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9. 15. 00:14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반야심경
2012년 2~4월간 춘천 흥천사에서 혜천스님께서 강의하신 반야심경강의 8회분 전편을 올렸습니다.
혜천스님, 반야심경강의 전문
반야의 지혜! 마음으로 흐르다...
혜천 스님 강독 정리 : 문혜
□ 목차
* 들어가는 말 * 불교란 무엇인가 * 반야심경 강독 * 질문과 대답
불교란 무엇인가
사는 일이 매양 그렇다지만, 요사이 우리 살림살이도 어렵고, 환경과 건강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 현상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어려움에서 어떻게 지혜롭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3년간 일요법회를 했는데, 오늘 새삼스럽게 불교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강론을 하게 된 이유입니다.
<완당평전>이라는 유홍준 선생의 책을 보면 글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불교 또한 그렇죠. 어느 누구도 불교를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불교를 제대로 정의하지 못하죠. 보통 불교를 무신론이라고 이해하죠. 그런데 그 말이 맞습니까? 불교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스님들도 그런 얘기를 합니다. 명백히 알아야 할 것은 종교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어떠한 종교의 틀에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부터 알아야 합니다.
종교의 기원은 대략 3만 년 전 구석기 시대로 봅니다. 프랑스에서 발견된 라스코 동굴 벽화 속에는 누군가가 어떤 제의의식을 행하는 상징적인 그림이 있습니다. 라스코 벽화는 가장 오래된 벽화로 종교학자들은 이 벽화의 그림을 근거로 종교의 역사를 3만년전으로 추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라는 틀이 갖춰진 종교의 역사는 사실상 만년 전부터 입니다. 야생의 시대인 신석기 시대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종교의 기원인 신화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런 신화는 각 지역, 여러 민족 모두에게 있습니다. 야생의 시대란 프랑스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가 붙인 이름입니다. 실제적으로 종교의 기원은 만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등 종교의 형성은 지금부터 끽해야 5,000년 정도 전부터입니다. 유대교의 역사가 4,000년, 우리가 알고 있는 고등 종교, 종교다운 종교의 시작이 3,000년 정도입니다. 고대 폐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한 조로아스터를 2,600년 전의 사람으로 추정합니다. 일설에는 3,200년 전의 사람으로 늘려 잡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종교의 틀이 형성된 것은 2,600년 전의 일입니다.
그 무렵 인도에서는 불교가 출발했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조조가 있는 종교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종교는 있었습니다. 조로아스터교는 본래 있던 배화교에 조로아스터가 배합한 한 것입니다. 모든 종교가 신을 대상으로 합니다. 본래 신화시대의 신은 자연신입니다. 천둥, 번개, 폭풍우, 바람, 비 같은 것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초월적인 현상으로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인간이 이것을 신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 다음 여기에 인격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감정을 가진 신이 탄생합니다. 인도 최고의 신인 인드라신은 천둥과 번개의 신입니다. 절에 가면 신전단 중앙에 있는 신입니다. 엄격하게는 절에 두면 안 되는 신입니다. 신전단 자체가 반불교적입니다. 모든 신은 인격화된 것입니다. 이집트의 ‘아즈라마후다’ 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로 뭉쳐진 것이 오늘의 기독교입니다.
모든 신은 절대성, 영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는 신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불교를 무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미안하지만 무식해서 하는 얘기입니다. 불교 경전에는 무수한 신이 나옵니다. 불교에서는 신을 얘기(인정)하는데, 신의 절대성, 영원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좁혀서 말해 기독교와 불교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신은 영원하고 절대적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다고 합니다. 무상하다는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허망하다, 허무하다의 뜻이 아닙니다. 인생이 덧없다는 식의 뜻이 아닙니다. 원어 ‘아니짜’는 영원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그에 비해 기독교의 신은 영원하고 절대적입니다. 이들에게 속俗은 무상합니다. 즉 인간세계를 무상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신의 세계는 영원합니다. 무상하다는 것이 불교만의 얘기는 아닙니다. 주역이나 기독교에서도 무상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영원하지 않은 가운데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불교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자비, 깨달음, 열반?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경전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나가 그렇게 이해합니다. 옳은 얘기이기도 합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정확히 말한다면, 불교는 '불편한 진실'입니다. 불편한 진실이 무엇일까요? 종교에서는 항상 커튼, 장막을 쳐 놓죠. 안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 야훼는 아브라함에게 자기의 이름만 가르쳐 줍니다. 유대교 모세가 기독교신 야훼를 만났을 때, 이름만 가르쳐 주고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커튼 뒤에 숨죠. 자기를 보여 주지 않습니다. 커튼 뒤의 세계는 영원의 세계입니다.
일본 교토의 정토종 본부라는 건물의 법당은 넓죠. 아주 큰 건물로, 목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실내의 평수만 해도 한 500평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건물 안에 들어가면, 중간이 막혀 있습니다. 1M정도의 홍살문이 가로막고 있죠. 그 안으로는 일반 신도들은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스님만이 들어갈 수 있도록 기둥으로 막혀 있습니다. 항상 뭔가를 경계 지어 놓죠. 특히 기독교에서 신의 영원성을 주장합니다. 그런데 신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대답해 주지 않습니다. 커튼 뒤의 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야훼는 인간과 소통하지 않습니다. 그 중간에 천사를 두죠. 이 천사가 커튼의 앞뒤를 왔다 갔다 하면서 인간과 소통합니다.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니, 기독교의 신은 알 수 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야훼가 이름만 가르쳐 주어 본 사람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신을 만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과연 어떤 신을 만난 것인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커튼 뒤에서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존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무릎 꿇고 복종하는 일 밖에는 없습니다.
조선의 사극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어떤 신하도 대전 내관인 환관을 거치지 않고는 임금을 직접 볼 수 없습니다. 무슨 사안이 있을 때 문을 열고 임금에게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내관을 통해 임금의 지시가 떨어지고, 내관을 통해서만 임금을 만날 수 있습니다. 조선 조 어떤 당파도 대전 내관을 자기 당파로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권력을 잡을 수가 없었죠. 내시가 권력을 농단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요즘은 청와대 대변인이 대통령의 말을 마사지 한다고 하던데, 그것과 같습니다. 마치 천사라고 하는 것이 그와 같죠. 단지 인간은 장막 뒤, 커튼 뒤 신이 무엇을 하는지는 천사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부처님은 장막을 걷어내고, 장막의 뒤를 보여주죠. 와서 보라고 끌고 들어가죠. 네 눈으로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무슨 절대성, 영원성이 있는가?'라고 얘기하죠. 나는 이것이 불편한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커튼 뒤가 궁금합니다. 그러나 궁금하기는 해도 커튼을 열어 제치고 보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심지어는 아무 것도 없는 걸 보고서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부흥회의 간증을 겪은 어떤 사람의 고백입니다. 어떤 기독교 부흥회를 갔더니 목사가 간증을 행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이 야훼의 기적을 행해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눈먼 장님은 눈을 뜨고, 앉은뱅이는 일어납니다. 자기 감동이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는 성도 하나를 불러서 일어나라 하니 일어나고, 쓰러져라 하니 쓰러지더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차례로 자기가 불려갔습니다. 앞에서의 성도와 똑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 사람은 집에 돌아와서 생각했습니까? 그것이 성령일까? 그리고는 생각했습니다. 만약 그 자리에서 쓰러져라......, 라고 하는 목사의 외침에도 쓰러지지 않았더라면, "사탄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말을 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는 저주의 말이 두려워 쓰러졌던 것입니다. 그것이 어찌 자기 한 사람만의 일이겠는가? 미국의 기독교는 그 동안 제 3세계 선교에서 성령이 친히 임한다. 라고 했지만, 이 같은 행위들이 사기임을 인정했습니다. 만약 그 상황에서 쓰러지지 않으면 신앙심이 없는 것입니다. 사탄의 속삭임에 사로잡혀 지금 임하는 성령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만이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들 그래서 쓰러진 것입니다.
같지만 서로 다른 두 분의 군대 이야기입니다. 어떤 분이 원주군단에 근무했는데 좀 고지식했던 모양입니다. 자기보다 작은 고참이 이유 없이 한 방 날리는데, 맞을만해 버텼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고참이 발로 차고 깨물고 난리더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 분은 키가 백팔십 cm정도 되는 건장한 체격에 70년대에 군대를 다녀왔는데, 못하는 운동이 없어 태권도, 십팔기 등 모두 합하면 12단 정도 되는 무술 내공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특기란에 그걸 모두 적었더니 수경사에 배치되었습니다. 첫날 밤 고참이 너 바깥에 있을 때 운동 좀 했다는데, 맞는 것도 잘하냐며 패서, 이유 없이 맞았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날도 다른 고참이 불러 맷집 좋게 생겼다면 또 두둘겨 팹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하룻밤 사이에 적응력이 좋았던지 주먹이 닿는 순간 멋지게 뒤로 날라 나가떨어졌습니다. 때린 고참 본인도 의아할 정도였습니다. "짜식! 운동 좀 한다더니 별 것 아니네. 야 임마, 니가 12단이면 난 15단이야!" 그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알아서 날아가 이쁨을 받았다는 얘기입니다. 쓰러져야 할 때는 쓰러져 줘야 합니다. 난 그 기독교인이 쓴 글을 읽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근본적으로 신앙이라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쓰러져라! 라고 하면 멋지게 쓰러졌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의 속삭임에 빠지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내 눈으로 보았다고 하면, 그것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한 때 우리나라 언론에도 등장한 일본의 오옴 진리교 사건이 있습니다. 살인가스로 테러한 혐의로 교주 아사하라가 체포됩니다. 그런데 그 교의 골수분자들은 아직도 교주가 일본 정부의 음모에 빠져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믿고 있다고 합니다. 아사하라가 결백하다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실이 밝혀졌는데도, 진실을 믿지 않고 불편해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의 영원성과 절대성 앞에 우리는 복종할 뿐입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100년 정도 삽니다. 100년 넘게 사는 사람이 많은 걸로 조사된 장수국가 일본이 요즘 발칵 뒤집어 졌습니다. 죽은 뒤에도 연금을 타기 위해 사망 신고를 하지 않는 등 고령자 숫자가 부풀려졌다는 것입니다. 전수조사를 해보면 일본이 장수국가라는 것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영원한 존재, 즉 영원성과 절대성이 있는 것에 대해, 나도 영원성을 얻고 싶은 것입니다. 보상받고 싶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복종하고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불교는 처음부터 오픈되어 있습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감추죠. 커튼 뒤는 보여 주지 않습니다. 커튼 뒤는 성스러운 곳에 속하여서, 속된 인간은 볼 수 없습니다. 불교는 아예 커튼을 달지 않죠. 거기에는 절대성, 영원성이란 없습니다. 영원하지 않은 가운데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변화하는 가운데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신이라는 존재도 영원성이 없습니다. 불경에 보면, 신도 유한한 존재입니다. 신도 언젠가 깨진다는 것은 영원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맹물과 같죠. 맹물은 맹숭맹숭 하잖아요. 약수터에 약수를 한 말 먹는다고 갈지자 걸음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맹숭맹숭하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약수에 절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강원도 영월 주천이라고 하는 마을이 있습니다. 요새 소고기로 유명한 마을입니다. 여름이라 더워서 그런지 소도 가죽을 벗고 몰려들고, 겨울이 되면 인간이 추울까봐 가죽을 벗어주고 몰려듭니다. 그러다 보니 벗은 소와 놀려는 인간 또한 많이 몰려드는 곳입니다. 주천이라는 고장의 전설이 있습니다. 주천酒泉이라는 우물이 말 그대로 술이 샘솟는 우물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술 사랑하는 주당들이 모두 살고 싶은 동네입니다. 그런데 이런 전설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것처럼 어떤 인간이 혼자 먹으려 해서 그 우물이 말라 버리는 것입니다. 술은 한 잔만 먹어도 자극적이고 격렬합니다. 술의 종류도 여러 가지여서 맥주 소주 등 다양하며, 그 도수 또한 그렇습니다. 소주는 40-50도 하는데, 증류를 거듭하게 되면 도수가 높아져 독해집니다.
불교는 물과 같죠. 마시면 시원한데 맹숭맹숭합니다. 술은 먹으면 자극적이죠. 신을 믿는 종교는 마치 술을 먹이는 것과 같습니다. 강렬합니다. 강렬한 것을 먹으면 자기 통제가 안 됩니다. 내 자신이 내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마약, 환각물질, 술이 그러한 것들입니다. 나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은 내 자신이 누군가의 지배 하에 있는 것입니다. 물은 맹숭맹숭합니다. 내가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전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의지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유의지와 동시에 절대적인 힘에 복종하려는 복종의지가 그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자유롭고 싶은 자유의지와 동시에 절대적인 것에 복종하는 복종의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권력자에게 복종함으로서 편안해지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가지고도, 자유를 두려워하고, 진실을 알고도 진실을 두려워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내가 몰랐어야 하는 것이 인생을 살다 보면 많지 않습니까? 알아서 불편한 것 말입니다. 우리는 그럴 때, 때에 따라 그걸 회피하고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모세는 신 야훼를 만났을 때, 두려워서 바라보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을 바라보기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우리를 끌고 가서 그걸 보게 하죠. 어쩌면 부처님이 가장 무서운 분입니다. 진실을 보여주는 그 사람이 가장 두려운지도 모릅니다. 부처님은 커튼 뒤를 보여 줍니다. 아예 커튼을 치지도 않죠. 이것은 세상의 상식을 뒤엎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세상의 사고와 인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는 신이 영원하다고 말합니다. 신의 절대성을 주장합니다. 인간은 거기에 복종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저 남의 짐 머슴살이와 같습니다. 머슴은 편합니다. 주인 집 농사가 풍년인지 풍년이 아닌지에 상관할 바 없습니다. 머슴의 입장에서는 달라질 것이 없으니까요. 조선의 선비는 노동하지 않습니다. 꽃밭은 매도 곡식밭은 매지 않습니다. 전남 함평의 한 유명한 선비는 보리타작을 할 때 손도 까딱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바쁜데 점심밥은 꼬박 뜨신 밥을 차려야 합니다. 하루는 아내가 보리를 널고 밭일을 나갔는데 갑자기 소낙비가 왔습니다. 그런데도 보리를 걷지 않아 보리가 빗물에 몽땅 떠내려가 버렸습니다. '선비가 어찌 소낙비가 온다고 보리를 걷는가?" 했다나요. 이 양반은 부인을 둔 게 아니라 종을 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부인은 부엌에서 밥을 먹고, 자신은 상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꽃밭은 본인이 손수 맨다는 것 아닙니까. 조선 세조 때 강희안의 <양화소록(養花小錄>은 선비가 꽃을 가꾸는 얘기입니다. 인간의 사고는 이렇게 재미있습니다. 조선의 선비가 가난한 이유는 종들이 농사를 짓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짓는 농사는 자영농 소출의 절반밖에 되지 않습니다. 종이 무슨 이유로 관계도 없는 논밭에 열심히 하겠습니까. 그저 지시만 받고 움직일 뿐입니다.
자유는 내가 다 결정하고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다 감당하고 결정하여 잘못되었을 때는 쪽박을 차게 됩니다. 인간은 사실 자유의지보다 복종의지가 강합니다. 절대왕권이나 정부에 맞서 싸운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언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으로 보이지 않는 절대성, 신에게는 복종합니다. 신을 만난다는 접신도 모두 자신의 인식일 뿐입니다.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은 내부의 청각일 뿐이며, 신을 보았다는 것도 내부의 시각일 뿐입니다. 어느 절에서 관세음보살 기도를 하면 뭘 준다는 것도 내부의 시각입니다.
고대의 신은 자연의 현상입니다. 자연은 그것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바람, 천둥, 번개, 비의 여러 현상들이 그렇습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의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즉 우리가 통제할 수 없습니다. <삼국지>에 보면 조조가 유비에게 묻습니다. 천하의 영웅은 누구인가? 유비는 여포, 원소, 유포, 유장 등을 꼽죠. 조조가 말합니다. "아니다. 천하의 영웅은 바로 너!" 유비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합니다. 아이고! 살아남지 못하겠구나하고 생각하죠. 유비는 좋은 말로 하면 덕이 많고, 나쁜 말로 하면 임기응변이 능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자 유비가 술상 밑으로 숨죠. '나는 천둥이 너무 무서워!'하면서 말이죠. 이 때 조조가 멸시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사람을 잘못 보았다는 듯이 말이죠. 삼국지에 보면, 그 다음 날 유비는 처자식을 버리고 자기만 살겠다고 말을 타고 도망치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3만 년 전, 천지 하늘에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들고 소낙비에 천둥 번개가 칠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머리를 박고 숨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요새도 천둥 번개를 무서워 합니다. '마른하늘에 벼락 맞을 X'는 아주 무서운 욕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천둥 번개는 아주 무서운 신입니다. 어떤 부족에게는 악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악을 달래려 뇌물을 바치기도 하죠. 인간 세상과 다를 바 없습니다. 뇌물을 바쳐 이쁨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자연현상을 인간의 사고로 그려냅니다. 언제나 찾아온다는 것도 그 곳에 절대성과 영원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대의 종교의식은 환각약물을 먹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마초 정도가 아니라, 인도에서는 광대버섯, 멕시코 같은 곳에서는 선인장의 환각물질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면 세상이 황홀해 보입니다. 그 때 종교의식을 치르는 거죠. 그러면 신도 만나고, 신은 좋은 소리도 들려주겠죠. 그래서 고대의 명상이 사실 그렇습니다. 요기들은 거의 숨을 안 쉬고 가사 상태에 이릅니다. 그러면 뭔가 보이죠. 우리가 아이들 놀이로 그저 안 죽을 만큼 목을 조르기도 합니다. 그 순간 희열이 강합니다. 문제는 너무 강하면 돌아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술 한 잔이 두 잔, 세 잔 되어 결국 집에 못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종교의 출발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먹었는데, 뭔가가 보이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커튼을 열어젖히는 것은 그 곳에는 영원성과 절대성이 없다는 것을 부처님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불교는 신을 믿느냐 안 믿느냐를 초월해 있습니다. 즉 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를 넘어서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그 영원성을 제거하면 인간의 카테고리가 열려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육두윤회라는 톱니바퀴가 있을 뿐입니다. 어떤 것도 영원성을 지니지 못합니다. 맞물려 돌아갈 뿐, 영원성, 절대성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 "이것은 상식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바라문으로부터 세상을 혼란시키고 어지럽힌다고 비난받는 것입니다.
본래 불교는 인도 사회에서 반힌두교적으로 시작했습니다. 기존의 모든 틀을 해체한 것입니다. 해체한다는 것은 장막을 걷고 커튼을 없애는 것입니다. 불편한 진실입니다. 커튼 너머에는 어떤 영원성과 절대성도 없다는 것입니다. 절대성, 영원성은 네 사고 속에 있다는 것이죠. 인간은 절대로 버릴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생각입니다. 머리 속에 든 것을 누가 와서 없앨 수는 없습니다. 자기 자신도 없앨 수 없습니다. 인간은 생각을 없애지 못합니다. 인간의 생각은 변화시킬 수는 있지만, 없앨 수는 없습니다. 네 사고가 영원성과 절대성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돌아오면, 불교를 무신론/ 유신론 그런 범주로 규정지으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불교는 신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신의 영원성, 절대성을 거세한 것입니다. 신의 영원성, 절대성을 부정하죠. 기독교는 신의 영원성과 절대성을 주장합니다. 그리고는 장막 뒤에 숨기고는 보여주지 않죠. 마치 양반과 상민의 중간에 마름이 있듯이 신과 인간 중간에 매개를 통하게 합니다. 사또 밑의 6방 관속은 월급이 없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을 등쳐먹고 삽니다. 양반들이 좋은 제도를 고안한 것입니다. 직접 충돌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마름이나 육방 관속을 두고, 좋은 일이면 자기 것으로, 나쁜 일이면 여기로 미뤄버립니다. 불교는 부처가 중생이고, 중생이 부처입니다. 중생과 불교가 같죠. 거기에는 어떤 장막이나 베일도 없습니다. 바로 보고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불교의 성격을 이해해야, 그리고 종교의 성격을 이해해야 합니다. 종교는 야생의 시대에 출발해, 지식의 시대에 꽃 피우고, 지금은 지성의 시대로 들어가는 단계입니다. 토마스 아퀴니스처럼,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주장은 더 이상 존립하기 어렵습니다. 불교가 지향하는 것은 지혜의 시대입니다. 지혜의 시대에 이르면, 비로소 인간은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야생의 시대는 길고, 지식의 시대는 1만년, 지성의 시대는 더 짧습니다. 지혜의 시대에는 종교가 필요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내가 보는 견해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불교란 결론적으로 불편한 진실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진실을 원하지만, 진실을 알았을 때는 불편합니다. 환각물질로 희열을 보려면 그 중간 과정이 고통스럽습니다. 그것과 같습니다.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 五蘊皆空 度一切苦厄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 故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 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故知 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 一切苦 眞實不虛 故說 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번역: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이 깊은 지혜의 완성을 수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보고, 일체의 고를 벗어났느니라. 사리자야!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 그대로가 공이요, 공 그대로가 색이다. 수상행식도 또한 그렇다. 사리자야! 이 모든 존재의 공한 특성은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더러워지지도 않으며 깨끗한 것도 아니다.(더러움도 아니고 깨끗함도 아니다.)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나니, 그러므로 공 속에는 물질인 몸도 없고, 마음의 작용인 수상행식도 없고, 눈 귀 코 혀 몸 마음도 없고,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대상도 없다. 눈의 영역도 없고, 내지 마음의 영역도 없다.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의 소멸도 없고, 내지 늙음과 죽음도 없고, 또한 늙음과 죽음의 소멸도 없다. 고집멸도도 없고, 지혜도 없고, 또한 지혜의 증득도 없다. 지혜를 얻을 바 없는 까닭에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는 고로 마음의 장애가 없다. 마음의 장애가 없기 때문에 공포가 없으며, 전도몽상을 벗어나 열반을 증득하니라.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증득하시니라. 그러므로 알라, 반야바라밀다라는 크게 신묘한 주문이며, 큰 지혜의 주문이며, 깨달음의 주문이며, 비교될 수 없는 주문이다. 능히 일체의 고를 제거 하나니라. 진실하여 거짓되지 않으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설한다. 바로 주문을 설하나니, 건너갈 수 있는 이여, 건너갈 수 있는 이여, 저 편 언덕에 건너갈 수 있는 이여, 저 편 언덕에 건너갈 수 있는 이여, 깨달음이여 행복할지니.
강론을 시작하기 전에 같이 하시고 시작하겠습니다.
나모 따싸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싸 (세번)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 sambuddhassa , 거룩하신 부처님께 두 손 모아 머리 숙여 예경 올립니다.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원래 반야심경은 제목이 없습니다. 이건 번역을 하신 현장 스님이 붙인 거죠. 마하(摩訶)라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다 시피 '크다~' 라는 뜻이죠. 근데 무엇이 큰가요? 마하는 크다, 높다 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이 우주겠죠. 우주보다 더 큰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왜 그러냐면 마음은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가장 크지만, 또 가장 적은 것이 마음이기도 해요. 왜 그러냐면, 인간의 마음은 모든 것을 담을 수 있지만, 무언가를 용납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담을 수 없죠.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가장 크기도 하고 동시에 가장 작습니다. 크고 작은 것은 비대칭 같지만은 사실 크고, 작음은 대칭이에요. 왜냐면 크고 작음이 있기 때문에 대칭관계가 유지되는 것이지요. ‘마하’라는 것은 크다! 라는 것이지만, 동시에 가장 적은 것이기도 해요. 대칭이 유지되려면 비대칭이 있어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대칭이 유지되는 거예요.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라고 하는 말은 지혜의 완성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반야바라밀다를 현재형으로 보면, '지혜의 완성'이 되고, 또 과거형으로 보면 '완성된 지혜'가 되죠. 그래서 반야바라밀다는 완성된 지혜, 완전한 지혜이기도 해요. 그렇지만 진행형으로 보면, 현재 진행형으로 보면, 지혜의 완성이에요. 아직 완성된 건 아니에요. 지혜의 완성 도중에 있는 거죠. 즉 반야심경은 지혜를 완성하는 도중에 있는 걸 이야기하죠, 그래서, 여기의 심(心)은 마음이라고 하는 뜻이 아니고, 핵심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원래 중국 고어에서는 마음 심心은 심장을 뜻하는 말이에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음이라는 말을 중국 고대에서는 성性이라고 하는 말을 썼어요. 마음 성자(性). 그래서 중용(中庸)에 녹슬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다. ‘천명이라는 것은 바로 성이다’라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보통 이것을 성명론(性命論)이라고도 이야길 하는데. 여기에서 심은 핵심이에요. 경(經)은 가르침이라고 하는 뜻이고요.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은 우리가 흔히 관세음보살이라고 부르죠. 관세음보살. 관세음이라고 번역한 것은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이라고 하는 중국 요흥의 진나라 때, 우리가 보통 전진, 후진이라고 부르는데, 전진왕 부견이 고구려에 불교를 전해줬다 그러잖아요. 전진왕 부견이 동진을 공격하다가, 부견이 80만 대군으로 동진을 공격했는데, 10만 동진군의 기습을 받아 가지고 부견이 거기서 죽어요. 그의 아들도 죽고. 그러고 나서 그의 부하 장수였던 요흥이 권력을 장악해서 진나라를 세우는데, 우리가 그걸 후진이라 그러죠. 구마라집은 바로 그 후진 때 사람인데, 그는 관세음이라고 그랬고, 현장스님은 관자재보살이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관세음보살이나 관자재보살은 같은 뜻인데, 이것은 부처님의 자비를 인격화시킨 거예요.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 오온개공)라고 그랬죠. ‘깊은 지혜의 완성을 수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본다’라고 그랬습니다.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密多時) 심(深)은 깊다고 하는 뜻이니까. 부처님은 이렇게 표현 하셨어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심심미묘(甚深微妙)한데, 어찌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겠는가? 부처님이 처음 깨달음을 얻었을 때, 이렇게 표현하죠. 그래서 '깊다'라고 하는 것은 '심심미묘하다'라는 뜻이에요.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密)는 아까도 얘기했지만, 지혜의 완성이에요, 그러니까, 관자재보살이 심심미묘한 지혜의 완성을 행(行)은 행한다고 말할 때, 수행(修行)을 말하죠. 우리가 실천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실천이라는 것이 수행을 뜻하니까. 시(時), 때에. 관자재보살이 깊은 수행의 완성을 할 때에.
조견 오온개공(照見 五蘊皆空)이다.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보고. 조견(照見)이라는 말은 비추어 본다라는 얘기걸랑요. 비추어본다라고 하는 것은 뭐냐며는, 부처님이 라훌라한테 이렇게 말씀하시죠. "라훌라여, 생각할 때, 말할 때, 행동할 때, 거울에 비추어 보라!" 거울에 비추라는 것은 마음의 거울을 말해요. 즉 마음에 비추어 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조견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거울에 비추는 걸 뜻하죠. 우리가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어요. 우리는 거울은 보지 않는다는 거예요. 우리가 거울 앞에 서는 것은 나를 보기 위해서 서는 것이지, 거울을 보기 위해서 서진 않아요. 그런데 우린 거울을 본다고 하는데, 거울을 보지 않아요, 나를 보지. 조견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보는 거예요.
무엇으로? 사티(sati)로. 그래서 조견이라고 하는 말은 사티라고 하는 말과 같아요. 사티라는 말은 불교 수행에서 가장 핵심적인 용어 중의 하나인데, 사티라는 말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굳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번역한 것을 보면, 마음집중이라고도 번역하고, 마음 챙김이라고도 번역하는데, 나는 '깨어 있음'이라고 보통 쓰죠. 왜냐하면 사티라고 하는 말의 반대말은 미망(迷妄)이예요. 미망은 혼돈의 상태걸랑요. 미망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착각하는 걸 말해요. 그래서 사티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사티라고 하는 말은 지혜라고 하는 뜻과 같아요, 사실. 사티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깨어 있는 상태'. 미망의 상태가 아니라 깨어있는 상태를 말하죠.
조견이라고 하는 말을 우리가 이해를 해야 하는데, 중국 남송 때 굉지 정각(宏智 正覺)이라고 하는 스님이 있죠. 우리가 보통 천동 정각이라고도 하는데, 천동(天童)산 경덕사(景德寺)에서 30년간 주지를 했기 때문에 천동이라고도 하고, 굉지는 돌아가신 후에 황제가 준 시호예요. 그래서 굉지 정각이라고도 하고, 천동 정각이라고도 하는 스님이 있는데, 이 분(天童 宏智 正覺 : 1091~1157) 은 중국 조동종, 우리가 흔히 묵조선(默照禪)이라고 하는 조동선의 확립자죠. 이 굉지 선사가 묵조선이라고 하는 것을 확립했는데, 그 분이 묵조명(默照銘)이라고 하는 것을 지었어요. 딱 288자. 반야심경이 255글자걸랑요. 근데 이 굉지 선사의 묵조명은 288자예요.
묵조명에 보면 뭐라고 얘기 하냐 하면 '묵묵히 일체의 언어를 끊고 좌선 할 때, 불성의 영묘한 작용이 분명히 깨달음의 세계로서 그대로 드러난다.' 이게 지금 묵(默)을 굉지 선사가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묵묵히 일체의 언어를 끊고 좌선 할 때, 불성의 영묘한 작용이 분명히 깨달음의 세계로서 그대로 드러난다.'라고 했어요. '비출 때에는 확연하게 텅 비어 있지만, 그 불성의 본체는 영묘히 작용하고 있다.' 이건 지금 조(照)를 서명하고 있는 거걸랑요. 그러니깐 조견이라고 하는 말은 묵조라는 말과 같아요, 사실은. 묵조(默照)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쓰는 거예요. 묵묵할 묵(默)자와 비칠 조(照)자.
그래서 이 조견이라고 하는 말은 라훌라의 거울, 사티, 굉지 정각이 말한 묵조의 뜻하고 같아요. 여기서 공통점은 뭐냐면 나를 본다는 거예요. 비춰 본다고 하는 것은 거울을 본다는 뜻이 아니에요. 나를 본다는 거예요.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는 것이에요. 사티라고 하는 것도 대상을 보는 것 같지만 기실은 나를 보는 거걸랑요.
그리고 인제 오온(五蘊), 오온이 다 공했음을 비추어 봤다 그랬단 말이에요. 오온이라고 하는 것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예요. 이 5가지를 오온이라고 그래요. 불교의 핵심적인 개념이자 용어예요. 색(色)이라고 하는 말은 물질이에요. 물질. 동시에 우리 몸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오온이라고 할 때는 물질이라고 해석하면 안돼요. 우리 몸이에요. 근데 우리가 보통 이것을 다 물질로 해석하걸랑요, 물론 불교에서 우리 몸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로 봐요. 왜 물질로 보느냐면, 우리 인간의 육체라고 하는 것은 분자의 합성에 불과하니까요. 분자의 합성, 우리가 흔히 말하는 DNA, 단백질.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몸을 물질로 봐요. 그렇지만 우리가 오온에서는 이것을 물질로 해석하면 이해가 잘 안와요. 그냥 단순히 우리 몸 이라고 이해를 해두시죠.
그리고 수(受)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느낌이에요, 느낌. 또 우리가 말하는 감수 작용, 우리가 말하는 감성이죠. 감성작용이 수예요. 인간은 감성의 동물이죠. 인간은 굉장히 민감해요. 왜냐하면 수의 기능이 있걸랑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쉽게 상처 받아요. 인간은 감성을 건드렸을 때, 불같이 화를 내죠. 누군가 내 감성을 건드리는 것은 마치 촉수를 건드리는 것과 같아요. 정확하게 말하면 독사의 대가리를 때리는 거와 같죠. 그래서 수라고 하면 보통 느낌, 감수라고 하지만 우리가 더 본질적으로 들어가면 감성작용이예요. 마음의 기능 중에서 감성작용.......
그리고 상(想)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생각을 구성하는 기억, 연상 작용이에요. 우리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구성하는 거예요. 우리가 기억이라고 하는 말을 많이 쓰는데, 우리 기억이라고 하는 건요, 순서가 없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1살 때 입력된 기억의 정보와 80살 먹었을 때 입력된 기억의 정보가 순서로 보면 1살 때 입력된 기억의 정보가 가장 깊고, 깊이 있어야 되고, 80에 입력된 기억의 정보가 맨 끝에 있어야 되는데, 우리 뇌의 기억의 회로라고 하는 것은 좀 띨띨해 가지고 그런 게 없어요. 정확히 말하면, 두서가 없어요. 그래서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기억의 구상이에요. 연상 작용이죠. 그래서 상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생각을 구상하는 기억의 연상 작용이 상이에요.
행(行)이라고 하는 것은 의도 작용과 의지 작용이에요. 행이라고 하는 것은 의도와 의지 작용을 갖고 움직이는 것이죠.
그리고 식(識)이라고 하는 것은 상황을 인식하는 작용. 즉 판단과 분별 작용이에요. 그래서 색수상행식, 오온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화시키면 몸과 마음이에요. 색은 몸이고 수상행식은 마음이에요. 그런데 붓다가 마음을 4가지 작용으로 설명한 거예요. 첫 번째는 감수, 느낌인 감성작용, 두 번째는 생각을 구성하는 기억의 연상 작용, 그리고 의도와 의지의 작용, 그리고 상황을 인식하는 분별과 판단의 작용, 이렇게 4가지로 구분한 거예요.
지금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남방불교에선 마음을 86가지 작용으로 구분해요. 그리고 우리 대승불교, 유식불교에서는 마음을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6식에, 7식 마나식, 8식 아뢰아식, 9식 마타나식, 나중에 11식까지 선정을 하는데, 보통 8식까지 이제 이야길 하죠. 식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작용을 뜻하는 말이걸랑요. 그래서 보통 유식에서는 제8 아뢰아식, 보통 여래장식, 함장식이라고도 하는데, 보통 우리가 말하는 잠재의식을 말하는 거죠.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굉장히 중요하게 다뤘어요. 왜 중요하게 다루었냐면,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라고 얘기하죠. 왜 마음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냐면,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마음을 발견했기 때문에 인간이에요. 만약에 인간이 마음을 발견하지 못했으면, 그저 우리는 보노보노나 침팬지나 오랑우탄 등등하고 지금 사돈 맺고 살아야 돼요. 근데 우리가 마음을 발견했기 때문에 인간이걸랑요.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마음이 출발점이라고 한 거에요. 그래서 오온이라고 하는 것은 색, 수, 상, 행, 식을 말해요.
여기 공(空)이라고 하는 말이 나왔잖아요. 공이라고 하는 말이 굉장히 어려운 말입니다. 우리가 공을 어떤 분들은 무(無)라고 해석하고, 어떤 분들은 수학에서 말하는 제로(0)라고 주장을 하는데, 수학에서 제로일 것 같으면, 그냥 제로라고 이야기하고, 무일 것 같으면 무라고 이야기하지, 왜 공이라는 말을 썼겠어요? 공이라고 하는 말은 무의 개념이 아니에요. 사실 중국에서는 이걸 무의 개념으로 봤던 것 같아요, 내가 보니까. 무의 개념으로 봤는데, 이 무라고 하는 말은, 이 공이라고 하는 말은 무의 개념이 아니에요.
이 공이라고 하는 말을 이해하기가 굉장히 쉽지가 않아요. 이 공이라고 하는 말은 대승불교에서 주로 공관 철학에서 이걸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데, 공이라는 말은 정확하게 말하면 무언가가 비어 있는 것을 말해요. 물질적으로 무엇이 비어 있는 것. 정신적으로 무엇이 비었느냐 않느냐는 우리가 논한다는 것은 좀 그렇지 않아요? 대체적으로 보면 물질적인 것이죠. 그래서 우주가 비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거걸랑요. 우리가 공간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들어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공이라고 하는 개념은 우리가 쉽게 이해한다면, 공중관(空中管)의 개념으로 보면, 아마 좀 아주 가깝지 않은가 해요, 공중관. 공중관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인체에 공중관이라고 하는 것이 있걸랑요. 무엇을 공중관이라고 하냐면 입에서부터 식도, 위, 장, 그리고 항문까지를 공중관이라고 불러요. 공중관은 뭐예요? 그야말로 비어 있어요.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인간이 살아서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공중관이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입에서 항문까지 비어 있기 때문이에요. 입으로다 들어가서 항문까지 가보세요? 비어 있어요. 우리가 비어 있기 때문에 음식을 섭취하죠. 그러면 그 음식이 장으로 내려가서 장에 흡수되잖아요. 그리고 배출돼요. 비어있기 때문에. 근데 이 공중관이라는 것은 비어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 분명히 우리가 있잖아요. 있는데, 공중관 내부는 비어 있어요. 입에서 항문까지는 비어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존재할 수 있는 거예요. 우리가 공이라고 하는 개념을 쉽게 이해한다면, 공중관의 개념으로 보면 돼요.
그래서 이 공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옛날식으로 설명하면, 체성이 없다. 체성(體性), 몸 체자, 마음 성자 써서 체성. 체성이라고 하는 말은 어떤 씨앗 같은 것은 없다는 얘기예요. 마치 양파를 까는 것처럼. 양파를 까서 들어가면 어떻게 돼요? 없죠. 파초를 까면 어떻게 돼요? 없죠. 파도 까보세요? 없어요. 그렇지만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걸랑요. 그래서 우리가 이 공이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불교의 흐름을 알아야 돼요. 왜 흐름을 알아야 되냐 하면, 대승불교 시대에 이 공이라는 말을 썼어요. 대승불교 이전에 물론 근본불교에서도 공이라는 말이 나오긴 나오지만, 공이라는 말을 중요한 개념으로다가 다룬 것은 나가르주나예요. 우리가 말하는 용수(龍樹).
그래서 나중에 또 이야기 되겠지만, 공이라는 말 전에 어떤 용어를 쓰냐면, 계체(戒體)라고 하는 말을 쓰죠. 불교는 기본적으로 오온(五蘊)은 무아(無我)라고 하는 논리 위에 서 있어요. 오온은 무아다. 지금 오온 개공이라고 하는 것도 오온은 무아라고 하는 뜻이에요. 근데 무아라는 말을 안 쓰고, 대승불교 시대에 오면 공이라는 말을 써요. 아마 무아라고 하는 개념 자체가 좀 부담스러웠던 것 같아요. 그래서 공이라고 하는 말을 쓰는데, 그 전에는 계체라고 하는 말을 쓰걸랑요. 누군가가 출가를 해서 비구계를 받게 되면, 계체라고 하는 것이 형성된다고 주장하는 부파가 있었어요. 계를 파하든 안 파하든, 그 계를 받게 되면 계의 체성이 생기는데, 그것은 영원하다. 이것이 계체론(戒體論)이에요. 이 계체론 이외에 설일체유부에서 주장하는 것이 법체론(法體論)이에요. 법의 체성은 영원하다. 삼세에 걸쳐서 영원한 것이다. 그런데 이 계체나 법체나 다 영원하다는 거걸랑요. 근데 불교는 어떤 영원성도 인정하지 않아요.
