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參禪)의 요체(要諦)

2013. 1. 11. 10:3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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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參禪)의 요체(要諦)[1] /청화스님

 

 

 

 

우리가 바른 생각을 하고 거기에 따르는 바른 행동(行動)을 함으로 해서 바른 깨달음과 위없는 행복(幸福)을 얻습니다. 따라서 바른 생각이 없으면 부처님 가르침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른바 무명심(無明心)이라든가 무지(無知)라든가 그런 것을 가지고서는 부처님 가르침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의 가지가지의 고난(苦難)같은 것은 모두가 연원(淵源)이 무명(無明)으로부터 옵니다.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을 다 배워서 아시는 바와 같이 무명(無明)이 있으므로 해서 거기에 행동이 따르는 것이고, 또는 우리가 식(識)을 받는 것이고,또 무명(無明)이 없으므로 해서 거기에 따라서 우리 모든 업장(業障)이 소멸(消滅)되고 드디어는 깨달음과 행복(幸福)이 수반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무명(無明)이고 어떠한 것이 바른 지혜(智慧)인가?

부처님 가르침은 바른 지혜(智慧)의 가르침, 이른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의 가르침입니다. 무명(無明)이라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도 바로 못 보고

우주(宇宙)의 본바탕도 본래 있는 그대로 못 보는 그러한 흐리멍덩한 어리석은 마음 이것이 무명심(無明心) 아니겠습니까.

기신론(起信論)에 무명심(無明心)의 풀이가 아주 간략히 나와 있습니다.

부달일법계고(不達一法界故)로, 모두가 다 본래(本來)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청정미묘(淸淨微妙)한 법계실상(法界實相)인데 그러한 청정미묘한 법계실상을 우리가 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홀연염기(忽然念起) 명위무명(名爲無明)이라, 문득 일어나는 한 생각, 이것을 보고 무명이라 한다하는 법문(法門)입니다.

우리는 지금 한사코 무명을 여읜 반야지혜(般若智慧)에 입각하는 공부를 해야만 이 참선(參禪)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냥 방편(方便) 공부는, 세간적인 공부는 반야지혜가 없어도 할 수가 있겠습니다만 이른바 부처님의 진지(眞智), 참다운 지혜를 가지고 하는 공부가 되어야만이 참다운 수행(修行)인 동시에 이른바 참선(參禪)을 한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습니다.  

 

일법계(一法界)라!

이것은 물질(物質)과 정신(精神)이 따로 있다든가 나와 남이 따로 있다든가 그런 것은 일법계라고 못하는 것입니다. 우주(宇宙)는 우리가 알고 모르고 상관이 없이 청정미묘(淸淨微妙)한 일법계입니다. 하나의 법(法)의 세계입니다. 화엄경(華嚴經)식으로 말하면 화장세계(華藏世界)입니다. 정토경(淨土經)식으로 말하면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입니다.

극락세계, 화장세계, 즉 일법계(一法界)는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고 과거, 미래, 현재, 그런 시간적인 제한도 없고 항시 그대로 있는 것인데 우리 중생(衆生)이 어리석어서 법계(法界)의 뜻을 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래저래 생각이 나온단 말입니다.

'나'라는 생각 '너'라는 생각 또는 물질이라는 생각, 마음이라는 생각이 나옵니다.

우리 참선(參禪) 수행자(修行者)는 그런 무명심(無明心)을 단연코 돈단(頓斷)이라, 문득 떠나야 합니다.

우리 사고(思考)와 우리 건강(健康)이 절대로 이원적(二元的)이 아닙니다. 별개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 생각 잘못하면 이른바 무명심 때문에 성도 내고 탐욕심(貪慾心)도 냅니다. 무명심으로 해서 우리가 '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나'라고 생각이 들면 나한테 좋게 하면 탐심을 내고 싫게 하면 응당 진심을 내겠지요.

따라서 무명심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自己)라는 것에 대해서 자기 권속(眷屬)이나 자기 소유(所有)나 자기 권력(勸力)에 대해서 집착(執着)할 아무런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 생각이 나올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대승적(大乘的)인 공부라 하는 것은 이와 같이 무명심(無明心)을 떠난 자리 참다운 법계(法界)자리, 실상(實相) 자리에 입각을 해버려야 이른바 대승적인 공부입니다.

