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 반야 바라/반야경

2015. 8. 15. 19:5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반야심경

728x90

반야심경 / 몽지 심성일

 

마하 摩訶


마하는 범어이니 번역하면 크다 또는 평등이라는 뜻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큰 것은 허공이며 허공보다 더 큰 것은 없으므로, 

금강경에 이르되 "부처님께서 이르시되,

남서북방과 사유와 상하의 허공을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니

수보리가 답하기를 '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시여!" 

라고 하엿으며, 그래서 관계스님은 말하시되 "시방이 둘러싼 벽이 없으며

시방이 또한 문이 없다"고 하시었다.


크나큰 도는 끝이 없으며 허공은 생각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므로

설봉스님은 이르시되 "우러러 보아도 하늘이 보이지 않고 머리를 숙여도

땅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이와 같이 넓고 크다 할지라도 한 물건이 있어

이 보다 더 큰 줄을 누라 알겠는가?

말해보아라 ! 이것이 어떤 물건인가?

이 0 을 알겠는가? 

저 허공이 비록 넓기는 해도 능히 그 몸을 감쌀 수 없고 해와 달이

밝기는 하지만 능히 그 빛을 견줄 수 없으므로 달마 스님이 이르시되

"넓기로는 온 법계에 두루하고 좁기로는 바늘끝도 용납하지 않는다"하시었다.

"이 암자가 비록 작기는 하지만 온 법계를 머금고 있다"고 하였으니,

펼치어 벌리면 커서 바깥이 없고 거두어들이면 작아서 안이 없어서

산을 못에 감추는 것이나 배를 골짜기에 감추는 것도 천하를 천하에 감추는 것이다. 


여기에서 삼라만상과 유정 무정이 모두 같은 한 몸인 것을 알게되면 비로소

"끝없는 청산에 한치의 나무도 없고 가없이 넓은 푸른 물에 물결이 사라졌다"

고 한 말을 믿게 되리라


광명이 밝게 비쳐 시방세계에 사무치는 것이 마치 천 개의 밝은 해가 큰 광명을

비추는 것과 같으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모든 대지가 사문의 한 쪽 눈이며,

모든 대지가 하나의 부처님 몸이다" 라고 하시었고, 경에는 말씀하시기를

"부모가 낳으신 눈으로 삼천대천세계를 모두 본다"고 하시었고,

"넓고 긴 혀를 내어 삼천대천세계를 두로 덮는다"고 하시었다.


어찌 보지 못했는가

운문스님이 이르시되 "이 한 가닥의 주장자가 용으로 변하여 온 세상을

집어삼켜 버렸으니 산하대지가 어디서 나오겠는가?"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만약 여기서 하나하나 밝혀내게 되면 조그마한 겨자씨가 수미산에 들어가며

거대한 수미산이 겨자씨 속에 들어가는 도리를 문득 깨닫게 되고, 몸뚱이를

감춘 곳에 자취가 없으며 자취가 없는 그 곳에 또한 몸을 감추지도 않으면서

(허공뼈를 보았는가 - 부처님의 진신이 온우주에 드러나 있다)

신통이 자재하고 출몰이 자유로워서 어떤 때는 큰 몸을 나투어 온 허공계에

가득하고 어떤 때는 작은 몸을 나투어 작은 것 가운데도 極微하게 되며

가는 것 가운데서도 極細하여 여러분 눈 앞에 이것을 던지니 북을 쳐서

찾아보아도 볼 수가 없다.

알겠는가?


바다 밑에 비친 해가 하늘에 뜬 해요 (千江有水 千江月)

눈에 비친 아이는 앞에 있는 사람이다.(둘이 아니다. 마하니라)



반야 般若


반야는 범어이니, 이를 번역하면 지혜라고 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의 본래 참 성품을 알지 못하여 하는 짓이 거칠고 약하여

무슨 일을 하더라도 지혜가 없으니 살아서는 세상의 법망에 걸려들고

죽어서는 괴로운 아비지옥에 떨어지게 된다.

만약에 어리석음을 돌이켜 지혜롭게 되면 무슨  일을 해야 할 때에

사리가 밝아지고 큰 복덕을 같추게 되며, 원인과 결과를 잘 알게 되니

사람들로부터 공경을 받으며 가난의 괴로움을 받지 않으리라.

(반야지혜는 선악 시비 등 차별이 없다.

다만 길바닥에 깔린 금을 연금해야 쓸 수 있으리라)   


누구든 예로부터 허물과 악업을 날마다 이리저리 분주하게 지어왔으면서도

어리석고 뒤집혀진 줄을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였던 것을 돌이켜 생각하여

홀연히 깨닫게 되면 생각생각의 순간마다 나고 죽음 뿐이니

마지막에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겠는가?

큰  고통인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과 얻으려해도

엊지 못하는 괴로움과 버리려고 하여도 버리지 못하는 괴로움뿐이며,

그저 막막히 어둡고 아득하여 앞길이 캄캄하니 혼백이 어지러이 흩어져

날리게 되면 그 어디에도 돌아갈 집이 없으리라.