그래서 이 공이라고 하는 말은 부파불교에서 주장하는 그런 체성이라고 하는 것을 공격하기 위해서 공이라는 말을 사실 써요.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그런 체성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는 거예요. 계체가 되었든, 법체가 되었든 그런 체성이라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어떤 불변의 영원한 씨앗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그것이 공이라고 하는 용어를 쓰게 된 이유에요.
五蘊皆空
五蘊無我 ↓ 人無我 法無我 ↓ ↓ 我空 法空
無 自 性
표를 보면,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되어 있고, 오온무아(五蘊無我)라고 되어 있죠. 오온개공이라고 하는 말은 오온무아라는 말과 같아요. 사실 반야심경은 조견 오온개공으로 끝나요. 왜 그러냐 하면, 나머지는 사실 이것을 부연 설명하는 거예요. 오온개공이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아까도 얘기했듯이 불교는 기본적으로 오온은 무아라고 하는 거예요. 오온, 색수상행식은 무아다. 이건 부처님이 일관되게 강조하는 건데, 오온이 무아라고 하는 말은 오온이 무상이라는 말과 같아요.
불교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의 골격이 있어요. 기둥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무상과 무아예요. 무상과 무아가 불교의 골격 이예요. 무아라고 하는 것은 아트만(atman)이 아니라는 하는 뜻이에요. 우리가 무아라는 말을 아트만이 없다고 해석하면 안돼요. 아트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지, 아트만이 없다고 하는 의미가 아니에요. 아트만이 뭐예요? 자아사상이죠.
불교를 이해하려면 필수적으로 인도의 사상에 대해서 정통해야 돼요, 사실은. 인도의 사상을 모르면 불교를 이해할 수 없어요. 그래서 오온은 무아다. 오온이라고 하는 것, 색수상행식, 이 다섯 가지에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색도 나라고 할 수 없고, 수도 나라고 할 수 없고, 상도 나라고 할 수 없고, 행도 나라고 할 수 없고, 식도 나라고 할 수 없다. 아니라는 것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나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왜 나라고 할 수 없다고 이야기 하느냐 하면, 나라고 하는 것은 인도 고대 브라만들이 뭐라고 주장 하냐 하면, 나라고 하는 것은 영원한 것이다 그랬걸랑요. 나라고 하는 것은 영원해서 불생의, 불멸의 존재예요. 이거는 지옥 불에 들어가도 아트만은 영원해요. 아트만은 불변의 존재예요, 영원해요. 근데 불교는 기본적으로 영원성을 인정하지 않걸랑요.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영원한 자아라는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무상과 무아라는 것은 병렬 교차해요. 무상과 무아는 분리해 놓고 설명할 수가 없어요. 무상하기 때문에, 즉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영원한 나라는 것이 존재할 수가 없어요. 영원한 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영원한 것은 없어요. 무상이라고 하는 말은 변화한다는 말이에요. 변화하면 어떻게 되죠? 변화하면 어떻게 돼요? 새로워지잖아요. 우리가 무상이라고 하는 용어를 주역에서 이야기하는 변화처럼 생각하면 안돼요. 주역에서 이야기하는 변화와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변화는 달라요. 불교에서 말하는 변화는 뭐냐 하면, 흐른다고 하는 뜻이에요. 흐른다 이 말이에요.
우리가 한번 보자고요. 몸이라고 하는 것은 뭐예요? 분자의 합성이잖아요. 그래서 분자의 합성과 분자가 분해되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 인간이걸랑요. 분자의 합성과 분자의 분해과정이라고 하는 것을 뭐라고 설명하느냐 하면, 우리가 흐름이라고 설명할 수 있어요, 흐름. 우리의 이 단백질이라고 하는 분자가 합성된다 말이에요. 그리고 분해되잖아요. 그 과정이 흐름이에요. 우리는 언제나 흐름 속에 있는 거예요.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왜 그러냐면, 우리는 언제나 흐름 속에 있죠. 내 그 전에 강론에서 이야기 했잖아요. 우리는 언제나 과정 속에 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인과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왜 그러냐면, 과라고 하는 것은 결과인데, 인간세계에는 결과라고 하는 것은 없어요. 오직 과정만 있어요. 하나의 과정에서 또 하나의 과정으로 흐르는 것이지, 결과물이 아니에요. 내가 목표가 서울대다. 서울대 가서 졸업했다고, 그게 결과라고요? 아니죠, 과정이죠. 내가 서울대 가는 건 왜 서울대 가요? 그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요. 자아실현이니 뭐니 그거는 참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고, 폼 나게 나 잘 먹고, 잘 살겠다. 그래서 서울대 가는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은 그저 잘 먹고, 잘 살면서 나를 복제하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결국 복제한다는 게 뭐예요? 분자를 새롭게 전이시키는 것. 그러니까 흐름 속에 있는 거예요. 우리는 언제나 흐름 속에 있는 거예요. 무상하다는 말은 뭐냐면, 흐름 속에 있다는 얘기예요. 흐름 속에 있다. 영원하게 어떤 , 무엇이 결정 지워져 있어서 영원하게 무엇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언제나 영원한 흐름 속에 있다는 거예요. 하나의 과정에서 또 하나의 과정으로 넘어가고, 분자와 분자가 전이되고....... 다른 거 없어요.
요새, 마음공부라고 하는 표현을 쓰는 스님들도 많아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교에서는 마음공부라고 하는 말을 안 썼어요. 요건 도(道)쪽에 있던 분들이나 쓰던 말인데, 불교에서는 마음공부라는 말이 성립이 안돼요. 왜 성립이 안 되냐면, 오온은 무아이기 때문에. 마음공부라고 하는 말이 성립하는 것은 마음을 아트만화 시키기 때문이에요. 실질적으로 중국 선종에서 마음을 아트만화 시키고 있고, 우리나라 불교에서도 마음을 아트만화 시키고 일걸랑요. 마음을 자이처럼 인식하죠.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이야기 하듯이 흐른다고 했어요.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우리의 몸이라는 것이 뭐예요? 흐름 속에 있다고 이야기 했잖아요. 분자와 분자의 흐름 속에 있는 거예요, 우리 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몸과 떼어 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미안한 얘기지만, 마음을 작동시키는 기계는 우리 뇌예요. 우리 마음이 우리 육신과 분리되어 있다면 왜 치매가 옵니까? 아주 더 직설적인 표현으로 모가지가 떼어져도 움직여야 될 거 아니야? 모가지가 떨어지면 다 끝이잖아. 그러니까 마음공부라고 하는 말은 불교에서 성립되지 않아요. 왜? 마음이라는 것은 아트만처럼 어떠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흐름과 흐름 속에 있기 때문에. 몸도 흐름 속에 있고, 마음도 흐름 속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무상과 무아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병렬 교차 되죠. 병렬 교차된다고 하는 말을 쓰니까 조금 뭐 그런가요? 이진법을 연상시켜 보세요. 무상과 무아는 이진법처럼 병렬되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오온의 무아와 오온의 무상은 이진법의 원리로 이해하면 가장 쉬워요. 그래서 무상과 무아는 분리해서 우리가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불교식으로 말하면, 오온이라고 하는 것은 무아예요. 왜? 어떠한 아트만, 우리가 말하는 자아나 영혼이나 이런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예요. 오온이라고 하는 것은 몸이 되었든, 마음이 되었든 흐름 속에 있는 거예요. 분자의 흐름 속에. 이것을 물질이라고 우리가 이야기 하죠. 몸을 물질이라고 보는 이유는 그거예요. 무리 몸은 분자의 흐름이걸랑요. 이거는 현대 분자 생물학에서도 밝힌 것이지마는. 분자생물학에서도 우리 인간이라는 것을 분자와 분자의 흐름일 뿐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래서 사념처완(四念處觀)이라고 하는 것이 있잖아요. 보통 우리가 위빠사나라고 하는 거. 위빠사나라고 하는 것은, 오온이 무아임을 확인하는 것이 사념처관이예요. 신수심법(身受心法) 사념처라고 하는 것은, 신수심법이라고 하는 것이 뭐예요? 오온이잖아요. 신(身)이라는 것은 몸이고, 수(受)라는 것은 색수상행식의 수(受)고, 심(心)이라고 하는 것은 상행(想行)심이고, 법(法)이라고 하는 것은 오온 자체를 말해요. 그러니까 위빠사나라고 하는 것은 오온이 무아라고 하는 것을 확인하는 거예요. 정확하게 말하면, 불교수행이라는 것은, 오온이 무아이고, 오온이 무상한 것을 확인하는 것이 위빠사냐 수행 이예요. 뭐 몸을 보느냐, 마음을 보느냐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런데 아쉽게도 위빠사나 한다는 사람들 마음공부니, 마음을 보느니 이런 헛소리를 해 싸요. 기본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불교를 모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불교의 골격이라고 하는 것은 무상과 무아가 병렬 교차하는 거예요. 그것을 확인하는 거예요. 무아를 확인하면 어떻게 되나요? 자의식이 해체되잖아요. 무정물(無情物)은 자의식이 없어요, 인간만이 자의식이 있어요. 자의식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상처받고, 화나는 거요. 내가 길을 가는데 하! 저 스님 멋지네! 그 날 나 기분 좋아요. 아따, 겁나게 못생겼구먼! 이래 보세요. 기분 되게 나빠요. 왜 그러냐면, 나라고 하는 자의식이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자의식이 있기 때문에 함께 하기 어려운 거예요. 왜 부부싸움 하는지 아세요? 자의식 때문에 싸우는 거예요. 내 감성을 건드리걸랑. 충성을 외치면 싸울 일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충성 안 한다고 그러니까 싸우지, 충성하라고. 내가 똑똑한데 네가 왜 충성 안 하냐? 무아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무아라는 것을 확인하면 자의식이 해체되어 버리죠. 자의식이 해체되면 거기에서 자비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오온이 무아라고 하는 것은 사념처관이예요. 오온개공이라고 하는 것도, 오온이 무아임을 보는 것이 오온개공이에요. 그래서 오온이 다 공했음을 비추어 봤다고 그랬잖아요. 거기에 표에다 오온무아라고 되어 있잖아요. 요거는 어떤 분이 질문을 했는데, 내가 설명을 해드릴 필요가 있어 가지고 조금 부연해 설명을 드립니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오온무아를 얘기해요. 부처님도 오온무아를 굉장히 강조해서 얘기했어요. 미안한 얘기지만, 무아라고 하는 말은 독립되어 쓰이지 않습니다. 오온이 무아라고 하는 의미로 쓰지, 무상과 무아와 고(苦)가 삼법인(三法印)이라고 하는 것은 부파불교 시대 때 그렇게 조직화시킨 것이지, 부처님은 오온이 무아라고 표현을 써요. 우리 몸과 마음 어디에도 우리가 말하는 자아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오직 흐름 속에 있다, 라는 것이 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입니다.
오온무아라는 말은 부처님이 제시하신 것인데, 이 말이 부파불교 시대가 되면, 인무아(人無我), 법무아(法無我)로 쓰이게 돼요. 오온이라는 것이 사람이잖아요. 그러니 인무아예요. 사람은 무아의 존재라는 거지요. 법이라고 하는 말은 대상이에요. 즉 우주죠. 정확히 말하면, 나 이외에는 다 대상이에요. 내 아내도 대상, 내 남편도 대상, 내 자식도 대상, 내 부모도 대상, 다 대상이에요. 이 세상에는 딱 두 가지 존재 밖에 없어요. 나와 대상. 나와 대상 외에는 아무도 없어요. 나 이외에는 인간도 대상이고, 동물도 대상이고, 자연도 대상이에요. 오직 나만이 나예요. 그 외에는 다 대상이에요. 그러니까 나라고 하는 것이 무아라면 당연히 대상도 무아가 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부파불교에서는 인무아, 법무아라는 것을 중요한 개념으로 쓰죠. 여기서 법은 대상도 되지만, 동시에 다르마(dharma)가 되기도 하죠. 그래서 여기서 법무아를 주장하는 것은 실제로 앞에서 나온 법체에 대한 의식이기도 해요. 설일체유부에서 법체를 주장하기 때문에.
에, 이게 어떻게 보면, 복잡한 이야기이긴 한데, 대승불교 시대가 되면, 아공(我空), 법공(法空)이라는 말로 바뀌죠. 나도 공하고 법도 공하다. 아공, 법공이라고 하는 것은 중관불교(中觀佛敎)에서 주장하는 것이죠. 아공, 법공이라는 것을 유식(唯識)에서는 무자성(無自性)이라고 이야기해요, 무자성. 자성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 자성이라는 것은 자아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우리가 오온무아라고 하는 말을 본질적으로 이해를 해야 돼요. 오온무아라고 하는 말이 본질적으로 이해가 안 되면, 오온 개공이라고 하는 말이 이해가 안 되죠.
조견 오온개공이라고 했는데, 오온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실제적인 자성이 없음을, 조견했다는 거예요, 사티로. 사티로 봤다는 거예요. 어떻게? 검색해서 봤다는 예기예요. 왜 조견이라고 하는 말을 쓰냐면, 불교에서 두 가지 개념을 중요하게 쓰는데, 삔냐타(Pinnyata)와 빠라마타(Pramatta)예요. 삔냐타라고 하는 것은 환상이에요. 실재하지 않는 거죠. 그럼 빠라마타라고 하는 것은 그 실재하는 본질을 말해요. 불교에서는 자아사상을 삔냐타로 보는 거예요.
에~, 미안한 얘기지만, 우리는 아직 과거 속에 머물러 있어요. 과거 속에 머물러 있다고 한 이유는 영원과 자아니 이런 개념 같은 경우는 3,000년 전에 성립된 거죠. 근데, 현대 생물학에서 보면 인간은 분자 덩어리일 뿐이에요. 몸이 되었든 마음이 되었든, 분자가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하지요. 어떻게 보면, 우리는 3,000년 전의 가설을 아직도 믿고 있는 거지요. 그런데 붓다는 영원한 자아라는 것은 삔냐타라고 보는 거예요. 그건 삔냐타라는 거죠, 실재하지 않는 것.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거죠.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거짓이라는 뜻이죠. 다른 표현으로 하면 불선(不善)이죠, 선하지 않은 것, 악이에요. 빠라마타라고 하는 거는 뭐예요. 실재하는 거예요. 사실이고. 그것이 선이죠.
불교에서만 무아를 사실로 보는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 했듯이 인간 존재라고 하는 것은 분자의 흐름일 뿐이걸랑요. 거기에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하물며, 유체이탈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죠. 도 닦는 분들이 유체이탈 된다는 얘기 많이 하잖아요. 나도 20년 전에 도 닦을 때 보니까 어느 날 몸이 없데? 이거 다 삔냐타예요. 환상이걸랑요. 20년 전에 내가 앉아 있는데, 몸이 없어? 몸이 없는데, 지가 어떻게 살았겠어? 그건 환상이걸랑요. 정확히 말하면 뇌의 전자신호죠. 뇌가 그렇게 전자신호를 보내는 거예요. 내가 그 전자신호를 착각하고 있는 거지요.
우리가 자아라고 하는 것도, 자아 사상이라고 하는 것도 일종의 착각으로 보는 거예요. 뇌가 보내는 전자신호. 그래서 오온이 무아라고 하는 것은 인무아, 법무아를 낳고, 인무아, 법무아는 아공, 법공을 낳고, 유식불교에서는 이것을 무자성이라고 해버렸죠. 모든 것은 다 자아라고 하는 것이 없다. 뭐 이해가 가시는 가요?
조견 오온개공하니까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다. 오온이 다 공했음을 비추어 보고 나니까 일체의 고를 벗어났다 이 말이에요. 왜? 자의식이 해체되어 버리니까 고라고 하는 관념이 없어졌다 이 말이에요. 이 고라고 하는 것이 뭐냐면, 불만족스러운 것, 뒤틀려 있는 것, 동요되는 걸 말해요. 이 고라고 하는 말, 두카(dukkha)라고 하는 말은 뒤틀려 있다는 거예요. 뒤틀려 있다는 것은 뭐를 말해요. 불안정한 걸 말하죠. 뭔가가 불안정한 거예요. 안정되어 있지 않은 것을 말해요. 왜 안정되어 있지 않을까요? 착각 때문이죠.
영화 매트릭스(Matrix)를 보면, 매트릭스에 나오는 인간들이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고, 사랑하고 다 하잖아요. 근데 영화를 보면 그 인간은 통 속에 인간 건전지로 담겨져 있걸랑요. 그 통속에서 인간 건전지로서 컴퓨터에 전원을 공급하기 위한 건전지로 있는데, 컴퓨터가 프로그램에 의해서 그 통속에 있는 인간 건전지의 뇌에 전자신호를 보내는 거죠.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고, 사랑하는 것은 다 컴퓨터가 그의 뇌에 전자신호를 보내서 그를 조종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이 실재인양 그렇게 느끼게 되거든요.
영화 매트릭스 보셨어요? 이 영화가 굉장히 중요한 영화예요, 거기는 불교뿐만 아니라 기독교, 고대 조로아스터교, 힌두교나 현대 심리학, 인지 과학, 모든 분야가 다 녹아 있는 것이 매트릭스라고 하는 영화에요. 근데 매트릭스라고 하는 영화를 보면, 오직 가상의 세계에서만 안경을 써요. 현실세계에 들어왔을 때는 안경을 안 써요. 네오가 매트릭스라고 하는 프로그램 속에 들어가 있을 때만 안경을 써요. 그 밖에 나오면 안경을 안 써요. 왜 그 속에서만 안경을 쓸까요? 중요한 포인트예요. 그건 현실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현실이라는 것이 뭐예요? 실재하는 거잖아요.
우리가 착각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내 자존심이라고 하는 것도 알고 보면, 착각이걸랑요. 막말로 이 세상에 자존심 없는 인간 어디 있나? 자존심이라고 하는 건, 다른 표현으로 하면 뭐예요? 생존 본능이에요. 내가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존에 위협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에 거기에 대응하는 거예요.
대통령이 불러서, 너 총리할래? 그렇게 이야기 하면, 기분 나쁜 사람 없어요. 중국의 주은래(周恩來)는 마오쩌뚱(毛澤東) 앞에 무릎을 꿇고 보고를 했어요. 주은래가 자존심이 없어서 그런지 자존심이 있는데도 그랬는지, 그건 알 수가 없어요. 그러나 적어도 모택동과 함께 중국을 양분했다고 하는 주은래가 모택동 앞에서 무릎을 꿇고 보고를 했다는 거예요. 내 생각에는 주은래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어도 별로 자존심 상하지 않았을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모택동을 황제처럼 생각했으니까 그랬을 겁니다.
내가 자존감이 상하고, 내가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나에게 이익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나에게 이익이 주어지면 우리는 자존심, 자존감 그런 것 아무 소용없어요. 대통령 시켜 준다면 대낮에 옷 벗고 서울을 한 바퀴 돌라 그래도 돌려는 사람이 최소한 백만은 될 거예요. 그거 아무런 자존심 상하지 않아요. 부끄럽게 느끼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결국 우리가 고를 느끼는 것은 뭐냐면, 뒤틀려 있기 때문이에요. 뭐가? 미망(迷妄)에 의해서 착각과 착시죠. 자아라고 하는 것이 실재한다고 믿는 그 착각, 그 자의식. 그것이 해체되고 나니깐 자유로워 진 거예요. 왜? 하나의 흐름일 뿐이니까. 하나의 과정과 과정으로 넘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안 사안마다 열 받고, 화나고, 삿대질 할 일이 없는 거예요. 아까 얘기했듯이 서울 시내를 옷 벗고 한 바퀴 돌면 대통령 시켜준다면, 그건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에 부끄러울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근데 문제는 다른 측면에서 강요되면 다르겠죠. 그래서 오온이라고 하는 것이 공함을 비춰 보니까 모든 고액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거예요. 도일체고액은 원래 현장 스님이 끼워 넣은 거예요. 맨 뒤에 보면 능제일체고(能除一切苦 )라고 하는 말이 나오잖아요? 여기까지 끌고 가면 논리전개가 재미가 없으니까, 현장스님이 오온개공에서 결론을 끝내고 다시 시작을 한 거예요. 실질적으로 이 반야심경이라고 하는 것은 번역이지만 동시에 현장 스님의 창작 작품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원전보다 현장 스님의 반야심경이 훨 낫걸랑요. 훨씬 논리적이고, 훨씬 수준이 높아요.
자 다음대목입니다.
舍利子(사리자여!)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는 부처님의 제자 중에 가장 우수한 제자였던 사리불 존자를 말합니다. 우리가 대승불교에서 10대 제자를 거명할 적에 지혜제일로 불리는 분이죠. 사리불 존자는 법의 해석에 있어서 가장 뛰어났다는 거예요.
色不異空 空不異色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 그대로가 공이며, 공 그대로가 색이다. 수상행식도 또한 그렇다. 색불이공, 공불이색이라 그랬어요. 색은 먼저 설명했지만 물질 또는 우리 몸이죠. 공이라는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비어 있는 거를 말해요.
'비어 있다'는 말을 잘 이해해야 돼요. 이건 무의 개념은 절대 아니에요. 우린 물이 흐른다고 그러잖아요. 우린 보통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고 그러잖아요.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통상적으로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고 생각하지만, 물이 흐르는 이유는 비어있기 때문이에요. 비어 있는 곳을 채우는 거죠. 우리가 시각적으로 보면 높낮이이지만 그 본질에서 보면 물이라고 하는 것은 빈 곳을 채우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웅덩이를 만나면 채워지고, 채워지면 넘치죠. 여기서 공이라고 하는 것은 '비어있다' 그런 뜻이에요.
그런데 색이 공과 다르지 않다 그랬어요. 그리고 또한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이건 반대 논리죠. 뒤로 넘어가서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 그대로가 공이고, 공 그대로가 색이다. 즉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측면에서 볼 거 같으면, 색 그대로가 공이 되고, 공 그대로가 색이 된다는 얘기예요.
수상행식도 또한 그렇다. 지금 이것은 앞에서 오온개공이라고 하는 것, 오온은 공하다고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오온이 왜 공한지에 대해서 지금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물질도 흐름이에요. 물질도 흐름이고, 마음이라는 것도 흐름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공이예요. 아까 얘기했지요. 공하지 않으면 흐르지 않아요. 비어 있기 때문에 흐르죠. 공하지 않으면 흐르지 못해요. 그러기 때문에 물질도 흐르고 마음도 흘러요. 그러기 때문에 공이죠.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무상과 무아라는 것에 대해서 이해가 제대로 있어야 돼요. 오온이 공하다고 하는 것은 무상과 무아이기 때문에 공하다고 하는 것인데, 무상이라고 하는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요.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변화해 움직이며 진화해 간다는 것이에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변화해 움직이며 진화해 간다는 것은 무엇이냐면, 항상 흐른다는 거죠. 정지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변화가 일어나면 움직이고, 움직이게 되면 진화가 일어나는데,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변화와 움직임을 만들죠. 그게 무상의 논리예요.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반드시 불교만 변화를 이야기하진 않습니다. 그리스 철학에서도 변화를 얘기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중국의 주역에서도 변화를 얘기하죠. 그래서 우리가 주역을 변화의 서書라고 그러걸랑요. 변화의 서. 근데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될 것은, 주역에서 말하는 변화와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변화가 다르다는 거예요. 우리가 그거를 분명히 인식해야 돼요. 주역에서 얘기하는 변화라고 하는 것은 변화되면 지속되걸랑요. 유지돼요. 주역 계사 하 2장에 보면 대표적으로 유명한 구절이 나오죠. '역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 (易 窮則變 變則通 通卽久)'. 역이라고 하는 것은 궁즉변이다. 여기서 궁은 '한계에 이르면' 이 말이예요. 한계에 이르게 되면 변화하게 되고, 변즉통, 변하면 통하고, 통즉구, 통하면 유지된다. 이것이 주역의 대표적인 구절이죠. 역(易)이라는 말 자체가 변화라는 뜻이걸랑요.
불교에서 말하는 변화란 변화하면서 움직이죠. 움직이면서 진화해요. 그러면서 또 다른 변화를 낳죠. 그게 무상이예요. 그런데 주역에서 말하는 변화라고 하는 것은 변화해요. 변화하게 되면, 그 변화된 것이 그냥 지속되고 유지되죠. 같은 변화를 얘기한다고 해서 그것이 같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우리가 보통 이부분에서 많은 오해를 하걸랑요. 아 뭐 변화를 얘기하는 것이 불교만 그러냐? 불교라는 것이 변화를 얘기하는데, 그 변화라는 것이 변화하면서 또 다른 변화로 변화한다는 거죠. 그래서 무상이라고 하는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왜 고정되어 있지 않느냐? 변화의 움직임에서 진화하기 때문에. 그게 무상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무상한 것 가운데 고정되어 있는 자아는 아니다. 그것이 무아예요. 변화하는 가운데, 변화하지 않는 자아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죠.
사실 우리가 이거를 이해하려면 인도의 우파니사드 이래의 주류사상인 자아사상, 즉 아트만 사상을 이해를 해야죠. 우파니사드에서 얘기하는 아트만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영구불변이에요. 불변 불멸하는 존재이걸랑요. 본래 아트만이라고 하는 것은 브라흐만이 내재되어 있는 아(我)예요. 브라흐만은 본래 창조의 원리인데, 이 브라흐만이라고 하는 창조의 원리가 나중에 신격화되죠. 그래서 인도에서는 창조주로 받아들여지죠. 우파니샤드에 보면 자아는 브라흐만이라고 얘기해요. 브라흐만이 자아다 이렇게 얘기하죠. 그렇기 때문에 자아라고 하는 것은 창조주인 브라흐만이 내재되어 있는 자아예요. 그러기 때문에 불변하고 불멸해요.
근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뭐냐 하면, 만약에 불변하고 불멸하는 자아가 있다면, 우리의 기억이 영속되어야 된다는 거, 우리의 기억이 영속되어야죠. 그러나 기억은 영속되지 않걸랑요. 우리의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본성의 발현이 아니고, 후성의 작용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여러 생의 기억은 없죠. 여러 생은, 과거 전생의 기억은 우리에게 없다는 말이에요. 만약에 아트만이라고 하는 존재가 불변하고 불멸하는 존재라면, 그 아트만은 영속된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그 아트만이라고 하는 불변불멸하는 존재가 언제나 지속되기 때문에 여러 생의 기억이 항상 우리의 기억 속에 있어야 돼요. 왜 그러냐면, 그것이 불생불멸하기 때문에. 우파니사드에서는 아트만이라는 것은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 집어넣어도 불멸하고 불변하는 존재라 그렇게 나오거든요.
만약 그런 자아라면 기억이 영속되어야 돼요. 과거 생의 기억, 전생의 기억이 지금까지도 기억해야 돼요. 많은 생의 기억이 항상 돼야 하걸랑요. 근데 우리는 전생의 기억이 없어요. 우리의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후성의 기억이죠. 전생 기억이 나시는 분 있어요? 우리의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이후의 기억밖엔 없어요.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부모로부터 받는 것이 본성이라면, 태어나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통해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후성이죠. 그러니 우리의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100% 후성이에요. 본성의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런데 고정되어 있는 자아가 있을 수 없죠. 만약 그렇다면 고정되어 있는 자아가 있어야 되걸랑요.
수상행식(受想行識)도 또한 그렇다고 그랬어요. 불교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이라고 하는 연기의 토대 위에, 무상과 무아라는 골조가 서는 거예요. 연기라고 하는 토대가 있고, 그 토대 위에 무상과 무아의 두 골조가 서는 거예요. 그래서 불교라고 하는 것은 이 두 가지를 이해하지 않으면, 사실 우리가 불교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지난주에도 이야기했지만, 사념처관이라고 하는 것, 흔히 우리가 말하는 위빠사나라고 하는 것은 무상과 무아를 관(觀)하는 거를 말해요. 무상과 무아를 체험하는 거예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에요.
心不異空 空不異沈 心卽是空 空卽是心
色不異空 色空 空不異色 空色 色卽是空 色空 空卽是色 空色
위의 것을 보면 심불이공 공불이심 심즉시공 공즉시심(心不異空 空不異沈 心卽是空 空卽是心)이라고 되어 있잖아요. 이거는 수상행식 역부여시를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내가 구성한 거예요. 수상행식이라는 것이 뭐예요? 마음이잖아요. 앞에 수상행식의 뜻은 설명했었죠. 수상행식은 하나로 압축하면 마음이걸랑요. 앞에서는 몸이 공과 다르지 않다 그랬단 말이에요. 근데 여기서는 수상행식, 즉 마음이 공과 다르지 않은 거예요. 역부여시라는 것은 또한 그렇다 그말이에요. 즉 앞에서 말하는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그 논리와 같다는 얘기예요. 그 이치와 같다. 그러니 마음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마음과 다르지 않으며, 마음 그대로가 공이요, 공 그대로가 마음이다.
우리가 공이라고 하는 것의 뜻이 그렇게 쉽게 다가오지 않죠. 일본에서는 일본어로 하늘이 소라 [ 空 ( そら ) ] 예요. 우리가 먹는 고동 소라 말고. 하늘을 소라라고 그런다고요. 한문으로 표기할 때는 공(空)이라고 표기해요. 일본에서 하늘은 공이예요. 하늘 천(天)자라는 것을 안 써요. 우주가 존재하는 거는 비어있기 때문에, 공하기 때문이에요.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공한 거예요. 비어 있는 거. 비어 있는 하늘 가운데 점이 있죠. 그게 행성이죠. 지구가 되고, 태양이 되고.
色心 空 空 色心 色心 空 空 色心
내가 왜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옆에다가 색공 공색 색공 공색(色空 空色 色空 空色) 또 심불이공 공불이심 심즉시공 공즉시심(心不異空 空不異沈 心卽是空 空卽是心) 옆에 심공 공심 심공 공심(心空 空心 心空 空心)이라 했고,(오늘 나눠준 자료에 있는 도표) 밑에 보면, 색심 공, 공 색심, 색심 공, 공 색심(色心 空/ 空 色心/ 色心 空 / 空 色心)이라 했잖아요. 우리가 이걸 끄집어내서 봐야 이해가 가요.
왜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고 하는 논리, 또 심불이공 공불이심 심즉시공 공즉시심(心不異空 空不異沈 心卽是空 空卽是心)이라고 하는 논리가 우리가 사실, 쉽게 와닿는 논리가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가 이거를 매트릭스로 병렬시키면 하나의 흐름만 있게 되죠.
이것은 상기시켜서 연상을 해야 돼요.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이걸 짜 가지고, 매트릭스처럼 가동시키며는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아! 매트릭스 원리 혹시 모르시는 분이 있으신가요? 매트릭스 원리는 수학적 원리에 바탕을 두는 건데... 혹시 매트릭스 영화 보셨어요. 매트릭스라는 영화를 보면 수없는 숫자가 흐르는 게 보이잖아요. 그게 매트릭스에요. 매트릭스라고 하는 말은 병렬한다는 말이걸랑요. 병렬. 그래서 이렇게 놓은 것을 매트릭스처럼 짜 가지고, 컴퓨터에다가 입력해놓고, 매트릭스처럼 변환시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어요? 거긴 오직 하나의 흐름 밖에 없어요. 색이라고 하든가, 공이라고 하든가, 마음이라고 하는 이 자체가 분리되느냐 분리되지 않느냐 그런 차원을 넘어서게 돼요. 전체가 하나의 흐름으로만 존재하게 돼요. 이거는 연상을 하셔야 돼요.
에~ 좀 더 쉽게 설명을 할까요? 사칙연산이 병렬 교차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사칙연산, 즉 더하고 빼고 나누고 곱하는 것이, 무한정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상호교차하면서 움직인다고 보세요. 그렇게 되면 거기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게 될까요? 매트릭스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죠. 여기서 질문을 받고 넘어 가겠습니다. 이해가 안 되면 질문하세요.(이해가 안되니 질문할 수가 없죠. 일동 웃음)
내가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물질도 흐름이고, 마음도 흐름이다. 그러기 때문에 공이다. 공하지 않으면 흐르지 못한다고 내가 얘기 했잖아요. 이거를 병렬시키면, 이 현상이 시각적으로 나타난다 이 말이예요, 내 말은. 우리가 매트릭스를 병렬시켜서 하나의 흐름만 있게 되는데, 그 가운데에서 색과 심이 흐름임을 보게 되요. 공하기 때문에 흐른다고 내가 아까 얘기 했잖아요. 공하지 않으면 흐르지 못하잖아요. 결국 색과 심이라는 것도 하나의 흐름이에요. 아까 무상을 얘기했지만, 사실은 무상도 흐름이에요, 무상이라는 것도 흐름이에요. 변화해서 움직이는 게 뭐예요. 흐름이지요. 흐름이 또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내잖아요.
물이 흐르다 보면 어떻게 돼요? 수직 절벽을 만나면 폭포가 되잖아요. 경사지를 만나면 여울이 되고, 평지를 만나면 소리도 없이 흐르죠. 그러다 바다에 이르고. 우리가 시각적으로 보면, 바닷물은 흐르지 않걸랑요. 그렇지만 바닷물도 흐르죠. 우리가 시각적으로 봤을 때, 바다가 흐르지 않는 것이지 바다도 흐르잖아요. 우리 지구도 흐르잖아요. 우리는 태양이 떠오른다고 그러잖아요. 태양이 언제 뜬 적이 있던가요? 우리가 태양이 뜨고 진다는 것은 우리의 시각적인 착각이죠. 태양은 단 한번도 뜬 적도 없고, 진적도 없어요. 왜 그러냐면 태양은 그 자리에 있걸랑요. 지구가 돌면서 그런 현상이 시각적으로 보이는 거죠. 결국 지구도 흐르는 거예요. 지구가 흐르기 때문에, 태양이 뜬다 라고 시각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거고, 태양이 진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여기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心不異空 空不異沈 心卽是空 空卽是心 하는 것은 결국은, 色과 心은 하나의 흐름이라는 말이에요. 근데 우리가 그것을 흐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다고 보는 거죠. 고정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에 마음을 절대화시키고 그러는 거죠. 부처님이 무아라고 하니까, 무언가 붙들고 싶어서 마음을 절대화시키는 거죠. 사실 우리가 마음을 절대화시키고 일걸랑요. 한국 불교에서는 마음을 아주 절대화시키고 있어요, 지금. 무아라고 하니까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절대화시켜 버린 거죠.
나는 무아의 운명이 무소유의 운명하고 같다고 보죠. 우리가 무소유를 이야기하지만, 무소유한 인간은 없잖아요. 무소유한 인간 봤어요? 나는 어떠한 인간도 무소유한 인간은 못 봤어요. 왜 그러냐면, 존재한다는 것은 소유한다고 하는 것을 뜻해요. 그러기 때문에 무소유한 인간은 존재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무소유를 이야기하지만, 그거는 가상의 세계에서만 존재하죠, 무소유는. 현실의 세계에서는 무소유가 존재할 수가 없어요. 왜 그러냐면, 우리는 소유하지 않으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걸랑요.
고로 붓다는 말하죠. 살아 있는 자는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다. 먹는다고 하는 거는 소유한다는 거를 말해요. 소유하지 않고 어떻게 살 수가 있나요? 먹지 않고 어떻게 사는가요? 그저 이슬만 먹고 산다는 것은, 정말 그거는 가상의 세계 속에서나 있는 얘기고. 현실의 세계에서는 그런 건 없어요. 우리가 입으로는 무아 그러지만, 마음으로는 유아 그러거든요.
맨날 무아를 얘기하는 스님들도 무아를 믿는 사람 없어요. 입으로만 무아를 이야기하는 거죠. 왜 그러냐하면 무아를 체현하게 되면 삶 자체가 그렇게 살 수 없거든요. 아! 우리가 있는 것도 믿기 어려운데, 없다는 걸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요? 없는 거를 믿으려 그럴 적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얘기하죠. 신앙심이 없기 때문에 믿지 못한다. 마음을 절대화시키면 안돼요. 마음은 몸과 같이 흐름일 뿐이에요. 마음은 뇌라고 하는 기계가 작동시키는 거예요. 뇌라고 하는 기계가 없으면, 마음은 작동하지 않아요. 몸을 떠난 마음이라고 하는 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이에요. 인간이라고 하는 거는 무언가를 잡고 싶어 하걸랑요.
그러기 때문에, 반야심경에서 오온은 공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오온은 공이다. 부처님이 오온은 무아라고 한 것을 오온은 공이다라고 반야심경에서는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오온은 공이다고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논리를 전개하는 거예요. 오온이 공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메트릭스로 병렬시켜서 시각화하면 우리가 이해가 딱 가죠. 아! 전체가 흐름이구나! 흐름 이외에는 없구나. 여기에 대해서 정말 질문이 없는가요? 마, 질문이 없으시면 넘어 가겠습니다.
不生不滅 生滅
不垢不淨 垢淨
不增不減 增減
滅生
淨垢
減增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사리자야! 모든 존재의 공한 특성은, 여기서의 제법(諸法)은 모든 존재라고 하는 뜻이에요. 그리고 여기 모양 상(相)자는 모양을 뜻하는 게 아니라 어떤 특성, 특징을 뜻하는 거예요. 모든 존재라고 하는 것은... 존재는 딱 두개만 있어요. 유정과 무정. 유정, 무정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 보셨잖아요. 유정이라고 하는 것은 움직이는 생명체예요. 유정은 움직이는 생명체고, 무정은 움직이지 못하는 생명체예요.
모든 존재의 공한 특성이라고 하는 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 )이다. 생(生)하는 것도 아니고 멸(滅)하는 것도 아니다. 생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결합이에요. 멸이라고 하는 것은 해체죠. 무엇이 결합하는 가요? 분자가 결합하잖아요. 분자가 결합하면 생이에요. 그 분자가 해체하면 멸이죠. 그래서 생멸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바꾸면, 생과 사예요, 생사. 모든 존재의 공한 특성이라고 하는 것은 결합하지도 않고, 해체되지도 않는다 이 말이에요. 왜 그러냐면 공의 특성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이에요. 왜? 공하기 때문에. 분자의 결합과 분자의 해체라고 하는 것은 흐름일 뿐이걸랑요. 불교에서 이것을 생멸의 법칙이라고 그러죠. 분자가 결합되고, 분자가 해체되는 것, 이것이 법칙이라는 거예요. 이것을 불변의 법칙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우리가 보통 연기라고 불교식으로 표현하고. 그러기 때문에 물질도 마음도 결합되고 해체되는 것뿐이에요.
