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7. 00:02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살아있는 기도
불자로서 기도는 생활의 전부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전 생활을 통하여 기도를 한다. 다만 예외는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식이나 교양으로 쌓아놓고 알고 있는 것으로 믿음을 삼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에게 있어 불교는 학문이요, 철학이요, 교양이다. 자기 변혁을 가져오고 역사를 바꾸는 강한 의지도, 높은 목표도, 결단적 행동도 없다. 기도하는 자만의 신앙이 살아있는 신앙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도의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제불과 더불어 다를 바가 없는 청정자성을 믿고 조사언구(祖師言句)를 참구하는 신자도 있는가 하면 제불보살의 무애 위신력을 믿고, 일심 염불하고 기도하고 진법계가 여래광명임을 믿고, 그 구현을 향하여 끊임없이 보살만행을 실현해가는 방법까지 그 사이에 여러가지가 있다.
그런데 기도하는 자 중에는 불법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이 오직 욕망충족을 원하여 기구하는 것을 기도로 삼는 일군(一群)이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욕망충족의 방법이다. 그러기 위하여 예경도 하고 염불도 한다. 그렇다고 기도에 있어 세속적 욕망이 첨가되는 것을 버리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기도가 어떤 논리에서 이루어지느냐에 대한 이해의 결여가 문제다.
허공에 태양은 찬란하고 우주에 광명은 충만하다. 그 속에 산하대지 두두물물(頭頭物物) 온갖 중생이 함께 있다. 어떤 것도 광명 밖에 있지 않다. 다만 스스로 눈을 가리거나 어둠의 장막에 갇혀있는 자만이 광명 속에 살면서 광명을 모른다. 일체 중생이 본래로 하나의 법성일 뿐이요, 법성 광명을 벗어난 자는 없다고 하건만, 미혹의 구름에 싸인 자들은 법성광명인 자신을 모른다.
기도는, 미혹에 살되 이와 같이 미혹이 없는 제불 보살의 경계를 확신하고 그 진리를 긍정하는 행위인 것이다.
긍정하는 기도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렇지만 근본적인 것은 여래공덕이 항상 빛나고 자신의 생명 본분이 찬란하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불보살의 끝없는 공덕에 대한 감사로 표현된다. 기도에 있어 근본적 요건은 감사다. 그런데 너무나 명백한 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이 오늘날 불자들 중에 많이 있어 보인다.
제불의 무량공덕 광명을 수용하지 못하는 원인은 미혹이라고 하였다. 미혹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사실을 잘못 보는 착각이 아닌가. 사실은 엄연한데도 불구하고 착각하는 자만이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범부가 그렇다.
그렇다면 미혹한 범부라 하더라도 청정자성의 여래공덕이 무한히 부어져 있음을 긍정하고 감사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범부에 있어 여래공덕의 수용이 아니겠는가. 미혹이란 착각이요 실유(實有)가 아니요 적극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를 인정하는 자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본다면 미혹을 깨뜨리는 방법도, 여래공덕을 범부 현실에 구현시키는 방법도 근본이 여래공덕의 긍정, 즉 감사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변의 불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기도하는 불자들 사이에서 얼마만치나 진실한 긍정과 감사가 행해지고 있는가. 감사보다도 미혹과 불행에 집착이 없는가. 불행을 집착하고 염불하며 그 해소를 기원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서 현실적인 해소가 속히 이루어지지 아니할 때 초조와 불안이 깃들고 나아가 제불의 무애위신력을 불신하지나 않는가. 이러고서는 욕망기구행 밖에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본란은 살아있는 기도를 강조한다. 불보살의 대자대비와 무애위신력과 무량공덕이 우리에게 부어져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뜨거운 감사는 살아있는 기도라 하겠거니와 이런 사실을 감사로서 살아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생명력이 없는 기도라고 하는 것이다.
불자는 모름지기 어떤 수행이나 어떤 기도에서든 끊임없이 부처님을 생각하고 그 무량자비공덕을 생각하고 끊임없이 부처님을 생각하고 끊임없이 감사하여야 한다. 염불과 감사가 함께 행하여지는 기도로써 우리의 생활은 일시에 바뀌어질 것이다.
비록 미혹한 중생살이라 하더라도 그는 여래공덕을 현실적으로 받아쓰는 권능적 창조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감사는 미혹을 깨뜨리고 여래공덕의 문을 여는 열쇠다. 불자는 감사로써 미혹의 어둠을 몰아내자. 시시로 마음을 새로이 하고 꿈과 희망을 부풀리자.