(발심한 사람에게 도는 無價寶다, 자기 집 찾아가는 공부라)

   

풀포기를 붙들고 나무에 기대어 살면서 배고프고 목마름에 시달리지만

일가친척이 있다해도 어느 누구하나 돌아보지 않으니 아득하고

막막한 근심걱정뿐이며 혹은 지옥에 떨어져서 하루낮 하루밤에도 천 번

죽었다가 만 번 깨어나는 고초를 당하기도 하고, 혹은 짐승들의 무리 속에

뛰어들어 온같 괴로움을 받기도 하지만 누구하나 제도하여 주는 사람이 없으니

한량없는 세월동안 괴로움을 받게 되리라.


홀연히 이를 깨닫고 돌이켜 생각해 보면 끝없는 옛적부터 이와같은

갖가지 괴로움을 엇없이 받아왔을 뿐이다.

부처님의 법을 올바로 가르치는 선지식을 가까이 하여 모시면서 큰 지혜를 내어

자기의 본성을 바로 보아 나고 죽음이 없는 진리를 깨달으면 앞의 어리석음을

돌이키어 지혜와 복덕이 되고 모든 것이 공적으로 돌아가서 신통묘용이 된다.

살림살이 꾸리고 생업을 이어가는 것이나 세상에 쓰이는 온갖  말들도 모두

반야로 돌아가게 되니, 범무를 돌이키어 성인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이 자리에서 곧바로 부처를 이루며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인 줄 알게 되면

극락국토에 태어나게 되어 생각생각이 자비롭고 언제나 반야를 이야기하게 되며

모든 가난의 괴로움을 구제하되 대지를 변화시켜 황금으로 만들고

강물을 저어서 소락(酉禾酪)으로 만들게 되리라.


세상의 모든 법이 불법 아님이 없는 평등한 참 법계(불이 반야 평등 이 마음)에는

부처가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아니니, 비로소 중생을 제도할 것 없으며

삼계를 가히 벗어날 것 없으며 열반을 가히 증득할 것도 없이(번뇌즉 보리) 

본래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임을 믿게 되리라(神의 성취).

불자가 이러한 경계에 머물게 되면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受用하시는 것이며

이리저리 오나가나 앉거나 눕거나 언제나 그가운데 있게 되는 것이니,

사람들이 스스로 이를 긍정하게 되어야 의심하지 않으리라

(깨달음은 자기 자신이 알게 되리라)


이 믿기 어려운 법을 말하는 것이 참으로 희유한 일이니,

이것은 깨달은 사람이라야 바야흐로 알게 되리라. 다시 마지막 지극한 한마디

말을 참구하여야만 비로소 안온한 경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어떤 것이 마지막 지극한 한마디 말인가?


하필이면 잎이 다 진 그때가 되어야만

모든 것이 덧없어 허무한 줄 알겠는가 

(수본진심하고 수처작주하라)



바라 波羅


바라는 범어이니 저언덕에 이른다는 뜻이다.

미혹하면 이 언덕이요 깨달으면 바로 저 언덕이다.

경에 이르시되 "물을 건널 때는 뗏목이 필요하지만 언덕에 오르고 나면

배가 소용없게 된다"고 하였다.

(뒷자취를 두지마라. 금가루가 귀하지만 눈에 들어가면 티끌이 된다.

혼침 산란하지 말고 묵묵하고 꾸준히 공부하라)


자기의 본래 성품을 미혹하면 생각과 말과 행동의 삼업이 어둡고

육근의 안이 눈 멀어서 사대인 육근을 망령되이 자기 자신이라 여기게 되니,

이것은 중생들이 착각에 빠져 도적을 자기 아들인 줄로 잘 못 여기는 것과 같다.

자기의 본성을 미혹하여 생사의 윤회에 돌고 돌게 되면 이것이 바로

이 언덕이니 이 몸의 껍데기를 벗고 다른 몸의 껍데기를 둘러쓰면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줄을 깨닫지도 못하여 머리 모양을 고치고

얼굴 생김새를 바꾸면서 기나긴 무량 세월을 고통을 받으며 잠시도 쉴수 없게 된다.


만일 어떤 이가 참다운 근원으로 되돌아가서 세상의 이치와 자기의 본성을

모두 깊이 궁구하여 자기의 본래면목을 바로 보게 되면

나고 죽음이 없는 도리를 깨달아 문득 저 언덕에 오르게 되리라.

한 번 얻으면 영원히 얻게 되고 한 번 깨달으면 영원히 깨닫게 되어

다시는 태어나지 않게 되며, 윤회를 영원히 쉬게 되어 죽음을 영원히 끊게 되면,

하나의 물외한인이 되어 마음대로 인연따라 소요하면서

고요한 즐거움을 누리게 되니, 이것을 이름하여 극락이라 말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극락인가?

 

내 집안의 바로 그가 아니고서는

어느 누가 그 속에서 행동하리오 

 
         
        나는 꼴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