不垢不淨. 염오(染汚)도 아니고 청정( 淸淨)도 아니다.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이 이 도표를 좀 보시죠. 우리가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는 것을 이해하려면, 구(垢)와 정(淨)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되겠죠. 불생불멸(不生不滅)을 이해하려면, 생(生)과 멸(滅)을 이해해야 되구요. 구라고 하는 것은 염오심이죠. 그래서 이 염오심라는 것은 부정관(不淨觀)하고 연결이 되죠. 정이라고 하는 것은 청정심이예요. 에 이거는 자비관(慈悲觀), 인연관(因緣觀), 수식관(數息觀), 계분별관(界分別觀)하고, 이거는 연결이 되는데.
부정관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몸의 분자가 분해되는 흐름을 시각과 마음으로 보는 것이 부정관이예요. 대념처경에도 부정관이 앞에서 나오죠. 우리 몸의 분자가 분해되는 흐름을 시각과, 눈으로 마음으로 보는 거예요.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어요? 우리 몸이 분해되잖아요, 분자가. 그걸 시각적으로 보는 거예요. 마음으로 보는 것이기도 하구요. 그 과정에서 오온이 무아인 것을 보죠. 그리고 무상을 보고요.
그래서 이 부정관이라고 하는 것을... 아! 언젠가 마, 어떤 스님께서 부정관을 이야기하면서, 그 스님 굉장히 유명한 스님인데, 거의 뭐 스타처럼 불교 TV에도 강의하러 나오고 그러는데, 자기 몸을 혐오하지 않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을 하는데, 부정관을 이야기하면서. 아이, 나도 그 분처럼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부정관이라는 것은 자기 몸을 혐오한다 그런 의미로다가 이해하면 안돼요. 조금 전에도 얘기했듯이 부정관이라는 것은 몸의 분자가 분해되는 흐름을 시각과 마음으로 보는 거예요. 그 가운데서 오온이 무아하고 오온이 무상한 것을 보죠. 그게 부정관이예요. 이것은 뭐, 더럽고 깨끗하다, 혐오한다 이런 의미가 아니에요.
垢 淨 ↓ ↓ 染汚心 淸淨心 (神秀) (慧能) ↓ ↓ 慈悲觀 不淨觀 因緣觀 數息觀
不垢不淨
이 구라고 하는 것, 즉 염오심에서 보면, 여기에서 신수의 게가 나오죠. 그건 이따가 설명을 하고. 불구부정에서 정은 청정심이에요. 염오심은 마음이 물들어 있는 걸 말하죠. 염오란 물들어 있는 거, 번뇌에 물들어 있는 것. 정이라고 하는 것은 청정심. 깨끗한 거죠. 그래서 여기에는 오정심관 중에서 자비관, 인연관, 수식관, 계분별관이 여기에 해당돼요.
첫 번째는 자비관이 여기에 해당되죠. 자비관은 무량심(無量心)을 말해요. 무량심, 가없는 마음. 내 강론할 제 말했던 아파마나. 아마 이 자비보다, 처음에 부처님이 강조했던 것은 무량심이었을 거예요. 왜 그러냐면 자비라는 개념보다는 무량심이라고 하는 개념이 무상과 무아라는 본질의 측면에서 본다면, 훨씬 부처님의 깨달음에 가깝죠. 무량심이라고 하는 거, 아파마나가요. 그래서 자비보다는 무량심이 강조되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에, 그런데 무량심은 불교의 핵심이지만, 명확히 이해되지 않는 단점이 있어요. 명확히 잘 이해가 안돼요. 그래서 무량심을 세분화시켜서 자비희사(慈悲喜捨) 4가지로다 나눴을 거예요. 무량심이라고 하는 것은 4가지 측면이 있다고 세분화 시킨 거죠. 첫째는 자고, 사랑하는 마음이고, 두번째는 아파하는 마음이고, 비. 사랑하는 마음만 가지고는 세상을 살수가 없어요. 아파하는 마음이 있어야 돼요. 타인의 불행을 아파할 줄 알아야죠. 사랑하는 마음과 아파하는 마음은 달라요. 그리고 희는 기뻐하는 마음이고.
제가 제일 처음에 반야심경 제목을 이야기하면서 가장 큰 것은 마음이라고 했고, 가장 작은 것도 마음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남 잘 되는 거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나는 그런 적 없는데..., 우리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가 그렇게 남이 잘되는 것에 대해서 배 아파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은근히 질투가 나요. 잘 나가는 거 보면 배가 아파.
이무기가 용이 되면, 이무기가 오랫동안 도를 닦으면 용이 되잖아요. 용이 되면, 용이 된 이무기를 가장 시기하고 질투하고 험담하는 것이 본래 용들이겠어요, 아니면 이무기들이겠어요? 본래 용들은 이무기가 용이 되었을 때, 별 상관하지 않아요. 왜 상관하지 않는 줄 아세요? 본래 종자가 용이 아니기 때문에 아예 대거리할 생각이 없어. 그런데 같은 이무기들은 용이 된 이무기를 용납을 못 해요. 우리가 그걸 아셔야 돼요. 용이 된 이무기를 해치려고 달려드는 것은 다 이무기라는 거예요. 용들은 안 그래요. 왜 그러냐면 격이 다르기 때문에 용이 된 이무기하고 놀 생각이 애초에 없어요. 그러나 이무기들은 배가 아파. 그래서 이무기는, 용이 된 이무기는 절대 여의주를 자주 물면 안돼요. 입에 여의주를 물면 비룡이 되걸랑요. 올라간단 말이에요. 그러면 시기와 질투를 받죠. 처음부터 용은 모두가 인정을 해요. 왜? 본래 용이기 때문에. 그래서 맨 날 물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어. 맨 날 올라가도 괜찮아. 근데 용이 된 이무기가 맨 날 여의주를 물고 올라가면, 이무기들의 질투심에 불을 붙이는 거예요. 그걸 명심해야 돼요. 용이 된 이무기는 반드시 와룡이 되어야 돼요. 가끔 한 번씩만 올라가요, 여의주를 물고. 이무기가 처음 용이 되었을 때는 박수를 쳐주지만, 그 이무기가 여의주를 물고 올라 가는거를 보면 눈에 불이 붙어요.
그래서 우리는 남을 잘 용납하지 못해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이 사람 눈동자에요. 모든 것을 담죠. 우주도 담잖아요. 그러나 가장 작은 것도 눈동자에요. 내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은 용납을 할 수가 없어요. 설사 부처님이 다시 돌아오신다 할지라도 용납하기 어려워요, 내 맘에 안 들면. 나한테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해줘야 부처죠. 그래서 기뻐하는 마음이 여기에 들어가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에요.
사는 차별 없는 마음이에요. 우리가 직역하면, 평정된 마음이지만, 차별 없는 거를 말하죠. 그래서 자비라고 하는 것은 결국 무량심이예요, 아파마나. 아까도 얘기했지만, 무량심은 부처님의 핵심적인 가르침이지만, 명확히 이해되지 않아요. 왜 그러냐면 가없는 마음이란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사실 우리가 잘 알 수가 없걸랑요. 그래서 이것을 구체화시킨 것이 자비희사 4가지예요. 그래서 나중에 이 자비를 강조하게 되는 거고.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자비관이라고 그래요. 아파마나, 즉 무량심을 키우는 거예요.
그 다음에는 인연관. 인연관은 보통 연기관이라고도 하는데, 보통 12연을 관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이야기 하죠. 요 부분은 뒤에 가서 자세히 이야기 하겠습니다.
그리고 수식관....... 수식이라고 하는 말은 들숨, 날숨을 센다고 하는 뜻인데, 수식관은 들숨, 날숨의 흐름 속에서 무상을 보고, 무상 속에서 무아를 체현하는 거를 말해요. 그게 수식관의 본래 목적이에요. 들숨 날숨의 흐름 속에서 무상을 본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 무상 속에서 무아를 보는 것이 수식관이예요. 그리고 그 다음에 계분별관이라고 있는데, 18계를 관하는 거예요 그건 뒤에 나오니까 그 때 다시 설명을 하도록 하죠.
이 다섯가지를 오정심관(五渟心觀)이라고 그래요. 다섯 가지, 정심이라고 하는 것은 정지시키는, 안돈시키는, 즉 평정시키는, 그런 뜻이에요. 사실 우리가 불교수행에 대해서 곡해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마, 그것이 불교를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하죠. 아쉽게도, 아까도 얘기했지만, 뭐 자기 몸을 혐오하지 않으면 도를 얻을 수 없다는 그런 엉뚱한 소리가 나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죠.
그래서 구에서는 염오심, 염오심이라 그랬잖아요. 여기에서 신수(神秀)의 게(偈)가 나와요. 육조단경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신수와 혜능(慧能)이 게를 주고받게 되는데, 물론 그것은 역사적 사실은 아니에요, 창작된 거지. 우리가 중국 선종의 혜능을 6조라고 칭하는데, 신수게(神秀偈)에서는 신수를 육조라 칭했는데, 신수와 혜능은 상면한 적이 없어요. 얼굴도 몰라요. 나이 차이도 거의 뭐 30년 가까이 나고. 그리고 혜능이 5조 홍인의 문하에 갔을 때는 신수는 이미 없었어요.
神秀 偈 慧能 偈
身是菩提樹 菩提本無樹 心如明鏡臺 明鏡亦無臺 時時勤拂拭 佛性常淸淨 莫使有塵矣 何處有塵矣
그러나 신수게라고 하는 것, 그리고 혜능게(慧能偈)라고 하는 것, 이건 단경을 창작한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이건 우리가 한 번 중요하게 다뤄볼 만 해요. 거기 보면 신수게라고 밑에 있죠. 신수가 지었다고 하는 게인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건 역사적 사실은 아니예요, 단경에서 주장을 하는 것이지.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莫使有塵矣. 몸은 보리의 나무요, 신시보리수. 심여명경대, 마음은 밝은 거울 같나니, 시시근불식, 항상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시시는 때때로니까 항상이에요. 막사유진의, 먼지가 묻지 않게 하라. 이게 신수의 게예요.
신수계의 방점은 사실 마음에 있어요. 심여명경대.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다는 거죠. 조견에서도 얘기했지만, 사실 거울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에서 수행을 설명할 때, 비유해할 때 많이 쓰는 사물이기도 하죠. 중국 묵자에서도 거울에 대해서 나오기도 하고. 그래서 거울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지마는, 거울은 자신을 보는 거예요. 그래서 거울 곧 마음과 같은 뜻이에요. 마음은 밝은 거울 같다는 거죠. 그러기 때문에 항상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가 묻지 않게 해야 된다. 왜냐하면 거울이라고 하는 것은 먼지가 묻으면 거울이 아니걸랑요.
사실 신수게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불교의 전통적인 입장에 서 있어요.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줄리반타카에게 항상 ‘라조하나랑’ 하라고 시켰는데, 라조하나랑....... 그러면서 항상 깨끗한 걸로 닦고 다녀라! 라조하나랑 이란 말은 우리가 쉽게 이해하자면, 털고 닦자 뭐 그런 뜻이에요. 더 쉽게 얘기하자면 깨끗이 닦자 이런 뜻이에요. 이런 면에서 신수게는 사실 전통적인 불교의 입장이었어요.
아까도 얘기했듯이 신수게는 마음에 방점이 있다고 그랬어요. 마음에 방점이 찍혀 있는 거예요. 중국 선종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뭐예요? 마음을 깨쳐 성불하자는 거잖아요. 중국 선종에서는 마음을 깨치는 것이 성불이라고 주장을 해요, 깨달음이다. 사실 이것이 명심견성설(明心見性說)이라고 하는 것인데, 명심견성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밝혀서 불성을 본다는 얘기걸랑요. 사실 마음을 밝혀서 불성을 본다고 해서, 그것이 깨달음이 아니에요. 나는 이 명심견성설은 중국 전통의 성명(性命)사상하고 대승불교의 불성(佛性)사상이 결합된 거리고 봐요. 사실 명심견성설이라고 하는 것은 명심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견성에 방점이 찍혀 있는 거예요. 불성을 본다는 거죠.
중국 사람들이 불성이라고 하는 것에 굉장히 매력을 느끼고 있어요. 왜 중국 사람들이 불성에 매력을 느끼게 되냐면, 중국의 전통적인 성명설하고 이것이 딱 부합되걸랑요. 새로운 문화가 들어왔을 때, 전통적인 문화와 부합되는 것이 없으면, 살아남기가 어려워요. 그런데 마침 새로운 것과 전통적인 것이 일치되는 관점이 있다면, 그거보다 더 좋을 수가 없죠. 이 중국 선종에서 얘기하는 명심견성설은 중국의 성명사상과 불성사상이 결합된 거예요.
성이라고 하는 것은 본성이예요. 이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서 왔냐하면 천명(天命)으로부터 오는 거예요, 천명. 이것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거예요.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 인도의 바라문들이 자아라고 하는 걸 브라만이 내재되어 있는 아라고 주장하는 거와 같죠. 내가 아까 주역을 언급했었는데, 주역이라는 것은 바로 이 천의 명을 해석하는 것이에요. 천의 명을 해석한단 말이에요. 천은 언어로써 말하지 않아요. 상징으로만 나타나거든요. 상징이 하늘의 언어예요. 효(爻)라고 하는 건 하늘의 언어걸랑. 그러기 때문에 그게 명이라. 그거를 해석한 것이 역이죠. 주역의 십익은 그걸 해석한 거걸랑요.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은, 그러니까 천의 명을, 천의 명은 상징으로 나타나걸랑, 즉 효란 말이에요. 상징의 언어가 효예요. 하늘의 언어는 효란 말이에요. 즉 상징이거든. 그거를 해석한 것이 바로 주역이에요. 그런데 성명이라고 하는 것도,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 바로 성이걸랑요. 그래서 우리가 이걸 본성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게 명심견성설이에요.
우리나라에 근래에 한국 불교의 유력한 지도자였던 한 분도 이 명심견성설을 이렇게 이야기 했죠. 팔만대장경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명심견성설이다, 그렇게 주장하셨어요. 왜 그러냐면 이것이 전통적인 선종의 주장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마음을 보았다고 그래서 깨달음이 아니에요. 마음을 봤다고 하는 것은 가능성을 열었다고 하는 것이지, 무한성에 이르렀다고 하는 뜻이 아니에요.
결국은 중국 선종이 명심견성설을 내세우는데, 이 명심견성설을 칼로 찔러서 중국 불교를 반신불수로 만든 사람이 주자(朱子)예요. 주희(朱熹)가 바로 이 명심견성설 논리를 이용해서 중국의 선종을 그 창으로다 찔러서 반신불수로 만들었죠. 주희 이후에 중국 불교가 급격히 쇠퇴하는 이유는 중국의 선종의 논리로써 주희가 선종을 찔렀기 때문이에요.
내가 저 먼저께 강론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상대방을 찔러 죽이려면 반드시 상대방의 창으로 찔러야 해요. 그의 논리로다가 그를 찔러야만 그를 제거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나의 논리로다가 그를 제거하려고 달려들걸랑요. 그래서 안 되는 거예요. 반드시 그를 제거하려면, 그의 논리로 제거해야 돼요. 주희처럼요. 주희가 본래 불교를 배운 사람이거든요. 주희가 이 명심견성설을 맹자의 4단론과 중용의 성명론으로다가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명심견성설을 이용해서 말이예요. 왜 그러냐면, 중용에서 얘기하는 성명론이 바로 이 명심견성설이 불성하고 결합된 거를 간파한 거예요. 그래서 미안한 얘기지만, 명심견성설은 이미 주희에 의해서 깨졌어요. 그런데도 아직도 반신불수가 되어 가지고, 숨은 남아 있다고, 숨이 붙어 있으니까 아직도 명심견성설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미 반신불수가 되어 있으니까 병신이죠.
오늘은 혜능게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신수게가 없으면 혜능게는 성립이 안돼요. 보리본무수 명경역무대 불성상청정 하처유진애 (菩提本無樹 明鏡亦無臺 佛性常淸淨 何處有塵矣),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신수게에서는 뭐라 그랬죠?. 몸은 보리의 나무라 그랬잖아요, 신시보리수. 근데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다고, 여기 혜능게에서 얘기해요. 명경역무대, 밝은 거울 또한 틀이 없다. 앞에서는 마음은 밝은 거울 같다고 했단 말이예요. 근데 여기서는 밝은 거울 또한 틀이 없다고 그랬어요. 불성상청정, 불성은 언제나 깨끗하나니, 앞에서는 항상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불성이라는 것은 언제나 청정하다고 했죠. 하처유진애, 어느 곳에 먼지가 묻으랴. 앞에서 신수게에서는 먼지가 묻지 않게 하라고 했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신수게하고 혜능게는 전혀 반대 입장에 있어요. 신수게가 동쪽에 서 있다면, 혜능게는 서 쪽에 서 있죠. 서로 등지고 있는 거예요. 혜능게를 보면, 굉장히 시원스럽죠. 그래서 이 중국사람들이 굉장히 매료되었던 것이기도 한데... 혜능게의 방점은 어디에 있는가 하면, 불성상청정에 방점이 있어요. 앞의 신수게의 방점은 심여명경대에 있걸랑요. 마음은 밝은 거울이다, 이것이 신수게의 주장이예요. 근데 혜능게의 주장은 불성상청정이예요. 사실 여기에 방점이 있어요. 우리가 신수게하고 혜능게를 많이 비교하여 논하기도 하는데, 엄격히 이야기 하면, 신수게에서 이야기하는 논점과 혜능게에서 이야기하는 논점은 다르다는 거예요. 사실 신수계와 혜능게는 전혀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어요, 논점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보통 그렇게 보지 않는데, 실제로 신수게와 혜능게는 별개의 입장을 나타내고 있는 거예요. (중복?)
신수게는 마음은 밝은 거울이기 때문에 항상 그 거울이 밝게 빛나도록 닦아줘야 된다는 것이에요. 근데 여기서는 거울을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 같지마는 방점은 불성상청정에 있어요.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불성상청정이고, 신수게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마음은 거울이다라는 거예요. 우리가 이것을 이해를 하려면 먼저 알아야 될 것이 부처님이 3가지 해탈을 이야기해요. 첫째는 신해탈(信解脫), 믿을 신자 신해탈이 있고, 또 하나는 혜해탈(慧解脫), 지혜혜자 혜해탈, 그리고 또 하나가 심해탈(心解脫), 마음 심자 심해탈. 대념처경에서는 혜해탈과 심해탈을 말하는데, 신해탈, 혜해탈, 심해탈, 대체적으로 이 3해탈을 부처님이 이야기해요.
신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으로서 해탈하는 거예요. 무엇을 믿느냐? 붓다를 믿는 거죠. 붓다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다르마를 믿는다 이 말이에요. 붓다라고 하는 것은 인격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다르마를 이야기해요. 그래서 부처님이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다르마를 보는 자가 나를 본다고 하거든요. 그리고 나를 보는 자, 다르마를 본다라고 하죠. 그래서 후기 대승경전에서도 붓다를 인격으로 보는 것을 엄히 금지하죠.
처음에 붓다가 오비구를 만났을 때, 오비구에 뭐라 그러던가요? 나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그러거든요. 고타마 싯타르타라고 하는 나의 이름을 부르지 마라. 나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하는 것은 인간인 고타마 싯타르타를 배제하는 거예요. 우리가 붓다를 얘기하는 것은 인격의 붓다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마 붓다를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르마로서의 붓다. 그래서 붓다는 곧 다르마죠. 그러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은 붓다를 믿는 걸 말하는데, 뭘 믿느냐? 다르마 붓다를 믿는 거예요. 다르마 붓다를 믿는다게 뭐예요? '붓다를 믿는 것은 해탈의 유일한 길이다'라는 걸 믿는 거예요. 해탈하는 유일한 길이다. 붓다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해탈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거예요. 그걸 믿는 것이 신해탈이에요.
기도한다고 하는 것도 신해탈이예요. 기도의 구조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고. 첫째는 믿는 것, 두번째는 예배, 세번째 찬탄이걸랑요. 첫번째 붓다를 믿고, 두번째 붓다에게 예배하고, 세번째 붓다를 찬탄하고....... 믿는다는 것이 뭐예요? 믿는다는 것은 확신한다는 걸 뜻해요. 확신, 확신이 믿음이에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확신이 없으면 안 나와요. 그래서 신(信)이라고 하는 것은 확신이에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확신한다는 뜻이에요. 예배한다고 하면, 절하는 걸 우리가 예배라고 그러잖아요. 예배라는 것은 물론 문자로 보면, 절하는 거예요. 그렇지만, 예배한다고 하는 것은 헌신한다는 것을 뜻해요. 부처님의 가르침에 헌신한다 이 말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예불문에도 뭐라고 이야기해요? 몸과 마음 다 바쳐 헌신한다고 나오걸랑요. 그래, 예배한다고 하는 것은 헌신한다고 하는 뜻이에요. 뭐 3,000배 한다고 굴신운동 하는 게 아니고. 예배한다는 것은 헌신하는 것, 즉 부처님의 가르침에 헌신하는 것이 예배예요. 찬탄한다는 게 뭐예요? 찬탄한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의 위대함을 내가 말로써 표현하는 것이 찬탄이에요. 우리가 흔히 염불(念佛)한다는 것도 사실 그거 찬탄이걸랑요. 구성(口聲), 입으로 말하는 것. 믿음을 바탕으로 해서, 예배와 찬탄을 통해 해탈하는 것, 이게 신해탈이에요. 바로 기도는 이거예요. 사실 우리가 하는 기도의 방식은 신해탈에서 사실 많이 벗어나 있죠. 이게 신해탈이에요.
또 하나는 혜해탈이예요, 지혜로 해탈하는 것. 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속박으로부터의 해탈, 즉 열반을 말해요. 다른 표현으로 하면, 깨달음이고.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표현하는 것이 수십 개예요. 깨달음, 열반, 해탈, 불사, 안온 등 여러 가지를 썼죠. 그래서 지혜로써 해탈한다 이거예요. 지혜로써 어떻게? 지혜로써 무명을 제거하고. 어떻게 지혜로써 무명을 제거하냐 하면, 직관으로 하는 거예요. 직관으로 무명을 제거하고 바로 열반을 증득하는 거지요. 이것은 뭐, 신해탈보다는 좀더, 아주 간명하죠. 그리고 직접적이고.
그리고 세 번 째가 심해탈이예요. 마음의 해탈. 마음의 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염오되어 있걸랑요. 우리 마음이 왜 염오되어 있냐면, 우리 마음은 염오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어요. 정자와 난자가 만나면 어떻게 돼요? 수정란이 되죠. 수정란이 세포 분열 하잖아요. 그렇게 되면 배아가 되죠. 그 배아가 성장하게 되면 그게 태아걸랑요, 태아가 되고. 태아가 더 성장하게 되면 자궁 밖으로 나오잖아요. 우리 인간이 어머니 자궁 속에서 나왔다 그래서, 우리의 성장이 다 이루어지지 않죠, 뇌가. 우리 뇌는 어머니 뱃속에서, 자궁에서 다 성장하게 되면, 자궁을 못 나와요. 나올 수가 없어요. 골반을 못나오게 돼요. 머리가 크기 때문에. 뇌가 다 성장을 하지 않기 때문에 골반을 나올 수가 있어요. 머리가 굳지 않걸랑, 부드럽죠. 그럼, 태어 나가지고, 자궁 밖에 나와 가지고 0세에서 4세까지 뇌가 성장하죠. 사실 이 시기가 가장 중요한 시기예요.
난자와 정자가 만나 수정이 되었을 때, 그 때가 선성(先性)이라면, 태어났을 때부터 후성(後性)이예요. 우리가 이 때를 후성 유전자라고 이야기하죠. 후성 유전자. 우리 인간은 선성 유전자가 있죠. 우리가 흔히 말하는 DNA가 있고, 엄마 뱃속에서 나오게 되면 후성적으로 영향을 받는 거를 후성 유전자라고 이야기해요. 그래서 지금은 선성 유전자보다 후성 유전자를 더 중요시 여기죠. 왜 그러냐면, 우리 뇌가 1세부터 4세까지 5가지 감각을 통해서 뇌가 성장해요. 시각, 청각, 후각,미각, 촉각. 5가지 자극을 받아서 뇌가 성장하게 되걸랑요. 성장을 하면서 뇌 회로가 연결되고, 완성돼요, 4세가 되면.
머리가 좋냐, 안 좋냐 하는 것은 머리의 뇌 회로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거예요. 뇌의 회로를 따라서 전기가 흐른다 말이에요. 우리가 이걸 뇌의 전자신호라고 그러죠. 뇌의 전자신호가 어떻게 보내지느냐? 그게 우리의 지능이에요. 알고 보면 우리가 기쁘고, 슬프고, 우울하고, 화나고, 이게 다 뇌의 전자신호이니 별거 없어요. 다 뇌의 전자신호일 뿐이야. 근데 이 뇌가 성장하면서, 5가지 감각을 통해서 성장하기 때문에 어떻게 돼요? 외부 환경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죠. 내가 자궁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마치 백지 상태와 같아요. 흰 천이죠. 색깔로 말하면, 흰 색이예요. 붓다를 상징하는 색이 흰색이에요. 왜 그러냐면, 흰색이라고 하는 것은 청정무렴(淸淨無染)이기 때문에. 청정해서 어떤 물도 들지 않은 것. 우리가 태어났을 때는 청정무렴이걸랑요.
그런데, 우리가 5가지 감각을 통해서 뇌의 회로가 형성되면서, 바깥에서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주입받게 되었죠. 그게 긍정적인 정보이기도 하고, 부정적인 정보이기도 하죠. 우리는 성인이 되어도 어렸을 때 기억의 50%의 지배를 받아요. 실질적으로 유년기의 기억이 그 사람의 일생을 지배하는 거예요. 그 유년기의 기억이 성인이 되어서 무엇을 결정하고, 판단하는데, 50%의 영향을 주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유년기에 어떤 환경에서 자랐느냐가 사실 그 사람의 일생을 결정짓는 거예요. 우리가 마음이라고 이야기하지마는, 마음이라고 하는 게 뭐예요? 마음이라고 하는 건 과거의 기억이에요.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경험이 결합되는 것이 마음이에요.
우리가 수행을 하면서, 마음을 본다고 그러잖아요. 수행을 해서 마음을 보는 것, 다 과거의 기억이에요. 현재의 기억은 존재하지 않아요. 왜 그러냐면 기억은 다 과거의 기억이에요.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경험과 결합되는 거죠. 그것이 마음이에요. 우리가 뭐, 수행을 하면서 로바와 도다를 본다고, 탐욕심과 분노심을 본다고 그러는데, 내가 분노심 보는 거, 과거의 분노예요. 지금 내가 가만히 앉아 있는데 왜 분노가 일어나요? 누가 내 뺌때기 때려주기 전에는 안 일어난다고요, 그래서 그것은 과거의 기억이라 이 말입니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경험과 결합되는 거, 그것이 마음의 작용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유년기의, 0세부터 4세까지 바깥으로부터 입력되는 그 정보에 의해서 어떻게 되어요? 지배받죠.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본래부터, 발칸발도의 학살자, 도살자 밀로세비치가 있는게 아니에요. 어렸을 때, 그 사람의 환경하고 관계가 있는 거예요. 설사 그런 인자가 있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어떤 환경에 놓이냐에 따라서 그 인자가 발아되기도 하고, 발아가 되지 않기도 해요. 우리가 밀로세비치 같은 사람을 마키아벨리적 싸이코패스라 그러는데, 우리나라에도 마키아벨리적 싸이코패스가 높은 자리에 많이 올라가 있죠, 지금. 그런 현상이 왜 오냐? 환경에서 오걸랑요. 그걸 부처님이 염오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이걸 전문 용어로 객진(客塵)이라는 말도 쓰고, 래객(來客)이라는 말도 써요. 객진, 객이라고 하는 것은 바깥에서 온 번뇌라고 하는 뜻이에요. 바깥에서. 진이라고하는 것은 티끌, 번뇌걸랑요. 바깥에서 온거. 바깥에서 오염되었다 이 말이에요. 객진이라는 말도 쓰고, 래객이라는 말도 써요. 바깥에서 오신 손님. 아, 이거는 아주 너무 점찮지, 표현이. 래객? 바깥에서 오신 손님이야. 본래 우리 집에 있던 게 아니고, 바깥에서 온 손님이 주인 행세를 한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주인과 손님이 바뀐 거지요. 내가 주인 노릇을 해야 되는데, 바깥에서 온 손님이 지금 주인노릇하고, 나는 손님 노릇하는 거죠. 그거를 부처님은 염오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래객 또는 객진. 그 래객과 객진에 의해서 염오된 것을 회복시키는 것이 심해탈이에요. 청정심. 즉 외부의 객진과 래객으로부터 벗어나는 거. 그게 마음으로부터의 해탈. 그러면 청정심이 되죠. 청정심이라고 하는 게 뭐예요? 더 이상 바깥에서 온 손님이 나를 지배하지 않는 거예요. 우리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걸랑요. 환경의 지배. 환경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면 다 바깥에서 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심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객진인 래객의 지배를, 그 지배권을 내가 박탈시키고 제거해버리는 거예요. 제거해 버리면, 어떻게 되어요? 순수한 내 본래의 그 마음, 그 본성, 그 청정심이 회복된단 말이에요. 청정심이 회복되지 않으면, 열반을 증득할 수 없어요, 솔직히.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이 이 부분을 굉장히 많이 강조하죠. 그래서 심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쉽게 이야기하면 뭐냐면, 새로운 마음의 길을 여는 거예요. 새로운 마음의 길을 열어서. 새로운 마음의 길을 열면 어떻게 돼요? 새로운 마음이 형성되겠죠. 새로운 마음의 길을 연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냐면, 우리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걸랑요.
인간은 절대 벗어나지 못하는 게 있어요. 그건 뭐냐면 자기의 마음, 즉 과거의 기억이에요. 이거 못 벗어나요. 수행에서 마음을 보라고 하는 것은 과거의 기억을 보는 거예요. 보면, 사라진다. 과거 유년기의 그런 것들. 나를 지금 억압하고 지배하고 있는 것들. 집에 가서 누워서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내가 하고 있는 행동, 내 부모님하고 얼마만큼 많이 다른가?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은 심해탈을 강조하는 거예요. 이걸 간단히 설명하자면, 부처님은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이라 그러죠. 탐진치 삼독. 탐심, 진심, 치심. 이게 염오심이걸랑요, 그러면 청정심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무탐, 무진, 무치죠. 탐심이 없고, 진심이 없고, 치심이 없는 거, 그게 청정심이예요. 염오심은 탐심, 진심, 치심이고.
부처님이 그래서 이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하셨어요, 제자들한테. 상두산이라고 하는 산에 올라가 가지고, 부처님이 설법을 하시죠. "비구들아,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 네 눈이 불타고 있다. 네 귀가 불타고 있다. 네 마음이 불타고 있다. 대상에 의해서 불타고 있다. 탐욕에 의해서, 분노의 불꽃에 의해서, 어리석음의 불꽃에 의해서 타고 있다." 이게 뭐냐면, 대상을 향해서 탄다는 거예요. 대상이라는 게 뭐예요? 객진과 래객이예요. 내 그 전에, 대념처경을 강의하면서도 이야기했었는데, 이 세상에 딱 두 개 밖에 존재 안해요. 나와 대상. 그 외에는 존재하는 게 없어요. 나! 나 이외에는 모두가 다 대상이에요. 내 자식, 내 부인, 내 남편, 다 대상이에요. 나 외에는 다 대상이에요. 나 외에는 다 대상만 존재하잖아요. 이것을 부처님이 심해탈이라고 하는 거예요.
좀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면, 상응부경전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이 마음은 오랫동안 탐진치에 오염되어 있다는 거예요. 마음이 오염됨으로써 모든 중생은 오염되고, 마음이 청정해짐에 따라 모든 중생이 청정해진다는 거예요. 이게 이 심해탈에 대한 이야기예요. 탐진치에 의해서 오염되어 있다 이 말이에요. 그 오염된 마음이, 마음이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중생이 오염되고, 마음이 청정해짐에 따라서 모든 중생이 다 청정해진다. 나중에 대승경전인 원각경에서 마음이 청정해지면, 세계가 청정해진다는 말도, 바로 이 바탕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냥 나오는게 아니구. 그래서 우리가 이거를 심해탈이라고 해요. 마음의 해탈.
내가 왜 신해탈, 혜해탈, 심해탈을 이야기 하냐면, 우리가 이것을 이해를 해야 불성상청정(佛性常淸淨)이라고 하는 이 구절을 우리가 논할 수 있어요. 상청정이라고 그랬잖아요. 불성은 언제나 깨끗하나니. 불성을 먼저 해석하고 상청정을 해석해야 되는데, 상청정부터 해석을 하겠습니다. 상청정, 이게 굉장히 중요한 용어걸랑요. 상(常)이라고 하는 말은 '늘상', 즉 '언제나'라고 하는 말이에요. 언제나 청정해. 근데 우리가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가 없죠. 의문을 제기하고, 질문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언제나 청정하다고? 언제나 청정하다는 얘기는 뭐예요? 객진과 래객의 지배를 받지 않는 거 걸랑요. 긴데, 자궁 밖의 세계는 이런 세계가 없어요.
가상의 세계에서는 언제나 청정할 수가 있는데, 현실의 세계에서는 언제나 청정한 건 없어요. 사실 현실세계는 이런 세계가 없어요. 내가 아까 심해탈을 이야기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어요. 혜능게는 굉장히 시원스럽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어요. 뭔 문제가 있냐면, 상청정이라는 것, 언제나 청정하다는 것. 근데 언제나 청정하다고 하는 것은 인간 세계에서는 없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나 청정한 인간이 있을 수 있나요? 인간세계에? 실질적으로 그런 인간은 존재할 수가 없어요.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언제나 청정한 세계가 있으면.
우리는 대상과 함께 존재하죠. 대상과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대상에서 벗어나지 않는한, 우리는 대상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있으나, 대상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는 거죠. 왜? 인간세계를 벗어나기 전에는. 우리가 그걸 알아야 돼요. 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대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아니라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운 거예요. 자유로운 걸 벗어난다고 이야기해도 되겠죠. 그렇지마는, 대상과 분리되어서 떠나간다, 그런 뜻은 아니예요. 우리가 대상과 분리되어 떠나가려면 딱 한 가지 방법밖에 없어요. 그렇게 되면, 그 때 상여소리가 나오죠. 이제 가면, 언제 오냐고. 이제 가면 언제 오냐는 상여소리가 나지 않는 한 우리는 대상과 분리될 수 없다는 거예요.
상청정이라고 하는 말은 사실 명심견성설과 모순되는 이야기예요. 마음을 밝혀서 불성을 본다고 하는 선종의 기본적인 그 기치와 모순되는 이야기예요. 왜 그러냐면, 상청정하다면 명심견성할 필요가 없거든요. 왜? 알고 보면, 상청정이라고 하는 개념은 본래 부처라고 하는 논거에 근거가 되는 거예요. 요새 본래 부처라고 하는 분들이 많걸랑요. 나하고 아주 가까운, 조계종의 아주 그냥, 굉장히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스님들이 부처를 항상 이야기하죠. 저 먼저께 춘천에 오셔가지고 이 이야기를 나에게 하시던데....... 나야 뭐 그저 듣고 있었는데. 그 분의 주장은 그래요. 부처의 행을 하기 때문에 부처지, 즉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의 행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처의 행을 하기 때문에 부처라는 거예요. 말은 그럴 듯 하죠. 그러나 미안한 이야기지만, 부처가 아니면, 부처의 행이 나올 수 없죠. 이거는 주어가 바뀐 거예요. 헤겔의 변증법 논리에 의하면, 이거는 기본적인 개념이 성립되지 않는 이야기죠.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의 행을 하는 것이지, 부처가 아닌데 어떻게 부처의 행을 하나? 부처의 행을 한다는 것은 부처인 것을 전제하는 거예요. 부처의 행을 하기 때문에 부처라고 하는 것은 가상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있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어요. 엄격하게 얘기하면 우리가 상상하는 세계와 우리가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세계는 다르다는 거예요. 명심견성설이나 본래부처론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모순이죠. 상청정이라고 하는 것도 명심견성설과 모순이고, 본래 부처라고 하는 것도 명심 견성과는 모순이에요.
선종의 핵심적인 논거가 명심견성설인데, 여기에 모순되는 이야기이죠. 원전에 청정한 세계는 인간세계에는 없다는 거예요. 적어도 자궁 밖 세계에서는. 자궁 안에서는 언제나 청정하다는 거, 나 동의해요. 우리 인간이 가장 행복할 때는 어머니 자궁 속에 있을 때니까. 그 때 인간이 가장 행복해요. 가장 안전하고, 보호되고. 자궁 밖에 나오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지죠.
불성(佛性)이라고 하는 말을 해석하겠습니다. 불성이라고 하는 말은 중국 불교의 핵심적인 논거인데, 이 불성이라고 하는 말은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하는 말과 같은 뜻이에요. 여래장. 우리가 여래장이나 불성, 이런 말을 주로 대승불교에서 쓰고, 선종의 논거가 되는 것인데, 불성이라는 용어는 특히 대승경전인 열반경에서 강조되는 거예요. 엄격히 얘기해서 불성은 비불교 사상이에요. 불교 사상 아니에요. 이건 반불교 사상이에요.
불성이라고 하는 거는 자아와 동일한 개념이에요. 자아, 아트만....... 아트만 하고 동일한 개념이예요. 불성사상의 논거가 되는 열반경에서는 무어라고 이야기하냐면, '불성은 자아다'라고 천명하고 있어요. 불성이라고 하는 것은 곧 자아다. 아트만이다. 그래서 불성은 아트만이에요. 이거는 불교 사상 아니에요. 한국 불교의 많은 모순점은 여기에서 나오죠. 한국불교를 지배하는 사상은 불성사상인데, 불성사상 자체가 불교 사상 아니라는 거예요. 반불교적인 사상이라는 거예요.
엄격히 말하면, 한국불교는 불교인가? 라고 질문을 던지면, 확답하지 못하죠. 왜 그러냐면, 한국불교를 지배하고 있는 근본적인 개념은 불성이에요. 명심견성도 이 불성이라는데서 나오고, 본래 부처라는 것도 여기서 나오고, 성불이라고 하는 개념도 다 여기서 나오는데, 불성이라고 하는 용어 자체가 비불교사상이라는 거예요. 이건 아트만 사상이에요. 불교의 기본적인 사상인 무아 사상과 양립하지 못해요. 불교 역사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자아를 인정하는 쪽으로 가죠. 내가 인간은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이유는 그거예요.
물론 인도라고 해서 고대 아트만 사상이 인도 전체를 지배했던 건 아니에요. 그러나 우파니샤드 이래 현대까지 아트만 사상이 인도의 주류 사상인 것은 확실하죠. 그건 부정 못해요. 그 아트만 사상을 부정한 사람도 있었지마는 수천 년간 오직 인도를 지배하는 주류 사상은 아트만 사상이에요. 모든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아트만 사상을 교육받고 크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트만 사상을 부정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면, 우리는 과거의 기억이 지배하거든요.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경험이 결합되는 거란 말이에요.