바꿔서 말하면 반야지혜, 반야바라밀의 지혜에 입각해야 그래야 가정(假定)이 아닌 유루법(有漏法)이 아닌 때 묻은 공부가 아닌 참다운 무루(無漏) 지혜(智慧)입니다.

남한테 우리가 돈 만원 한 장을 베푼다 하더라도 ‘나'라는 관념(觀念)이 있고 '너'라는 관념이 있고, 돈이 많다 적다하는 그런 관념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이것은 참다운 보시(布施)가 못됩니다. 이른바 상(相)이 있는 유주상(有住相) 보시입니다.

무주상(無住相) 보시가 될 때는 상이 없는 참다운 보시가 된다고 생각할 때는 나라는 상, 너라는 상, 또는 물질이 많다, 적다하는 상을 떠나야 합니다.

 

이 참선 공부는 그러한 무명심을 제거하고 참다운 반야지혜(般若智慧)에 입각해야, 그래야 비로소 참선이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한계를 분명히 느껴야 합니다.

가치관(價値觀)의 혼란 때문에 우리는 지금 저와 같은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불교(佛敎) 내에도 마찬가지고 다종교(多宗敎) 사회(社會)인지라 다른 종교와 교섭적인 관계도 마찬가지고 또는 정치, 경제 모두가 다 혼란 가운데 있습니다. 어떠한 것이 바른 정치고, 어떠한 것이 바른 경제고, 또는 종교는 어떠한 것이 바른 종교인가? 이런 가운데서 다 아시는 바와 같이 한 가족(家族) 내에도 개신교(改新敎) 믿고, 천주교(天主敎) 믿고, 불교(佛敎) 믿고 또는 천도교(天道敎) 믿고 하는 집안도 있습니다.

문교부장관도 지냈고 철학박사(哲學博士)였던 어느 분은 자기 가족이 대식구(大食口)인데 자기는 단군교(檀君敎) 믿고, 아내는 불교(佛敎)를 믿고 그리고 자기 딸이 둘인데 한 딸은 가톨릭을 믿고, 다른 한 딸은 개신교(改新敎)를 믿는다고 자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다 초월(超越)하는 입장에서 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념체계(理念體系)가 다른지라, 신념체계가 다른지라 화합(和合) 되기는 참 곤란스럽습니다.

제사(祭祀) 모시는 것은 도리어 마귀한테 베푸는 것이라고 믿는 그런 사람들하고 화합이 되겠습니까.

 

지금은 이와 같이 굉장히 어려운 때입니다. 어째서 어렵게 이리 갈라지고, 저리 갈라지고 할 것인가? 이것은 우주(宇宙)의 본체(本體)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공자(孔子)나 노자(老子)나 예수나 그런 분들 역시 본체(本體)를 다 알으셨겠지요. 성인(聖人)이라고 그래서 몇 천 년 동안 그분들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으므로 알았다고 우리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운 법문(法門)을 할 만한 개재(介在)가 못되어서 방편설(方便設)만 하시다가 가셨지만, 그래도 논어(論語)나 요한 마태 복음서의 허두에 보면 다소 방편설을 떠난 진실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아무튼 지금 현행적인 종교 형태로 보아서는 불교 아닌 것은 인간(人間)의 본 성품(性品)이 무엇인가, 참다운 자기(自己)가 무엇인가, 우주(宇宙)의 본 바탕이 무엇인가? 이런 것을 밝힐 만한 가르침이 없습니다.

 

'나'가 무엇인가를 모르고서, 인간 자체가 무엇인가를 모르고서 우리가 올바른 인간 교육을 할 수가 있습니까.

 

참다운 인간의 행복을 말할 수가 있습니까.

경제나 정치나 모두가 인간의 행복(幸福)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인데 인간이 무엇인가를 모르고서 바른 정치, 바른 경제학(經濟學)을 성립시킬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법학(法學)을 하거나 경제학을 하거나 교육학(敎育學)을 공부하거나 어떠한 분야나 꼭 기본적(基本的)인 문제 '인간(人間)이 무엇인가?', '우주(宇宙)의 본질(本質)이 무엇인가?' 이런 문제를 알아야 합니다.

정치학도 없고, 경제학도 없고, 그런 아직 미개한 저 원시 공산 시대라든가 중세기의 미개한 때는 모르거니와, 어차피 다양하게 모든 학문이나 모든 주의, 주장이나 종교가 이렇게 혼재해 있어 놓아서 이런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는 꼭 바른 도리(道理) 모두를 다 종합(綜合)하는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바르게 살 수가 없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참선(參禪)한다고 애쓰고 또는 소중한 시간을 할애하고 이렇게 삼동(三冬)동안 모였습니다만 “참선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런 길을 잘 모르고서는 소중한 우리 힘을, 우리 생명(生命)같은 우리 시간을 낭비만 합니다.

