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찬탄의 진언(眞言)-"마하반야"

2012. 7. 13. 09:5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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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찬탄의 진언(眞言)-"마하반야"]

 

'마하반야바라밀 염송'. 그것은 우리 안에 깃 든 무한 능력, 무한 창조력을 일깨우는 대찬탄의 진언(眞言)입니다.

 


'마하반야'를 염할 때, 그리하여 우리 마음에 끝없는 '마하반야'의 노래를 울릴 때, 잠자고 있던 나의 불성(佛性), 우리의 무한 능력이 비로소 잠을 깨고 출현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열리지 않는 문이 열리며 보이지 않는 길이 보이게 되는, 실로 불가사의한, 상상할 수도 없던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제 생각에, 굳이 불자가 아니라도 한번쯤 해 볼만한 굉장히 '보편적이며 대중성이 있는 고난 타개법' 입니다.

 

 


불교를 믿든 아니든, 불자이든 아니든, 

어둠이 있는 자리에 마하반야를, 절망이 있는 자리에 언제나 '마하반야'를 갖다 놓으십시오.

 

 


우리 안에 본래 넘치는, 그 무한 창조, 무한 능력, 무한 진리의 노래를...

 

 

[수행 너머의 세계를 가야-수행이 전부는 아니다]

 

수행은 참으로 중요하다. 수행없이는 번뇌를 이길 수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행이 전부는 아니다.
어느 정도 수행을 이루면 반드시 수행 너머의 세계를 가야 한다.


참선, 명상을 아무리 잘해도 참선, 명상만 가지고는 이 세상을 장엄할 수 없다.
이 세상은 물질계이고, 세상은 수없이 많은 여러 실천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절을 아무리 많이 해도 절만 가지고는 이 세상을 장엄할 수 없다.

염불, 주력, 모두 마찬가지.
그런 것은 마음은 밝힐지 모르나 현실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밝아진 마음으로 그런 것 아닌 일들을 해야 하는 것이다.


수영을 아무리 잘해도, 마라톤을 아무리 잘해도, 돈을 아무리 잘 벌고 출세를 아무리 눈부시게 해도 수영, 달리기, 나의 부귀영화만으로 세상이 변하지는 않는다. 그런 것 너머의 세계를 정말 잘 살아야 나도 행복하고 이웃도 행복해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행을 아무리 잘해도 그것만 가지고는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그 이상의 세계, 수행 너머의 세계를 가야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수행만 중시하는 가르침의 한계.


한 마디로 세상은, 수행 너머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곳.
따라서 수행을 해서 마음이 맑아지면, 반드시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수행만 가지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어찌 보면 아무 것도 없는 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라고 하는 무대이다. 수행만 가지고는 먹고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수행만 하는 초기불교 시절에는 밥을 빌어먹었던 것.
수행 너머의 세계를 반드시 가야한다. 그리고 이왕 하는 수행이라면, 수행을 하더라도 <수행 너머의 세계를 수행과 동시에 가는 수행>을 해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덧글:수행 너머의 세계를 수행과 동시에 가는 수행! 그것이 불교에는 있습니다. 바로 행마다 원을 안고 공경, 찬탄, 섬기는 <보.현.행.원.>입니다. 보현행원을 할 때 우리는 수행을 할 뿐 아니라 이미 수행 너머의 세계를 가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과 의심의 해결을 위해 : 마하반야와 보현행원

광덕 큰스님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큰스님의 일관된 사상은 <마하반야>와 <보현행원>입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시길, <마하반야를 염하고(念마하반야바라밀) 보현행원을 행하라(行보현행원)>고 하셨으며, 이것은 다시 <내 생명 부처님 무량 공덕 생명>이란 말씀과,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란 말씀으로 정리됩니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 공덕 생명>이 바로 큰스님이 보신 반야관이며,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는 것>은, 그 반야관이 구체적 창조행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은 육조스님의 <마하반야를 입으로 외우고 몸으로 행한다>는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리고 <마음은 부처님(진리 자리)을 향하고 몸은 중생으로 향하는> 보현행원의 핵심 사상과도 일치합니다.

 

  큰스님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마하반야를 염하며 끝없이 내 가슴에 타오르는 본래 내 생명을 자각하며, 보현행원으로 그 생명을 증명해 나가라!>

 

  마하반야를 염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진실상을 본다(또는 그린다)> 는 말입니다. 그것은 본래로 구족하며 본래로 자족하며 본래로 청정한,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의 진리 생명의 세계를 온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는 행위입니다.