우리 마음에는 미래라고 하는 건 존재하지 않아요. 왜 존재하지 않는 줄 알아요? 미래는 기억도 아니고, 경험도 아니걸랑요. 그냥 상상하는 거죠. 추론이죠.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지. 과거와 현재는 경험되어지는 거예요. 우리가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미래를 예측하고, 현재를 판단하죠. 나는 인도에서 부처님 이후에, 많은 스님들이 이 인도의 아트만 사상의 지배를 받았다고 봐요. 그렇기 때문에 이 불성 사상이라는 것도 나오고, 이 푸트칼라라고 하는 사상도 나오고, 법체라는 말도 나왔다고 보는 것이죠. 사실 대승불교에서 주창하는 공이라는 것도 바로 이 아트만 사상과 불교의 무아 사상인데, 인도의 전통적인 아트만 사상이 주류이기 때문에 무아를 주장하는 것을 회피하고, 공이라고 하는 제 3자적인 용어를 선택한 거예요.
엄격히 이야기해서, 부처님 이후의 불교는 단 한번도 주류사상과 격렬한 논쟁을 해 본적이 없어요. 그건 중국에 와서도 마찬가지고, 현재 대한민국에서도 마찬가지고. 언제나 숨고, 회피했지요. 부처님 이후에 주류 사상과 격렬하게 논쟁하고 싸운 적이 없어요. 그러니깐 불성이라고 하는 거, 푸트칼라라고 하는 거, 법체라고 하는 거, 이런 것들이 다 그래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불성은 불교 사상 아니다. 불성이라고 하는 거는 있을 수가 없지요. 무아인데 불성이라는 것이 언제나 청정하게 존재할 수가 있겠어요? 아트만과 어떻게 다른데? 그래서 불성이라고 하는 거는 아트만 사상이에요, 이건 불교사상 아니에요.
그래서 기본적으로 불성상청정이라고 하는 것은 성립되지 않아요. 신수게와 혜능게는 동일한 사람이 지었을 거예요. 원래 육조단경이라고 하는 것은 육조 사후에 누군가에 의해서 찬술된 건데, 기본적으로 불성상청정이라고 하는 것은 논거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 기본적으로 논거가 성립되지 않느냐면, 부처님의 심해탈과 반대가 되니까요. 오히려 신수게가 심해탈의 입장에 서 있죠. 그래서 이 혜능게 같은 경우에는 굉장히 시원해요.
내가 재미있는 말씀을 하나 드리죠. 우리나라 스님들이 미안마에서 너무 열심히 수행을 하니까 떼자냐 샤아도께서 한 번은 그러시더만. 너희는 전투하러 가냐? 뭐 그렇게 앉아서 좌선하는데 그렇게 살기가 번뜩이느냐 이 말이에요. 코리아에서 영화 구경 안 해봤냐? 그래, 다들 영화 좋아한다, 그러니까 영화 볼 때도 극장에 그렇게 들어 가냐? 수행이라는 것도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는 거죠. 영화 볼 때 긴장하고 보지 않잖아요? 뭔가 이빨 뽀드득 뽀드득 갈면서 안 보잖아요? 모든 것이 다 릴렉스 되죠. 편안하게 보잖아요. 그게 수행이라는 거예요. 수행이라고 하는 거는 뭔가를 극복하는 게 아니에요.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즐겁고 재밌는 것이지, 뭔가를 극복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기본적으로 수행에 대한 오해가 없어야 돼요. 지금 우리나라의 가장 문제는 뭐냐 하면, 수행에 대한 기본 개념에 대한 이해조차 없다는 거예요. 기본적인 어떤 이해조차 없어요. 그러니까 불교도 모르고. 불교는 세 가지를 통합해요, 간단히 설명하면 개념과 직관, 경험. 이 세 가지를 통합하는 거예요. 첫째는 개념, 둘째는 직관, 세번째는 경험. 개념과 직관과 경험이 통합된 거, 그게 불교 수행이에요. 다른 것이 수행이 아니고. 뭐 불성상청정이라 그래서 불성을 찾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찾아야할 불성이 어디 있나? 마음과 다른 어떤 불성이라는 게 있을 수 없잖아요. 내 아까 얘기 했잖아요. 마음은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경험이 결합된 거다.
그 다음에, 우리가 심해탈이 되면, 불구부정(不垢不淨)의 경계가 되는 거예요. 그 다음에 부증불감(不增不減 )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부증불감,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나니. 여기서 늘어나면, 저기서 줄죠. 그런데 저기서 늘면 여기가 줄어요. 사실 우리가 증감이라고 하면,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면 쉽죠. 내 주머니에서 돈이 나갔다고 하는 것은 뭐예요? 누군가의 주머니로 돈이 들어갔다는 걸 뜻하죠. 그렇지 않습니까? 네 꺼 없어졌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걸 가졌다, 습득했다는 걸 뜻해요. 누군가의 것이 없어졌다는 것은 내가 습득했다는 거죠. 그러면 부증불감은 뭐냐? 그렇지마는 총 질량은 변한 게 없죠. 총량은 변하지 않아요. 내 주머니에서 나가서 저 사람 주머니에 들어갔든, 저 사람 주머니에서 나와서 내주머니에 들어왔든, 총 그 양은, 그 질량은 변하지 않고 같죠, 항상.
언론에서 가끔 풍선효과라고 하는 말을 쓰잖아요. 이 풍선 효과라는 말을 쓸 때는 부정적인 의미로 쓴 말이긴 한데, 풍선이란 것이 어때요? 누르면 어떻게 돼요? 반대쪽으로 풍선이 밀려 나가잖아요. 내가 손으로 풍선을 쥐면 반대쪽으로 나가지만, 풍선의 그 전체적인 질량은 변한 게 없어요. 똑 같에요. 다만 어디에 힘을 가하느냐에 따라서 그 형태의 변화는 있죠. 그렇지만 총질량은 변하는 게 없어요. 부증불감이죠.
不生不滅 生滅
不垢不淨 垢淨
不增不減 增減
滅生
淨垢
減增
도표를 보세요.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내가 이렇게 따로 띠어 논 거는 전체적으로 평면에 눌러 붙어 있으면 이게 잘 안 들어와요. 그런데 요것만 따로 띠어 가지고, 우리가 이렇게 보면 딱 눈에 들어오죠. 옆에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이거는 제쳐놓고, 결국은 생멸(生滅)이예요. 구정(垢淨)이고, 증감(增減)이고. 이걸 반대로 놓으면, 멸생(滅生)이 되고, 정구(淨垢)가 되고, 감증(減增)이 되죠.
세계는 점과 선으로 이루어져 있죠. 나는 그렇게 봐요, 점과 선. 하나의 점, 하나의 선. 내가 이해하는 세계는 하나의 점과 하나의 선일 뿐 이에요. 점과 선으로 연결되는데, 연결된 점과 선은 변환되죠. 하나의 점과 하나의 선이 영원히 하나의 점과 하나의 선인 거 아니에요. 전환되고, 변환되면서 어떤 때는 점이 선으로 변하고, 어떤 때는 선이 점이 되죠. 점과 선이라고 하는 것은 유기적으로 전환되고, 변환돼요. 그건 유기적이에요. 이거는 생각으로다가 점과 선이 끊임없이 전환과 변환을 거듭되면서 팽창되고, 축소되는 거 상상하면서 봐야 돼요. 그래야만 딱 들어와요. 그러기 때문에, 세계는 점과 선이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불생불멸하고, 불구부정하고, 부증불감하죠. 부처님이 이걸 연기라고 이야기했죠. 나는 연기를 점과 선으로 이해하죠. 점과 선. 모든 것은 점과 선이다. 하나의 점과 하나의 선이 끊임없이 전환과 변환을 거듭하는 거. 마치 물이 흐르듯이 끊임없는 흐름 속에서 전환되고 변환되죠, 점과 선은.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그러므로 공 속에는 물질인 몸도 없고, 마음의 작용인 수상행식도 없고.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눈, 귀, 코, 혀, 마음도 없고,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대상도 없고, 눈의 영역 내지 마음의 영역도 없고.
여기서 논리 전개가 바뀌었습니다. 앞에서는 '오온은 공하다'라고 하는 논리를 전개했었는데, 여기에 와서는 그 논리를 완전히 뒤집었어요. 여기선 공한 것이 오온이다,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반야심경은 철저하게 기존의 모든 구조를 해체시켜 버린다는 거예요. 철저하게 해체시켜요. 그 해체시킨 위에다가 새로운 구조를 세우죠. 우리가 일상적인 표현으로 할 것 같으면, 도시를 개발하는데 있어서 뉴타운 방식을 쓰지 않고, 도시 전체를 아예 밀어버리죠. 그리고 그 위에다 도시를 세워요. 뉴타운 방식이라고 하는 게 뭐예요? 부분 부분적으로 하잖아요. 여기 찔끔, 저기 찔끔. 그런데 아예 도시 자체를 철저히 밀어버리죠. 아예 없애 버려요. 그리고 그 위에다 새롭게 도시를 건설하죠. 그래서 반야심경의 논리는 이거예요.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우리가 보통 표전(表銓)과 차전(遮詮)이라는 말을 쓰는데, 표전은 긍정한다는 말이고, 차전은 부정한다는 뜻이에요. 반야경은 철저히 부정하죠.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우리가 논리에 있어서 보면 인도나 구라파의 논리는 소통의 언어 논리예요. 근데 중국은 뜻의 언어 논리죠. 그래서 기본적으로 언어 논리구조가 달라요. 지금 이 반야심경 같은 경우는, 본래 반야심경은 소통의 언어논리 구조예요. 그래서 원전은 상당히 지루할 정도로 말이 많죠. 그런데 현장스님은 소통의 언어논리 구조와 중국의 전통적인 뜻의 언어 논리구조를 절충해서 이 반야심경을 번역했어요. 우리가 아함경이라는 걸 보면 정말 지루해요. 왜 그러냐면 언어논리가 반복되걸랑요. 근데 중국의 논리구조는 뜻이기 때문에 굉장히 단순하죠. 대신 중국의 뜻의 언어논리 구조는 그 뜻을 왜곡시킬 수 있는, 즉 소통에 많은 장애를 일으킬 수 있는 구조를 갖죠.
시고 공중무색(是故 空中無色)이라 그랬어요. 그러기 때문에 공 속에는 색이 없다고 그랬어요. 색수상행식은 오온이잖아요. 이것이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인간 존재를 이해하는 건데, 경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죠. "아난다여! 자아와 자아에 속한 모든 것은 공하므로, 세계는 공하다고 불린다." 자아, 또 자아에 속한 모든 것은 다 공하다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세계 자체가 공하다는 거죠. 불교에서 말하는 세계는 오온, 육근, 육경, 육식이예요. 이걸 세계라 그래요. 이거를 단순화시키면, 나와 대상이 되죠. 사실 우리가 오온이 공이 되었든, 공이 오온이 되었든 간에, 공이라고 하는 논리를 전개하게 되는데, 우리가 이 공이라고 하는 개념의 이해가 쉽지 않죠.
내가 이 공이라고 하는 것은 무상과 무아를 뜻한다고 했지만 공의 특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아요, 사실. 굉장히 이게 어떻게 보면 난해하죠. 난해한 이유는 이론적으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아요. 사실 이거는 이론적이기보다는 경험적인 거예요. 특히 반야경에서 공을 강력히 주장하는 이유는, 대승불교 전에는 부파불교 때는 독자부의 개아설, 아니면 유부의 법체설을 겨냥하고 있어요. 독자부에서 개아설을 주장하는데. 개아라고 하는 것은 푸트칼라라고 그래가지고, 금강경에 보면, 아상 인상(我相 人相)할 때 그 인상이 푸트칼라예요. 사람이라고 하는 뜻, 아니에요. 인도에는 자아라고 하는 개념도 있고, 개아라고 하는 개념도 있고, 영혼이라고 하는 개념도 있고, 여러 가지 유사한 개념이 있어요.
그런데 부처님이 '오온은 무아다'라고 그랬단 말이에요. 오온은 무아다. 독자부에선 뭐라 그랬냐면 붓다가 오온은 무아라 그랬다, 고로 오온이 아닌 것은 유아다. 아주 독특한 논리죠. 부처님이 오온은 무아다 그랬으니까 오온이 아닌 것은 유아라는 거지요. 그게 개아설이예요. 설일체부에서 삼세에 걸쳐서 법체는 항존한다고 하는 주장 같은 것들, 이따가 12연기에서 이야기 되어야 되지만, 여기서는 공 속에 수상행식이 없다고 하는 것, 우리가 이거는 일체개공이라고 표현하죠. 일체개공, 모든 것이 다 공이다.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라고 하는 것은 옆에 도표 나눠드린 거 있죠. 도표 나눠드린 거 보며는 18계라고 되어 있잖아요. 이게 지금 18계에 대한 이야기예요. 18계에 관한 이야기인데, 고 뒤에 한장을 넘겨 보세요. 한 장 넴게 보며는 근(根), 경(境), 식(識)이라고 되어 있고, 중앙에 계라고 내가 적어 놨는데, 육근, 육경, 육식이 동시작용할 때를 계라고 불러요. 그래서 이거를 하나하나 분석해서, 사티로다가 관하는 수행을 계분별관이라고 해요. 계분별관. 일단 도표를 보고 설명을 해야, 이 논리가 이해가 가요.
十 八 界
六根 六境 六識
眼根 色境 眼識
耳 〃 聲 〃 耳〃
鼻 〃 香 〃 鼻 〃
舌 〃 味 〃 舌 〃
身 〃 觸 〃 身 〃
意 〃 法 〃 意 〃
육근이라고 하는 것은, 근이라고 하는 것은 감각기관이라는 뜻이예요. 감각기관, 근은 감각기관이라고 하는 뜻이예요. 그래서 감각기관에는 여섯가지가 있다는 거예요. 첫째는 안근, 그러니까 시각이죠. 두번째는 이각, 청각. 세번째는 비근 후각. 네번째는 설근, 미각. 다섯번째는 신근, 이거는 촉각이예요. 그리고 여섯번째는 의근, 이건 마음이예요. 그러니까 시각과 청각과 후각과 미각과 촉각, 이 다섯가지 감각기관을 불교에서 육근이라고 불러요. 그래서 안이비설신은 아까 우리 색성향미촉법할 때, 색이예요.
18계라고 하는 것은 오온이 확장되고, 세분화되었다 그렇게 보면 맞아요. 인간은 시각과 청각과 후각과 미각과 촉각을 통해서 외부 세계와 소통하죠. 이 다섯 가지 감각이 완전히 소멸되어 버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경전에서는 이걸 썩은 나무토막보다는 더 소용이 없다고 그랬어요. 이건 시신이에요. 죽은 거예요. 인간은 철저하게 다섯 가지 감각을 통해서 소통하죠. 우리가 태어나서 다섯 가지 감각을 통해서 뇌가 성장하고, 뇌의 회로가 연결되걸랑요. 그래서 4세 이후가 되면 더 이상 뇌는 성장하지 않죠. 뇌의 회로도 새롭게 연결되지 않고. 수행을 통해서 뇌의 회로의 연결을 바꿀 수가 있어요. 뇌의 회로는 바뀔 수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일상적인 삶 속에서, 그냥 살아가는 중에는 뇌가 새롭게 연결되고 하는 법은 없어요. 인간에게는 이 다섯 가지 감각이 가장 근본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육경이라고 하는 것은, 경은 대상이라고 하는 뜻이예요. 색경이라고 하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자연이 되겠죠. 산, 별, 해, 달 이런 것들. 눈으로 볼 수 있는 건 전부 다예요. 색깔도 들어가요. 색깔, 청황적백흑, 이런 색깔. 그러니깐 눈으로 볼 수 있는 건 모두 다 색경이에요. 눈의 대상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에~, 그 다음에 성경은 소리이죠. 청각이 감지할 수 있는 것, 향경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냄새가 되었든, 나쁜 냄새가 되었든 냄새를 말하죠. 그 다음에 미경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먹는 음식물이예요.
인간은 철저히 외부에서 에너지가 공급되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해요. 우리가 음식물을 섭취해야 살죠. 왜냐하면 우리는 에너지를 외부에서 얻걸랑요. 우리에게는 자가발전 기계가 없어요. 이슬만 먹고 산다? 뭐, 이런 거는 상상 속에서나 있는 얘기죠. 인간은 철저하게 먹어야 살아요.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먹어야 산다고 하는 것은 똑 같아요. 그래서 중요한 것이 어떻게 먹냐는 거죠.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는 것. 그게 그 사람의 심성이나 어떤 육체의 건강이나 이런 데 많이 좌우하죠. 그 다음에 촉경은 피부가 느낄 수 있는 감촉이예요. 여기에 법이라는 게 나오는데, 법이라는 것 자체가 여기선 대상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그리고 안식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설명하면 보는 마음이 되고, 이식은 듣는 마음이 되고, 비식은 냄새를 맡는 마음이 되고, 설식은 맛을 보는 마음이 되고, 신식은 감촉을 느끼는 마음이 되고, 의식은 마음의 인식작용이에요. 그래서 눈으로 대상을 보잖아요. 대상을 보게 되면, 거기에 마음이 움직이죠. 그걸 안식이라고 그래요. 보는 마음이 움직이고, 동시에 의근이 작용하죠. 또 동시에 의식도 작용하고요. 안근과 색경과 안식과 의근과 의식이 다 작용해요. 계분별관은 이것을 낱낱이 사띠로 보는 걸 말해요. 우리가 볼 대 어때요? 눈알이 움직이잖아요. 안구가 구르잖아요. 안구가 구르고, 눈동자의 조리개가 확장과 축소를 하죠. 그걸 느끼는 거예요. 그걸 느끼면서 동시에 색경, 대상을 볼 때 눈의 눈동자가 움직이게 되는데, 안구가 구르고 눈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을, 움직임과 동시에 마음이 작용해요. 그거를 실제적으로 느끼는 거예요.
이근이라고 하는 것은 청각이 소리를 듣고, 소리를 들을 때, 거기에 또 마음이 움직인다 말이에요. 그리고 냄새를 맡게 되며는 코의 후각이 움직이고, 거기에 마음이 작용하게 되고. 외부에서 음식물이 공급되면 어떻게 돼요? 미각이 작용하잖아요. 수행에서는, 실질적인 수행에서는 안구의 움직임, 청각의 움직임, 후각의 움직임, 미각의 움직임, 소리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맛을 혀에서만 느끼는 것 아니에요. 구강에서도 느끼고, 인후에서도 느껴요. 그 자체를 다~아 느끼게 되고.
신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피부에서 느끼는 건데, 사람이 피부 접촉이 굉장히 중요해요. 피부 접촉이 많을수록 정이 들어요. 그래서 어린 애기일 때, 얼마가 얼마나 많이 보듬어 주느냐? 이게 굉장히 중요하죠. 우리가 낳은 정이냐, 기른 정이냐 하는 것도 이래서 나오는 거예요.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훨씬 더 영향이 커요. 왜 그러냐면 태어나서 기른 정은 피부 접촉이 많걸랑요. 피부 접촉을 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강한 유대감을 갖죠. 피부 접촉이라는 것은 환경적인 것을 뜻하기도 해요. 그래서 우리가 이걸 보통 후성이라고 그러는데, 선천적으로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온 것 보다는 후천적으로 얼마만큼 피부 접촉이나 어떤 환경을 조성해 주느냐, 이것이 굉장히 중요하죠.
일란성 쌍둥이는 거의 같은 환경에서 키우면 유사한 성장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환경에서 키우면 어떻게 될까요? 일란성 쌍둥이라 그래도 다른 환경에서 키우면, 유사한 점이 25% 밖에 안돼요. 그러니까 지능 여부, 질병 여부, 이런 부분 같은 경우가 일란성 쌍둥이를 다른 환경에서 키우면 25% 정도 밖에 동일하지 않아요. 그런데 같은 환경에서 키우면, 이게 굉장히 높아요. 그렇기 때문에 피부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 감촉으로 느껴지는 접촉이라고 하는 거는 굉장히 중요해요. 어떻게 보면 제2의 자궁이라고도 할 수 있죠. 우리가 가장 편안하고 안정되어 있을 때가 어머니 자궁 속에 있을 때걸랑요. 우리가 어머니가 안아 줄 때가 가장 편해요. 안정되어 있죠. 그래서 선천적으로 우리가 낳은 정을 이야기하지만, 후천적으로 기른 정이 더 깊은 거예요.
여기서 법경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대상이에요. 우리가 여기서 육근, 육경, 육식이라고 해서 법경을 나눠놓고 있지마는. 보통 부파불교에서는 색성향미촉법은 법경에서 제외된다고 그러지마는 제외될 수가 없지요. 또 제외되어서도 안 되고. 의근이라고 하는 것이 마음인데, 색성향미촉 자체가 다 마음의 대상인데, 법경에서 분리될 수가 없죠, 이거는. 이 18개가 모인 것을 18계라고 그래요. 계는 영역이라고 하는 뜻이예요. 근, 경, 식, 세 개가 모이면 계라 그래요, 영역이에요. 그래, 이 하나 하나를 사티로 직관하는 것을 계분별관이라고 그러죠, 수행에서. 이것도 수행에서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사티로 무엇을 직관하느냐? 육근, 육경, 육식 모두를, 그 어느 것도 아트만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는 거예요. 무상과 무아를 보는 거죠. 18계는 쪼금, 이게 좀 복잡합니다. 뭐 여기서 질문을 받고 넘어가죠? 뭐 질문할 것 없어요?
根
界
境 識
界 分 別 觀
의근은 마음이에요. 마음이라는 것이 어떤 형체가 있는 것이 아니니까. 의근이나 의식은 사실 구분할 수 없는 거예요. 부처님의 말씀에 보면 우리가 마음 심(心)으로 번역되는 것은 '짓다'라고 하는 말이에요. 그리고 의(意)라고 번역되는 거는 사실 '마노' 걸랑요. 예, 원어 자체는 달라요. 다른데.. 여기 식(識)이라고 하는 것도 또 다르단 말이에요. 윈냐나니까. 근데 이것이, 우리가 언어적으로는 이것을 분리할 수 있지만, 마음이라고 하는 것에서는 크게 다를 게 없죠. 그래서 부파불교에서는 심의식(心意識)은 동의어라고 그렇게 주장을 했어요. 물론 어떤 분들은 다르다고 주장을 하는 분들도 있지마는, 엄마와 여자가 다른 것이 아니죠. 엄마와 여자가 다른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의근이니, 의식이니, 마음이니 하는 말을 쓰지마는 실제적으로는 같은 거예요. 또 같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남방불교에서는 마음을 86심으로 나눠요. 그리고 부처님은 14심을 이야기 하고. 하~, 근데 우리 마음의 작용이 뭐 86개만 되고 그러겠어요? 똑같은 것을 봤을 때도, 어떤 때는 좋고 어떤 때는 나쁘고. 그 사람 아니면 죽을 것 같아 가지고 그 사람하고 결혼했는데, 지금은 그 사람하고 같이 있는 것 때문에 죽을 것 같고. 우리 마음의 움직임라고 하는 게 굉장히 복잡하죠. 부파불교 시대에는 이런 것 가지고 굉장히 논쟁을 많이 하고 그래요.
의근이나 육식이나 다 마음의 움직임이죠. 안근과 색경과 안식이 작용할 때는 동시에 의근과 의식이 작용해요. 다섯 개가. 우리가 이제 안근서부터 신근까지는 우리 육체에 속하잖아요? 의근은 우리가 색심2법으로 나누걸랑요, 부파불교에서 보면. 색심2법으로 나누게 되면 안근에서 신근까지는 색법에 속해요. 근데 의근은 심법에 속하걸랑. 육식은 다 심법에 속한다고. 근데 법경은 절반은 색법에 속하고, 절반은 심법에 속해요. 부파불교에서는 그렇게 분리했어요. 그 이야기는 뭐냐면, 이게 이론적으로다가 앞에 것들은 쉽게 와 닿죠. 시각은 보고, 청각은 듣고, 뭐, 이런 부분 같은 경우는 분명하니까. 이거는 재론의 여지가 없는데. 의근과 육식은 마음의 작용이거든요. 마음의 작용이라고 하는 거는 움직임의 형체가 보이지 않죠. 계분별관인 이유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사띠로 직관한다 이거죠. 직관이라는 말은 지혜를 말해요. 그래서 이거는 혜해탈에 속하는 거죠. 지혜로써 감각의 움직임과 그 대상과 마음의 작용을 동시에 보는 거예요. 이거야말로 체험을 해야 돼요. 이건 경험하지 않으면 이거를 해하기가 어려워요.
우리가 보통, 이것을 온처계(蘊處界)라고 그러걸랑요. 온처계. 오온, 육근 육경은 12처예요. 계라고 하는 것은 이 세 가지를 모아서 온처계라고 하는 말을 쓰는데, 불교에서는 이 온처계를 세계라 그러죠. 나와 대상. 엄격히 얘기하자면 이 세상에 나와 대상 밖에 없단 말이에요. 우리가 그렇잖아요. 나 그리고 대상. 나 이외에는 모두가 다 대상이걸랑요. 그 외에는 없죠. 그래서 우리가 온처계라고 하지마는 단순화시키면 나와 대상이에요.
우리가 보면, 대체적으로 경전에서는 육식이 따로 설해져요. 12처가 설해지고, 육식이 따로 설해져요. 우리가 18계니, 근경식이니 이런 것은 실질적으로 부파불교 시대 때 이런 것은 다 붙인 거예요. 부처님이 이야기할 때는 뭐라 하냐면, 내가 대상을 볼 때는 당연히 마음이 움직이죠. 내가 대상을 보고, 그 마음의 움직임을 보고, 단순하게 이야기하죠. 그런데 부파불교에서는 굉장히 복잡하게 온처계를 도표를 그려가지고, 이쪽 저 쪽에다 막 연결시키니까 굉장히 복잡해요. 실제적으로 이거는 단순해요. 내가 대상을 볼 때, 마음의 움직임을 보고, 내가 소리를 들을 때 마음의 움직임을 보고, 내가 맛을 볼 때 마음의 움직임을 보고, 내가 냄새를 맡을 때 마음의 움직임을 보고, 내가 참 보드라운 것을 걸치고 부딪쳤을 때 마음의 움직임을 보고, 우리가 단순히 보면 그거예요.
우리가 몸을 보는 것은 마음을 보기 위해서예요. 마음을 보는 것은 다르마를 보기 위해서예요. 반야심경에서는 철저히 무무무 하잖아요. 다 부정해 버리죠. 중국의 무문혜개(無門慧開)선사는 무자 28자로 무자송을 딱 지었죠. 무무무무무무무 무무무무무무무 무무무무무무무 무무무무무무무(無無無無無無無 無無無無無無無 無無無無無無無 無無無無無無無) 이거 어떻게 해석할 거예요? 28자로다가 무문 혜개선사는 무자송無字頌을 지었어요. 원래 무자라는 것은 없을 무자지만 동시에 아닐 무자예요. 우리가 무자라고 하는 것을 없다라고만 해석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없다'라고 하는 의미도 있지만, '아니다'라고 하는 부정사의 의미도 있어요.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의 소멸도 없다. 내지 늙음과 죽음도 없고, 또한 늙음과 죽음의 소멸도 없고. 이거는 12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동시에 설명하고 있는데, 그냥 내지라고 해버렸어요. 앞에서도 안계 내지 해버렸고. 다 생략해 버린 거예요. 원래 원전에서는 길게 다 나오는데, 현장 스님은 그냥 짤라 버렸어요.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뒤에 보면 12연기, 12인연이라고 하는 도표가 있죠.
十 二 緣 起
無明 行 識 名色 六入 因 觸 緣 受 觀 愛 取 有 生 老死
12연기. 조금 전에 12연기에 대한 얘기걸랑요. 첫 번째는 무명(無明)이고, 무명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의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예요. 무명의 반대되는 말이 명이걸랑요. 명. 밝을 명자 명. 띠띠야. 명은 지혜라고 하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무명은 지혜가 없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무지(無知). 무엇이 무지냐하면 낡은 의식을 말해요. 부처님이 처음 성도하셔 가지고, 낡은 의식에 사로잡힌 자는 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걸랑요. 낡은 의식이 뭐예요? 과거의 사고체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말하죠.
얼마 전에 이병철 삼성 전회장이 돌아가시기 전에 종교인들에게 질문한 것에 대해서, 세 분이 답한 것이 시중에 나왔는데, 차동엽 신부하고, 김홍도 목사하고, 허정이라고 하는 스님. 내가 발췌된 것을 읽어 보니까 과거의 낡은 답을 고대로 다시 되 판것에 불과 하더라구요. 새로운 답이 없어요. 과거, 옛날에 답했던 것을 그대로 또 답했어요. 왜 그러냐면, 우리는 과거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걸랑요. 낡은 의식에 고착화되어 있으면, 우리는 항상 낡은 의식 속에서 모든 걸 판단하죠. 부처님은 무명이라고 하는 것은, 연기와 무상 무아를 이해를 몬하는 거를 무명이라 그랬어요. 우리가 쉽게 설명하자면 무명이라고 하는 것은 낡은 의식이에요.
무명으로 인해서 행(行)이 생긴다는 거예요. 무명으로 인해서 행이 생긴다. 이것을 순관(順觀)이라고 그래요. 유전연기(流轉緣起)라고 하는 말도 쓰죠. 유전이라고 하는 것은 물이 흐른다 이 말이에요.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 그래서 무명으로 인해서 행이 있고. 이 행이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행이라고 하는 거는 형성된다고 하는 뜻인데, 무엇이 형성되느냐? 그릇된 행동, 그릇된 언어, 그릇된 마음으로 인해서 무언가가 형성되는 거를 말해요.
우리가 이것을 신행, 구행, 의행이라고 하는 말로 쓰는데, 이건 업(業)이라고 하는 말과 표리의 관계예요. 행이라고 하는 말은 현재 진행형이에요. 업이라고 하는 말은 과거 완결형이죠. 그래서 행은 업설하고 바로 연결돼요. 무명으로 인해서 행이라는 것이 있게 되는데, 그 행의 완결형이 업이에요. 불교 윤회설의 핵심이 되는 용어가 이 행이라고 하는 말이에요. 형성되는 거, 뭔가가 형성되는 거. 우리가 행동하고, 우리가 어떤 말을 하고, 우리가 어떠한 마음을 썼을 때, 그것이 어떤 하나의, 마치 뭔가를 자취를 만들어 낸다는 거예요. 우리가 길을 가면 발자국이 남듯이 남아요. 그게 진행형일 때는 행이라고 그러고, 그것이 완결형일 때는 업이라고 하는 말을 써요. 그래서 행과 업은 표리 관계예요. 소등과 손바닥의 관계죠. 이것은 분리가 안돼요.
그 다음에 식(識)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이에요. 우리가 아까 안이비설신의 육식을 이야기 했잖아요. 그 의식을 말해요. 그 다음에 명색(名色)이라고 하는 것은, 명은 마음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색은 몸이라고 하는 뜻이고. 색수상행식 오온을 여기서는 그냥 명색이라고 단순화시켜 버렸어요. 몸과 마음이요. 그 다음에 육입(六入)은 육근(六根)을 말해요. 앞에서 나왔죠, 육근. 그 다음에 촉(觸)은 근경식이 접촉되는 것을 말하고, 수(受)는 그 근경식이 접촉됐을 때 느낌을 말해요. 그리고 애(愛)라고 하는 것은, 근경식이 접촉되어 느낌이 있으면 거기에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잖아요. 그것을 애라 그래요.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면, 취(取), 집착이 생기죠. 대념처경에서는 '움켜쥐다'라고 표현을 하죠. 움켜쥐는 거예요.
움켜쥐게 되면 유(有)가 생기죠. 이거는 존재의 욕망이에요. 뭔가 존재하고 싶어지는 거예요. 존재의 욕망이 있게 되면 생(生), 태어난다는 거예요. 그러게 되면 태어났으면, 늙고 죽는 것이 있게 돼요. 그러니까 무명으로 인해서 행이 있게 되고, 행으로 인해서 식이 있게 되고, 식으로 인해서 명색이 있게 되고, 명색으로 인해서 육입이 있게 되고, 육입으로 인해서 촉이 있게 되고, 촉으로 인해서 수가 있게 되고, 수에 의해서 애가 있게 되고, 애에서 취가 있게 되고, 취에 의해서 유가 있게 되고, 유에서 생이 있게 되고, 생에 의해서 노사가 있다. 이 흐름을 순관이라고 그래요.
반대로 무명이 소멸하게 되면 행이 소멸하고, 행이 소멸하면 식이 소멸하고, 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쭉~ 내려와서, 생이 소멸하고, 노사가 소멸한다. 이걸 역관(逆觀))이라고 그래요. 또 환멸연기(還滅緣起)라고 하는 말을 후대에서 썼죠. 환멸이라는 말은 소멸된다는 뜻이에요. 소멸되어서 열반을 얻는다고 하는 뜻인데, 이거는 부처님께서 보리수와에서 깨달음을 얻을 때, 이 12연기를 순관과 역관으로 관했다고 되어 있어요. 경전에. 마하박가에도 그렇게 되어 있고. 그래서 부처님의 깨달음은 연기인데, 이 12연기를 보리수하 아래서 순관과 역관으로 관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근데 나는 여기에 의문이 있어요. 12연기인데, 부처님이 보리수하에서 순관과 역관으로 이걸 관하셨다 그러는데, 그래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는데, 부처님이 최초의 5비구에게 가르침을 전할 때, 중도와 사성제에 대해서는 설명했는데, 12인연은 설명했다고 하는 기록이 없어요. 만약에 부처님이 보리수하에서 순관과 역관으로 12연기를 관했으면, 당신의 깨달음의 내용이 이건데, 이거를 설명을 했어야 되지 않겠어요? 근데 왜 안했을까? 나는 이것은 불멸 후에 누군가가 무아 윤회를 설명하기 위해서 구성했다고 봐요.
경에서는 부처님이 이걸 관했다고 하지만, 마하박가에서도 하지마는, 실제에서는 그러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많아요. 무아인데, 무엇이 윤회하느냐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거는 후대에 고안되고 구성되었을 거예요. 그리고 12인연이, 이게 엉성하걸랑요. 식(識)은 육식이에요. 명색(名色)은 오온이에요. 육입(六入)은 육근과 육경이에요. 부파불교 설명에 의하면 육내입, 육외입이라 그러는데 육입에 육경이 들어가야 할 이유가 없걸랑요. 그런데 육입에 들어간다고 그래요. 그리고 촉수애취유(觸受愛取有)는 마음의 작용이에요. 식에서부터 유까지는 다 겹쳐요. 의식하고 명색의 마음하고 다른가요? 육입에서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은 색이예요. 그리고 의근은 마음이라구요. 그리고 촉수애취유는 다 의근에 속해요. 마음에 속하고. 이거는 후대에 조합했다고 봐요.
불교의 역사는 무아인데, 무엇이 윤회하느냐? 이걸 설명하는데 가장 고심했어요. 근데 그거는 아직도 답을 못 내놓고 있어요. 무아인데 무엇이 윤회하느냐? 윤회의 주체가 뭐냐는 거죠. 윤회의 주체에 대해서 업이라는 걸 세우는데, 이게 또 문제가 있걸랑. 행과 업은 표리의 관계인데 이게 문제가 있어요. 뭐가 문제가 있냐면 붓다는 제행은 무상이라 그랬거든. 우리가 전생의 업, 전생의 업 하는데, 제행이 무상이야. 제행이라고 하는 것이, 업이라고 하는 것이 영원할 수가 없어. 근데 과거의 업이 어떻게 현재의 나를 반드시 지배할 수 있는가? 이게 굉장히 많이 충돌하는 부분이에요, 이런 부분이 요령부득이지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부처님이 윤회설을 방편으로 말씀하셨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부처님이 윤회를 설하지 않았다....... 라고도 하죠. 그런데 윤회라고 하는 것을 부정을 하면, 수타니파타에서 수없이 이야기하는 거센 흐름을 건넜다고 하는 표현이 성립이 안돼요. 거센 흐름은 윤회를 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처님은 영원이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물었을 때 답하지 않았어요. 부처님이 사후에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도 답하지 않았고. 부처님은 도리어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서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답 아니걸랑요. 허정이라고 하는 스님이 그 독화살의 비유를 들고 나왔는데, 그것은 답한 게 아니에요. 부처님이 독화살 이야기를 든 거는 환자가 있을 때, 이론으로 치료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럼 뭐예요? 약을 쓰고 집도를 해야죠. 말룬카가 붓다에게 물었을 때 독화살의 비유를 든 이유는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것이에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관심을 갖는 부분에 대해서 붓다는 관심이 없었다는 거예요.
내가 왜 낡은 의식이라는 말을 쓰냐면 우리는 어떤 의식이 있어요. 무언가가 있어야 돼요. 우리는 끊임없이 뭔가를 세우려고 하죠. 그런데 아까도 이야기 했듯이, 붓다는 구조 자체를 철저히 해체시켜 버리걸랑요. 12연기라고 하는 것은 무아(와?) 연기를 설명하기 위해서 누군가가 엄청나게 고심한 끝에 나온 작품이에요. 그래서 부처님의 여러 가지 말씀을, 우리가 법수라고 하는 것을 모아서 이것을 집성했다고 보는 것이 옳죠. 이게 불교의 핵심적인 교리라고 가르쳐지는 건데, 나는 그렇게 봐요. 나는 전부터 이 12연기를 보면 의심이 갔걸랑. 어떻게 이게 전혀 연결이 안 되걸랑. 적어도 부처님께서, 부처님이 했다면, 이렇게 띨띨하게 했을 리가 없다, 그게 내 생각이에요. 오온 12처라든가 이런 부분은 거의 논리적으로 완벽하걸랑. 이론적으로도 그렇고. 근데 이거는 굉장히 중첩되는 게 많아. 식명색육입촉수애취유(識 名色 六入 觸 受 愛 取 有)는 다 이거 겹치는 얘기들이라. 더군다나 촉수애취유 이것은 마음의 움직이걸랑. 다 이 근경식이 움직일 때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온 18계하고도 다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거예요.
식도 마음의 작용이고, 명도 마음의 작용이에요. 우리가 마음, 마음하여 마음을 절대화시키니까 마음이라는 것이 마치 어떤 형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하지만. 부처님이 마음을 심유주라고 그랬거든. 마음은 흐르는 것이다. 흐른다고 하는 것이 뭐예요? 고체가 아니라는 이야기죠. 우리는 마음이라는 걸 고체로 파악하걸랑요. 대체적으로 나는 그렇게 인식한다고 봐요. 선종의 명심견성설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기 때문에 명심견성설이라고 하는 것이 나온다고 보는데, 사실 12연기는 아까도 얘기했지만 무아 윤회를 설명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나는 봐요. 경에서 주장하듯이 부처님이 만드셨는지, 내가 주장하듯이 후세에 만들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난 적어도 부처님이 만들었다고는 안 봐요. 부처님이 만들었는거 치고는 너무 허술하죠.