 

아! 저 같은 경우도 승려가 되어서 한 10년 동안은 걸망지고 갔다 왔다 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확철대오(廓徹大悟)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저래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고, 이말 듣고 저 말도 듣고, 꼭 자기한테 맞는 수행법(修行法)을 확립을 못했습니다. 따라서 맨 처음 선방(禪房)에 오신 분들도 대체로 제가 방황하던 그런 때나 비슷하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을 해서 저는 기우 때문에, 노파심 때문에 몇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지금 좌선(坐禪)하는 형태는 이른바 대승권에서, 대승권이라 하는 것은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중국(中國)이나 일본(日本)이나 한국(韓國)이나 그런데서 이루어진 불법(佛法)의 형태가 대승권이라고 합니다. 대승권에서는 참선하는 방법을 대체로 3가지로 구분해 있습니다.

달마(達磨)스님이나 육조(六曹) 혜능(慧能)스님, 이른바 정통(正統)조사(祖師), 흔히 말하기를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 그리고 마하가섭부터 헤아려서 육조 혜능스님까지 33대 삽삼조사(救三祖師) 이렇게 말합니다. 이 분들은 이른바 정통조사라고 말씀을 해서 그런 분들이 말씀한 것은 조금도 오류가 없다고 지금 우리가 다 느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달마스님 때부터서 - 달마스님은 중국에 와서는 초조(初祖)이지요.

저 인도(印度)까지 합하면 28대 조사이고 - 육조 혜능스님 때까지는 별로 분파(分派)가 없습니다. 분파가 없이 그냥 관심일법(觀心一法)이라. 마음을 관조(觀照)하는 그런 식으로만 쭉 이어져 나왔습니다.

달마(達磨) 혈맥(血脈)론을 보거나 또는 석실소문(釋室疏門)이라든가, 달마가 스스로 말씀했다는 그런 어록(語錄)을 보거나 승찬(僧璨)스님의 신심명(信心銘)을 보거나, 도신(道信)스님이나 홍인(弘忍)스님의 어록을 보거나 여러분들도 다 대체로 보신 바와 같이 육조단경(六組檀經)을 보거나 별로 분파(分派)가 없습니다.

중국(中國) 당(唐)나라 이후 북송(北宋) 때에는 자꾸만 여러 가지로 사람 근기(根氣)에 따라서 교파(敎派)가 갈라졌습니다. 그러나 맨 처음에는 마음을 관조(觀照)하는 하나의 법(法)만 있었습니다. 왜 마음을 관조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른 지혜(智慧)로 마음을 관조(觀照)하면 우리 인간(人間)이 보는 현상계(現象界)라는 이것은 다 허망무상(虛妄無常)합니다. 허망무상하기 때문에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반야심경(般若心經)이나 금강경(金剛經) 도리(道理) 그대로 사실 모두가 허망무상 합니다.

금강경 도리는 압축하면 나도 없고, 너도 없고, 또는 중생(衆生)이라고 할 것도 없고, 수명(壽命)이 길다 짧다 하는 시간적(時間的)인 관념(觀念)도 원래 없는 것이고, 이런 도리가 금강경 도리 아닙니까. 따라서 금강경 도리는 현실(現實)을 바로 본 도리입니다. 어느 사람들은 잘 몰라서 현실 그러면 이대로 내가 있고 저대로 그대가 있다. 물질(物質)은 물질대로 있고 이대로 된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부처님 법(法)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른 눈으로 볼 때는 나도 공(空)이고 너도 공(空)이고 또는 중생(衆生)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이어서 중생도 공이고 시간(時間)도 결국은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 그런 것도 없습니다.

 

인간적인 차원(次元)에서 본다면 분명히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어제가 있고 내일이 있으므로 있다고 보겠지요. 이런 것 마저 없다면 우리가 허무(虛無)한 감이 듭니다. 여태까지 배운 것은 그렇게 안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반야사상(般若思想), 반야공(般若空), 이것이 불교와 다른 가르침과의 특색이 있는 구분입니다. 반야의 지혜가 있으면 불교(佛敎)이고 반야의 지혜가 없으면 이것은 외도(外道)입니다. 물질(物質)이라고 할 것이 없으므로 결국은 마음밖에는 없습니다.

