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로 무엇이 이루어지는가

2012. 7. 27. 08:5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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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마음

 

기도로 무엇이 이루어지는가

 

불교는 원래가 깨달음의 가르침을 말하는 종교다. 진리를 깨달아 바른 마음, 바른 행으로써 인간과 국토의 완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를 믿으면 재난이 없어진다든가 병이 낫는다든가 불행한 사태가 호전된다는 등 여러 현세적 이익이 있는 것을 말한다. 말만이 아니라 그것은 사실이다. 불교가 깨달음의 종교인데 현세 이익의 결과를 가져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깨달음의 진리를 행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이란 완전무결한 궁극적인 법이다. 생명과 존재의 근원적 실상이다. 그러므로 진리에는 불행도 고도 일체 재난이란 말조차 없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믿고 마음으로 받고 행으로 닦아가는 데서 본래 완전한 진리의 공덕이 자신과 환경에 나타나게 된다.

 

진리를 알면 생명력을 속박하여 나타났던 병도 사라지며 자기 능력을 속박해서 가난했던 빈궁도 사라진다. 진리의 말씀을 믿고 행하여 깨닫는다는 것은 그대로 스스로가 진리로 바뀌고 환경을 진리공덕으로 장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법문을 배워 재난을 면하고 소망을 이루고자 할 때에 사람들은 자칫하면 힘 안들이고 소망을 이루려 하는 잘못에 빠지기 쉽다. 부처님의 법은 힘 안들이고 이루어지는 마술은 아닌 것이다. 헐값을 지불하고서는 헐한 물건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원래의 법칙이므로, 환경을 바꾼다는 것은 진리를 깨달아 행한다는  높은 가치를 먼저 확립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소망하는 것은 무엇이든 무조건 성취되는 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인간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무조건으로 얻게 된다면 그것은 도리어 큰 화난을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바르게 노력하는 것을 잊고 다만 향락과 게으름과 탐욕을 쫒 어리석은 자가 되고 이기적인 자가 되기 쉬우며 급기야는 자신과 사회를 파탄으로 몰아넣고 말게 된다.

 

우리가 인간 세계에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결코 무의미하게 내던져진 생이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자신의 과거 행위의 결집, 즉 업의 실현이라고도 말하나 거기에는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주어진 조건하에 태어나 그 조건에 적응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자기를 형성해 간다. 그 사이에 고난이라는 저항요인을 만나 그것을 극복하고자 노력함으로써 스스로는 새로운 지혜와 힘을 쌓아간다.

 

새로운 자기형성의 의욕의 연속, 그리고 그 행동의 전개가 우리의 삶의 모습이며 성장의 모습이다. 그 사이에서 덕성을 배우고 자비를 훈련하며 자기의 품성을 도야하고 또한 능력을 계발해 간다. 여기에서 인간 정신은 향상하고 심성은 새롭게 정화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이런 방식에 의해서 스스로를 향상시키며 새롭게 역사에 작업할 의무를 자신 가운데에 지니고 타고난 것이다.

 

이 점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은 조금도 소흘히 할 수 없는 진지하고 중대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와 같은 인간 본연의 뜻을 어겨 창의적인 선택도 없고 노력도 없고 자기 실현도 없이 다만 이기적으로 만족을 구한다면 그것은 자기 타락이요, 이 땅에 태어난 큰 뜻을 저버리는 것이 된다.

 

만약 부처님 법을 힘 덜 들이고 큰 효과를 거두는 방법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불교라기보다 종교를 잘못 안 것이며 마술로 착각한 중대한 잘못이다.

 

그렇다고 불법은 힘 많이 들이고 고행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진리를 모르면 고생은 많고 성과는 없다가, 진리를 알아 노력할 때 큰 성과를 얻게 되면 힘 적게 들이고 성과를 얻는 듯 싶어도, 그런 것이 아니라 진리를 실현한 당연한 성과다. 확실히 불법은 바르게 믿고 자비와 정진을 이어갈 때 진리의 무한공덕은 어김없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법칙과도 같다.