무아라고 하는 말 자체가 나를 부정하는 말은 아니걸랑요. 아니다라고 하는 말이지. 여기서 ‘아니다’ 라고 하는 말은 어떤 자아의 실체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죠. 사실 불교의 무아 이론은 굉장히 논리적으로 어렵습니다, 이게. 대체적으로 보면 서양에서도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도 영혼을 이야기하고, 인도의 주류사상도 다 그렇고. 대체적으로 영혼이나 자아나 개아나 푸트칼라나 지와나 뭐, 온갖 것을 다 이야기하는데, 불교만 그 실체성을 인정을 안 해요. 아까도 이야기 했듯이 인도 불교라고 하는 거는 그 실체성을 인정하는 쪽으로 가는 거예요. 무아라고 하는 말을 피해서. 왜냐면 무아라는 말을 전면적으로 하게 되면 불교가 아니게 되니까. 불교라는 깃발을 세울 수 없으니까, 불교라는 깃발을 세우면서도 어떻게 이 부분을 인정할 것이냐? 그 쪽으로 가는 거죠.
사실 무아라고 하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체험을 말해요. 이건 체험되어지는 거예요. 우리가 무아라고 하는 것이 체험되어져야 모든 자의식이 해체되고, 열반에 이를 수 있어요. 현대 과학이 이렇게 발달했어도, 구체적으로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해서 아직 몰라요. 이제 마음에 대해서 알아가는 초입에 들었죠. 우리가 무아설이라는 것도 2,500년간 이야기 되어졌지마는 아직도 구체적으로 설명을 몬해요. 구체적으로 설명을 못하는 이유는 사실 무아라는 개념 자체가 굉장히 난해한 개념이에요. 개념 자체가 난해한 개념이에요. 업설과 윤회설 자체도 추상적인 용어인데, 이게 이론적으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죠.
부파불교 시대에 구사론이라는 것이 옛날식으로 딱 100권인데, 대부분이 무아인데, 무엇이 윤회하는가를 설명해요, 70%가. 100권에서 70권은 그걸 설명한다고 보면 맞아요. 근데 문제는 거기에 대한 답을 못 내놓는다는 거예요. 그저 믿어라, 믿으면 복 받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결론을 낸다고 하는 것이 가장 쉽죠.
조금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행에서 식이 성립된다고 12연기에서는 이야기 하는데, 하아~, 참 이것이 자아와 무엇이 다른 건가? 라는 의문이 들죠. 만약에 그렇다면 식이라고 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식이라고 하는 것이 자아이론의 아트만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왜 그러냐하면 명색보다 먼저 와 있걸랑요. 여기 몸이 없걸랑, 아직. 아직 몸이 없잖아요. 몸이 없고 의식만 있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면 의식만 따로 존재한다면 아트만하고 무엇이 다른가? 우리가 근본적인 질문을 안 할 수가 없죠.
아까도 말씀드렸지마는 기본적으로 붓다는 윤회하는가 안하는가에 대해서는 나는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봐요. 그럼 붓다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무엇이냐면, 해탈이에요. 동요되지 않는 열반을 얻는 거예요. 말룬카가 붓다에게 14가지를 물을 때, 세상이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이런 여러가지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했을 때, 독화살의 비유를 든 이유도 거기에 있죠. 형이상학적인, 추상적인 이론이라고 하는 것은 죽은 뒤에 영혼이 있는가, 없는가를 알고 싶으면 죽어보면 알아. 그게 가장 효과적인 거예요. 천국과 극락이 좋은지 안 좋은지는 죽어서 가보면 알고, 지옥이 고통스런 곳인지 아닌지는 죽어서 가보면 알아.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지옥이 못살 것 같으면, 도망 나오는 놈이라도 있을 텐데, 없다는 거예요.
(이 부분 녹음 안되었음)
원문: 無苦集滅道 무고집멸도
사성제는 5비구에게 처음 가르침한 내용이에요. 苦는 生老病死로 근본이 된다. 줄여서 生死로 표현. 생사는 윤회의 전생입니다. 集은 원인이라는 뜻. 즉 고의 원인을 말한다. 갈애라고 표현되기도. 고의 원인은 무명. 무명이란 다르마에 대한 무지. 즉 달리 말하면, 연기에 이르지 못하는 것. 연기에 이르지 못하면 무상과 무아를 알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부처님이 윤회를 주장한 것은 방편설이라고 주장을 해요. 스님들도 그렇게 이야기하는 분들이 있고요. 어떤 분들은 부처님이 업과 윤회를 이야기하지 않았다고도 이야기 해요. 부정했다고도 하고. 왜 그러냐면 부처님이 그거를 물었을 때 답하지 않았다고 하는 기록이 있걸랑요. 그거는 부처님이 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부처님이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주장을 해요.
우리가 하나 알아야 될 것은 불경에는 상호 모순되는 이야기가 많다는 거예요. 상호 모순되는 이야기가 많은 이유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대기설법(對機說法)이예요. 대기설법이라는 말은 맞춤설법이라는 말이에요. 어떤 사람이 와서 물었을 때, 그 사람의 물음에 대해 답을 주는 것이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답을 제시하지는 않아요. 의사가 앉아 있다가 감기환자가 오면, 감기약을 주고, 독감환자가 오면 독감약을 주죠. 뭐 50년대 군대에서는 정말인지는 몰라도, 그랬다고 그러지만. 배 아프다고 그러면 군의관이 배에다가 아까쟁끼를 발라주었다데. 뭐 이게 군대에서 전설같이 나오는 이야기니까 실질적으로 그런 군의관도 있었겠죠. 우리가 모든 환자에게 동일한 처방을 할 수는 없죠. 동일한 약을 줄 수는 없는 거고.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가르침을 주죠. 말룬카가 와서 14가지를 질문했을 때, 붓다가 답하지 않고 독화살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 비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당장 생사의 해탈이지, 그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그 비구에겐. 그런데 우리는 한 사람한테 한 이야기를 일반화시키니까 문제죠. 대표적인 것이 무소유예요.
부처님이 무소유를 이야기한 것은 비구들한테 했어요. 부처님이 무소유를 이야기한 것은 최소한의 소유를 이야기한 것이지,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래서 비구는 가질 수 있는 것이 삼의(三衣). 삼의라고 하는 것은 옷 세 가지예요. 허리 아래 걸치는 가사, 윗몸을 덮는 가사, 아랫가사, 윗 가사, 그리고 대가사라고 그래 가지고 딱 그 세 가지. 그리고 밥그릇 하나, 물을 걸러 먹을 수 있는 걸름망 하나, 왜 그러냐면 물에 벌레들이 있기 때문에. 단순히 벌레 때문만은 아니에요. 위생적으로 그건 중요하거든요. 그리고 비구는 반드시 맨바닥에 않으면 안돼요. 보자기 비슷한 게 있어요. 나도 그걸 가지고 있는데, 반드시 그걸 깔고 앉아야 돼요. 엄격히 규정을 적용하면, 나도 지금 비법이에요. 그걸 깔고 앉아 있어야 되는데, 안 깔고 앉아 있으니까요. 반드시 비구는 어디든지 앉을 때, 그걸 깔고 앉아야 돼요. 규정이 그래요.
그 이야기는 뭐냐 하면 2,500년 전 인도의 비구들이 유행을 하기 때문에 땅바닥에 앉고 그런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게 위생 상 문제가 생기죠. 그러니까 그걸 까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방석이에요. 방석은 두터우니까 가지고 다닐 수 없으니까. 앏은 천을 가지고 다니는 거예요. 그걸 까는 거예요. 그래서 비구는 그 위에 앉고, 그 위에서 자고. 요것만 소유할 수 있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무소유라고 하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일반화시켜서 얘기하면 곤란하죠. 내가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인간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소유한다고 하는 뜻이에요. 소유하지 않으면 인간은 존재하지 않아요. 인간은 소유하지 않으면 굶어 죽어요. 인간은 반드시 소유를 전제로 인간이에요. 그래서 존재해요. 결국 무소유의 주장은 정말 아름다운 스포츠카이긴 한데, 사진 속의 스포츠카예요. 타고갈 순 없어요. 나는 무소유의 주장은 사기라고 봐요. 그건 거짓이에요. 무소유한 인간은 있을 수가 없어요. 부처님도 비구들에게만 그 이야기를 한 것이지. 부처님이 재가자들에겐 이렇게 얘기 했어요, 돈 많이 벌어라~! 부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붓다는 얘기 했어요. 돈 벌라고 했어요. 단, 정당하게 벌라고 그랬죠. 뭐, 사기를 치거나 이러면 안 되죠.
불교에서 재물을 천시하는 것은 중국적인 사고방식이에요. 원래 초기 불교의 지지자들은 상인계급이었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부유했지만, 신분적으로 보면, 차별받는 신분이었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아니었어요. 상인들이 부유했지마는 신분적으로는 차별 받았걸랑요. 불교가 중국식으로 말하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기 때문에 상인계급의 지지를 받았어요. 그리고 붓다의 법회장에는 가장 귀한 빠세나디나 빔비사라와 같은 왕부터, 그의 왕비인 말리카나 유제이 같은 왕비에서부터, 평민들, 하다 못해 유녀들 까지도 같은 자리에 앉아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었던 것은 그 당시에 비춰보면 혁명적인 것이죠. 그것 때문에 붓다는 비난받았고. 이상한 집단이다. 유녀라고 하는 게 뭐예요? 요새로 말하면, 그저 길거리 여자예요. 그런 여자들까지도 가장 권력자였던 왕이나 그런 사람들하고 같은 자리에 앉아서, 동등하게 붓다의 가르침을 들었어요.
우리가 불교를 왜곡하면 안돼요. 무소유의 주장은 불교를 왜곡하는 거예요.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대못을 박는 소리죠. 먹고 죽고 싶어도 먹고 죽을 게 없어. 모든 것은, 업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성립이 될라 그러면 의도가 있어야 돼요. 의도가 없으면 업은 성립되지 않아요. 만약에 의도가 없는데, 모든 것이 성립이 되면, 우리는 영원히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게 돼요. 중국에서 이게 초기에 논쟁이 되었죠. 중국에 불교가 왔을 때.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는 것이 살생이냐? 그리고 업이 성립되는 거냐? 였어요. 사자가 사슴을 잡아 먹는 것이 살생입니까?
한 번 말씀해 보세요....... 아니 뭐, 자타가에 보면 살생하지 않으려고 굶어 죽는 사자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게 붓다의 전생이다 이런 얘기. 이런 사자는 붓다의 전생 한 마리면 충분하고.......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는 것은 살생과 업이 아니예요. 그건 도덕과 윤리의 문제니까요. 그건 도덕과 윤리의 문제지, 업의 문제는 아니에요. 도덕과 윤리라고 하는 것이 뭐예요?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양식이걸랑요. 우리는 그러한 것이 업이 성립되든, 안되든 간에, 내가 고의였든 실수였든 간에 어떠한 사건이 생기면, 거기에 대해서 마음이 아파요. 그게 뭐냐? 붓다는 그것을 비심(悲心)이라 그랬죠. 아파하는 마음. 우리가 자비(慈悲)라 그럴 제, 자(慈)가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비(悲)는 아파하는 마음이걸랑요. 원래 자비라는 것은 붙여 쓰기도 하고, 따로따로 쓰기도 하고 그래요. 우리가 그러한 거를 아파하는 거는, 그건 당연한 거예요. 왜? 내 마음 속에는 따뜻한 피가 흐르니까요. 만약 그거에 대해서 아무렇지 않다면, 그게 도리어 어색한 거 아닌가요? 업이 성립되고, 성립되지 않고 하는 것은 2차적인 얘기예요.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오늘은 지난주에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에서 고와 집을 설명을 하고, 멸과 도를 설명을 못 드렸죠. 오늘은 멸과 도를 설명하겠습니다.
멸은 고가 소멸된 거를 말하죠. 고집멸도라는 것은 불교에서 사성제라 그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르침인데, 멸은 고가 소멸된 겁니다. 고가 소멸된 것에 대해서, 부처님은 안온(安穩)이라는 표현도 썼고, 안락(安樂)이라고 하는 표현도 썼고, 불사(不死)라고 하는 표현도 쓰죠. 불사, 영원히 죽지 않는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표현도 쓰고, 또 해탈(解脫)이라고 하는 표현도 씁니다. 그리고 열반(涅槃)이라고 하는 말을 쓰죠. 경에 보면, 안온이나 안락이나 불사나 해탈이나, 이런 것보다 열반을 상위 개념으로 쓴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유심히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열반이라고 하는 개념과 깨달음이라고 하는 개념이 동일한 것이냐 아니면 차이가 있느냐는 거죠. 우리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말을 많이 써요. 그런데 열반이라고 하는 말도 부처님이 동시에 쓰걸랑요. 근데, 우리가 실제적으로 보면 부처님이 보리수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표현을 하지마는 경전에서 일상적으로 쓰이는 단어는 열반이라고 하는 말이에요. 어떻게 보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순간에 오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우리가 매 순간의 깨달음이라고 하는 표현도 쓰지만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경지를 뜻한다고 보기는 좀 어려워요. 무슨 말이냐 하며는, 열반이라는 것은 지속되는 것을 말해요. 그렇지만 깨달음이라는 것은 어떤 전환을 뜻하죠. 무엇이 바뀐 걸 뜻해요. 그런 면에서 우리가 진지하게 보면, 깨달음이라 것은 어떠한 경지의 활로를 연 거라면,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일상화 되어 있는 거를 뜻하죠.
요것은 중국 불교에서 돈오돈수(頓悟頓修)나 돈오점수(頓悟漸修)의 논쟁, 또 티벳에서 있었던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돈오냐, 점오냐 하는 논쟁하고도 다 밀접한 관련이 있죠. 중국에서는 돈오돈수론을 주장했어요. 물론, 뭐 규봉 종밀(圭峯 宗密)이나 하택 신회(荷澤 神會)같은 경우는 돈오점수론을 이야기했는데, 적어도 중국 불교에서 마조 이후에는 돈오돈수설을 고수한단 말이에요. 돈오돈수라고 하는 것은 무슨 말이냐면, 깨치고 나면, 더 이상 닦을게 없다는 거죠. 근데 돈오점수론이라고 하는 것은 깨쳤더라도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다 바뀌지 않는다고 하는 주장이에요.
그것이 이제 훈습론(熏習論)인데, 훈습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과거에서부터 일깨워온 어떤 습관을 말하죠. 정확히 말해서 훈습이라고 하는 용어는 어떤 향기가 옷에 밴 거나 내 몸에 밴 거를 뜻하는 말인데, 원래 훈습이라고 하는 것은 부파불교의 시대 때에 아주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였어요. 훈습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에부터 내가 익힌 걸 말하걸랑요. 그래서 뭐, 습기라고 하는 용어도 썼고. 근데 우리가 어떤 생각의 전환이 왔다고 그래서 모든 생활이 360도로 전환이 될 수 있느냐, 그게 인제 돈오점수설의 기초예요. 그런데 돈오돈수설은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다 바뀐다는 거죠.
사실 돈오점수설, 돈오돈수설 두 가지 자체가 사실 논리적으로다가 굉장히 문제가 있죠. 어떻게 보면, 중국에 중요한 선종의 논쟁이긴 했지만 돈오점수설 되었든 돈오돈수설 되었든 원래 그 자체가 문제점이 있어요. 티벳 라싸에서 중국 선종의 마하연(마할리안사;摩訶衍) 선사와 인도 출신 카마라실라의 점오(漸悟)냐 돈오(頓悟)냐 라고 하는 논쟁 같은 경우도 보면 확실하게 들어나지요.
부처님은 숫타니파타에서 이렇게 이야기 하걸랑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한 순간에 오는 것도 아니고, 점차적으로 오는 것도 아니다. 이게 붓다의 근본적인 입장이에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일순간에 오는 것도 아니고, 곧 돈오도 아니고 점오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리고 어떻게 보면, 돈점의 논쟁, 돈오점수냐 돈오돈수냐라고 하는 논쟁은 비불교적인 논쟁이죠. 결국은 인도의 부파불교라고 하는 것이 지나치게 이론적으로 그야말로 번잡해지고 쓸데없는 걸 가지고 논쟁을 하는 그런 형태였는데, 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한 순간에 오는 현재 진행형으로다가 우리가 볼 것이냐, 아니면 완성된 과거형으로 볼 것이냐 하는 거죠. 그런데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완성된 과거형이에요.
그렇지만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을 완성된 과거형으로 볼 수 있느냐? 왜 그러냐면 부처님이 해탈 자체를 열반이라고 하는 것 보다 아래 단계의 개념으로다가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는 거는 분명해요. 물론 뭐, 여러 가지 표현을 쓰시지마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대기설법이라 그때그때에 사람에 따라서 가르침을 주기 때문에, 우리가 경전을 보면 사실 당혹스러울 때가 많죠. 당혹스러운 이유는 모순을 많이 노출시킨다는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영혼과 윤회의 질문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 뭐 이런 부분들 같은 경우. 그 사람에게 그 답이 적합 하냐 안하냐에 따라서 답하고, 답하지 않고 그래요. 우리가, 스님들도 그렇고, 우리 불자님들도 그렇고, 많은 부분에서 간과하는 것이 뭐냐면, 어떤 특정인한테 한 이야기를 일반화시켜 다 적용시킨다는 거예요. 일반화시키면 안 돼요.
열반이라고 하는 것을 경전에서는 뭐라고 설명 하냐면, 탐진치 삼독의 불꽃이 꺼진 것이다. 그것이 열반이라고 그러죠. 결국은 고를 불태우는 것, 고를 있게 한 것이 탐진치 삼독이라는 거죠. 고의 원인이 사실 탐진치 삼독이걸랑요. 왜 그러냐면 무명에 의해서 탐진치 삼독이 생기니까. 그래서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무명이 소멸된 거, 결국은 탐진치 삼독의 불꽃이 꺼진 걸 말하죠. 이것이 전통적인 해석 방식이에요. 경전에서도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내가 이해하는 것은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자의식이 해체된 경지라고 보죠. 자의식이 해체된 경지.
부처님은 자(自)의 특성에 대해서 세 가지를 얘기해요, 자(自). 뭐냐 하면, 첫째는 아(我), 나, 두 번째는 나의 것, 세 번째는 나의 본질이라고 하셨죠. 나의 본질이라고 하는 말은 나의 실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죠. 나라는 것은 한문으로는 아트만, 아르마라고. 나의 것이라는 것은 한문에서는 아소(我所)라고 해요. 그리고 나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아체(我體)라는 말을 쓰는데, 몸 체자를 써서, 아체. 여기 후대에 개체나 법체, 이런 말은 다 아체라고 하는 말의 이 체의 용어에서 파생되는 거예요. 부파불교 시대 때에, 개체나 법체라 하는 것들을 그렇게 보면 정확해요.
결국 반야심경에서 중점으로 두고 설파하는 것은 공이걸랑요. 공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 공의 사상은 제법의 공인데, 무엇을 겨냥하고 있냐면, 설일체유부의 법체라고 하는 걸 겨냥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돼요. 그래서 부처님은 이 자의 특성을 나, 나의 것, 나의 본질....... 나의 실체라고 하는 거는 내가 붙인 건데, 이 세 가지를 든단 말이에요. 나의 본질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고, 나의 실체라고도 이야기 할 수 있어요. 이 세 가지가 자의 특성이라는 거예요. 근데 이런 것은 실체가 없다는 거죠. 이 세 가지가 자의식을 만드는 거거든요. ‘나’라고 하는 의식을 만드는 것이 이 세 가지예요.
우리 인간의 근본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태어나서 6세까지 입력된 정보에 의해 형성된 유년기의 의식이에요. 유년기의 의식이 사고와 생각의 토대가 되죠.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과거의 의식과 현재의 일반적 경험이 통합되는 것을 말해요. 우리가 유년기를 중요시 여기는 이유는 유년기 즉, 태어나서 6세까지 외부에서 입력된 정보에 의해서 의식이 형성된다는 얘기예요. 그것이 평생의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게 되죠. 우리가 성년이 돼도, 이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이 시기에 형성된 자의식에 의해서 80이 된 사람도 무엇을 판단하고, 결정할 때 이것이 작용하는 거예요. 우리가 좋은 환경 속에서 자라야 되고, 좋은 환경을 조성해줘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죠. 천재는 만들어지는 것이지 태어나는 게 아니에요. 엄마의 자궁 밖에서 나와서 6세까지 어떤 양육 환경 속에 놓여 있느냐에 아이가 천재가 되기도 하고, 보통 아이가 되기도 하죠. 물론 태아 때부터 선천적으로 문제가 되는 아이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자궁에서 나올 때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고, 태어나서 6세까지 형성되는 그 어떤 것들이죠.
우리가 자의식이 해체되지 않으면, 자의식이 해체된다고 하는 것이 뭐겠어요? 과거의 의식이 지워지고, 새로운 의식이 형성되는 것을 말하죠. 그저 뇌과학에서 말하면, 뇌의 새로운 회로가 연결되는 것을 뜻해요. 우리의 뇌는 6세까지 완성되죠. 그 이후에는 더 이상 뇌가 성장 한다던가 하는 것은 없어요. 끝이에요. 그래서 과거에는 뇌라고 하는 것은 6세 때 결정되면 더 이상 새로운 거는 없다고 봤지요. 명상수행을 통해서 뇌의 회로가 새롭게 연결된다고 하는 것을, 지금은 과학적으로 인정하죠. 뇌도 성인이 되어도 새롭게 연결된다는 거예요. 우리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뇌의 회로를 따라서 전자신호가 움직이는 거걸랑요. 사실 알고 보면, 별 거 아니죠. 우리가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알고 보면 그거예요.
자의식이 해체되어야 뇌의 새로운 회로가 형성되고, 그래야 새로운 삶이 시작되죠. 우리가 맨 날 똑같은 것을 반복하고, 똑같은 것을 고민하고 하는 이유는 우리 뇌의 의식이 똑같은 전자회로를 따라서 전자신호가 움직이기 때문이에요. 내가 굳이 윤회의 주체를 찾는다고 하면 자의식이라고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죠. 굳이 윤회의 주체를 찾는다면 자의식이예요. 굳이 윤회의 주체를 내세우고 싶다면. 사실 사성제는 고와 멸이예요. 고와 멸은 윤회하고도 관계있는 이야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생로병사 자체가 윤회걸랑요.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고라고 하는 것은 생로병사 자체가 근본 고에요. 그저 노병은 떼어 버리고, 태어나면 노화현상이 있는 건 당연하고, 노화현상이 있으면 병드는 건 당연하잖아요.
결국은 생사란 말이에요. 생사라고 하는 게 뭐예요. 과거와 미래예요. 생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이지만 동시에 과거예요. 사라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사라는 것도 현재이자 동시에 미래이고 과거이기도 해요. 그러니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시간의 개념에서는 따로 존재하지만, 공간의 개념에서 보면 과거, 현재, 미래는 언제나 같이 존재하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보면, 윤회라고 하는 것은 굳이 윤회의 주체가 있어야할 이유가 없죠. 왜냐하면 윤회라는 것은 흐름이에요. 하나의 흐름. 어떤 흐름이 반드시 어떤 흐름의 주체가 있어서 흐름이 있는 건 아니죠. 바람이 부는데, 뭐 주체가 있어서 바람이 부는 건 아니잖아요. 굳이 주체를 찾는다면, 자의식이라고 할 수 있지만 윤회라는 것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굳이 윤회의 주체가 있어야할 이유는 없어요.
사실 부처님의 불멸 이후에 2,500년간 윤회의 주체를 집요하게 찾았는데, 알고 보면 밥 먹고 할일 없는데, 쓸데없는 짓거리 한거죠. 그래서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자의식이 해체된 것이다. 결국은 생로병사를 지속시키는 것은 자의식이걸랑요. 부처님도 자의 특성을 나, 나의 것, 나의 본질이라고 하고 있으니까요.
네 번째는 도(道)입니다. 도라고 하는 것은 고를 소멸시키는 방법이에요. 열반에 이르려면 그 길을 따라 가야 되는데, 길이라고 하는 건 방법이란 말이에요. 내 요전에 강론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보고, 새로운 방식으로 듣고, 새로운 방식으로 느끼고,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걸 이야기 했는데, 도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쉽게 이해하면 새로운 방식이예요. 새로운 방법이죠.
그래서 경전에서는 도는 팔정도라고 이야기하죠. 부처님이 그렇게 이야기해요. 도는 팔정도다. 불교의 수행이 뭐냐? 기도냐, 간경이냐, 명상이냐 뭐, 우리나라에서는 간화선이 최고다. 누구는 위빠사나가 최고다.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그들만의 이야기고, 불교 수행의 근본은 팔정도예요. 왜 그러냐하면, 모든 것이 팔정도 안에 있걸랑요. 부파불교 때는 이 팔정도를 계정혜(戒淨慧) 삼학(三學)으로 나누기도 했지요. 우리가 흔히 많이 듣잖아요. 정혜쌍수(定慧雙修)라고 하는 것. 정혜라고 하는 것도 결국 팔정도 안에 있는 거예요. 결국 불교의 수행은 팔정도예요.
四 聖 諦
苦 集 滅 道 → 八 正 道 正見 正思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
팔정도의 번째는 정견(正見)입니다, 정견. 도표를 참조해 주시지요. 사성제 도표를 보면 정견고 하는 것은, 여기서 견(見)이라고 하는 것은 '본다'는 뜻도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이해한다'고 하는 뜻이에요. 올바른 이해. 보통 이걸 견해라고 해석하는 스님이 많이 있는데, 견해라고 하는 뜻은 아닙니다. 왜 그러냐면 견해라는 거는 밑에 사(思)가 있기 때문에, 견해나 사고나 같은 뜻이걸랑요. 여기에서 견은 이해예요, 이해. 무엇을 이해하는 것이냐? 다르마에 대한 이해를 말하죠.
그래서 정견은 다르마에 대한 이해예요. 다르마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된다는 거죠. 8정도를 이야기하지만, 그래서 부처님은 8사도(八邪道)도 이야기하걸랑요. 정견의 반대말은 사견(邪見)이예요. 그릇된 이해. 그래서 정견은 곧 정안(正眼)이예요. 정안은 뭐냐 하면 눈, 올바른 눈이죠. 불교에서는 이 안목이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써요, 눈이라고 하는 말. 그래서 깨달았다고 하는 말을 '눈을 떴다'라는 표현을 쓰죠. 오비구 중에 아야교진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했을 때, 붓다는 이렇게 표현했죠. "콘다냐가 진리의 눈을 떴다.” 그래서 정견은 정안이예요. 올바른 눈.
안목이 있어야 돼요.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은 안목이에요. 눈이 있느냐, 없느냐에요. 그래서 보통 지혜의 눈을 제3의 눈이라고 그러죠.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부처님은 오안(五眼)을 갖췄다고도 이야기하잖아요. 그만큼 눈이라는 걸 중요시 여기는 거예요. 우리는 눈을 통해서 세상을 보걸랑요. 우리가 안목이 없으면, 봐도 모르죠. 인간은 오직 자기 눈높이에서만 봐요. 그 이상은 못 봐요. 오직 자기의식의 세계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는 이야기죠. 자기의식을 넘어간 건 몰라요. 가르쳐 줘도 모르고. 그래서 정견이라고 하는 것은 정안과 같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정사(正思). 두 번째는 정사예요. 정사는 사고나 의식, 사유 그런 뜻이죠. 내가 항상 말씀드렸지만 깨달음의 문제가 아니에요. 사고의 문제지요. 우리가 어떻게 사고하느냐에 따라서 보는 것이 달라져요. 사고가 근본적으로 잘못 되어 있으면, 수행을 해도 결국 그 곳으로 낙착되죠. 내가 아는 스님은 사회 있었을 때, 사주관상을 공부했었는데, 절에 와가지고 스님이 되어 토굴에 가서 공부를 하더니만, 어느 날 내려와서 하는 말이, 깨달음을 얻었는데, 사주에 도가 틔었다 이렇게 이야기 하드 만요. 그럴 수 있어요. 왜 그럴 수 있냐면, 인간은 자기 사고의 의식을 벗어나지 못하걸랑요. 깨달음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의 문제예요. 어떤 사고를 하고 있느냐 하는 거죠. 근본적으로 사고에 문제가 있으면, 아무리 그거해도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경에서는 말하죠. 소가 우유를 마시면 우유를 만들고, 독사가 물을 마시면 독을 만든다. 왜 그러냐 하면, 사고라고 하는 것은 그 본질이 그렇기 때문이에요. 사고라고 하는 게 뭐예요? 인간의 의식이잖아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우리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의 의식과 현재의 일반적 의식이 결합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의식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데, 어떻게 올바른 결과가 나올 수가 있어요. 그래서 부처님이 정사를 강조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어요.
올바를 이해를 통해서 올바른 사고와 의식이 형성돼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처음에 깨달음을 얻었을 때 이렇게 말씀하시죠. "낡은 의식에 사로잡힌 자들이 어찌 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 부처님이 그래서 법을 설하지 않고 침묵하시려고 그랬다 그러잖아요.
그 다음에는 정어(正語)입니다. 정어는 올바른 말이죠. 올바른 언어 논리예요. 말과 지금 같은 경우 보면 글도 해당돼요. 부처님 당시에는 문자로 기록한다고 하는 것은 없었어요. 다 암기예요. 그러기 때문에 불경을 보면 참말로 보통 인내를 가지지 않고서는 불경을 보기가 어려워요. 왜 인내를 가지지 않고는 불경을 보기가 어렵냐 하면, 특히 아함경 같은 경우에는 같은 이야기가 세 번씩 반복되어 나온다는 거예요. 아이~~ 우리도 참 지리해요, 그런 거 보면. 편집하면서 다 잘라버리지, 뭐 하러 이리 지리하게 나왔을까. 그거는 인제 그 당시에 청중들 때문이기도 하고 인도적인 언어 논리 때문이기도 해요.
인도나 구라파의 언어 논리는 소통의 논리에요. 소통의 언어 논리. 소통하기 위한 언어 논리예요. 그러기 때문에 소통 쪽에 치중하죠. 원래 인도 사람들 하고 유럽 사람들은 본래 인종이 거의 같아요. 인도의 아리안 족들이나 게르만족들이나 북게르만족이나, 뭐 앵글로 색슨족이나 다 같은 인종이에요. 고대로 올라가면 지금 이란이나. 그런데 중국 같은 경우는 뜻글자잖아요. 그래서 근본적으로 중국의 한문이라고 하는 것은 뜻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함축되어 있죠. 그렇기 때문에 외교문서를 중국 한문으로다가 작성을 하면 낭패를 볼 수가 있어요. 왜 그러냐면,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으니까요. 어디에서 끊느냐에 따라 완전히 문장이 달라지니까요. 정어라고 하는 것은 올바른 언어논리예요. 언어논리가 그릇되거나 왜곡되어선 안 된다는 이야기죠.
그 다음에 정업(正業). 정업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업이라고 하는 것은 행동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행동하는 것.
정명(正命)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살잖아요. 먹어야 생명을 유지하고. 명은 바로 그거를 말해요. 생명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그 방법이 정당해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서는 편법과 불법을 많이 용인하잖아요. 뭐, 특히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더하고. 정명은 그야말로 정의와 같은 뜻이에요. 생명을 유지하는데 정의로워야 된다는 거죠. 대한민국에서 정명을 이야기하고, 정의를 이야기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건 없죠. 대한민국에서 정명 운운하다가는 태반이 굶어 죽습니다. 그저 이런 것은 살면서 잊어 먹으셔도 돼요! ㅎ
그 다음에 정정진(正精進). 정정진이라고 하는 것은 부단한 노력이에요. 물론 경전에서는 선(善)을 지향하는 거를 뜻하죠. 선, 선과 악, 할 때 선 말이에요.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거를 말해요. 그래서 미얀마에서는 반드시 이야기하죠. 사띠에 위리야를 밀착시킨다. 위리야라고 하는 말도 노력이라는 뜻이걸랑요. 그래서 정정진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 일곱 개에 다 붙는 거예요. 또 붙어야 돼요. 정정진이라는 것은 부단한 노력. 선을 향해 나가고자 하는 부단한 노력이죠.
그 다음에 정념(正念). 정념이라는 것은 대념처경에서도 이야기 했고, 강론에서도 수없이 이야기했는데, 염이라고 하는 이 말이 생각 념(念)자이지만, 실제로 생각하고는 관계가 없어요. 이건 사실 우리나라 말로다가 옮기기 어려운 말인데, 여기선 깨어있는 것을 말해요. 깨어 있다는 하는 것이 뭐예요? 혼돈의 상태에 있지 않는 거죠. 언제나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아는 것을 말해요. 깨어 있어야 알잖아요. 성철 스님께서 일관되게 주장하신 동중일여(動中一如)와 몽중일여(夢中一如)가 바로 이 염이예요. 그래서 정념이라고 하는 것은 일상의 생활 속에서 깨어있음이 유지되는 걸 말해요.
그 다음에 여덟 번째는 정정(正定). 정정은 올바른 선정(禪定)이예요. 올바른 선정.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싸마타(samatha)냐 싸메디(samadhi)냐 해 가지고 많이 따지는 것 중의 하나가 이 정정이예요. 이 정정은 선정을 말하는데, 선정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집중되어 평정되어 있는 상태를 뜻하죠. 그것이 지속되는 걸 뜻하고. 그래서 이 정정은 반니원경(般泥洹經?)에서는 이것을 구차제정(九次第定)이라고 그래서 아홉 단계로 설명을 해요. 사선(四禪), 사무색정(四無色定), 멸진정(滅盡定). 사선은 초선(初禪), 2선(二禪), 3선(三禪), 4선(四禪), 그래서 네 단계고, 그 다음에 사무색정은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 그래서 이게 사무색정이고, 아홉번째는 멸진정(滅盡定)이죠.
正定 - 九次第定 · 四禪 · 四無色定 · 滅盡定
사선에서 초선, 이선 삼선, 사선은 굳이 뭐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거 뭐 부파불교 시대에 설명한 것처럼 그렇게 규정지어서 설명하는 것이 합당한가? 하는 의문이 있고. 여기 구차제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일곱 단계 무소유처정, 여덟 단계 비상비비상처정, 아홉 단계 멸진정입니다. 왜 무소유처정이 문제가 되냐면, 이 무소유처정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알라라 깔라마 밑에서 수행할 때 얻었다고 하는 것이걸랑요, 이 무소유처정. 그리고 비상비비상처정은 웃타카 라마푸타 밑에서 얻은 건데,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궁극의 단계가 아니다’라고 해가지고 고행림에 들어가게 되는데, 어떻게 무소유처정과 비상비비상처정이 여기에 일곱 단계와 여덟 단계에서 열거될까? 하는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반니원경에 의하면 붓다가 입멸할 때, 초선에 들고, 이선에 들고, 삼선에 들고, 사선에 들고, 공무변처정에 들고, 식무변처정에 들고, 무소유처정에 들고, 비상비비상처정에 들고, 마지막으로 멸진정에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과거에 본인이 부정했던 것을 왜 갑자기, 여기 들어갔을까요? 이상하지 않아요?
그 다음에 멸진정. 멸진정이라고 하는 것은 마지막 아홉 단계인데, 멸진정은 의식과 인식과 지각 등 마음의 작용이 멈춘 거예요. 의식, 인식, 지각, 모든 마음의 작용이 멈추고 호흡마저 끊어진 상태. 이게 멸진정이예요. 아라한이 이 선정을 얻는다고 이야기하는데, 근데 여기서 중대한 문제점이 하나 있어요.
불교에서는 마음이 지시하지 않으면 몸을 움직일 수 없다고 이야기하죠. 마음이 지시하지 않으면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요. 아니, 실제적으로 그래요. 그렇다면. 마음이 지시했다고 하는 거는 뭐예요? 의식과 인식과 지각이 있다는 걸 얘기해요. 마음이 작용하니까. 그러면 멸진정에 들 수 없죠. 왜냐하면 멸진정이란 의식과 인식과 지각의 마음 작용이 완전히 멈추고 호흡마져 끊어진 상태걸랑.
증지부 경전에 보면 이 말이 나오죠. "그는 정여(靜慮)하고 있어, 정여는 정념 한다고 하는 뜻과 같아요. "그는 정여하고 있어, 들숨 날숨 즐기며, 내심 깊이 선정에 들어가 있다. 코끼리는 걸으면서도 선정에 들어가 있다. 코끼리는 머물면서도 선정에 들어가 있다. 코끼리는 모로 누우면서도 선정에 들어가 있다. 코끼리는 앉아서도 선정에 들어가 있다. " 여기서 '그'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에요. 부처님이 정여하고 있어 들숨 날숨 즐기며, 내심 깊이 선정에 들어있다. 여기서 코끼리도 부처님이에요. 코끼리는 걸으면서도 선정에 들어가 있고, 코끼리는 머물면서도 선정에 들어가 있다. 코끼리는 모로 누워서도 선정에 들어가 있다. 코끼리는 앉아서도 선정에 들어가 있다. 걷는다고 하는 것은 뭐예요? 의식과 지각이 살아 있다는 걸 뜻해요.
결국은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에서 의식과 인식과 지각이 없다고 하는 것은 뭘 뜻해요? 정념의 이론에 합치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사띠라고 하는 것은 몸과 마음이 언제나 함께 존재해야 돼요. 이것이 불교에서 주장하는 정정이에요. 그래서 사실 정념과 정정은 분리할 수가 없어요. 왜? 분리되지가 않아요. 실제적으로 정념이 없는 정정은 존재하지도 않고, 정정이 없는 정념은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8정도라고 하는 것은 8개지만 사실 이건 동시에 하나예요. 그런데 멸진정을 마지막 아홉 번째 단계로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지각과 인식과 의식이라고 하는 마음 작용이 없는데 어떻게 움직일까? 마음이 지시하지 않으면 몸은 움직일 수 없다. 현대과학의 표현에 의하면, 뇌가 지시하지 않으면, 손가락도 움직여지지 않는다. 결국은 멸진정이라고 하는 것은 반니원경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붓다가 멸진정에 들어서 입멸하거든요. 결국 이거는 죽음을 뜻하는 말이에요. 결과적으로 살아서는 멸진정에 들을 수가 없어요.