마음이 개별적인 내 마음, 네 마음. 그것이 물질이 아닌데 그렇게 있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마음이 물질이라고 생각하면 여기가 있고, 저기가 있고, 내 마음, 네 마음이 있겠습니다만 물질이 아닌지라, 물질이라는 것은 시간성(時間性), 공간성(空間性)이 있어야 물질인 것인데, 그런 것이 없으므로 우리 마음이 어디가 있고 저기가 있고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마음이라는 것은 끝도 갓도 없이 우주(宇宙)에 둘러있다 이렇게 밖에는 볼 수가 없습니다.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이 바로 부처라. 내 마음, 네 마음 따로 있다는 그런 좁은 마음은 부처라고 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참다운 깨달음은 마음이 부처이기 때문에 한계가 없고 어디에나 언제나 있는 그러한 생명(生命)의 본체(本體), 이것이 바로 마음의 본체인 동시에 그것이 바로 깨달음의 부처입니다.

따라서 달마 때부터서 육조 혜능까지는 그와 같이 마음을 관조하는 법으로 말씀했습니다.

육조 혜능스님도 '내 법(法)은 항시 본체(本體)를 여의지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

현상계(現象界)가 연기법(緣起法)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천차만별(千差萬別)로 구분된다 하더라도 내내야 그 본래적인 마음자리, 부처님 자리에서 나왔습니다.

따라서 마음자리, 부처님 자리, 그 자리를 안 떠나야 그래야 우리가 이제 법을 이탈하지 않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의 요체(要諦) [2]

 


제가 말씀 드릴 것이 한 시간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너무 장황한 철학적인 깊이까지 얘기 드릴 수는 없습니다.

아무튼 그와 같이 마음을 관찰(觀察)하는 법으로 되어 있고, 그 다음 이루어진 것이 오종칠파(五宗七派)라. 임제종(臨濟宗), 조동종(曺洞宗), 법안종(法眼宗), 운문종(雲門宗), 위앙종(浍仰宗), 그런 종파로 분리가 되었습니다. 그런 종파도 사실은 뚜렷이 그렇게까지 절연히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마는 그래도 역시 조사(祖師) 스님들의 경향 따라서, 개성(個性) 따라서 또는 부처님 법을 이해하는 정도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가지고 그 뒤에 송(宋)나라 때 참선(參禪)의 형태가 3가지로 구분되었습니다.

한 가지는 무엇인가 하면 어느 문제(問題)를 문제시 해가지고서 문제의식을 가지고서 그것을 우리가 의심(疑心)을 가짐으로써 우리 공부를 해나갑니다.

이른바 이것이 화두(話頭)법 아닙니까.

 

화두(話頭)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어느 스님 네가 깨달은 도인(道人)들한테 무어라고 법(法)을 문법(問法)할 때에 깨달은 도인들이 그때그때 간명한 해답(解答)을 내립니다.

해답을 내리나 그 분들이 아 그대가 이 문제 가지고 의심만 해라, 그런 말은 또 안했습니다. 안한 것인데 그 후인들이.... 도인(道人)들이 그때그때 하신 말씀은 때 묻지 않은 말씀입니다. 상(相)이 없는 말입니다.

운문대사가 '여하시불(如何是佛)잇고?', '부처란 무엇인가?' 그 말 따라서 '똥 마른 막대기다!'  이런 말도 우리가 생각할 때는 똥이 더럽고 막대기는 하찮은 막대기이고 그렇게 개념(槪念)으로 생각할 때는 이것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운문대사의 말은 그런 개념적인 뜻이 아니라 상(相)을 떠나버린 말이기 때문에 도인들의 말은 어떻게 말하나 ‘똥 마른 막대기'라고 말하나 '다람쥐'라고 말하나 하나의 '흙덩이'라고 말하나 도인들의 말은 그것은 때 묻지 않은 말이기 때문에 상(相)에 걸리지 않은 말입니다.

 

따라서 천 칠백공안(千七百公案)인 화두(話頭)도 모두가 다 그런 식으로 때 묻지 않은 말을 가리켜서, 어려운 말로 하면 격외도리(格外道理)라! 격(格) 밖의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은 항시 격내(格內)에서 규격(規格) 따라서 말합니다만 성자(聖者)의 말은 전부(全部)를 보는 것입니다.

