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쥐를 집듯 3 / 혜암 종정스님

2012. 10. 26. 12:1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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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쥐를 잡듯 닭이 알을 품듯]
손을 털고 고향에 돌아가니
아는 사람이 없구나.
그러나 한 바퀴 둥글고 밝은 달은
창앞에 걸려 있더라는 말 가운데에,
걸려 있는 달은 무엇입니까.
마음이 있으니 저 밝은 달이 보이지
마음이 없으면 밝은 달이 보입니까.
허공이 크다고 합시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없으면
허공이 어찌 큰 것을 알겠습니까.
한산 정언 선사가 자신을 찾아와
예를 갖추고 절을 하는
동산스님에게 묻습니다.
"너는 信(믿음)이 섰느냐?"
"제가 불법이나 스님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여기를 찾아왔겠습니까."
"네가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계를 지켜야 영험이 있을 것이다.
만일 계행이 없으면 허공에
누각을 세우는 것과 같을 것이니,
계행을 지키느냐?"
"지금 오계를 지키고 있습니다."
"내가 물은 것은 그런
소소한 오계를 말함이 아니다.
화두를 들때
분별사량을 하지 말 것이며,
내가 누구인가 하는
대목만을 알려고 해야 한다."
설사 부모를 죽였다 하더라도
내가 나를 모르는
죄보다 더 크진 않습니다.
내가 내 마음만 똑바로 안다면
부모를 죽이고
날마다 오입질 하고
다녀도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 "스님 법문을 임의로 수정할 수 없어
원문을 게재하지만, 부모를 죽이고
날마다 오입질 하는 것은 죄가 되지요.
다만, 그 정도로 자신의 마음 자리를
정확히 꿰뚫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함을
강조하신 것으로 법문을 순화醇化하여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無量光明 註] 
사람이 그림자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재미가 있거나 없거나
쥐가 한 구멍만을 뚫어야 수지가 맞듯
오로지 한 구멍만을 뚫어야 합니다.
화두도 '이 뮛고'
한 가운데만 뚫어 나가야지,
재미가 없다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 보면
공부가 안 됩니다.
재미가 없고 알래야
알 수 없는 구멍으로 들어가야
깨칠 수 있습니다.
알아지면 벌써 귀신이 덤벼듭니다.
갈수록 깜깜해야 해요.
화두를 크게 깨쳐 도인이 되려면
분명히 모르는 데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비법입니다.
스승 없이는 이 공부를 할 수 없습니다.
경이나 어록만 보려고 하지 말고,
간단히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만들어 앉으나 서나,
일이 있으나 없으나
물 흘러가듯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분명하게 '이 뮛고' 하되,
고양이가 쥐 잡듯
닭이 알을 품듯
끊일 사이없이 해야 합니다.
아직 깨치지 못했으면
늙은 쥐가 판대기를 쪼듯 옮기지 말라.
재미가 있거나 없거나
꼭 그 대목만 알려고 해라.
공부를 짓는 식이 이렇습니다.
만일 도를 깨달아 열반락을 줄기려면
세상의 인연을 다 버리라고 하는데,
이것은 자식이나 돈을
버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집착만 하지 않으면 됩니다.
돈을 써도 쓰지 않는 것과 같이 하고,
먹어도 먹지 않는 것과 같이 하면
마음이 귀중한 것이므로
세상의 반연을 끊는 것과 같습니다.
공부 분상에서는 여자와 같이 살아도 
애착이 없으면 여자를 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고집이나 삿된 마음을 버리고
진실되게 생사,
곧 나고 죽는 큰 공부를 하면
우린 죽지 않습니다.
옷 입고, 밥 먹고,
돈벌이를 하지 않아도
우리는 살아요.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몸을 버려도 우린 죽지 않아요.
더 좋은 몸을 받으로 가지!
이런 이치를 아는 사람은
하나도 걱정할 것 없어요.
부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가족을 위하는 것은 참선이다]
제사를 지내지 않고 참선하는 것이
오히려 효도가 될 수 있습니다.
죄 짓고 죽은 부모들이
지금 독사 밥이 될 처지에 있는데
참선해서 그들을 구해야 할 것 아닙니까.
큰 절에서 내가 스님들에게 소리칩니다.
자신을 위해서 중노릇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죽은 선망부모의 혼들이
지금 내 고손자, 증손자들이 빨리 깨쳐
살려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부모는 어떻게 하려고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자신이 참선을 하면
지옥에 떨어져 있는
우리 조상들이 구제 받을 수 있습니다.
집안 일을 돕는 것만이
부모를 돕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의 방거사와 단하 천연 선사가
함께 과거를 보러 가다가
마조스님을 만나,
마조스님에게 그런 과거를 보지 말고
네 마음 깨지는 과거에
급제하라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래서 단하 선사는
출가해 도인이 되었고,
방거사는 처자 권속이 있어
세상에 나가 공부해
가족 모두 도인이 되었어요.
마음 먹기 따라 천하를 움직일 수 있고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어요.
사람노릇을 잘 하는 것이
꼭 예의를 지키는 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공부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남편이 죽을 병으로 누워 있어도
공부를 잘하는 것이
남편을 돕는 일인 것입니다.
남편을 생각하다가
자신도 호랑이 밥이 되어 버립니다.
누구 때문에 공부를 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없답니다.
예를 들어 아들 생각하다가
공부하지 못했다고 하면
그것은 아들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아들을 지옥에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우린 이 공부 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먹는 것이나 잠자는 것은
형편 따라 살며,
남에게 천대받아도 남 모르게 공부하면
그 사람이 가장 똑똑한 사람입니다.
또 그 사람이 세상에 제일 필요한 사람입니다.
방거사도 제일 가는 부자였으나
재산을 모두 내놓고 길거리나
오두막집 또는 나무 밑에서 잤어요.
그래야 수지 맞습니다.
잘 사는 것을 부러워할 것 없습니다.
인연따라 이 세상의 일을 받아쓰되,
다음 날이 밝으면
잠을 자지 않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③편으로 이어집니다. 나무관세음보살

 

 

          [혜암종정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