이건 걸으면서도 들을 수가 없고, 앉아서는 한 순간에 들을 수도 있을지 모르죠. 그런데 인간이 호흡이 끊어지면, 뇌사상태가 오기 때문에. 호흡이 끊어질 수가 없어요. 호흡이 끊어진다고 하는 것은 끊어졌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식이지, 호흡은 끊어질 수가 없어요. 실제적으로 수행의 단계에서 무호흡의 상태를 느끼걸랑요. 호흡이 미세하게 되면 마치 호흡이 완전 정지된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와요. 실제적으로 거의 호흡이 정지된 거와 같죠. 그렇지만 무호흡의 상태는 있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5분만 딱 무호흡의 상태로 있다면 인간은 뇌사에 들어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멸진정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아홉 단계 마지막에 들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좀 주의 깊게 봐야 되요. 반니원경이라고 하는 것을 유심히 보면, 후대에 편집되었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여기저기서 끌어 모아서 편집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우리가 부처님의 경전이라고 하는 것을 마치 부처님 시대에, 부처님 당시에 그것이 편집되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오산이에요. 적어도 우리가 보는 부처님 경전이라고 하는 것은 후대에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완성된 거예요. 결국 무소유처정과 비상비비상처정이 일곱 단계, 여덟 단계에 들어오는 것도, 그래서 나는 그렇다고 보죠.
정확히 말하면 정통적인 상카야의 수행 방법과 불교의 수행방법을 잘 구별하지 못했어요. 왜 구별하지 못했냐면 붓다는 붓다의 스승이었던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는 상카야 계통의 사람들이었어요. 그 차이를 붓다의 제자들도 잘 몰랐어요. 난 그렇게 봐요. 우리가 2,500년간 윤회의 주체를 찾는 이유도 과거의 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바로 거기에 있는 거고, 거기에서 오는 문제라고 보죠.
결국 8정도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중도(中道)예요. 그래서 8중도라고도 하죠. 중도는 중정이라고 할 수도 있고, 중심이라고 할 수도 있고, 중행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중정(中正), 중행(中行), 중심(中心). 8정도라는 것을 아주 단순화시키면 중심, 중행이에요. 우리가 길게 설명하니까 8정도이지. 고의 원인은 무명이고, 그 고가 소멸되면 열반이고, 그 고를 소멸하는 방법은 팔정도다. 이것이 부처님이 최초에 5비구에게 가르쳤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지혜도 없고 또한 지혜의 증득도 없다. 얻을 바 없는 고로. 반야경에서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은 반야 지혜예요. 근데 여기서는 지혜를 부정해 버렸어요. 지혜도 없어. 역무득, 무득이라고 하는 것은 지혜 또한 얻을 게 없다고 하는 뜻이에요. 지혜도 없고, 또한 지혜로 얻을 것도 없어. 증득할 거도 없어~~~.
지혜는 빛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해와 달, 별과도 연결이 되죠. 인도의 고대인들이 생각했던 지혜는 해와 달과 별과 같은 빛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지혜는 선(善)이예요. 그리고 그 반대가 되는 무명은 불선(不善)이 되죠, 악(惡). 인도의 신을 데바라고 부르는데, 데바라고 하는 말 자체가 빛나는 존재라고 하는 뜻이에요. 신이라고 하는 것은 빛나는 존재예요. 지혜를 성취한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인도 고대인들에게는 자기가 신이 되는 걸 뜻하였는지도 모르죠. 왜 그러냐 하면 지혜를 얻는다고 하는 것은 빛나는 존재가 되었다는 걸 뜻하니까요. 그러기 때문에 바라문의 이 논리가 성립되었는지도 몰라요. '하늘에는 천신(天神)이 있고, 땅 위에는 인신(人神)이 있다. 인간의 신, 그들이 바로 우리다'라는 논리가 성립됐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지혜는 빛이에요.
근데 여기에서는 그 자체를 다 부정해버렸어요. 공이라고 하는 절대적 입장에서 보면, 지혜도 공할 뿐이죠. 왜 그러냐하면, 제법이 다 공하기 때문이죠. 조주선사의 삼전어(趙州三轉語 :泥佛不渡水 金佛不渡爐 木佛不渡火)라고 하는 것이 있어요. 중국 당나라 조주 스님이 어느 날 법상에 올라가서 이런 법문을 하죠. 금불은 불도로하고, 쇠붙이로 만든 불상은 용광로를 건너지 못하고, 목불은 불도화하고, 나무로 만든 불상은 불을 건너지 못한다. 니불은 불도수니라, 흙으로 빚은 불상은 물을 건너지 못한다. 쇠붙이로 만든 불상은 용광로를 건널 수 없죠. 왜 그러냐면 녹아버릴 테니까. 나무로 만든 불상은 불을 건너지 못해요, 타버리니까. 흙으로 만든 불상은 물을 건너지 못해요. 왜냐면 흙은 물에 풀어져 버리니까. 이게 조주스님의 조주 삼전어라는 거예요. 전어라고 하는 것은 전환시켜 주는 말이에요.
'조주삼전어'와 '무지역무득'의 공통점이 무엇이냐 하면 절대의 부정이 아니라는 거죠. 여기서는 부정의 논리로다 전개하고 있지만 이건 부정도, 긍정도 아니에요, 사실. 내가 처음에도 얘기했지만, 인도의 논리는 이래요. 니띠 니띠 니띠,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 '아니야'를 거듭하면 뭐가 돼요? 하루 종일 아니야를 외치면 뭐가 되겠어요? 이것이 인도의 논리 방식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그런 말을 쓰잖아요. 강한 부정은 긍정이다.
여기에서는 일단 표면적으로 지혜도 부정하고, 지혜를 얻는다고 하는 것도 부정하죠. 지혜라는 말은 깨달음이라는 말과 거의 동격으로 쓰이기도 해요. 지혜라고 하는 것은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예지를 말하는 거예요. 우리가 말하는 ‘머리가 좋다, 아 저 사람 참 똑똑하고 지혜가 많아’ 와 같은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지혜라고 하는 용어와 불교에서 쓰는 지혜라고 하는 용어는 같은 용어를 쓰지만 그 의미는 조금 달라요.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라고 하는 의미는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예지(叡智), 즉 정견을 말해요. 앞에 8정도에서의 정견과 정사를 말해요. 조주 스님도 '금불은 불도로하고, 목불은 불도하하고, 니불은 불도수다' 라고 하는 것은 조주 선사가 던지고자 하는 그 의도와 목적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눈에 보여 지는 자체는 진실이 아니라는 거예요.
금강경에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면 즉견여래(則見如來)라고 하는 뜻과 조주의 삼전어는 궤를 같이하는 거예요. 범소유상이, 보여지는 바, 보여지는 것, 여기서 상은 부처님의 몸을 말해요.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니, 다 거짓이다. 역견제상비상이면, 만일 부처님의 육신과 비상, 육신이 아닌 것, 부처님의 정신입니다, 그것을 보면. 즉견여래라, 여래를 본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이걸 어떻게 해석하느냐면, 약견제상비상, '만일 상이 상 아닌 줄 보면' 이렇게 해석하는데, 이게 한국 불교가 가지고 있는 가장 폐단으로 그저 자기 식으로다 아전인수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면 즉견여래(則見如來)라고 하는 것은 보여 지는 바 상, 즉 부처님의 육신, 32상 80종호라고 하는 것은 다 거짓이라는 거예요. 왜 거짓이냐? 붓다라고 하는 것은 붓다의 32상 80종호, 즉 인격으로서의 붓다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즉 다르마 붓다, 진리로서의 붓다를 얘기하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상과 비상, 그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봐야 비로소 여래, 붓다를 본다. 라고 하는 것과 조주 삼전어의 뜻은 궤를 같이하는 거예요.
보여 지는 것, 우리 불자님들도 불상을 다 부처님, 부처님 하는데, 그건 잘못된 표현이에요. 그저 불상은 눈에 보이는 부처일 뿐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초기불교에서는 불상을 엄금했어요. 불상을 만들어서는 안 돼요. 엄격히 말하면 불교의 교리에서 보면, 불상은 존재하면 안돼요. 이건 위배되는 거예요.
菩提薩陀 依般若波羅蜜多 故心無罣碍 無罣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지난주에는 '지혜도 없고, 또한 지혜의 증득도 없다, 얻을 바 없는 고로'했는데, 지난주에는 지혜를 부정했어요. 그러기 때문에 지혜도 없고, 지혜를 얻을 것도 없다. 그리고 여기 와서는 논리 전개가 완전히 또 바뀌었어요.
보리살타는 보살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보리살타의 준말이에요. 우리가 앞에서 관자재보살이 관세음보살이라고 이야기했지마는, 정식으로 이야기하면 관세음 보리살타예요. 관자재 보리살타이고. 보리살타의 원어는 보디사트바(Bodhisattva)인데, 이걸 우리가 보통 음사(音寫)라 그러죠, 음역, 번역을 하지 않고 그대로 적는 거예요. 원어 그대로 중국말로 적은 거예요. 우리말로 보리살타이지 쭝국어로 읽으면 보디사트바 비슷하게 나오죠. 외국어를 우리 한국어로 적었다 이렇게 보면 딱 맞아요. 보리살타의 뜻은 우리가 이걸 보통 각유정(覺有情)이라고 번역하죠. 초기에는 이걸 각유정이라고 번역했는데, 나중에는 하지 않습니다. 그냥 다 음사해 버리죠. 각유정이라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이냐면, 깨달음을 지향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본래 이 보살이라고 하는 용어는 보통 명사가 아니고 고유명사였어요. 즉 부처님의 전생, 그리고 보리수하에서 성도하기 이전의 붓다를 지칭할 때 보살이라고 하는 용어를 썼어요. 경전에 보면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깨달음 이후에는 붓다라 칭하지만, 그 이전에는 보살이라는 명칭을 써요. 고타마 싯다르타라고 하는 본명을 쓰지 않고, 대체적으로 경전에서 기술할 때는 성도 이전에 태어나서 출가 이후를 보살이라고 칭해요. 그래서 이 보살이라고 하는 용어는 본래 붓다의 전생이나 깨달음 이전의 시기에 한정해서 쓰는 용어예요. 근데 이것이 후기 대승불교 시대에 오면, 육바라밀을 닦는 대승 수행자를 지칭하는 용어로다가 일반화 되죠.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는 까닭에(菩提薩陀 依般若波羅蜜多). 반야바라밀다는 우리가 다 알고 있다시피 반야의 지혜입니다. 번역하면 지혜가 되고. 반야는 이거 음사한 거예요. 처음에 행심반야에서 이야기 했듯이, 처음에는 번역을 했는데, 나중에 오면 번역을 안 해요, 그냥 음사를 해버려요. 왜 음사를 하냐면, 중국에서 얘기하는 지혜라는 의미와 불교에서 말하는 반야라고 하는 의미가 차이가 있어요.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나중에는 음사를 하죠. 반야바라밀다라는 용어가 반야심경에 다섯 번 등장해요. 그마만큼 중요한 용어라는 얘기예요. 여기서 반야바라밀다는 육바라밀을 뜻하는 거예요. 반야바라밀다라고 하나만 나오지만 반야바라밀다, 하나를 들어서 여섯 가지를 표하고 있는 거예요. 왜냐면, 대승 수행자가 닦는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육바라밀 수행이걸랑요. 육바라밀 수행이 뭐냐 하면 보시(報施) 바라밀, 지계(持戒) 바라밀, 인욕(忍辱) 바라밀, 정진(精進) 바라밀, 선정(禪定) 바라밀, 지혜(知慧) 바라밀. 이게 육바라밀이에요. 이 육바라밀은 대승 수행의 근본이기도 하지요.
첫 번째가 보시마라밀. 보시라는 것은 요새 식으로 말하면 나눈다고 하는 나눔의 의미인데, 정확히 불교적인 용어로 말하면 순수 증여를 뜻해요. 증여하는 것, 증여인데 순수 증여죠. 사실 우리의 증여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는 순수 증여를 하지 않걸랑요. 우리가 어떤 것을 증여하면 반드시 대가가 있죠.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 마음속에는 내가 무엇을 증여하게 되면, 마음에 뭔가 남는다는 거예요. 즉 증여한 것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다는 거죠.
그래서 금강경에 보면, 무주상 보시(無住相布施)라고 하는 말이 나오잖아요. 무주상보시라는 말은 뭐냐면, 순수 보시라고 하는 뜻이에요. 불교에서는 순수 증여가 돼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왜 순수 증여를 이야기 하느냐?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내 앞에 있는 것, 내 것, 즉 내 앞에 등기되어 있고, 내 통장이라고 할지라도 그거 내꺼 아니에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물질은 어느 누구의 소유라고 보지 않아요. 누구의 소유도 아니기 때문에 내가 주는 거 아니에요. 단지 나는 이 세상에 살면서 그거를 관리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관리자일 뿐이야! 내가 소유자가 아니고 관리자이기 때문에 내 소유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관리하는 것을 누군가에게 증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 것이라고 하는 관념을 가져서는 안 돼요. 기본적으로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은 어느 누구의, 개인의 소유라고 보지 않는 거예요. 단지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그 물질을 사용하는 거죠. 즉 물질을 사용할 권리를 갖고 있는 것이지, 물질에 대한 소유의 권리를 획득하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무주상 보시를 이야기 하죠. 본래 내 것이 아니니까.
그래서 부처님은 증여라는 것은 상호 증여라 하는 거지요. 어떤 일방적인 증여가 아니라 상호 증여하는 거예요. 서로가 서로에게 증여하는 거지요. 대체적으로 불교에서는 두 가지 증여를 이야기해요. 물질의 증여, 그리고 정신의 증여. 어떤 사람은 물질을 증여하고, 어떤 사람은 정신을 증여한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물질로만 행복할 수 없걸랑요. 물론 정신만으로도 행복 할 수 없죠. 물질과 정신이 균형이 맞아야 되걸랑요. 그러기 때문에 상호 증여예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재가자는 물질을 증여하고, 출가자는 정신을 증여한다는 거죠. 그래서 상호 증여의 원리예요.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쌍가라고 하는 것은 재가자와 출가자의 공동체걸랑요. 출가자는 정신적인 것을 증여해주고, 재가자는 물질적인 것을 증여 해 준다, 그래서 상호 증여하는 것. 그것이 보시 바라밀이예요.
본래 이 육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대승불교에서 주장을 했지만, 본래 아함경에서도 누누히 강조되는 것들이에요. 근데 그것을 바라밀이라고 하는 말을 붙였죠, 바라밀다. 바라밀다는 바라밀과 같은 말인데....... 바라밀이라고 하는 말은 완성이라고 하는 뜻이잖아요. 그러니까 좀 더 강조한 것이지요. 즉 보시라는 것에 바라밀을 붙여가지고 좀 더 강조한 거예요.
두 번째는 지계 바라밀. 지계는 윤리와 도덕이에요. 우리가 계를 지킨다고 하는 것이 뭐냐면, 그 당시의 수행자가 지켜야할 보편적인 윤리, 도덕을 말해요. 살생하지 않는다, 도둑질하지 않는다, 거짓말 하지 않는다, 뭐, 술 먹고 해롱대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그 당시 수행자들이 당연히 지켜야 될 윤리, 도덕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처음에는 계라고 하는 것을 설하지 않아요. 왜 설하지 않느냐 하면, 설할 필요가 없었던 거예요. 왜? 이런 것들은 단순히 불교 수행자뿐만이 아니라 그 당시 자이나교나 아지비카교나 또는 바라문 출가 수행자들이나 모두 말하지 않아도 지켜야 되었던 윤리 도덕이에요. 그렇게 때문에 특별히 그걸 이야기 하지 않는 거죠.
근데 나중에 이걸 범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계라고 하는 것이 제정이 되는데, 왜 계가 제정이 되냐 하면 그 당시는 누구나 윤리 도덕이기 때문에 필요가 없었어요. 근데 계가 제정된다는 것은 뭐예요? 형벌을 가하기 위해서죠. 어떤 것을 범하게 되면, 교단에서 축출해버리는 형벌이 따르게 되죠. 계라는 것은 반드시 거기에 벌칙이 따라요. 그래서 지계의 의미는 본래 윤리, 도덕이에요. 지금은 계라는 것을 설하고, 받고 하지만 그 시대에는 수행자들이 당연히 지켜야 했던 것이죠.
우리가 여기서 중요하게 짚어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런 주장들을 많이 해요. 깨달음은 윤리, 도덕을 초월한다! 스님들이 뭐 그런 이야기들 많이 하잖아요. 맞아요. 깨달음은 윤리, 도덕을 초월해요. 왜냐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윤리나 도덕과 같은 그런 관념하고는 관계가 없걸랑요. 그러니까 초월해요. 그렇지만 우리가 여기서 분명하게 알아야 될 것이 있어요. 깨달음은 윤리 도덕을 초월하지만, 깨달은 인간은 윤리, 도덕 안에 있다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 가시는 가요? 깨달음이라는 것 자체는 윤리 도덕을 초월하죠.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경지를 뜻하는 거니까. 그러지만 깨달은 인간은 윤리 도덕 안에 있다는 얘기예요. 깨달은 인간은 가장 윤리, 도덕적인 인간이죠.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이라고 하는 경지는 윤리, 도덕을 초월하지만 그 인간은 윤리, 도덕을 초월할 수가 없어요. 윤리 도덕 안에 있다는 거예요. 윤리 도덕이라는 게 뭐예요? 인간이 지켜야할 근본을 말하는 거예요.
우리나라 불교의 문제점 중 하나는 인간이 지켜야 될 근본을 지키지 않고 마치 깨달음이 따로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마치 윤리 도덕을 파괴하는 것을 깨달음처럼 생각하는데, 만약에 부처님이 보면 이렇게 이야기 할 거예요. 저 사악한 자들은 어떤 자냐? 이건 절대 사악한 자예요, 깨달은 자는, 가장 윤리 도덕적인 사람이 깨달은 자예요.
중국에서 보면 특히, 명나라 말기 이탁오(李卓吾)하고 경정향(耿定向)이 인륜지지(人倫之至)와 미발지중(未發之中)으로 충돌하게 되는데, 이 둘은 다른 게 아니에요. 인륜이라는 게 뭐예요? 인간이 지켜야 될 근본 도리를 말해요. 미발지중이란 게 뭐예요? 희로애락이 일어나기 이전의 단계를 말해요. 인간의 본성을 뜻하는 말이 미발지중이걸랑요. 그러면 인륜도 그 본성이에요.
그러면 왜 이것 때문에 충돌하느냐 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인륜이라는 거는 오륜(五倫)이예요. 이 오륜이라는 것은 엄격히 말하면 유교의 본질은 아니에요. 군신, 부부, 부자, 부모 이런 오륜이라고 하는 것은 한나라 시대 때 동중서(董仲舒)가 만든 거예요. 한나라 때 동중서가 인륜지지 이론을 바탕으로 해서 한나라의 중앙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만든 것이 오륜이에요. 이 오륜이라는 것이 본래 동중서 이전부터 있던 게 아니라 동중서가 만든 거라고요. 동중서가 이걸 만들어 가지고 결국은 모든 사람에게 굴레를 씌운 거죠. 오직 한 사람에게 충성하게 하기 위해서. 국가와 황제에게 충성하고, 집에서는 아버지에게 충성하고. 그래서 인륜지지와 미발지중이 다른 것이 아니죠. 인륜을 떠나 미발지중이 있을 수 없고, 미발지중을 떠나 인륜이 있을 수 없걸랑요.
내가 왜 이 이야기를 말씀드리는가 하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윤리와 도덕을 초월하는 것이 맞지만, 깨달은 인간은 윤리와 도덕을 초월할 수 없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면, 윤리와 도덕을 초월한 인간은, 그 인간은 사악한 인간이거든요. 초월할 수가 없어요.
세 번째, 인욕바라밀. 인욕이라고 하는 것은 인내죠. 그 당시에 수행자가 반드시 갖춰야 될 덕목이 인내입니다. 왜 인내가 강조 되냐면, 인내하지 않으면 수행할 수 없어요. 그저 풍찬노숙(風餐露宿)을 밥 먹듯 하잖아요. 본래 수행자는 나무 밑에 3일 이상 머물러서는 안 돼요. 지붕 아래에서는 들어가선 안 되죠. 비바람을 맞고 강변에서 그냥 자야 되고, 풀 벌레 한테 뜯겨야 되고, 탁발하려면 그 무서운 개한테 물리기도 해야 되고, 오직 인욕하고, 인내하지 않으면, 수행자 생활을 할 수가 없어요.
뭐, 요새는 미안마 떼자냐 사야도의 표현을 빌리면, 출가라고 할 것도 없죠. 그저 편안하니까. 밀림에 들어가서 독사하고 동거할 일도 없고, 뭐 풍찬노숙할 일도 없고, 편안하죠. 그래서 인욕이라고 하는 것은, 인내라고 하는 것은 수행자가 필수적으로 갖춰야 될 덕목이에요. 부처님도 이 인욕을 굉장히 많이 강조하셨어요. 인욕과 인내라는 게 뭐예요? 견디는 힘이에요. 견디는 힘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죠. 우리가 제일 잘 못하는 게 이거예요, 견디지 못하는 것. 쪼끔만 불편하면 못 참걸랑. 쪼끔만 내 맘에 안 들면 못 참걸랑. 반찬이 쪼금만 맛이 없어도, 그저 당장에 그냥 얼굴 표정이 달라지고. 수행자는 반드시 견디는 힘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네 번째는 정진 바라밀. 이 정진이라고 하는 것은 간단하게 생각하면 불퇴전의 의지와 행동을 말해요. 불퇴전의 의지와 행동이 정진이에요. 다른 게 정진이 아니고, 불퇴전의 의지와 행동. 의지만 있어도 안 되죠. 행동이 있어야죠. 부처님도 말씀하시잖아요. 불퇴전의 의지와 행동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고.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도 이거잖아요. "아난다야! 방일하지 말고 정진해라!" 정진이라고 하는 말은 끊임없는 노력이에요. 끊임없이 노력하고, 끊임없이 인내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격려하는 게 정진이에요.
다섯 번째는 선정 바라밀. 이 선정 바라밀은 뭐냐면, 언제나 마음이 평정되어 있고, 안정되어 있는 거를 말해요. 우리는 선정 그러면 앉아 가지고 도를 닦아서 무슨 뭐 목석처럼 아무 감정도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하~ 그거야 망부석이 더 잘하지. 그거는 망부석이 더 잘 하잖아요. 영릉에 가보니까 예종 때 그 자리에 있던 망부석이 아직도 선정에 들어 있더라고! 선정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평정되어 있는 거를 말해요.
그리고 지혜 바라밀. 여섯 번째죠. 지혜바라밀은 뭐를 말 하냐면,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는 무분별지를 말해요. 무분별지, 분별하지 않는 거. 우리는 분별을 많이 하잖아요. 선종에 <신심명(信心銘)>이라고 하는 책이 있어요. 보통 중국 선종의 3조라고 하는 승찬대사가 지었다고 하는데 그 신심명은 처음에 '지도무난(至道無難)이요, 유염간택(唯嫌揀擇)이라'고 나와요. 지도무난이요, 유염간택이라. 보통 이걸 어떻게 번역하느냐면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게 없다. 오직 간택을 혐의(嫌疑:꺼리고 미워함)할 뿐이다. 이렇게 해석하죠. 성철 스님도 이렇게 해석하고, 다 이렇게 해석해요.
근데 나는 '지도문안'을 '지극한 도'는 이라고 해석하는 거에, 나는 동의하지 않아요. 왜 그러냐 하면, 지도문안이걸랑요.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게 없다?' '지(至)'라고 하는 말은 만약 '지도(至道)'를 하나의 단어로 보게 되면, 여기서 '지'는 의미가 없어요. 한문에서 지는 '궁극의 단계'를 뜻하기 때문이지요. 왜냐면 도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인데, 그럴 필요 없걸랑. 지도문안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어려울 게 없다'. 나는 이러게 해석해야 맞다고 봐요.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게 없다가 아니라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어려울 게 없다. '유정간택'이라, 오직 간택을 꺼리는 것 뿐이다. 간택이라고 하는 것이 뭐예요? 가리는 것이에요. 우리가 세자빈을 간택한다고 그러잖아요. 간택이라는 말이 뽑고 가린다는 뜻이걸랑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어려울 게 없어요. 단지 분별심만 떨쳐내면 된다. 이게 <신심명>의 첫째 구절이에요.
그러니까 지혜라고 하는 거는 뭐냐? 분별심을 떨쳐내는 거예요. 그게 지혜예요.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예지를 말하걸랑요. 그래서 우리가 보통 지혜라고 하는 것은 불교에서는 간혜(乾慧)라고 그래요. 메마를 간(乾)자를 써가지고 간혜....... 간혜라는 말은 성숙되지 않은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이 지혜라고 하는 말이나 반야라고 하는 말이 같은 말인데, 나중에 반야를 지혜로 번역하지 않는 이유는 거기에 있어요. 그래서 반야라는 것은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예지걸랑요. 그런데 우리가 보통 지혜라고 할 때 불교에서는 이것을 간혜라고 그런단 말이에요. 그런 부분에 차이가 있죠.
그래서 보시 바라밀, 지계 바라밀, 인욕 바라밀, 정진 바라밀, 선정 바라밀, 지혜 바라밀 이 여섯 가지를 실천, 수행하는 것을 대승 수행자라 그래요. 원래 대승의 수행은 6바라밀을 닦는 거예요. 그렇게 본다면, 후대에 정혜쌍수(定慧雙修: 선정, 지혜를 함께 닦는 수행법)만을 주장한 것은 뒤에 다섯 번째, 여섯 번째니까 부족하게 됐죠. 사실 본래 육바라밀은 하나가 전체 여섯 개를 표하고, 여섯 개가 하나를 표하게 돼요. 그래서 8정도와 6바라밀은 8개와 6개로 나뉘어 지지만, 하나가 전체를 포함하는 것이죠.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이라고 하는 말이 여기에 해당되지요. 마치 우리가 내리는 비를 보고, 내리는 눈을 보는 거와 같죠. 내리는 비를 보면 어때요? 한 방울의 빗방울과 전체의 빗방울이 동시에 내리잖아요. 눈도 마찬가지고요. 한 송이의 눈송이와 전체의 눈송이가 동시에 내리잖아요. 하나냐 전체냐를 구별하고, 구별 짓는다고 하는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내리는 비와 내리는 눈을 보고 있으면 하나의 눈송이냐 전체의 눈송이냐, 하나의 빗방울이냐 전체의 빗방울이냐 라고 하는 것을 구별하고, 구별 짓는다고 하는 자체가 의미가 없어져요. 한 번 눈이 내리고, 비가 내릴 때 지켜보세요. 연기의 이론이라고 하는 것도 같아요. 점과 선의 논리도 마찬가지고요. 비가 내릴 때 한 번 지켜보세요. 한 방울과 전체의 방울, 그것을 구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요? 그래서 육바라밀과 팔정도는 하나와 전체가 구별되고 하는 게 아니에요. 보시 바라밀을 닦으면 나머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가 동시에 같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왜? 순수 증여라고 하는 것은 이 다섯 가지가 없으면, 이루어질 수가 없걸랑요.
내가, 이 부끄러운 얘기지만 여기도 정기적으로 수금하러 오는 친구가 있어요. 우리가 마음이 약해 가지고, 어떤 때는 일주일에 한 번씩만 와줘야 되는데, 한 이 삼일 돌이로 오면 햐, 재가 너무 자주 오는 것 아니야? 이런 생각이 들어요. 실제로 그래요. 뭐, 내가 나가서 돈벌어서 주는 것도 아닌데, 아, 쟤는 좀 너무 자주 오네, 솔직히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우리가 증여를 한다고 하는 것도 순수 증여가 되려면 그 다섯 개가 같이 움직여 줘야 되거든요.
심무가애 무가애고(心無罣碍 無罣碍故), 마음의 장애가 없다.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의 장애가 없다. 마음의 장애가 없기 때문에'라고 했어요. 가애(罣碍)라고 하는 말은 장애라고 하는 뜻이에요. 여기서는 마음의 장애를 들었지만, 불교에서는 두 가지 장애를 얘기해요. 물질적인 장애, 그리고 정신적인 장애. 장애는 두 가지가 있어요. 물질적인 장애가 있고, 정신적인 장애가 있고. 정신적인 장애는 마음의 장애죠. 그러기 때문에 수행자는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 이 두 가지 장애가 적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 두 가지 장애가 많으면 수행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수나라 시대 때, 천태지의(天台智顗) 선사는 수행을 하려면 반드시 다섯 가지를 구족해야 한다고 그랬어요. 수습지관 좌선법요((修習止觀坐禪法要)라는 책에서 구족 오연(具足 五緣)이라고 주장을 하셨죠. 중국 불교에서 딱 한 명의 스님만을 선발하라면, 이 수나라 때 천태지의 선사를 선발해야 돼요. 그래서 천태지의 선사를 중국 불교의 완성자라고 불러요. 천태지의 선사는 나중에 선종이나 교종, 둘 다 이 천태지의의 영향을 안 받은 종파가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천태지의 선사는 중국 불교의 완성자예요. 천태지의 이후에는 실제적으로 더 이상 불교가 나아진 게 없어요.
천태지의 선사는 오연을 구족해야 된다 그랬어요. 첫 번째는 지계청정(持戒淸淨)이예요. 윤리와 도덕을 갖추고 지켜야 된다는 거예요. 윤리와 도덕을 불교에서 깔아뭉개기 시작한 거는 경허 성우(鏡虛 惺牛) 이후예요. 소위 한국 불교 근래의 중흥조라고 하는 경허 성우 이후에, 불교가 윤리 도덕을 깔아뭉갠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그런 적이 없어요. 일제 강점기 때 대표적인 불교 학자였던 이능화는 경허를 사악한 자라고 그랬어요. 지금 한국 불교에서 하늘같이 떠받드는 경허를 이능화는 사악한 자라고 그랬단 말이에요.
두 번째는 의식 구족(衣食具足)이예요. 입을 것과 먹을 것이 부족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헐벗고 굶주려서는 수행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이 부분에서는 원효하고는 분명히 다르죠. 원효는 <발심수행장>에서 그저 주린 배를 움켜쥐고서 이런 식으로 수행하라고 그랬는데, 천태지의는 그것을 한 칼에 베어버리죠. 그래서는 수행할 수 없다는 거예요. 입을 것과 먹을 것이 궁핍해서는 안 된다고 선을 그은 거지요.
세 번째는 한거정처(閑居靜處). 주거 환경이 좋아야 된다는 거예요. 주거환경이 열악하면 수행하기 어렵다는 거예요. 우리가 맹모삼천지교라고 하는 것도 주거 환경을 이야기 하는 거거든요. 맹모가 주거 환경이 나빠서 세 번을 이사했다고 그러잖아요. 천태지의 선사가 이 주거환경을 이야기해요. 주거 환경이 좋아야 된다는 거예요.
네 번째는 식제연무(息諸緣務). 간단히 말하자면, 일을 너무 많이 만들지 마라! 이 소리입니다. 일을 너무 많이 만들면 수행할 수 없다는 거예요. 요새는 스님들이 쓸데없는 일에 너무 많이 나서요. 어떤 스님은 세상에 명성을 얻더니, 뭐 당을 만들겠다고 설치다가 안 되니까 외국으로 피신 갔다가 돌아오기까지 하고 있어요.
다섯 번째는 득선지식(得善知識). 다섯 번째는 좋은 스승을 만나야 된다는 거예요. 선지식은 선우(善友)라고 하는 뜻과 같아요, 좋은 친구. 불교에서는 가장 좋은 스승이 가장 좋은 친구라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잖아요. "아난다여! 좋은 친구와 함께하는 것은 이 도의 전부다." 이 말은 아난 존자가 좋은 친구는 이 도의 절반에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했을 때,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에요. 좋은 친구와 함께하는 것은 이 도의 전부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을 원용해서, 이렇게 쓰죠. 좋은 친구는 우리 삶의 전부다. 선지식은 좋은 친구를 말해요. 가장 좋은 스승이 가장 좋은 친구걸랑요. 좋은 친구가 내 옆에 있다면, 내 삶의 전부예요. 나는 성공한 사람이에요. 부처님은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나야말로 너희들의 가장 좋은 친구다."
천태지의 선사는 이렇게 다섯 가지를 구족해야 된다는 거예요. 윤리와 도덕을 준수해야 되고, 입을 것과 먹을 것이 부족해서는 안 되고, 주거 환경이 좋아야 되고, 일을 너무 많이 만들지 말고, 좋은 스승을 만나라! 이 다섯 가지가 구족해야 장애가 없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저 발심수행장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도를 닦으라니까 너무 거기에 매몰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죠. 왜 천태지의 선사가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그렇게 해서는 한 달, 두 달은 어찌 버틸 수 있지만, 1년, 2년, 10년, 20년은 버틸 수 없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무유공포(無有恐怖). 마음의 장애가 없다. 마음의 장애가 없기 때문에 공포가 없으며, 공포는 두려움이죠. 두렵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하는 거. 공포는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우비고뇌(憂悲苦惱)를 말해요. 생로병사. 생로병사는 고(苦)에서 제가 이야기했죠, 근본 고입니다. 우리가 가장 두려운 것이 뭐예요? 우리가 가장 두려운 것은 사실 미래에요. 우리는 미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두렵죠. 우리 미래는 생로병사 안에 걸려 있기 때문이지요. 미래를 알면, 걱정하지 않아요. 쉽게 설명하자면, 식량이 떨어져도 내가 내일 300억 복권이 당첨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아무 걱정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양식이 떨어지면 걱정이 되는 거죠. 생로병사와 우비고뇌. 우는 근심, 비는 걱정, 고는 고통, 뇌는 번뇌, 이것이 공포예요.
고통에는 부처님은 여기에다 붙여서 몇 가지를 더 이야기 하죠. 원증회고(怨憎會苦). 원증회고는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거예요. 내가 정말 싫걸랑. 근데 싫어하는 것과 만나요. 내가 정말 저 사람 싫거든, 그런데 직장에서 그 사람 만나야 돼. 원수를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는 듯이 어쩔 수 없이 만나는 것이죠. 옛날에는 그 남자가 아니면 죽을 것 같아서 결혼했는데, 지금은 그 남자 때문에 죽을 것 같은 거. 그게 원증회고예요. 싫어하는 것과 어쩔 수 없이 만나는 것, 피할 수 없이 만나야 되는 고통이 원증회고예요.
그리고 애별리고(愛別離苦). 애별리고는 내가 좋아하는데 그 좋아하는 것과 별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내가 원하지 않는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물건, 내가 좋아하는 것과 어쩔 수 없이 결별해야 되는 것. 아까는 내가 싫어하는 것과 어쩔 수 없이 만나는 것인데, 이번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과 어쩔 수 없이 뜯어진단 말이에요.
구부득고(求不得苦). 내가 얻고 싶은데, 얻을 수 없는 것. 나는 강론에서도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명예와 권력과 돈과 사랑을 추구하는 것을 나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봐요. 나는 그것을 욕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욕망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있어요. 욕망이 나쁜 게 아니에요. 긍정적인 욕망은 좋은 거예요. 나를 발전시키고, 역사를 발전시키걸랑요. 부정적인 욕망은 안 되겠죠. 모든 것을 파괴시키니까. 파멸하니까. 돈, 권력, 명예,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에요. 뭐, 그거는 칭찬해도 괜찮아요. 권력을 얻기 위해서 힘쓰고, 명예를 얻기 위해서 힘쓰고, 돈을 얻기 위해서 힘쓰고, 사랑을 얻기 위해서 힘쓰는 것은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부자가 되고 싶으면서도, 부자가 되고 싶지 않은 척 하는 것이죠. 권력을 보면, 그 권력 앞에 고개를 숙이면서도 그 권력을 무시하는 듯이 이야기 하는 것이죠. 대표적으로 한국 사람들이 이런 경향이 있어요. 정치를 우습게 깔보면서, 막상 권력자들 앞에는 맥을 못 추는 면이 분명히 있어요. 명예를 얻으려고 추구하는 것, 사랑을 얻으려고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에요.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원래 돈과 명예와 권력과 사랑은 한 가지예요. 우리가 이걸 네 가지라고 생각하시죠. 이건 한 가지예요. 돈, 권력, 명예, 사랑은요, 언제나 같이 움직여요. 돈이 없으면, 명예와 권력과 사랑을 얻을 수가 없어요. 권력이 없으면 다른 것도 얻을 수 없고요. 명예가 없으면 다른 것도 얻을 수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뭐냐 하면, 돈과 권력과 명예와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지만 추구해도 얻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그걸 알면, 문제가 없죠. 얻고 싶어서 추구할 순 있지만, 얻어지지 않았을 때 그것이 얻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돼요.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고가 생로병사와 이 세 가지예요. 우리가 뭐, 오음성고(五陰盛苦)도 이야기하는데, 사실 오음성고라 하는 것은 생로병사 그 자체를 뜻하기 때문에, 특별히 이야기할 필요가 없죠. 이것이 공포예요.
공포가 없으며....... 왜? 마음의 장애가 없으니까, 마음을 다 비우고 털어버렸으니까. 오온이 공하기 때문에, 오온이 공하다고 보면, 무슨 마음의 장애가 있겠어요? 돈과 명예와 권력과 사랑을 추구했다가 얻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공하기 때문에, 본래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래 내 주머니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어놔도 아까울 게 없죠. 그런데 참 이상해요. 왜 내 주머니에 들어오면, 나갈 때는 아까운 생각이 들까요?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 전도몽상을 벗어나....... 원리라고 하는 말은 멀리 여읜다고 하는 말인데, 멀리 여읜다고 하는 것은 벗어난다고 하는 뜻이죠. 전도라고 하는 말은 뒤집어져 있다고 하는 말이에요. 전도는 뒤집어져 있는 것, 즉 무슨 말이냐면 거짓이 진실을 가리고 있는 것을 말해요. 그게 전도예요. 거짓이 진실을 가리고 있는 것. 몽상이라고 하는 건 뭐예요? 허구적인 관념이죠. 전도 몽상을 벗어나. 그래서 전도몽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릇된 것을 진실로 믿는 거예요.
인간은 먼저 입력된 정보를 맹신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요. 인간은 먼저 입력된 정보를 맹신해요. 그게 아주 인간의 치명적인 약점이죠. 먼저 강론에서 이야기를 했었는데, 러·일 전쟁(1904.2.8~1905. 9.4) 때 일본에서 영양소파와 각기균파가 치열하게 논쟁하게 돼요. 러·일 전쟁 때 해군에서 3만명이 각기병으로 죽고, 육군에서 2만명이 각기병으로 죽어요.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었어요. 5만 명이 죽어나갈 때는, 죽지 않고 살아는 있지만 그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다까키 가네히로(高木兼寬)라고 하는 사람이 해군 군의관인데, 이 각기병을 퇴치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죠. 그러다 혹시 영양 문제가 아닐까 싶어서 이것저것 먹이다가 보리밥을 먹였는데, 해군에서 이것을 퇴치해요. 그렇지만 해군에서 이미 3만 명이 죽었어요. 러일전쟁이 약 1년간 진행 되는 그 와중에요.