그리고 모두와 함께 하는 불자의 본심으로 여래 공덕을 전개하여 우리의 생활을 창조로 충만 시키자. 이것이 불자가 살아가는 본래의 모습이다.
불자는 기도로써 성장한다
불자가 가지는 특권이라는 것이 있을까
있다. 그것은 기도라고 생각한다. 기도가 불자에게 주어진 특권이라 하는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대개들 누구나 소망이나 혹은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요구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소망을 이루기 위하여 나름대로 방법을 선택할 것이고 노력도 할 것이다. 때로는 어떤 절대자를 가정해 놓고 그 절대자의 은총에 기대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혹 기도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불자의 기도가 아니다.
기도를 불자의 특권이라고 하는 것은 불자는 기도로서 일체 사를 이루어가기 때문이다. 자기 생명의 성장도 인생의 보람도 역사에의 기여도 진리의 충만한 회복도 기도로써 이루기 때문이다.
불자의 기도는 큰 믿음에서 출발한다. 무엇을 큰 믿음이라 하는 것 일까! 위 없는 깨달음의 부처님, 무한 공덕이 너울 치는 공덕의 세계, 끝없는 지혜와 자비와 덕성의 근원, 그리고 일체의 막힘 없는 창조의 법이 원래로 자기와 온 국토 위에 주어져 있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 믿음, 이것이 부처님을 믿는 것이며 부처님 법을 믿는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이 제시한 논리가 아니다. 우리의 욕망이 만들어낸 허구가 아니다. 반야의 큰 지혜가 밝혀낸 인간과 우주와 법성 진리의 원래의 모습인 것이다. 온 생명의 근원적 모습이다. 그래서 법성이라고도 하고 본래 면목이라고도 하였다.
불자는 이러한 진리 본연의 참 모습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끊임없이 그 가슴 속에서 지켜보고 그 실현을 추구한다. 이것이 기도다. 자기의 생명위에 너울쳐 있는 부처님의 무한 공덕, 온 이웃, 온 세계에 충만한 부처님의 자비, 온 생명 구석구석 넘쳐나는 부처님의 지혜 위신력, 그것을 생각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온 몸 자체로써 보는 것이다.
이러한 불자의 기도에서 불자의 가슴은 지혜와 용기로 충만하다. 자비와 위덕이 넘쳐난다. 끝없는 희망과 밝음과 기쁨이 솟아난다. 일체를 삼키고 그 모두를 하나로 받아들이는 너그러움이 함께 있다. 결코 꺾일 줄 모르는 줄기찬 정진력이 거기 있으며 자기를 바꾸고 국토를 바꾸고 우주를 바꾸는 크나큰 힘이 용솟음치는 것이다.
대개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 마음에 있는 것, 그 가슴에 있는 것이 이루어 진다. 불자의 가슴에 타오르는 진리 생명의 불꽃은 이와 같이 하여 그 생활 무대위에, 현실적 역사 위에 구현되는 것이다. 이래서 불자는 기도로써 그 정신이 새로워지고 그 몸이 맑혀진다. 그의 지혜와 덕성과 힘이 새로워지면 꿈과 서원이 다시 드높아지고 견고해진다. 창조적 주체를 바로 확립하며 끝없는 성장의 자원을 얻고 빛을 뿌리는 우주의 중심으로 자기를 가꾸어 가는 것이다.
기도자의 마음 자세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진리 실상의 긍정이며 생명 본분의 긍정이며 부처님의 무한공덕장에 대한 여지 없는 신뢰이다. 그것은 우리의 생활 감정에서 감사로 나타난다. 자기 자신에게서 끊임 없이 다행스러움을 발견하고 자기 환경에서 또한 그러하고 모든 국토환경에서 또한 그러하다. 이 다행스러움의 발견이 우리들을 끝없는 감사로 이끄는 것이다.
이제 올해의 하안거도 반이 지났다. 출가 수도하시는 스님들은 타오르는 태양 같은 정진력을 한참 발휘하는 이즈음이다. 재가 불자들도 이 정진의 계절을 결코 등한 할 수 없다. 하루하루 시간시간 생각생각에 우리의 깨달음, 밝은 마음을 기도로써 키워가도록 힘 써야 할 것이다. 불자에게 주어진 특권이라할 기도의 권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자. 그리하여 이 여름이 우리 모두에게 참된 성장의 계절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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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 큰스님 지음 빛의 목소리 p333 – p335 기도하는 마음에서, 불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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