 

우리들은 자연 법칙에 순응하여 그 법칙의 결과를 거둔다. 마음의 법칙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의 법칙과 자연 과학의 법칙을 상부하게 하는 데서 우리의 소망은 확실하게 가꾸어져 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마음 속에 근심 걱정이 가득 하고서는 건강은 얻기 어려운 것이다.

 

무엇이든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은 진리의 위신력이며, 마음에 무엇이 있는가에 따라 구체적인 것이 결정된다. 우리가 무엇을 구한다고 해서 그것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마음 상태가 어떠한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말이다. 마음이 어두우면 어두운 것이 그 앞에 나타난다. 마음을 어둡게 하고서 밝은 것을 구하더라도 그에게 광명은 얻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음을 밝게 하고 있으면 힘 안들이고 무엇이든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진리의 세계는 원래로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현상 생활에 현실적으로 나타나자면 마음의 상태가 그 구체성을 결정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서 끊임없는 행동을 통하여 정진해 나아갈 때 진리세계의 무한성은 우리 생활 현실위에 나타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부처님 법을 믿는다는, 이른바 불자가 많다. 그리고 기도하여 밝은 소망을 이루겠다는 신심 있는 불자도 많다. 또 부처님의 무한공덕과 대자대비를 믿는 불자도 물론 많다. 그러나 내 마음이 바뀌고 진리에 순응하여야 소망을 이룰 수 있다는 법칙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 까.

 

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일심 정진하여 부처님 가르침 따라 그 마음을 닦아가는 것이 요긴한 것이다. 우리들은 [그 마음이 청정함에 따라 국토가 청정하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깊이 배워야 할 것이다. 스스로의 행복을 가꾸고 사회에 평화를 이루어 가며 국토의 번영을 추구하는 보살의 길은 그 마음에 끊임없이 청정이 넘치는데 있는 것을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86.>

 

광덕 큰스님 지음 빛의 목소리 p351 p355 밝은 표정 밝은 마음에서, 불광출판사

 

 

 

 

빈 강에 서서 / 류시화  


날마다 바람이 불었지.
내가 날리던 그리움의 연은
항시 강 어귀의 허리 굽은 하늘가에 걸려 있었고
그대의 한숨처럼 빈 강에 안개가 깔릴 때면
조용히 지워지는 수평선과 함께
돌아서던 그대의 쓸쓸한 뒷모습이 떠올랐지.
저무는 강, 그 강을 마주하고 있으며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목숨처럼 부는,
목숨처럼 부대끼는 기억들뿐이었지.

미명이다.
신음처럼 들려오는 잡풀들 숨소리
어둠이 뒷모습을 보이면
강바람을 잡고 일어나 가난을 밝히는 새벽 풍경들.
항시 홀로 떠오르는 입산금지의 산영(山影)이 외롭고
어떤 풍경도 사랑이 되지 못하는 슬픔의 시작이었지.

 

 


 

 
다시 저녁.
무엇일까 무엇일까 죽음보다 고된 하루를 마련하며
단단하게 우리를 거머쥐는 어둠,
어둠을 풀어놓으며 저물기 시작한 강,
흘러온 지 오래인 우리의 사랑,
맑은 물 샘솟던 애초의 그곳으로 돌이킬 수 없이
우리의 사랑도 이처럼 저물어야만 하는가
긴 시를 끝의 마지막 인사를
끝내 준비해야만 하는가.

바람이 불었다.
나를 흔들고 지나가던 모든 것은 바람이다.
그대 또한 사랑이 아니라 바람이다.
강가의 밤, 그 밤의 끝을 돌아와
불면 끝의 코피를 쏟으며
선혈이 낭자하게 움트는 저 새벽 여명까지도
바람이다. 내 앞에선 바람 아닌 게 없다.
그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