그래서 해군에서 일본 육군에 병사들이 죽어가는 것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보리밥을 먹이니까 괜찮다라고 하는 통보를 해주는데, 일 육군의 군의부장이었던 모리 린타로((森林太郞)라고 하는 사람은 각기병은 균에 의해서 생기는 병이라고 봤어요. 병균에 의해서 생기는 병. 다까키 가네히로가 영양소파의 우두머리고, 모리 린타로, 이 사람 필명이 모리 오가이(森 鷗外)인데, 이 모리 린타로가 각기균파의 우두머리예요. 모리 린타로는 해군이 통보한 것을 믿질 않아요. 그 와중에 2만 명이 또 죽죠.
1910년에 최초로 일본의 스즈끼 우메타로(鈴木梅太郞)라고 하는 사람이 비타민 B1을 발견하죠. 최초로 비타민 B1을 발견한 사람은 스즈끼 우메타로라고 하는 농예화학자예요. 그러면서 비로소 각기병은 병균에 의한 병이 아니라 영양소에 의한 병이라는 것이 밝혀지죠. 근데 재밌는 것은 모리 린타로는 각기병은 각기균에 의한 병이라고 하는 그 소신을 꺽지 않아요. 이미 다 밝혀졌는데, 이 모리 린타로는 죽는 순간까지도 각기병은 각기균에 의한 병이라고 하는 소신을 안 버려요. 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참, 소신이 있다고 해야 할지, 이렇게 멍청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싶죠. 그릇된 것을 진실로 믿는 거예요. 모리 린타로는 각기균에 의한 병이라고 하는 것을 진실로 믿는 거예요, 죽을 때까지.
그러기 때문에 금강경에서는 유아상 유인상 유중생상 유수자상(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을 이야기하죠. 유아상, 여기서 상이라고 하는 것은 허구적인 관념을 말해요. 나라고 하는 허구적인 관념, 인상, 개아라고 하는 허구적인 관념, 이거 사람이라고 하는 뜻이 아니에요. 유중생상, 중생이라고 하는 허구적인 관념, 유수자상, 영혼이라고 하는 허구적인 관념, 이러한 관념들이 있으면 즉비보살이라~ 보살이라고 할 수 없다. 나라고 하는 허구적인 관념, 개아라고 하는 허구적인 관념, 중생이라고 하는 허구적인 관념, 영혼이라고 하는 허구적인 관념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다(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라는 것이죠.
우리나라에 나와 있는 금강경의 90%가 이걸 엉터리로 해석해요. 아상(我相)은 당연히 나아(我)니까 나라고 해석하지, 인상(人相)은 나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이 인이라고 하는 것을 대체적으로 한문에서 '너'라고 하는 뜻으로도 쓰걸랑요, 그러니까 이거는 너라고 하는 뜻이다. 너라는 것이 아니라 '개아'라고 하는 뜻이에요. 원어는 푸트갈라(pudgala), 저 먼저께 강의에서도 얘기했죠. 푸트갈라, 개아. 여기 중생(衆生)이라는 말이 나오니까 수자(壽者)는 뭐 부처라는 뜻이라나? 또 이렇게 이야기 하는 분도 있었죠. 뭐 영원히 살고자하는 욕망이라고도 하는데, 수자라고 하는 것은 영혼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원어는 지와(Jiva)라고 하고, 영혼을 말하죠.
이미 이것이 원전이 번역 되어서 이것이 잘못된 해석이라고 하는 것이 다 알려져 있는데도, 아이고오~ 참, 불교대학 총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라디오에 나와 가지고, 인상은 너라고 하는 뜻이고, 수자상은 영원히 살려고 하는 뜻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깐 이게 한번 정보가 먼저 입력이 되면 그만인 겁니다. 이것은 일본의 모리 린타로만 그러는 게 아니야. 불교 대학 총장도 그러니 참, 이게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런 면에서 우리는 굉장히 빨라요. 과감하게 버리니까.
불교에서는 사전도(四顚倒)를 이야기해요. 상전도(常顚倒), 낙전도(樂顚倒), 아전도(我顚倒), 정전도(淨顚倒), 이렇게 네 가지 전도가 있다는 거예요. 상전도라고 하는 것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을 부정하는 거예요. 즉 무상을 부정하는 거. 락전도는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부정하는 거예요. 그리고 아전도는 제법무아(諸法無我)를 부정하는 것, 즉 무아를 부정하는 것이고, 정전도는 열반적정(涅槃寂靜)을 오인하는 것, 즉 열반을 오인하는 것. 이것이 사전도예요. 네 가지 전도몽상이라는 거죠. 무상을 부정하고,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고를 부정하고, 고를 락이라고 생각하고. 무아를 부정하고, 자아를 있다고 여기고. 열반적정을 잘못 오해하는 것. 이것을 불교에서 사전도라고 그래요.
故心無罣碍 無罣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三世諸佛依般若波羅密多 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故知般若波羅密多 삼세제불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고지반야바라밀다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故說般若波羅密多呪 卽說呪曰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3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지난주에 원리 전도몽상까지 했죠. 전도몽상을 벗어나, 구경열반究竟涅槃, 열반을 증득하리라. 전도몽상을 벗어나면, 그게 바로 열반이에요. 열반은 고집멸도 할 때 설명을 했었는데, 오늘은 열반에 대해서 경전에서 부처님이 어떻게 열반을 규정하고 있는가에 대해 하기로 하겠습니다.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에서는 가장 높은 단계예요. 결국은 열반을 증득하는 것이 최종의 목표니까요. 이거는 이제 부처님께서 바차쿠다 화유경(밧차고타 화유경)이라고 하는 경에 부처님께서 열반에 대해 바차라는 사람이 질문한 것에 대해서 답하신 건데, "이 인생은 두카로 차 있다. 그리고 그것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때문이다. 사람이 어리석어서 격정의 희롱하는 바가 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격정을 없애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 격정이 없어지고 보면, 불안이니 괴로움이니 하는 것도 없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훨훨 타오르던 불도 그 땔감이 다하고 나면, 꺼져 버리는 것과 같다. 그것을 나는 열반이라고 한다." 바차라는 분이 열반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라고 질문했을 때, 부처님께서 답하신 거예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소멸되는 것이 열반이라는 거죠.
또 어떤 스님이 부처님의 수석 제자인 사리불한테, 열반에 대해서 질문한 것이 나옵니다. 열반이라고 하는, 이 니르바나(nirvana)라고 하는 말이 부처님 당시에는 굉장히 생소했던 용어예요. 니르바나라고 하는 말이 부처님 이전에는 불교 이외의 교를 외도라고 하는 말을 썼는데, 요새 말로 하면 이교도인데, 거기에서는 이 니르바나라고 하는 개념이 나오지 않아요. 그래서 이 열반이라고 하는 개념에 대해서 좀 상당히 어려워했어요. 비구도 이 열반이라는 개념이 이해가 안 되어서, 사리불한테 묻죠. ‘사리불이여! 열반, 열반하고 말하는데 열반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건 사리불의 답이에요. "벗이여! 무릇 탐욕의 소멸, 분노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 이것을 일컬어 열반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벗이여! 그 열반을 실현할 방법이 있는가? 거기로 갈 길은 있는가?’ "벗이여! 이 성스러운 팔정도야말로 그 열반을 실현하는 방법이다."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소멸되는 거라고 얘기하죠.
부처님이 가섭 3형제에게 상두산에서 그 제자 1000명들에게 설하신 설법 중에,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 라고 하는 설법이 이거예요. 그 대상을 향해서 불타고 있다. 탐욕의 불꽃에 의해, 분노의 불꽃에 의해, 어리석음의 불꽃에 의해 불타고 있다고 하는 연소(燃燒)의 경이 있는데, 결국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소멸되는 것, 소멸된 그 상태가 열반이에요. 그리고 그 소멸하는 방법은 팔정도라는 것이고. 부처님은 바차에게 그런 말씀을 했어요. 열반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거에 대해서 당연하다는 거예요. 왜 당연하냐면, “나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지 않는 한 열반을 얻을 수 없다”라고 이야기 하죠. 즉 팔정도를 행하지 않는 한 열반을 얻을 수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열반이라고 하는 것을 보통 탐진치 삼독(貪嗔痴 三毒)의 소멸이다 라고 그렇게 설명을 하죠.
내가 고집멸도에서 멸은 열반이라고 말씀드리면서, 열반이라는 것은 자의식이 해체되는 것이다. 라고 말씀드렸었는데, 결국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은 자아라고 하는 자의식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자의식이 없으면 이것이 일어나지 않걸랑요. 그래서 자아라고 하는 자의식이 해체되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도 소멸되죠. 부처님도 이야기하시잖아요. 땔감이 다하고 나면 꺼져버리는 거와 같다. 그 땔감은 결국 우리 자의식이예요. 나라고 하는 자의식. 이 자의식 때문에 이 세 가지가 일어나죠. 나라고 하는 자의식이 해체되어 버리면, 사실 탐진치 삼독이 일어날 이유가 없어요.
이것은 이제 경전의 설명이고, 그러면 열반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뭐냐? 이거는 철저히 자기 체험이에요. 사실 이거는 체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거예요. 왜 그러냐면, 그 당시 스님들도 이것이 이해가 안가가지고 지금 사리불한테 묻고 있잖아요. 열반이라는 게 뭐냐? 열반, 열반 하는데, 열반이라는 게 대체 뭐냐? 이 열반과 두카는 배치되는 개념이에요, 반대되는 개념이지요. 결국 탐진치 삼독이 일어나는 것, 사실 그게 두카(duhkha)예요. 다른 게 두카가 아니라 그게 두카예요. 우리가 보통 두카를 고(苦)라고 하는 말로 번역을 하는데, 두카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뜻을 괴로울 고자는 설명을 다 못해요. 원래 두카라고 하는 것이 불만족스럽고, 뒤틀려 있고, 뭔가 불안정한 것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지요. 뭐 고통이라는 것은 우리가 단순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니까요. 그런데 두카는 굉장히 커서 심리적인 거, 육체적인 거, 어떤 물질적인 거, 이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어요. 그것이 소멸되면 열반이고. 그래서 두카가 있다고 하는 것은 열반을 얻지 못했다는 걸 뜻하죠. 먼저도 얘기했지만, 깨달음의 문턱을 넘어서 열반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깨달음의 문턱을 밟고 열반에 들어가는 거예요.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아뇩다라 삼먁삼보리(三世諸佛 依般若波羅密多 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과거, 현재, 미래의 붓다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아뇩다라삼먁 삼보리를 증득하시니라. 삼세는 과거, 현재, 미래죠. 제불은 모든 부처님. 불교에는 부처가 참 많습니다. 아미타불, 로사나불, 비로자나불, 약사여래불 등 수없는 부처님이 있죠. 오죽하면 3,000명의 부처님 이름도 나오고 하니까요. 이 다불 사상은 힌두교의 다신사상이 유입되어 들어와서 정착된 거예요. 불교는 본래 일불 사상이에요. 붓다 이외의 붓다는 인정하지 않아요. 오직 붓다는 한 붓다만 있죠. 대승 시대에 오면 수 없는 붓다가 만들어지는데 본래 불교가 일불사상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대승경전에서 뭐라고 그러냐면 다른 세계의 부처님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죠. 이 사바세계의 부처님이 아니라 서방세계의 부처님이다. 동방세계의 부처님이다. 약사여래는 동방세계의 부처님이다. 이런 식으로 그걸 얘기하는 거죠. 그렇지만 본래 불교는 일불 사상이에요. 그래서 현재는 우리가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고타마 싯다르타, 그리고 미래에 오실 부처님으로 마이트레야(Maitreya), 미륵. 그 외에는 인정하지 않아요.
과거, 현재, 미래의 붓다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한다. 앞에서도 반야바라밀다를 얘기했지만, 육바라밀을 대표해서 여기서는 지혜 바라밀을 드는 거예요. 먼저 지혜가 뭐냐? 그렇게 질문들도 하시고 그랬는데, 다른 게 지혜가 아니라 그저 오온이 공함을 알면 그게 지혜예요. 지혜, 열반, 깨달음, 이런 건 다 추상적인 용어예요. 그래서 이것은 어떤 규정을 지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사실은 반야경에서 주장하는 지혜는 오온이 공함을 알면, 그것이 지혜예요. 왜냐하면, 오온이 개공이걸랑요. 오온이 개공인 줄 알면 그게 반야 바라밀이예요. 지혜예요. 반야바라밀을 통해서 오온이 공함을 보고, 또 오온이 공함을 알면 그게 곧 그대로 지혜가 되는 거예요.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증득하시니라. 아뇩다라삼막삼보리는 보리수와 부처님의 깨달음을 뜻하는 말이에요. 그래서 보리수하에서의 부처님의 깨달음을 아뇩다라삼막삼보리라 그래요. 그래서 가장 궁극의 깨달음, 가장 높은 깨달음, 뭐 그런 뜻이에요. 이거보다 더 높은 깨달음, 더 궁극의 깨달음은 없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깨달음이다, 그런 얘기죠. 우리가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이 뭐냐? 그건 12연기 때 내가 충분히 이야기했고. 붓다의 깨달음이란 연기(법)의 눈뜸이고 동시에 다르마의 체현이에요. 그래서 깨달음의 다른 표현을 눈을 뜬다! 라고 하는 표현을 쓰죠. 아뇩다라삼막삼보리는 열반을 뜻하는 말이기도 해요.
고지 반야바라밀다(故知 般若波羅密多). 그러므로 알라. 반야바라밀다는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크게 신묘한 주며, 큰 지혜의 주며, 깨달음의 주며, 비교될 수 없는 주다. 대신이라는 것은 크게 신묘하다는 거예요. 대명할 때, 명은 지혜라고 하는 뜻이에요. 경에 보면, 우리가 지혜라고 붙여 쓰지만 지혜 지(智)자와 지혜 혜(慧)자를 따로 분리해서 이야기하기도 해요. 밝을 명(明)자도 쓰고, 빛 광(光)자를 쓰기도 하고. 그러니 지와 혜와 명과 광, 이 네 가지는 유사한 같은 개념이에요.
무상(無上)은 깨달음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아뇩다라를 번역하면, 무상이 돼요. 무상, 위 없는, 즉 깨달음을 말해요. 중국 선종에서는 이 무상이라는 말을 향상이라고 하는 말로 고쳐서 썼어요. 향할 향자, 윗 상자, 향상(向上). 특히 중국 오대 시대 때 운문 문언선사는 향상과 향하(向下)라는 말을 많이 썼어요. 그래서 선종에서 향상일로(向上一路)라고 하는 말은 여기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향상일로라 그러면, 위로 향한 한 길, 그렇게 직역할 수 있지만, 뜻은 깨달음의 한 길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유일한, 한 길 밖에 없다는 거죠. 그래서 향상의 반대되는 말로, 운문선사는 향하라고 하는 말을 썼죠. 향상이 깨달음을 상징한다면, 향하는 어리석음을 뜻한다고 보면 맞죠.
무등등주(無等等呪), 비교될 수 없다. 무등등은 비교될 수 없다고 하는 뜻이에요. 비교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주(呪)라고 하는 말은 주문(呪文)이예요. 만트라(Mantra). 보통 우리가 번역해서 진언(眞言)이라고 하는 말을 쓰죠. 천수경을 보면 전부다 만트라로 되어 있잖아요.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은 수리수리, 신묘장구 대다라니, 이게 다 만트라죠.
본래 부처님은 이 만트라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붓다는 아타르바 베다의 제식을 행하는 바라문을 강도 높게 비판하걸랑요. 아타르바 베다는 인도 고대의 바라문교의 이 만트라, 주문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베다예요. 지금 힌두교의 가장 원형이 되는 성전으로 이 아타르바 베다라고 하는 것은 주문으로만 이루어져 있어요. 그 제식을 행하는 바라문들을 부처님은 강도 높게 비판해요. 그리고 주법(呪法)을 엄격히 금지해요. 불교는 원래 주법을 하면 안 돼요. 그런데도 불교가 주법의 관행을 벗어던지지 못해요. 그리고 붓다의 말씀을 주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죠. 부처님이 주법을 금지하는데, 부처님의 말씀을 주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요.
이 예를 보면, 인간이 기억의 의식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죠. 그래서 나는 그렇게 보죠. 기억의 의식을 잘라내야 해요. 특히 나쁜 기억의 의식을 발라내지 않으면 안 되죠. 그래야만 경험의식의 오류를 범하지 않아요. 이성의식은 평형이 회복이 되죠. 그것이 깨달음이고, 그것이 열반이에요. 기억 의식을 잘라내지 않는 한 열반은 없어요. 나는 기억의식은 잘라내야 한다고 보는 사람이에요. 특히 나쁜 기억의식은 발라버려야 돼요. 기억의식은 과거의 기억의식을 말하는 거예요. 우리가 여태까지 살면서 입력되어 있는 기억의식을 잘라버려야 돼요. 기억의식을 잘라버리지 않으면, 경험의식의 오류를 범하게 돼요. 그렇게 되면, 이성의식이 평형이 안 돼요.
우리가 현재 경험의식의 판단오류가 생기는 것은 결국은 이 기억의식을 잘라내지 못하기 때문이니 반드시 기억의식을 잘라내야 해요. 수행을 한다는 것은 기억의식을 잘라내는 것을 말해요. 그저 앉아서 들숨/날숨을 보고, 몸의 현상을 보고, 이거는 그저 수행을 하기 위한 전 단계의 준비과정이지, 이것을 수행이라고 볼 수는 없는 거예요. 수행이라는 것은 내 기억의식을 잘라내는 거예요. 완벽하게. 기억의식을 잘라내야, 자의식이 해체되죠. 그런데 우리가 기억의식을 잘라내지 못하걸랑요. 특히 나쁜 기억의식을 발라내야 되는데, 그걸 못 발라내걸랑. 그러니까 맨날 똑같은 것에, 똑같이 고민하고, 똑같은 생활에 똑같은 생각을 하죠. 보세요. 우리는 똑같은 것을 가지고 충돌하잖아요.
부처님이 그렇게 엄격히 주법을 금지하는데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주법으로 이해해 버리걸랑요. 그리고는 앉아 가지고 맨날 수리 수리 마수리만 하고 있잖아요. 하지 말라는 걸 하면서 복받기를 바라니, 이게 참 웃기는 얘기라. 이걸 우리가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될까요? 부처님이 금지하는 걸 하면서 복 받기를 바래? 참, 예쁜 사람 복주기도 바빠 죽겠는데, 말 안 듣는 애까지 챙겨야 돼. 그래서 나는 기억의식을 잘라내는 것이 수행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해야 된다고 보는 사람이에요. 제 아무리 초선, 이선, 삼선, 사선을 얻고, 멸진정을 설사 얻었다할지라도, 기억의식을 잘라버리지 않는 한 열반이라고 하는 거는 있을 수가 없어요. 능제일체고(能除一切苦). 능히 일체의 고를 소제 하느니라. 능히 일체의 모든 두카를 제거한다는 것이죠. 육바라밀의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열반에 이른다. 사실 대승불교에서 주장하는 것이 이거라고 보면 맞아요. 육바라밀의 배를 타고, 보시바라밀, 지계바라밀, 인욕바라밀, 정진바라밀, 선정바라밀, 지혜바라밀......, 이 육바라밀의 배를 타고, 두카의 강을 건넌다는 거예요. 두카는 다른 말로 하면, 윤회입니다. 윤회와 두카가 다른 게 아니에요. 우리는 윤회와 두카를 분리해서 이야기하지만 두카가 윤회고, 윤회가 두카예요. 왜냐하면 윤회라고 하는 것은 모든 자유의지가 박탈된 거를 말해요. 이거보다 더 큰 두카가 없죠.
해탈이라고 하는 것이 뭐예요?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거예요. 속박을 벗어났다는 것이 뭐예요? 자유를 얻었다는 거지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자유를 얻었다는 뜻하고 같아요. 그래서 불교는 무엇보다도 자유를 이야기하죠. 불교는 복종을 이야기하지 않아요. 기독교는 복종이에요. 오직 복종을 통해서만이 모든 것이 얻어지죠. 우리가 그걸 알아야 돼요. 복종은 행복이 아니에요.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자유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지, 복종을 통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에요. 노예는 아무리 그거해도 노예일 뿐이에요. 마치 복종이 행복인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인간이 가장 편한 것은 복종하는 거죠. 복종하면 지시만 받고, 행동하면 되니까요. 자유라고 하는 거는 내가 선택해야 되기 때문에 굉장히 위험성이 많아요. 실패할 수도 있고. 오너의 선택은 기업을 망치기도 하고, 흥하게도 하죠. 그렇지만, 노예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책임지지 않아요. 그저 복종만 하면 되죠.
진실불허(眞實不虛). 진실하여 거짓되지 않으므로. 진실하여 거짓되지 않기에 다르마죠. 진리라고 하는 것은 거짓되지 않기 때문에 진리예요. 다르마이기 때문에 진실한 것이 아니라, 진실이기 때문에 다르마라.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뭐라고 이야기했어요? 진실하라! 그러잖아요. 부처님은 오직 한 말씀만 하셨을 뿐이라, 진실해라!...... 진실이 다르마라. 진실하지 않으면, 사선 팔정을 얻는다 할지라도 그건 다 허구고 망상일 뿐이라.
설반야바라밀다주(說般若波羅密多呪). 반야바라밀다주를 설한다. 즉설주왈(卽說呪曰), 바로 주를 설하나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이게 주문이에요. 까떼까떼 빠라까떼 빠라쌍갓떼 보디스바하. 보통 이것, 주문은 해석하지 않아요. 그래서 주문이걸랑. 뜻은 이렇습니다. 건너갈 수 있는 이여, 건너갈 수 있는 이여, 저 편 언덕에 건너갈 수 있는 이여, 저 편 언덕에 건너갈 수 있는 이여, 깨달음이여 행복하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는 뜻이 이거예요. 건너갈 수 있는 이여, 건너갈 수 있는 이여, 저 편 언덕에 건너갈 수 있는 이여, 저 편 언덕에 건너갈 수 있는 이여, 깨달음이여 행복할지니.
건너간다고 하는 것이 뭔가요? 윤회의 강을 건넌다는 거예요. 즉 두카의 강을 건넌다는 거죠. 재미있지 않습니까? 왜 강을 건넌다는 표현을 쓸까요? 동서양 종교를 막론하고 다 강을 건너잖아요. 기독교에서도 요르단 강을 건너고, 불교에서도 강을 건너고, 중국에서도 황천을 건너잖아요. 왜 강을 건널까? 참 재미있지 않아요? 그리스 신화에서도 반드시 강을 건너죠. 기독교에서도 세례를 하고, 불교에서도 머리에 물을 부어서 관정을 하고, 원래 불교의식에서도 관정의식이 있어요. 물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을 상징하기 때문이죠. 저 편 언덕은 열반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피안. 우리는 이 쪽에 있고, 이 쪽은 두카의 땅이걸랑. 저 쪽은 열반의 땅이고. 그러니 저 편 언덕에 건너간다 이 말이에요. 강을 건너죠. 강을 건너니까 깨달음이고, 행복이죠. 사실 건넌다고 하는 것은 의식의 전환이기도 하죠. 내가 아까 기억의식을 잘라버려야 된다고 그랬는데, 우리가 기억의식을 잘라 버리는 것, 그것이 저 편 언덕에 건너가는 것이기도 하죠.
반야심경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뭐냐? 반야심경의 대의는 오온은 공이라는 거예요. 반야경이 지혜를 강조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지혜는 도구일 뿐이라. 즉 오온이 공함을 아는 도구. 그러기 때문에 오온이 공함을 알면 그대로 지혜예요. 오온이 공함을 알지 못하면 지혜가 아니고, 오온이 공함을 알면 지혜라는 거지요.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이라 그랬잖아요.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함을 조견했다. 반야심경에서 이야기하고 하는 것은 오온이 공하다는 거예요. 그러니 오온은 무상이고, 오온은 무아라는 거죠. 결국 무상과 무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무상하고, 무아인 줄 알면 나라고 하는 의식을 고집할 필요가 없죠. 여기까지 하고 반야심경 전문을 이어서 해석하기로 하겠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이 깊은 지혜의 완성을 수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보고, 일체의 고를 벗어났느니라. 사리자야!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 그대로가 공이요, 공 그대로가 색이다. 수상행식도 또한 그렇다. 사리자야! 이 모든 존재의 공한 특성은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더러워지지도 않으며 깨끗한 것도 아니다.(더러움도 아니고 깨끗함도 아니다.)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나니, 그러므로 공 속에는 물질인 몸도 없고,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 식도 없고, 눈 귀 코 혀 몸 마음도 없고,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대상도 없다. 눈의 영역도 없고, 내지 마음의 영역도 없다.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의 소멸도 없고, 내지 늙음과 죽음도 없고, 또한 늙음과 죽음의 소멸도 없다. 고 집 멸 도도 없고, 지혜도 없고, 또한 지혜의 증득도 없다. 지혜를 얻을 바 없는 까닭에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는 고로 마음의 장애가 없다. 마음의 장애가 없기 때문에 공포가 없으며, 전도몽상을 벗어나 열반을 증득하니라.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증득하시니라. 그러므로 알라, 반야바라밀다라는 크게 신묘한 주문이며, 큰 지혜의 주문이며, 깨달음의 주문이며, 비교될 수 없는 주문이다. 능히 일체의 고를 제거 하나니라. 진실하여 거짓되지 않으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설한다. 바로 주문을 설하나니, 건너갈 수 있는 이여, 건너갈 수 있는 이여, 저 편 언덕에 건너갈 수 있는 이여, 저 편 언덕에 건너갈 수 있는 이여, 깨달음이여 행복할지니.
이로써 반야심경 해석은 끝났습니다. 반야심경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간단해요. 오온이 공함을 알라는 것이에요. 오온이 공함을 알아서 열반에 이르라는 거예요. 두카의 강을 건너서 열반에 이르라. 그게 반야심경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거예요. 또 그걸 권하는 것이기도 하구요. 자 이것으로 반야의 지혜! 마음으로 흐르다.... 라는 강좌를 끝맺겠습니다. 모쪼록 이번 강론에서 선우님들께서 약간의 기쁨이라도 얻으셨길 바라면서 늘 노력하고, 또 행복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혜천 합장 _()_
<부록, 문답>
질문: 윤회에서 인간은 인간으로 윤회되나요? 아니면 다른 것, 동물이나 다른 생물체로도 태어나나요?
답: 불교교리에 보면 당연히 그렇죠. 반드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보장이 없죠. (그렇다면 아까 불살생하지 않고는 살수가 없다고 그랬는데, 나비는 살생을 하지 않으니 선업을 쌓아 다음 생에 더 나은 내생으로 태어나나요? ) 나비로 태어나면요? 그렇겠죠. 우리가 보통 6도 윤회를 한다고 그러니까. 천상, 인간, 이수라, 지옥, 아귀, 축생. 뭐 그것 뿐만이겠어요. 수가 없을 정도지요. 원해서 선택해서 태어날 수 있다면, 뭐 굳이 윤회라고 자시고 할 것도 없겠죠. 윤회라고 하는 것은 자유의지가 박탈된 거니까요.
질문: 살생이 선업이어서 윤회에 영향을 미친다면, 옷을 벗고 다니고, 심지어 불살생을 실천하기 위해 물주전자와 솔을 들고 다니는 자이나교가 불교보다는 불교보다 더 실천적이지 않나요?
답: 기본적으로요. 인도에서는 초기에는 바라문들 같은 경우에는 희생제라 그래서 많은 동물을 죽여서 신에게 공물을 올렸지만, 어느 시기가 지나며는 바라문들이나 그걸 비난하는 일파들이 생기기 시작하죠. 그러면서 철저하게 불살생의 가치를 내세우는 집단들이 많이 생기죠. 지금도 힌두교 일파 중에는 희생제를 치르기도 하지만, 또 지금도 힌두교도들 중에서도 불살생의 가치를 가장 높이 그거하는 경우도 있죠. 근데 붓다는 그걸 또 비난하걸랑요. 살생이라는 것은 내가 의지를 가지고 죽이는 것을 전제로 하니까요. 내가 죽인단 말이죠.
질문: 스님께서 일전에 불살생을 말하면서, 살생이 업에 작용할려면 살생의 의도가 중요하다 하였는데, 그래서 저는 그 이후론 집안에 개미가 돌아다녀도, 개미가 있으면 바퀴벌레가 없다는 이야기도 있고해서, 그 전 같으면 먹다남은 요플레 통을 화분 옆에 두고 개미를 유인해 죽이곤 했는데, 이제는 개미를 의도해 죽이지 않으려고 화장실에서 물로 쓸어내리는데, 괜찮은 방법입니까?
답: 네, 조금 전의 문혜선우가 한 얘기는 업의 성립이 되느냐, 안되느냐의 얘기예요. 예를 들면 내가 길을 가다가 개미를 밟아 죽였을 경우는 이거는 업이 성립이 안돼요.
문: 그럼 농사 짓기 위해 밭을 일구다 지렁이를 죽이면요?
답: 그거는 삽이나 이런 걸로 팠으니까 의도가 있는 거예요. 왜 그러냐면, 그건 거기 있는 줄 알고 판거걸랑. 우리가 의도가 있느냐 없느냐는 것은 이렇게 보면 돼요. 내가 산을 오르다가 돌이 굴렀잖아요? 내가 밟았는데, 돌이 굴렀어요. 근데 그 돌이 굴러가서 의도가 없었는데, 예를 들면 뛰어가던 다람쥐가 맞아 죽었다. 이건 업이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예요.
문: 그런데 의도하지 않았는데, 교통사고로 상대방을 죽게 했을 때 왜 처벌을 받나요?
답: 그건 현실에서 법적으로다 죄를 받는게 당연하죠. 그건 현실의 법이죠. 업이라는 것은 현실의 법이 아니에요. 그건 업이 성립 안돼요. 업에서는 성립이 안돼요. 왜 그러냐면, 업은 의도가 있어야 되걸랑요. 내가 저 사람을 차로 받는다는 의도가 있어야 돼요. 아, 그럼요. 그건 현실의 법이죠. 그건 업의 문제가 아니에요. 현실적으로 사회규약이죠. 공동체의 규약. 사실 윤회, 업, 행, 이건 사실 굉장히 복잡한 이론이에요. 굉장히 치밀하고요. 2,500년간 논쟁했는데, 아직 정리를 못했어요.
문: 그렇다면 사자는 살생을 해도 괜찮다는 것인가요?
답 : 아 네, 사자는 없어요. 대신 사자는 정말 분명하죠. 정확히 한번에 물어서 죽이죠. 인간처럼 몇 번 망치로 두드리는 짓은 안해요, 사자는. 단숨에 목줄을 끊죠.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사자의 덕이라 그러죠. 사자에게 덕이 있는데, 그것은 짐승을 사냥할 때는 단숨에 숨을 끊는다는 거예요. 걔네들은 인간처럼 사지를 절단하고, 찢고 하는 그런 잔인한 짓은 안 해요. 바로 목숨을 끊어놓지요.
질문: 개개인이 살아가면서 자기가 쌓아놓은 행적이 업이 되고, 그게 다음 생을 결정짓는다는 것을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지 않는 곳에 태어난다면, 이를 윤회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요? 예를 들어 누가 가난하고 불평등한 아프리카에서 태어나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적으로 개인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누구는 그런 곳에 태어나게 되는데, 개인의 업이 작용했다고 볼 수 없는 것 아닌가요?
답: 불평등이라고 하는 문제가 붓다도 그런 표현을 붓다도 그런 부분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대반열반경이라고하는 경전이 있어요. 그것은 붓다의 마지막 자취를 기록한 경전인데, 거기에 보며는 왕이 갖춰야될 덕으로 4가지를 드는데, 그 마지막이 뭐냐하면, 왕은 백성들에게 공평하게 물질을 나눠야 된다고 이야기해요. 평등하게. 그게 왕이 갖춰야할 덕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인간 세계의 불평등 문제를 현대인들은 시스템이나 제도로서 정비할려고 자꾸 그러죠. 근데 어떤 제도와 시스템도 인간의 불평등은 해결해주지 못해요. 그러면 그 불평등은 누가 해결 할 수 있나요. 오직 인간의 의식이 변해야지만 가능하죠. 인간의 불평등은 실제로 제도나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의식의 문제예요. 나누려고 하는 의식이 있으면, 그런 불평등의 문제는 생기기 않걸랑요. 결국은 우리가 복지국가로서 북구라파, 핀란드나 노르웨이나 스웨덴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사람이 사회적인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제도와 시스템 이전에 그건 사회적으로 합의한 거예요. 이렇게 하자.
어떤 분들은 이렇게 주장하죠. 우리나라 무료의료 가능하다는 거예요. 각자가 의료비를 좀 더 부담할 수 있으면. 각자가 15,000원에서 20,000원 정도만 더 부담하면, 우리나라 무료 의료 시스템으로 갈 수 있다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그럴 용기가 없걸랑요. 사회불평등은 인간의식의 문제예요. 결국은 붓다가 우리에게 이야기하고자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제도와 시스템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바꾸라는 거예요. 실질적으로 내가 일요강론에서도 내가 이야기하는 요지는 그거예요. 다른 거 아니에요. 생각을 바꾸라는 거예요.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우리는 항상 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어요.
내가 뭐 하도 많이 이야기해서 맨날 똑같은 이야기 한다, 이런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지만 인간은 자기 생각을 못 벗어나요. 어떤 인간도 자기 생각 못 벗어나요. 왜 못 벗어나느냐? 그게 인간의 한계이걸랑. 결국 그 틀을 벗어나지 않는 한, 의식의 전환, 깨달음이라고 하는 게 뭐예요? 의식의 전환이예요. 모든 사람이 아트만이 있다고 믿을 때, 붓다가 보리수하에서 보니까 아트만이라고 하는 영원불변하고, 영원불멸하는 아트만이라고 하는 건 없다, 그거 아닌가요? 그러니까 모든 자의식이 해체되게 되고.
우리는 백인이 부자인 것이 부럽죠. 그런데 백인이 그 부를 이루기 위해서 전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여서 그 부를 획득했는가는 생각을 안해요, 우리는. 인간은 굉장히 이율배반적이예요. 동네 건달이 나를 때리면요, 굉장히 화나요. 그리고 비난해요. 그러나 징기스칸이 말을 타고 밟으면, 모든 인간들이 무릎을 꿇죠. 영웅이라 그러죠, 그를. 어떤 역사학자는 말하죠. 인간 역사상 징기스칸보다 많은 인간을 죽인 사람은 없다고. 왜냐면, 징기스칸은 도시를 정복하면 도시 자체를 다 없애버렸으니까요. 근데 우리는 그를 영웅이라고 추앙하잖아요.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광개토왕이라고 하는 것도 그런 사람 아닌가요, 결국은. 6진을 개척했다고 하는 김종서도 여진족을 다 죽이고, 여진족 땅을 뺏은 것 아니예요. 우리는 거기에 환호하는 거예요. 일본이 36년간 짓밟은 것은 그렇게 화를 내면서. 조선조 천민들은 거의 여진족 출신이었어요, 가계가. 이성계가 이용해 먹고 버렸죠. 이성계의 사병이 5만이었는데, 2만 5천은 여진족이었어요. 근데 이성계는 권력을 잡자 그들을 버렸죠. 그들이 다 백정이 되었어요. 원래 백정이란 말은 고려시대 때 일반 백성을 지칭하는 말이었어요. 근데 그들이 다 그 일을 하니까, 백정 자체가 천민이 되어 버렸죠.
질문: 시스템과 제도보다 인간의 의식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예를 든 북구라파의 나라 사람들과 우리의 의식이 다를게 뭐 있겠습니까? 결국 제도가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강제하게 되면 의식이 생겨나는 건 아닌가요?
답: 그게(인간의 의식) 먼저 와야 된다는 거지요.
질문: 사실 제가 질문하려는 건 그게 아니고요. 제가 알기로는 스리랑카에서는 비구가 아라한이 되는 것에 대한 논쟁에서 몽정을 한자도 아라한이 될 수 있느냐의 문제로 대중부와 상좌불로 분열되었다고 알고 있는데요.(스님께서 인도에서요 라고 정정) 스님께선 무아라고 하는 것은 자의식의 해체인데, 이 무아가 체현되는 것이 아라한이다. 즉 무아란 나, 나의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윤회의 주체는 자의식이다. 자의식은 나라고 하는 의식이고, 이 자의식의 해체가 무아이다. 그런데 나는 왜 사는가? 즉 인간에게 생존의 욕구는 무엇인가? 생존의 목적은 나를 복제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성욕이 일어나야 2세도 낳고 하는 것인데, 몽정의 논쟁에서 처럼 불교는 성욕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는 건 아닌가요? 그리고 상가의 비구들은 결국 이런 성욕의 결과로 일반 사회의 사람들 중에서 충원되는데, 모순 아닌가요? 차라리 브라만교에서처럼 가정을 꾸리고 살다가 늙은 후에 특정한 시기에, 유행기로서 수행자가 되는 것이 더 합당한 논리가 아닐런지요?
답: 아니, 아니 그게 가장 좋죠. 결국 그런 부분들은 부처님 이전부터 출가 수행자들의 윤리 도덕이었어요. 그 부분은. 사실 불교에서 말하는 계라는 것도, 부처님이 처음에 계를 정하지 않은 이유는 그 당시에는 불교수행자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출가 수행자들은 그 당시에 다 지켜야할 윤리도덕이예요. 그러니깐, 내 문혜선우가 얘기하는 것의 요지를 이해를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2,500년전의 그 당시의 이야기예요. 그러니 현실은 현실이고, 또 다른 문제겠죠.
그 당시에는 사회적으로. 루소가 사회계약설을 얘기했잖아요. 그 당시에 보면 암묵적인 것이 사회계약이예요. 어떤 사회계약이냐면, 가정 생활하는 사람들은 물질을 출가수행자들에게 공급해주는 거예요. 그게 내 가족일 수도 있고. 미얀마에서 출가하려면, 반드시 후원자가 있어야 돼요. 후원자가 없으면, 계를 받을 수가 없어요. 결국은 그 후원자가 누구예요? 가족이에요. 그 비구가 일생에 쓸 것을 후원해야 되는데, 그 후원자가 없으면 계 안 줘요. 한국 스님들은 가도 후원자가 없어요. 한국의 비구였기 때문에 굳이 후원자를 거론 안해요. 그러나 사양사람들이 비구의 계를 받을려면 사찰에서 반드시 후원자를 정해 줘요. 후원자가 없으면 안돼요, 법적으로.