백척간두(百尺竿頭) 진일보(進一步)하니 시방세계(十方世界) 시전신(是全身)이라!

백척간두에서 다시 발을 내 디뎌서 우리가 깨달아 버렸다고 생각할 때는 시방세계 시전신이라. 시방삼세(十方三世) 전체(全體)가 바로 하나의 몸입니다.

하나의 법신불(法身佛)입니다. 따라서 깨달은 분들은 그와 같이 전체(全體)를 보기 때문에 전체 가운데서 어느 부분을 잡아서 말하나, 모두가 전체 가운데서 전체하고 상통(相通)해서 말하기 때문에 바로 그 전체입니다. 하나가 즉 전체요, 전체가 즉 하나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하나를 말하면 그것에 집착(執着)해서 말하기 때문에 이제 그것이 항시 때 묻은 것이고, 유한(有限)상대(相對)의 말밖에는 안되지만 도인들은 상대가 없는 그런 자리에서 말하기 때문에 모두가 다 격 밖의 소리입니다.

따라서 화두(話頭)라는 것은 '이뭣고?' 화두나 무슨 화두나 모두가 다 격 밖에 도리를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화두를 우리가 의심을 하다보면 그때는 거기에 마음이 모아지고, 또는 우리 자성(自性)이 원래(元來) 부처가 아니라고 그러면 부처가 되겠습니까 마는

우리 마음의 바탕이 본래(本來) 부처이기 때문에, 또는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본래로 법신(法身) 부처이므로 마음만 보아지면, 우리가 무명심(無明心) 때문에 이렇게 마음이 흩어지고 저렇게 흩어지고 산란스럽기 때문에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못 보는 것이지 우리 마음이 딱 모아지고 응집(凝集)되고 그렇게 해나가면 마음이 맑아 옵니다.

마음이 산란스러우면 마음이 흐린 것입니다. 흐린 탁수(濁水)와 똑 같습니다. 흐린 탁수는 잡스러운 것이 섞여 있으므로 흐립니다. 그러나 가만히 놓아두면 그때는 잡스러운 앙금은 가라앉고 물이 차근차근 맑아 옵니다. 맑아지면 그때는 바닥이 보이겠지요. 그와 똑 같이 우리 마음도 번뇌(煩惱)라 하는 잡스러운 것이 섞여 있습니다.


진리(眞理)에서 본다면 '나'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인데, 무명심(無明心)이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부처라는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법계(法界)의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 때는 나라고 생각하고, 너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때는 마음이 산란(散亂)스러워 옵니다. 산란스러워 오면 우리가 진리를 비추어 못 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화두가 되던 무엇이 되던 딱 모아지면 모아져 가만히 있으면 그때는 아! 탁수가 흐린 앙금이 가라앉고 바닥이 보이듯이 우리 마음도 차근차근 맑아집니다.

맑아지면 그때는 드디어 본래면목 자리고 부처이기 때문에 훤히 밝은 부처가 나온단 말입니다.  간단 명료(明瞭)한 도리(道理)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화두(話頭)의 의단(疑團)을 품음으로 해서 우리 마음이 모아져 차근차근 본래면목 자리로 갑니다.

그런 식도 있고, 또 한 가지는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우리가 비록 진여불성 자리는 아직 증명(證明)은 못했다 하더라도 석가모니(釋迦牟尼)께서나 삽삼조사(救三祖師)가 모두 하신 말씀이 본래가 다 법신불(法身佛)이다.

본래가 부처라! 이렇게 말을 했거니 가장 정직하고 조금도 거짓이 없는 말씀을 하신 불조(佛祖)가 말씀 하셨으니 우리가 믿어야 되지 않겠는가. 본래 부처라고 했으면 우리가 믿어야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확실히 믿어 버리면 새삼스럽게 우리가 무슨 의심 할 필요가 있겠는가.

부처인가 중생인가 무엇인가 우리가 헤아리는 것은 망상(妄想)인 것이고, 아! 불조가 다 말씀했으면 그 말이 사실이기 때문에 꼭 믿어야지 않겠는가. 이렇게 믿고서 잠자코 비추어 본단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이것이 바로 잠잘 묵(默)자, 비칠 조(照)자 묵조선(默照禪)입니다.

따라서 묵조선 계통은 지관타좌(只管打坐)라, 오직 앉으란 말입니다. 오직 단정히 앉아라!