 

그러한 실질적 체험이 끝없이 내 몸과 마음 안팎에서 용솟음칠 때, 그것은 마침내 온 생명을 창조하고 온 생명을 꽃피우는 폭발적 보현행원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마치 어떤 물체를 회전시킬 때, 회전 속도가 낮을 때는 제 자리에서 돌기만 하지만, 회전 속도가 한계점을 넘을 때는 자리를 박차고 날아가 버리는 것처럼, 끝없는 마하반야, 내 진리의 자리, 부처님과 똑같은 무량 공덕으로 가득한 나의 생명 자리를 끝없이 되뇌일 때, 어느 순간엔가 나의 염(念)은 한계점을 지나 폭발하게 되고(big-bang), 그 폭발은 섬기고 공양하는 보현행원의 모습으로 온 사방으로 퍼져나가, 우주를 창조하고 생명을 창조하여 곳곳에 화엄 법계를 이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생명이 절대 생명,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영원한 생명, 무량 공덕으로 꽉 찬 생명임을 자각하며, 이 황량한 사바세계에 화엄의 법계를 꽃피우는 것 입니다. 이것이 큰스님의 염 마하반야, 행 보현행원의 사상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큰스님은 또한 정견(正見)을 매우 중요 시 하신 것으로 저는 압니다. 정견이 무엇이냐? 그것은 <내가 완전한 존재임을 믿는 것>이요, <내가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범부는 그러한 견해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믿음이 잘 안 생기는 것입니다. 아무리 둘러보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 욕심 많고 어리석음 투성이인 내가 부처님과 똑같다고 하니 이해되지도, 믿어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리 봐도 범부인데? 에이, 어찌 내가 감히 부처님과 같을 수가 있나? 괜히 힘내라고 큰스님이 저렇게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것이겠지… 그러니 스스로를 비하하며 이렇게 의심합니다.

 

  아직도 일어나는 이런 정견에 대한 의심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큰스님은 마하반야를 끊임없이 염할 것을 또한 강조하셨습니다. 믿음은 행에서 생기며 의심 역시 행으로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어지지 않아도 의심이 끝없더라도, 끝없이 마하반야를 염함으로써, 내 생명 부처님 무량 공덕 생명을 외침으로써, 내 안에 솟아나는 절대 생명, 부처님 무량 공덕을 온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견과 마하반야, 그리고 보현행원. 이 세 가지가 큰스님 사상의 핵심이요, 화엄반야를 실천하기 위한 큰스님의 실참 수행법입니다. 화엄의 방대한 사상이 이해되지 않고 믿어지지 않는 저희를 위해, 큰스님은 이렇듯 간단하고 핵심적인 실천 수행법을 저희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1. 큰스님의 '내 생명 부처님 무량 공덕 생명'은 화엄의 시작이요 반야의 핵심입니다. 큰스님에게서 반야는, 일반 불교학 강좌에서 말하듯 공(空)이 아닙니다. 여법한 진리의 자리, 모든 근원의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모든 창조행이 일어나는 자리입니다. 현대 우주 이론으로 보면 우주를 창조한 최초의 출발점, 빅뱅이 일어난 곳, 즉 '특이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마하반야 염불은 대단히 뛰어난 염불법입니다. 그것은 실상관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염불선과 비슷합니다. 부처님 가피에 동승하면서도 가피에 의존하지 않고 무한 진리를 직접 체험하는 염불이 큰스님의 마하반야염불법입니다. 이러한 것이 제가 큰스님께서, 반야-선-화엄을 한데 어우르신 분으로 보는 이유입니다.

    그대는 누구십니까 차를 마시는데 소리 없이 다가와 찻잔에 담기는 그대는 누구십니까? 낙엽 밟으며 산길을 걷는 데 살며시 다가와 팔짱 끼고 친구 되어 주는 그대는 누구십니까? 비를 보고 있는데 빗속에서 걸어 나와 우산을 씌워주는 그대는 누구십니까? 바람 없는 강둑을 걷는데 물 위에 미소 짓는 얼굴 하나 그려놓고 더 그립게 하는 그대는 누구십니까? 푸른 내 마음에 그리움을 꽃으로 피우고 꽃과 함께 살자는 그대는 누구십니까? 커다란 별을 따서 내 가슴에 달아 주며 늘 생각해 달라는 그대는 누구십니까? 바람 타고 달려와 내 마음에 둥지 짓고 늘 보고 싶게 만든 그대는 누구십니까? 내 마음의 주인이 되어 보고 있는 데도 더 보고 싶게 만드는 그대는 그대는 진정 누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