그러면 출가수행자들은 사회생활 하는 사람들이 물질적인 공급을 해주기 때문에 그들에게 뭔가 정신적으로 충족해 줘야 돼요. 그럴려면 그게 뭐예요? 이 세상에요, 내가 강론에서도 가끔 얘기했지만, 증여는 공짜가 없어요. 증여는 붓다의 증여만 공짜예요. 그 나머진 다 있어요. 출가수행자는 사회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을 지켜야 돼요. 그것이 뭐냐며는 사회 사람은 하지마는 출가자에 대해선, 사회사람들이 하는 걸 다하면 안돼요. 술 먹어도 안되고, 결혼해도 안되고. 아까 얘기 했잖아요. 비구는 과일 나무 아래 과일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주지 않으면 먹으면 안 돼요. 누군가가 나에게 먹으라고 갔다 줬다? 요거 유효 기간이 언제인 줄 아세요? 밤 자정이 넘어가면, 이거 유효기간이 없어요. 그거 먹으면 안 돼요. 내가 받아 왔어도, 24시간 자정이 지나면 그건 무효야. 누군가가 다시 주워 주지 않으면 못 먹어, 먹어서는 안돼.
그러니깐, 사실 현대 한국 불교를 봐서 그러는데, 부처님 당시에 수행자들은요, 엄청난 어떤 지켜야 될 것이 많았어요. 지붕 밑에 들어가서 자면 안 돼요. 나무 밑이나 동굴 속에나 바위 밑에서. 그래서 부처님이 죽림정사라고 하는 절을 빔비사라왕한테 기증받고, 그 죽림원에 원두막 같은 것을 지어서 비구들이 거주를 했을 때, 붓다 이외의 수행자들이 뭐라고 불렀는지 아세요? 저 사깃꾼들. 왜 사기꾼인 줄 아세요? 수행자가 원두막이라고 하는 지붕밑에 들어가 있으니까 수행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저 사기꾼들. 자이나교에서도 격렬하게 비난했어요. 근데 나중에 자이나교는 그걸 받아들여서 정주하죠.
가장 재미있는 것은 지붕 밑에 들어간 집단만 현재까지 살아 남았다는 거예요. 그걸 비난했던 아지비카교등은 다 없어 졌어요. 문혜선우가 지적하는 부분들은, 그거는 현실적인 이야기죠. 문혜선우가 지적한 것은 바로 중국의 선비들이 지적한 거예요. 조선의 선비들이 지적하고. 영원히 그 문제에 대해서는 종교는 답을 주지 못해요. 왜 그러냐면 종교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회에 기생하걸랑요. 사회의 지원이 없으면 존재하지 못해요.
답 : 아하! 우리 헌수님이 의근이라고 하는 말에 자꾸 그거해서 그러는데, 의근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 따로 분리해 놓고 있지마는 안근과 의근은 함께 움직여요. ... 이 부분 같은 경우는 심법에 속하기 때문에 색법에 속하는 것처럼 명확하게 파악되는게 아니죠. 실제적으로 수행의 도상에서 대상을 느끼면서 안구의 움직임을 보고, 느낀다 말이이예요. 느끼면서 동시에 마음의 작용을 봐야만 이건 알 수 있어요. 뭐, 그거는 정말 말로써는 설명이 어렵죠. 이것이 계분별관인 이유가 그래서 그런 거예요. 다른 분은? 답 : 18계는 오온이 확장된거라고 보면 맞아요.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면 맞아요.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은 색에 속하는 거예요, 색이고. 의근과 육식은 심에 속해요. 우리가 수상행식이라고 하다 보니까 그런데, 12연기에서는 이거를 명색이라고 그래 버리죠. 몸과 마음, 딱 짤라 간단하게 해버리죠.
답 : 심의식이 동의어라고 하는 것은 부파불교 시대의 주장인데, 우리가 심이라고 할 때와, 마노라고 할 때와, 윈냐나라고 할 때는 약간의 차이는 있죠, 사실. 우리가 심이라고 할 때는 전체를 포괄한다고 보면 맞고, 마노라고 할 때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의식이라고 할 때는 전체를 포괄하지만, 그냥 식이라고 할 때는 전체를 포괄하지는 않죠. 근데 또 어떤 문제가 있냐하면 대승불교의 유식학파에서는 식을 마음의 의미라고 써요. 오직 마음뿐이다.
답 : 그 부분은 사실 12연기에서 나와야할 부분인데, 불교의 교리발달사라고 하는 거는 유아라는 말을 쓰지 않고, 어떻게 자아를 인정하느냐 하는 쪽으로 갔다고 보면 맞아요. 이거는 굉장히 복잡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결국은 유식에 이어서 아뢰야식(阿賴耶識)식이라 하는 것도, 아뢰아식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장식이라고 하는 뜻이니까, 그래서 여래장의 장도, 다 저장한다고 하는 의미걸랑요, 저장한다. 함장식(含藏識), 즉 종자라고 하는 뜻이죠. 거기까지 가면 이야기가 굉장히 복잡해지죠. 12연에서 그 부분은 다시 한번 이야기 하지요.
답 : 부처님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모든 것은 나와 대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거예요. 나와 대상. 18계라는 건 나와 대상, 단순화시키면 나와 대상이라는 얘기걸랑요. 나와 대상은 연기의 관계라는 거. 연기라고 하는 말, 빠띠띠야 사무빠따라고 하는 말은 무엇으로 인해서 무엇이 일어나고, 무엇이 생하고, 무엇이 소멸하고, 무엇이 있게 되고, 무엇이 없게 되고 그런 의미걸랑요. 그러니까 나와 대상은 어떤 관계예요? 서로가 상호관계 속에 있는 거지요. 대상이 없는 나라고 하는 어떤 의미에요? 존재할 수가 없어요. 대상이 있어야 내가 존재해요. 대상이라고 하는 거는 나 이이외의 모든 우주 만법은 다 대상이예요. 이 우주도, 지구도 다 대상이예요, 불교에서 보면. 그러니까 대상이 없으면 나는 존재할 수가 없죠. 대상과 나는 유기적 관계예요. 우리는 엄격히 말하며는 지구에 기생하고 있잖아요. 우리 철저히 의존하는 관계예요. 외부에서 에너지가 공급되지 않으며는 살 수도 없고. 안 먹고 사는 사람 있어요? 없잖아요.
답 : 쌍카라가 행이니까. 부파불교 시대 때는 이거를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라고 그래요. 무명과 행을 과거로 보고, 식에서 생까지를 현재로 보고, 여기 노사라는 말이 나오지마는 노는 여기 사실 있을 필요가 없어요. 사는 내세란 말이예요. 그래 삼세양중인과인데, 무명에서 행이 형성되고, 행에서 식이 햐형성된다고 여기서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여기에 의문을 갖는 것도 그거예요. 식과 명이 어떤 차이를 갖느냐는 거예요.
식도 마음의 작용이고, 명도 마음의 작용이에요. 우리가 마음, 마음하여 마음을 절대화시키니까 마음이라는 것이 마치 어떤 형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하지만. 부처님이 마음을 심유주라고 그랬거든. 마음은 흐르는 것이다. 흐른다고 하는 것이 뭐예요? 고체가 아니라는 이야기죠. 우리는 마음이라는 걸 고체로 파악하걸랑요. 대체적으로 나는 그렇게 인식한다고 봐요. 선종의 명심견성설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기 때문에 명심견성설이라고 하는 것이 나온다고 보는데, 사실 12연기는 아까도 얘기했지만 무아 윤회를 설명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나는 봐요. 경에서 주장하듯이 부처님이 만드셨는지, 내가 주장하듯이 후세에 만들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난 적어도 부처님이 만들었다고는 안 봐요. 부처님이 만들었는거 치고는 너무 허술하죠.
무아라고 하는 말 자체가 나를 부정하는 말은 아니걸랑요. 아니다라고 하는 말이지. 여기서 ‘아니다’ 라고 하는 말은 어떤 자아의 실체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죠. 사실 불교의 무아 이론은 굉장히 논리적으로 어렵습니다, 이게. 대체적으로 보면 서양에서도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도 영혼을 이야기하고, 인도의 주류사상도 다 그렇고. 대체적으로 영혼이나 자아나 개아나 푸트칼라나 지와나 뭐, 온갖 것을 다 이야기하는데, 불교만 그 실체성을 인정을 안 해요. 아까도 이야기 했듯이 인도 불교라고 하는 거는 그 실체성을 인정하는 쪽으로 가는 거예요. 무아라고 하는 말을 피해서. 왜냐면 무아라는 말을 전면적으로 하게 되면 불교가 아니게 되니까. 불교라는 깃발을 세울 수 없으니까, 불교라는 깃발을 세우면서도 어떻게 이 부분을 인정할 것이냐? 그 쪽으로 가는 거죠.
사실 무아라고 하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체험을 말해요. 이건 체험되어지는 거예요. 우리가 무아라고 하는 것이 체험되어져야 모든 자의식이 해체되고, 열반에 이를 수 있어요. 현대 과학이 이렇게 발달했어도, 구체적으로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해서 아직 몰라요. 이제 마음에 대해서 알아가는 초입에 들었죠. 우리가 무아설이라는 것도 2,500년간 이야기 되어졌지마는 아직도 구체적으로 설명을 몬해요. 구체적으로 설명을 못하는 이유는 사실 무아라는 개념 자체가 굉장히 난해한 개념이에요. 개념 자체가 난해한 개념이에요. 업설과 윤회설 자체도 추상적인 용어인데, 이게 이론적으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죠.
부파불교 시대에 구사론이라는 것이 옛날식으로 딱 100권인데, 대부분이 무아인데, 무엇이 윤회하는가를 설명해요, 70%가. 100권에서 70권은 그걸 설명한다고 보면 맞아요. 근데 문제는 거기에 대한 답을 못 내놓는다는 거예요. 그저 믿어라, 믿으면 복 받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결론을 낸다고 하는 것이 가장 쉽죠.
조금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행에서 식이 성립된다고 12연기에서는 이야기 하는데, 하아~, 참 이것이 자아와 무엇이 다른 건가? 라는 의문이 들죠. 만약에 그렇다면 식이라고 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식이라고 하는 것이 자아이론의 아트만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왜 그러냐하면 명색보다 먼저 와 있걸랑요. 여기 몸이 없걸랑, 아직. 아직 몸이 없잖아요. 몸이 없고 의식만 있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면 의식만 따로 존재한다면 아트만하고 무엇이 다른가? 우리가 근본적인 질문을 안 할 수가 없죠.
아까도 말씀드렸지마는 기본적으로 붓다는 윤회하는가 안하는가에 대해서는 나는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봐요. 그럼 붓다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무엇이냐면, 해탈이에요. 동요되지 않는 열반을 얻는 거예요. 말룬카가 붓다에게 14가지를 물을 때, 세상이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이런 여러가지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했을 때, 독화살의 비유를 든 이유도 거기에 있죠. 형이상학적인, 추상적인 이론이라고 하는 것은 죽은 뒤에 영혼이 있는가, 없는가를 알고 싶으면 죽어보면 알아. 그게 가장 효과적인 거예요. 천국과 극락이 좋은지 안 좋은지는 죽어서 가보면 알고, 지옥이 고통스런 곳인지 아닌지는 죽어서 가보면 알아.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지옥이 못살 것 같으면, 도망 나오는 놈이라도 있을 텐데, 없다는 거예요.
답 : 붓다가 이야기하고자하는 것은... 나는 그렇게 봐요. 윤회나 업에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 무명, 낡은 의식을 거두는 거예요. 낡은 의식을 제거하는 거예요. 붓다가 관심 있었던 것은 두카로부터 벗어나는 거예요. 수타니바타나 이런 경전에는 전생이야기가 많이 나오죠. 그리고 두카로부터 해방이라고 하는 것도, 윤회설이라는 것이 없으면, 그 고리를 끊는다고 하는 것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근데 내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뭐냐면, 붓다는 윤회의 주체가 무엇인가? 무엇이 윤회하는가? 그런거예는 관심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다음 생에 윤회할 것인가, 안할 것인가? 그런 것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봐요. 아니 근데 이건 제 개인적으로예요. 붓다가 중요하게 여겼던 거는 지금 이 순간에 낡은 의식을 걷는 거예요.
답 : 우리가 불교를 이해를 할라며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인도의 고대 베다나 우파니사트나 특히 쌍키아 학파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돼요. 불교가 이해되기 어려운 거는 불교 이전에 인도에 어떤 주장과 설이 있었는가에 대해서 잘 몰라요. 이건 불교대학에서도 안 가르켜요. 오직 이것만 가르치죠, 이런 것만. 무아라는 것은 유아가 전제되지 않으며는 이야기가 안 나와요. 그렇지 않은가요? 자아사상이 있기 때문에, 자아가 있기 때문에, 영혼이라는 것이 전제되기 때문에 무아라고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는 거예요. 헤겔식으로 말하며는 이게 정반합이예요. 무엇이 있을려며는 무엇이 있기 때문에 나오는 거예요. 이것이 연기의 법칙이기도 해요. 여기에 이것이 있기 위해서는, 여기에 무엇이 있는 거예요. 해가 솟아야 해가 지죠. 해가 아예 안뜨며는 질 일이 없죠.
답 : 내가 지난 번에 불교라는 것은 개념과 직관과 경험을 통합한다고 말씀드렸던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사실 불교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런 면에서. 왜 그러냐면 어떤 하나를 설정해 놓고, 세우고 달려드며는 쉬워요. 저기에 고지가 있다, 자, 뛰자! 그러면 그 고지에 가면 다 끝나요. 그런데 불교 자체는 그 고지에 목표점을 설정을 안한다 이 말이예요. 자, 저기를 향해 간다라고는 외치는데, 거기에 어떤 고지에 목표점 깃발을 꼽질 않아요. 그래서 스님들이 이야기를 하다가 끝맺음 낼때 하는 말이 이 말이예요. 니가 알겠냐, 내가 알겠냐? 불멸 후 2,500년간 윤회의 주체가 뭐냐? 2,500년간 논쟁했는데 안끝났어요, 아직. 아까 얘기했듯이 구사론 100권인데, 70% 가량 그걸 설명하고 있는데, 들을 때에는 그럴 듯한데, 듣고 나며는 구체적으로 무얼 들었는지 기억이 안 나요. 아까 내가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라고 한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답 : 우리가 그건 차전이라고 하는 말을 쓰는데, 차전과 표전은 표리의 관계인데, 부정과 긍정은. 그러기 때문에 체험을 강조하는 이유가 그거예요. 무아는 체험되어지기 때문에. 무상은 시각적으로 경험되어지는 거예요. 왜 그러냐면, 무상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적이고 심적인 것의 변화를 말하거든요. 근데 무아라고 하는 것은 첫째 체험되어지는 거예요. 무아라는 것은 내 의식세계에서 보는 거 걸랑요. 그리고 마음, 마음하지만, 실제적으로 마음의 움직임을 과연 얼마나 봅니까? 이거는 각자가 깊~이 생각하셔야 돼요. 다른 분은?
답 : 부처님이 그렇게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 어떤 스님은 마음이 윤회한다고 그래. 부처님의 설은 근본적으로 연기설인데, 12 연기는 무아 윤회를 설명하기 위해서 구성했다고 보는게 맞다는 거죠. 왜 그러나면, 이것은 과거, 현재, 미래를 이야기하는 거 걸랑요. 부파불교시대에는 삼세양존인과라고 전문적인 용어를 쓰고. 불교라는 것은 연기설을 빼면 불교는 존재하지 않아요. 부처님이 당시에는 깨달음이 연기라고 이야기하고, 자설경에 '일구월심, 사유하던 붓다에게 모든 존재가 밝혀지던 그날 그의 의혹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연기의 도리를 알았으므로'라고 했으니까. 다만 보리수와에서 이것을 순관과 역관으로 관했다는 것은 후대에 삽입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구차제정에서 나오는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그건 붓다가 궁극의 단계가 아니라고 주장한 건데, 왜 그게 구차제정겅에 들어느냐 말잉에요. 마지막 멸진정(滅盡定)이라고 하는 것은 쌍키아 학파가 최고의 경지로 치는 건데, 왜 거기에 들어갈까? 뭐, 그거는 다음 주에 이야기하겠지마는.
답 : 우리가 부처님의 경전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누군가가 편집한 거죠. 그러기 때문에 다른 것이 많이 섞여 들어갈 가능성이 많아요. 그리고 또 인도의 모든 학파와 불교가 쟁론을 했기 때문에. 인도에서 가장 저급한 종교가 뭔 줄 아세요? 불교예요. 인도에서는 그렇게 봐요, 주류에선. 왜냐? 불교가 자아를 부정하기 때문에. 인도의 주류사상은 자아사상이에요. 그런데 유일하게 그 자아사상을 부인한 건 불교 밖에 없어요. 자이나교에서도 그걸 인정해요. 지와라고 그래서. 자이나교에선 지와와 아지와의 다툼으로 보니가, 모든 것을. 지와는 영원이라고 하는 뜻이예요. 아트만하고 같은 개념이죠. 그래서 후기의 인도 철학에서 불교는 공적이예요. 시간이 많이 갔으니까, 다음 주에 이 부분은 좀 더 생각하시고, 오셔가지고 질문하시죠. 나도 아직 죽어서 입멸을 안해 봐 가지고 잘 모를 일이지요.
답 : 혜능게는 신수게가 없으면 존재하지 않아요. 신수게가 있어야만이 혜능게가 성립돼요. 정확히 말하면, 신수게는 혼자서도 살수 있지만, 혜능게는 신수게가 없으면 죽어요. 아, 그거는 다음 주에 말씀드릴께요. 여기 신수게에서 이야기하고 하고자 하는 것은 마음에 방점이 있다는 거예요. 마음은 거울과 같기 때문에 항상 닦아줘야 된다는 거예요. 왜 그러나며는 거울이라는 기능이 제대로 기능할려면. 왜 이 이야기가 나오냐며는 요새 거울과 옛날 거울 다르잖아요. 옛날 거울은 청동거울이잖아요. 청동거울은요, 거울 역할 할라며는 정말 부지런해야 돼요. 청동거울은 매일 닦다시피 해야 돼요. 안 그러면 청동이라고 하는 거는 산화되기 때문에 며칠만 안 닦으면, 볼 수가 없죠. 그래서 여기에서는 청동거울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는 거예요. 청동거울의 이미지를 빌려와 가지고, 마음이라는 것은 일정의 단계에 올라가지 않으면, 염오된다는 거죠. 신수게에서는 그걸 이야기하고자 하는 거든요(...) 뭐 어떻게 이해하든지 그거는 관계가 없겠죠.
답 : 아까 어느 분이 수행의 주체가 누구냐 물었는데, 수행의 주체는 나죠. 자기 자신이 수행의 주체예요.
십년이라는 거는, 에 나중에 나오는데, 우리가 그걸 알아야 돼요. 우리가 신수심법 4념처에서 신을 보고, 수를 보고, 심을 보고, 법을 본다고 순차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거는 설명할 때 그렇게 하는 거고, 수행의 도상에서는 그것이 동시적인 작용이지요. 몸을 볼때 마음이 작용이 하지 않지 않잖나요. 마음 작용 하잖아요. 그리고 마음이 작용하지 않으며는 몸의 느낌을 어떻게 보겠어요? 그러니 마음의 움직임을 보지 못하는 것이지, 마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몸을 본다고 그래서 마음이 작용하지 않은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느낌이라고 하는 것은, 수라고 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도 있지만, 정신적인 것도 있죠, 동시에.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이 있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이 있고.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짝 갈라서 설명할 수 없지마는. 이거는 뭐 수행에서의 체험이니까.
우리가 반야심경의 논리로 이야기하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흐름으로서 움직이는 거예요. 하나의 흐름이예요. 우리가 이것 저것으로 세분화시켜서 이야기하지마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부정관이라고 하는 것은 몸의 분자가 분해되는 흐름을 시각이라고 하는 이 안구와 마음으로 보는 거예요. 거기서 오온이 무아하고 무상한 거를 보죠. 실제적으로 시신을 놓고 하는 경우가 있고, 자기의 몸을 관념적으로 보는 경우가 있고. 부정관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마, 그런 것은 아니예요. 자기 몸을 혐오한다 뭐 그런걸로 이해를 하면 곤란하죠. 그렇게 되면 별 수 있겠어요. 새끼줄 세발 들고 뒷산에 올라가는 수밖에. 뭐 수식관라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들숨과 날숨의 흐름 속에서 무상을 보는 거예요. 무상 속에서 무아를 보는 거고.
답 : 오온개공의 체험에 대해서 정지민님이 물으셨으니까, 문건으로다 물으셨네. 오온의 세계는 한계성에 있어요. 왜 그러냐면 우리가 몸을 가지고 있는한, 우리는 3차원의 세계에 머물르게 돼요. 어떤 인간도 3차원을 벗어나지 못해요. 인간은 3차원이예요. 동물들은 2차원의 세계에 있고요. 무상과 무아의 세계는 가능성의 세계예요. 다르마의 세계는 무한성이고. 무상과 무아를 체현해야 가능성이 열리게 되고, 다르마에 이르게 돼요. 지난 주에도 얘기했지만, 무아라는 걸 체현할 때, 자의식이 해체되죠. 사실 우리가 한계성에 갇히는 것은 자의식 때문이예요.
답 : 에~, 질문은 가급적이면 그 날 강론에서 이야기하는 거를 하셔야 돼요. 그래야만이 연동성을 가져갈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이야기한 것은 크게 보면, 두 가지예요. 하나는 색, 심, 공을 메트릭스처럼 병렬시켜서 봐야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의미를 우리가 파악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며는 색과 심이 오직 하나의 흐름이라는 것을 우리가 파악할 수가 있죠. 이거는(도표) 내가 쉽게 이해하시라고 고안한 거예요. 다음에 이 문건을 묶을 때는 도표를 실으세요, 요거. 실으셔야 이해가 돼요. 오늘 뭐 더 이상 그거 없으면 여기까지 하죠. 다음 주에 혜능게 하고, 부증불감 이어가도록 하죠.
문 : 사무색이라고 하는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 실제 당시 인도에서 행해지던 수행법입니까?
답: 공무변, 식무변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식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이 사무색정은 소위 불교의 세계관에서 말하는 새계, 욕계, 무색계라고 하는 삼계 세계로 나눌 때, 사실 이것이 들어가요. 그래서 우리가 공무변처정이니, 식무변처정이니, 무소유처정이니, 비상비비상처정이니, 이 사무색정이라고 하는 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냐? 사실 이거는 불가능해요. 부처님께서도 어떤 사람이 와서 열반, 열반하는데 열반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했을 때, 부처님이 탐진치 삼독의 불꽃의 소멸이라고 이야기도 했지만, 야차에게 무어라 이야기했는가면 나의 가르침을 따라서 수행하지 않는한 이해할 수 없다 딱 짤라 그랬어요. 그 의의를,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랬어요. 우리가 사무색정이나 이런 것들은 부파불교 시대 때 이런 것들은 다 조직되었다고 봐야 돼요.
질문: 18계의 근경식은 부파불교 시대의 개념인가요?
답: 저 먼저께 헌수님이 의근과 의식에 대해 이해가 잘 안가시다고 그랬는데, 근이라고 하는 것은 부파불교시대 때 붙인 거예요. 원래 부처님 경전에는 근이라고 하는 말도 잘 안 나와요. 그냥, 눈귀코혀몸마음 이렇게 이야기하지, 무슨 뭐 안근이 어떻고, 의근 어떻고, 이런 이야기 안해요. 그거는 부파불교 시대 때 붙인 거예요. 계니 근이니, 경이니 이런 것들 다 부파불교 시대 때 붙인 거예요. 왜 그러냐면 좀더 이해하기 쉽게 조직화시킨 건데, 그래서 더 어려워 졌어요. (18계는요?) 18계란 말은 안 썼죠. 6경, 6근, 6식 이런 거는 다 부파불교 시대 때, 숫자를 붙인거죠. 왜냐하면 경전 자체는 그런 얘기가 없으니까요. 눈이 어떻고, 그 대상이 어떻고, 그 볼 때 마음의 작용이 어떻고 하고 있지, 뭐 안근이 어떻고, 색경이 어떻고 이런 이야기는 안하죠.
질문: 도교에서도 도에 이르는 경지를 말하고 있는데, 이런 것과 구차제정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요?
답: 도교라고 하는 것은... 도교를 논할려면, 최소한 운급칠첨(雲笈七籤)은 봐야죠. 운급칠첨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 북송 진종 때 황제의 칙령에 의해서, 도교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논한 것이 운급칠첨이에요. 우리나라에서는 노자, 장자보고 선교가 어떻고, 도교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하는 거 보며는, 참 불쌍하죠. 최하 노장(老莊)은 다 못봐도, 운급칠첨 정도는 봐야 그래도 도교에 대해서 좀 이야기할 수 있고, 정확히 도교의 수행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전진교에 대해서 모르면, 그 언급하면 안돼요.
왜 그러냐면 중국 도교라고 하는 거는 전진교 이전을 구도교라고 그래요. 진진교 이후로 신도교라고 그러고. 중국 도교가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 본격적으로 얘기된 것은 왕중양(王重陽) 선생에 의해서예요. 그래서 중국 도교의 그런 것들이 불교와 유사하게 보이는 이유는, 불교 영향 아래서 만들어 졌기 때문이예요. 왕중양 선생은 전진교의 세가지 경전을 소의 경전(所依經典)으로 삼았어요. 유교의 효경, 그리고 노자,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반야심경. 왕중양 선생의 글을 보면, 이게 불교 이야기인지 뭔 이야기인지, 정말 중국의 기본적인 도교나그 쪽에 대한 이해가 없으며는 아, 스님이 썼다고 봐도 문제 없죠. 도리어 왕중양 이후에는 중국 불교의 수행이 왕중양의 영향을 받으니까요.
일본 임제종의 중흥조라고 하는 하구잉에가꾸(白隱慧鶴백은혜학(1685∼1768)같은 경우도, <야선한화(夜船閑話)〉라고 하는 것을 남겼는데, 야선한화에 보면 중국 도교의 수행에 대해서 나와요. 하꾸잉에가꾸가 병에 걸렸을 때, 했다는 걸 보면 도교의 전진교의 도교 수행이 나와요. 뭐 이거는 쪼끔 나간 얘기지마는 아쉽게도 우리는 폭이 너무 좁아요. 그저 겨우 칠서보고 유교를 논하고, 노자, 장자를 보고 선교를 논하고. 내가 어른인데도 공부가 부족했다고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거예요. 그 분 같은 경우에는 유불도 3교에 달통했다 그러지마는 그 쪽 계통은 노자, 장자 밖에 본 게 없어요.
한국 불교 근래 최고의 인물은 성철 스님이에요. 성철 스님이 훨씬 학문적으로 그 분보다 뛰어나요. 근데 성철스님보다 뛰어난 분을 내가 요새 봤는데, 바로 우리 석두 선우가 가져왔던 <사벽의 대화>에 나오는 석우 스님이에요. 그 분은 뭐, 그 후에 세상에 나오지 않은 것 보면, 돌아가신 모양인데, 적어도 한국 불교 수백년이래 최고의 인물은 사벽의 대화의 주인공인 석우예요. 유,불, 선 3교에 통달했다고 하는 그 분은 미안하지만, 석우스님의 사벽의 대화 단편적으로 본, 논한 걸 보면, 거기에 미치지 못해요.
우리의 전통적인 수행법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분들이 있는데, 이거 바깥에 나가면 이거 일거에 깨집니다. 왜 그러냐면, 중국 도교에 그런 이야기가 다 있기 때문에. 적어도 우리가 도교 수행을 이야기할려면 운급칠첨은 봐야 돼요. 안 그러며는 그저 가만 있어야 돼요. 왜 그러냐면 그것이 중국 도교의 총론이자, 개론서이자, 가장 깊이 있게 다룬 책이예요. 황제의 칙령에 의해서 최고의 인물들이 그것을 짓고, 집성했기 때문에. 그게 아마 100권인가 돼요.
그래서 공무변처, 식무변처 이런 이야기들은, 사실 초선, 이선, 삼선, 사선도 부파불교에서는 무슨단계, 무슨 단계 이야기하지마는 알고보면 초선, 이선, 삼선, 사선이 겹치는 게 많걸랑. 그래서 여기서 나온 말이 그거죠. 니가 경험해 보면 알어. 나도 공무변처, 식무변처 설명한 걸 읽어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런 설명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설명도 안되는 이야기인데.
질문: 구차제정은 단계인가요? 그것이 단계라면, 7단계와 8단계는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이전인 고타마 싯타르타이던 때 스승으로 모셨던 이들의 수행단계입니다. 7단계 무소유처정은 알라라 깔라마가 하던 수행법, 8단계 비상비비상처정은 웃타카 라마푸타가 하던 수행법이라고 했는데, 붓다는 이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고행의 단계를 거쳐 보리수와에서 1선에서 4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이 사선이 어떻게 7, 8단계 앞에 올 수 있나요?
답: 반니원경에 보면 단계로 나와요. 그러니까 모순이 많다는 거예요. 다른 것이 모순이 많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게 모순이라는 이야기예요. 반니원경에 구차제정이 나오는데, 이건 이제 부파불교에서도 기술하고, 유심히 반니원경을 보며는 이것은 후대에 여기 저기서 모아서 편집했다고 하는 표시가 딱 나요. 이거 뭐 말이 필요없다고. 근데 이제 내가 의문을 갖는 거는 다른 분들이 몰라서 침묵하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침묵하는지, 나는 후자인 쪽이 가깝다고 보는 거예요.
물론 뭘 몰라서 너무나 믿음이 깊어 가지고, 옛날 어떤 스님 말씀대로 부처님이 아니고야 어떻게 이런 말을하냐? 화엄경을 가지고 그렇게 늘 주장을 하셨는데, 조정래보고 쓰라고 그러면 더 잘 쓰지. 솔직히 그래요. 화엄경, 법화경, 요새 소설가보고 쓰리고 그러면 더 잘 써. 그렇게 어리벙벙하게 쓰겠어? 우리가 후대에 편집을 거치면서 많이 섞여 들어갔어요. 그리고 제대로 편집회의나 편찬회의 거쳐서 만든 것도 아니고. 아니 그저 몇 사람 둘러 앉아 가지고, 우리 판소리 가르치듯이 가르치고, 외우고 그랬을 걸랑. 뭐 아함경 양이 많은 것 자랑하는 분이 있던데, 그 쪽 부분 얼마 안돼요. 아이구 뭐, 6근, 6식, 6경에 대한 것 몇 권 나오는데, 아, 뭐 6근, 6식, 6경 그거 몇 권 뽑으며는 한 세권 던져버리고, 18계 하나면 되는데 뭐.
내가 얘기하고자하는 것은 뭐냐면, 경을 대할 때는 믿음으로 대해야 되지만, 동시에 경을 보고 그거를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게 없으면, 매일 봐도 소용이 없어요. 그러면 우리가 왜 그걸 못보냐? 유심히 깊이있게 보질 않기 때문에. 그냥 눈만 았다갔다 하걸랑. 내가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의문과 질문과 실증이라고 봐요. 의문을 가지고, 그 의문에 질문하고, 그 의문에 실증하는 것, 즉 답을 구하는 거예요. 이거 벗어나지 않아요. 다른 분은? 질문: 부처님 당시 설법을 문자로 기록했다~ 라면, 이런 오해가 없었을 것을 왜 문자로 기록하지 않아서 혼란을 부추기는 것 같습니다.
답: 아, 문자는 있었습니다. 문자가 있었는데, 문자로 적지를 않았죠. 적지 않은 이유는 성스러운 말을 문자화한다고 하는 것은 불경이었어요. 왜 그러냐면 문자화되면 어떻게 돼요? 기록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오는가요? 소도 밟고 다니고, 돼지도 밟고 댕기고, 소도 뜯어먹고... 그래서 가장 신성하고, 안전한 곳, 인간의 마음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최고의 성전이라고 하는 힌두교의 베다도 기원 후 1세기경에 문자화 되었어요. 불경보다 더 늦어요. 불경 같은 경우는 불멸 후 약 400년 경, 기원전 1세기 경에 기록된 거로 보는데, 훨씬 빨라요.
빨랐던 이유는 스리랑카에서 전란이 일어났는데, 많은 스님들이 죽었어요. 죽었는데, 어떤 경전 같은 경우는 그걸 외우던 스님이 죽어서 더 이상 없어지는 거예요. 그데 어떤 경전 같은 경우는 그 스님이 죽기 직전에 구해 지기도 하죠. 그래서 문자화할 필요성을 그때 느끼기 시작해서, 문자화하기 시작했어요. 왜 그러냐면, 만약에 어떤 문제가 생기며는 그걸 외우는 사람이 죽으면 끝이잖아요.
질문: 성철 스님은 그럼 구차제정 중 어느 단계에 이르렀을까요? 어떤 단계에 이르렀다면 본인은 알 수 있나요?
답: 그거야 성철 스님한테 물어 봐야죠. 내가 성철 스님이 아닌데, 알 수 있나요? 부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우리가 정말 의미 있게, 새겨 들어야할 이야기인데, 붓다가 아니고는 누구의 경지가 어디인가를 얘기해 줄 수가 없다고 그랬어요.
미안마의 아신 코알라 사야도에게, 가장 미안마에서 존경받던 스님으로, 입멸하셨는데... 그 분께 한국 스님이 와서 물었죠. 제가 아무개 사찰에서 아무개 스님으로부터 수다원과를 얻었다고 하는 인증을 받았습니다. 근데 제가 그 경지에 오른 것이 맞습니까? 하고 물었죠. 그러니 아신 코알라 사야도가 뭐라고 답했겠어요? 네가 수다원과를 얻었다고 하는 인증을 받았다고? 그러면 니 스스로 알 수 있을 것인데, 왜 나한테 물을까? 우리나라 스님들처럼, 우리나라 불자님들처럼 도장받는데 목을 매는 거는 이 쪽 문화밖에 없어요. 율장에 의하며는 누가 어떤 경지인지에 대해서는 논할 수 없게 되어 있어요. 그 이야기는 뭐냐하면, 부처님이 아니고야, 정확히 말하며는 내가 그 경지의 눈높이가 아니고는 그 경지를 알 수가 없어요. 차~암, 미안마에서 보면, 내가 보기는 가장 안목이 높은 것이 우리 나라 분들인데, 앉아서 등급을 다 메겨. 누구는, 어떤 미안마 사야도는, 아신 코알라 사야도 아라한은 최소한 될 거라고 이야기하고, 그 밑에 인터뷰 사야도인 떼자냐는 아나한까지도 어렵고, 사다함 정도 되지 않겠어? 뭐 이런 식이라. 뭐 누구는 수다원, 누구는 사다함. 참, 내가 그걸 보면서, 야! 하 미안마 와가지구 인간 안내준다고 행패부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며... 햐~. 우리가 그렇죠. 남을 속일 수는 있지만 스스로는 어떻게 속이겠어?
그래서 중국 선사들이 그런 말을 하죠. 남에게 속으면 구제할 길이 있으나, 스스로에게 속으면 구제할 수가 없다. 실질적으로 그런 일이 많이 벌어지죠. 중국에 법안 문익(法眼文益)선사라고 하는 분 밑에 현칙(玄則)이라고 하는 스님이 있었는데, 몇 년이 되도록 참문(參門:스승에게 나아가 道를 묻는 것)을 안 해. 참문은 와서 법을 물어야 되는데, 안 물어? 하루는 법안 스님이 현칙이라고 하는 스님을 부르죠. 불러서 뭐래죠.
"왜 현칙 측감원은 참문을 하지 않느냐?" "저는 이미 청봉(靑峰) 스님 문하에서 깨달음을 얻었었습니다." "허, 그래 이야기 한 번 해 보게." 그래서 현칙스님이라는 분이 이야기를 하죠. 자기가 청봉스님이라고 하는 분에게 물었다는 거예요. "무엇이 제 자신입니까?" 하고 물었다는 거죠. 그랬더니 청봉스님이 뭐라고 대답했냐면 "병정동자 래구화(丙丁童子來求火)니라." 자기가 거기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거죠. 그러니까 법안 스님이 묻죠. "그게 무슨 뜻인가? 자네가 한번 이야기 해보게." 병정(丙丁)이라고 하는 것은 방위로 말하면 남쪽입니다. 그래서 불(火)이죠. 방위로 말하면 남쪽이고, 오행으로 따지면 불이예요. 그러니깐 병정동자니까 불이죠, 동자라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까. 병정이니까 불이란 말이예요. 래구화(來求火)는 불을 찾는다는 뜻이에요. 그러니 불이 불을 찾는다는 뜻이죠. 그러니까 법안선사가 그러죠. "그럼 그게 무슨 뜻이냐? " "제가 부처인데. 제가 부천데, 제가 부처를 찾는 거와 같다." 그러니까 법안 문익선사가 그렇게 이야기하죠. "역시, 네가 잘못 알았구나!" 그러니까 현칙이라는 스님이 화를 내면서 가죠, 자기를 무시했다고. 그러니까 법안선사가 이렇게 이야기하죠. "돌아오면 구제할 길이 있으나, 돌아오지 않으면 구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근데 현칙이라는 스님이 자기는 이미 일을 마친 사람인데, 법안 선사가 부인하니까 화가 나서 가다가 강가에 다다라서 문득 생각이 이렇게 나죠. 법안 선사는 500명의 제자를 지금 지도하고 있는데, 설마 일부러 나에게 모멸감을 줄려고 멸시했겠는가? 그래서 다시 돌아가죠. 돌아가서 정식으로 참문해요. 수행은 반드시 참문을 해야 돼요, 정식으로. 그러지 않으면 어떤 스님도 정식으로 답을 주지 않아요. 반드시 수행은 참문 해야 돼. 수행과 강의나 강론과의 차이는 바로 그거예요. 수행은 참문 해야 됩니다. 반드시. 반드시 절을 하고 물어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며는 깊이 있는 이야기를 안해요. 그러니깐 비로소 현칙이라고 하는 스님이 정식으로 법안 문익선사에 참문 하죠. 똑같은 걸 물어요. "무엇이 저 자신입니까?" 그 때 법안선사가 이렇게 대답하죠. "병정동자 래구화(丙丁童子來求火)니라." 현칙스님이 그 때 외치죠. "제가 비로소 진리의 문에 들었습니다." 법안선사가 인정하죠. 청봉선사에게 물었을 때와 그 답이나 법안선사에게 물었던 거나 답이나 똑 같애요. 똑같아. 그런데 왜 똑같은 대답을 했는데, 법안선사의 질문에 답할 때 현칙이란 스님이 진리의 문에 들었을까요? 이 미묘한 차이는 말로 설명이 안 돼요. 다만 중요한 거는 현칙이라고 하는 스님이 청봉스님 문하에서는 그것을 잘못 이해했던거라는 거예요. 근데 법안 스님 밑에서는 그거를 제대로 이해했던 거의 차이죠. 그래서 남에게 속으면 구할 길이 있으나, 스스로에게 속으면 구하지 못한다. 법안선사의 말리거랑요. 돌아오면 구할 길이 있으나, 강을 건너면 그를 아무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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