오직 단정히 앉고서 마음을 가만히 비추어 보면 신심탈락(身心脫落)이라!

몸 신(身)자, 마음 심(心)자. 자기 몸과 마음이 그때는 딱 빠져나간단 말입니다.

이른바 몸과 마음이란 생각이 다 끊어져 버립니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하고서 한 철 공부할 셈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무슨 큰 도움이 될 것인가? 무슨 공덕(功德)이 될 것인가? 맨 처음에는 굉장히 아프기도 하고 괴롭습니다.

참선을 많이 하신 운수납자(雲水衲子)는 다 경함하신 것 아닙니까.

 

맨 처음에 앉아 놓으면 이 몸뚱이 때문에, 몸뚱이 조복(調伏) 받느라고 큰 탈입니다.

조금 덜 먹으면 배가 고프고, 조금 더 먹어 놓으면 소화도 안 되고 배속에서 콜콜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좋은 환경 밑에서 적당히 먹고, 우리가 오랫동안 앉는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근차근 맑아 옵니다. 우리는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가장 중요한 것이 본래 부처라는 소식을 우리가 딱 믿어야 됩니다.

그러기에 보조국사(普照國師) 어록(語錄)에도, 종밀선사(宗密禪師) 도서(都序)에도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본래 부처라. 또 육조단경(六組檀經)도 본래 부처라 했습니다.

우리는 이 소식을 믿어야 합니다.

본래 부처라는 소식을 믿고 우리가 나아가야 공부가 빠른 것이지 길을 간다 하더라도 우리가 목적지(目的地)를 분명히 알아야지 어디로 갈 것인가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좀 괴로우면 괴로움 때문에 중단하고, 그러나 목적지가 성불(成佛)이라 하는 분명하고 동시에 나한테도 부처가 본래 갖추어져 있다. 이렇게 믿는다고 생각하면 설사 괴로움이 좀 있다 하더라도 그런 것이 별 문제시가 안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선(參禪)공부는 사실은 우리가 보는 것은 다 헛것인 것이고, 만법(萬法)유식(唯識)이라! 일체(一切)가 유심(唯心)이란 말입니다. 일체가 모두가 다 마음 뿐 입니다.

육조단경(六組檀經)에서 육조 혜능(慧能)스님도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하니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요. 물질(物質)이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이 소식을 분명히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물질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분석과학(分析科學)이 발달 못될 때는 상당히 공부한 분들도 도인(道人)이 미처 못되어 가지고서, 도인이 되어버리면 물질이라는 것도 법성(法性)을 다 지녔으므로 그대로 다 100% 믿어버리겠습니다만 도인이 미처 못된 사람들은 물질은 물질로 보이고, 나는 나로 보이고, 너는 너로 보입니다.

본래 무일물이라 이런 것도 도인들이 우리한테 물질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셨겠지, 이렇게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분석과학, 이른바 양자역학(量子力學)같은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이 나온 뒤로는 물리학도 본래 무일물을 알고 있습니다.

 

분석하면 결국은 다 비어 버립니다.

원소(元素)로 분석하고, 원자(原子)로 분석하고, 또 원자를 소립자(素粒子)로 분석하고 그런데 소립자 그것도 물리학적인 고찰로 해서 물질이 아니라 에너지(Energy)의 파동(波動)입니다. 따라서 현대 물리학은 모두가 다 공(空)으로 돌아간다는 제법공(諸法空) 도리를 증명(證明)한 것입니다. 고전 물리학은 미처 증명 못하고서 물질은 물질, 마음은 마음 이렇게 이원론(二元論)으로 보았으나 현대 물리학은 일체 물질이라는 것은 다 비어 있다는 소식을 증명했습니다. 얼마나 이것이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따라서 현대 물리학은 차근차근 우리 불교로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현대 물리학은 차근차근 우리 불교를 증명해 오고 있습니다. 현대 학문(學問)은 실존철학(實存哲學)이고 무엇이고 모두가 다 부처님 법에 가까워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 실존철학도 제 아무리 연구해 봐도 아직은 우리 마음이 무엇인가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철학도 모르고 물리학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른다 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 반야사상(般若思想)을 믿고 알 때는 그 가운데에 가장 오묘(奧妙)한 철학(哲學), 가장 궁극적인 과학(科學)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그야말로 이때라야 비로소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라!

