 법어 법문
수행을 할 때 큰 의심이란 한 가지에 집중해 있는 마음을 오랫동안 계속 간직하는 것이다. 몇 초 혹은 몇 분은 쉬울지 몰라도 오랫동안 한마음을 간직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예를 들어보자. 어머니가 장을 보러 갔다 오겠다며 아이에게 말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먹어라."
한 시간,두 시간이 지나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는다. 네 시간,다섯 시간이 흘러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이는 온갖 생각과 걱정들로 뒤죽박죽이 된다.
"무슨 사고가 난 것은 아닐까."
기어이 울음을 터뜨린다. 아이의 모든 의식의 에너지는 '어머니는 왜 돌아오시지 않을까'하는 의심에 집중해 있다.
또 다른 예가 있다.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아주 배가 고파 하늘도, 땅도, 나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직 '어디에 먹을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다.
또 며칠 동안 사막을 헤매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햇빛은 따갑게 내리쬐고 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오직 '물'뿐이다. 그러나 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거의 죽을 것도 같다. 그런 상황에서는 돈도 명예도 잠도 다 필요가 없다.
우리의 수행도 이와 같다. 어머니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한 컵의 물을 찾는 사막의 방랑자처럼 '나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갖고 수행해야 한다. 모든 에너지가 완전히 한 점에 맞추어져 바깥 상황이나 조건에 전혀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아이는 어머니를 원한다. 배고픈 사람은 음식을 원한다. 목마른 사람은 물을 찾는다. 본성을 찾고 싶으면 오직 '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가슴 깊이 가져야 한다. 이런 마음으로 수행을 하면 깨달음은 멀지 않다.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젊었을 때는 여자, 돈, 명예를 원하고 심지어 참선 수행을 하는 하는 데도 욕심을 가지고 한다. 이것저것 가지려고 여기저기 쫓아다닌다. 결코 만족을 모른다.
그러다 훌쩍 나이가 들면 한 순간 당혹스러워진다.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찬한 친구도 한두 명씩 세상을 떠난다. 문득 죽음이 다가온다. 그러면서 삶에 대한 의문들이 생긴다.
아!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 허무감을 이기기 위해 '산다는 것은 다 그렇고 그런 것' 혹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고 애써 결론을 내려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가? 과연 그런가?
'삶은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것은 충분한 대답이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하고 말하는 나는 과연 무엇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죽기 전에 그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나는 무엇인가.' 하는 큰 의심이며 '오직 모를 뿐' 인 마음이다.
다시 말하지만 본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대신심, 대분심, 대의심이 있어야 한다. 이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빠져선 안된다. 또 어느 하나가 다른 것들보다 강하다면 균형을 잃어 문제가 생긴다. 큰 용기만 가지고 있다면 믿음과 의심은 약해질 것이고, 오직 에너지만 모아질 뿐이다. 무엇보다 조화가 중요하다. 그것이 '오직 모를 뿐' 의 다른 이름이다.
긴장을 풀면 대신심, 대분심, 대의심이 순간순간 가능하다.
참선한다는 것은 긴장을 푼다는 것을 의미한다. 차를 운전할 때 어깨가 움추려서 있으면 문제가 발생한다. 갑자기 변화하는 환경에 순발력있게 대응할 수가 없다. 긴장을 늦추라고 해서 운전할 때 잠을 자라는 것은 아니다. 빨간 불이 켜지면 멈추고 초록색 불이 켜지면 가면 된다. 그것이 전부이다.
대부분의 일본 선방에서는 에너지를 모으는 방법을 주고 가르친다. 즉, 용기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다. 사사키 로시는 종종 제자들이 얼마나 큰 에너지를 갖고 있는지 점검하곤 했다. 그가 강조하는 수행은 중심인 단전에서 얼마는 큰 에너지를 한꺼번에 터뜨려내느냐 하는 것이다.
"무(無)라고 말해 보아라."
"무우."
"더 크게 더 힘을 줘서."
"무우우."
"너는 아직 도 너 자신을 못 믿는구나. 다시 무."
"무우우우우우."
이것은 사무라이들이 받는 훈련과 유사할 뿐 수행이 아니다.
강한 단전을 길러내는 것만이 중요시 되는 잘못된 훈련이다. 용기만 강조되면 믿음이나 의심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빨리 갈 수는 있어도 명확한 방향은 분명히 아니다. 여러분은 곳에 도착하고 싶은가. 서울? 전라도? 경상도? 금강산? 아니면 샌프란시스코? 도쿄? 뉴욕? 파리? 믿음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방향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목적은 본성을 발견해서 중생을 돕는 것이다. 열심히 수행하면 큰 믿음이 생기고 우리는 그것을 서원이라 한다. 열심히 참선 수행을 하면 큰 용기가 큰 에너지가 된다. 그러면 어느 날 큰 의문이 풀려서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지혜라 한다.
거듭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오늘 바로 이 순간에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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