어쩌다가 나 같은 존재(存在)가 몇 천만겁을 헤매다가 부처님 법(法)을 만났는가 하는,

우리가 스스로 행복(幸福)을 되새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참선(參禪)의 요체(要諦) [3]

 


아무튼 선(禪) 가운데서 어느 문제(問題)를 의심(疑心)하는 화두선(話頭禪)이 있고

또는 한 가지는 그와 같이 부처님 도리(道理)를 그대로 잠자코 관조(觀照)하는 묵조선(默照禪)이 있고, 그러나 우리 중생(衆生)이 단박에 성불(成佛)해 버리면 좋지만 그렇게는 안 됩니다.

금생(今生)에 나와서 애쓰고 배운 것이 모두가 다 가정에서 배운 것이나 유치원에서, 대학(大學)까지 배운 것이 모두가 다 있다, 없다 하는 상(相)이 있는 것만 배웁니다.

따라서 그런 것이 지금 우리 잠재의식(潛在意識)에 꼭꼭 쌓여 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 지혜(智慧)를 좀 배웠다 하더라도, 부처님 지혜도 누가 확실히 말한 사람도 별로 없고, 그러므로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고, 그렇게만 생각합니다.

마음은 마음이고 물질은 물질이고 나는 나고 너는 너고 이렇게만 생각합니다.

따라서 화두(話頭)를 들고 공부를 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단박에 훤히 트여버리는 것이 아닌 것이고 한 10년 동안 화두 의심하고 다녀도 별로 얻은 것이 없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

또는 묵조선(默照禪)도 역시 묵조해서 잠자코 비춰본다고 해도 자꾸만 앉아 놓으면 - 그런 저런 그 어릴 때부터 배운 것, 과거 전생에 우리가 소나 돼지나 개나 사람이나 천상(天上)이나 모두 그런데서 갔다 왔다 하다가 우리 잠재의식에 쌓아 놓은 그런 관념들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도 같이 곁들어서 - 조금만 생각이 쉬면 그냥 딴 세계가 나옵니다.

상시(常時)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아 있을 때는 모르지만 방선(放禪)하면 밖에 보이는 것이 모두가 있는 것뿐이고, 또 우리 표면의식(表面意識)이 잠들면 그때도 역시 잠재의식에서 있다는 것만 나오고 이제 과거에 싸웠던 생각, 누구하고 좋아했던 생각, 그런 것만 나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단박에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이래저래 부처님 가르침 보다는 딴 생각이 먼저 나옵니다. 그래서 애써서 염불(念佛)이라 하는 그런 법(法)이 있단 말입니다.

 

염불(念佛)이라는 이것은 무엇인가?

부처님이 하나 뿐이 없으면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 하는 것 하나만 하면 될 것인데, 부처가 많이 있기 때문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지장보살(地藏菩薩)이나 그렇게 많은 이름이 있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한 사람들도 우리 불교(佛敎)인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더러는 우리 스님 네 가운데도 지장보살을 하면 공(功)이 더 적고 또는 관세음보살을 하면 공이 더 많고 또 그 반대로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참 곤란스러운 문제입니다.


법계(法界)라 하는 것은, 이 부처님이라 하는 것은 이래저래 여기가 있고 저기가 있고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한계(限界)가 있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가 못 됩니다.

법신(法身) 부처가 못 됩니다. 무량무변(無量無邊)하게 한도 끝도 없는 것이고, 공간적(空間的)으로 시간적(時間的)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부처님 경계이기 때문에 부처하면 하나의 부처 뿐 인 것이지 이래저래 많은 부처가 있지가 않습니다.

다만 삼천불명경(三千佛名經)이라, 삼천 가지의 부처님 이름이 있는 것도 있습니다. 청정광불(淸淨光佛), 무량광불(無量光佛), 무애광불(無碍光佛) 등등 삼천불(三千佛) 이름이 있는 그런 경(經)도 있습니다.

 

그러면 삼천불이 따로따로 있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반야지혜(般若智慧)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반야지혜로 비추어 보면 모두가 하나의 부처입니다.

하나의 부처님인데 부처님의 공덕(功德)이 무량한 공덕이 있기 때문에 우리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공덕을 다 말을 하려면 하나의 이름으로 해서는 전부를 말할 수가 없습니다.

자비(慈悲)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智慧)도 있는 것이고 원력(願力)도 있고 그렇게 한도 끝도 없는 공덕이 있기 때문에 자비로운 쪽으로 우리가 얘기할 때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또는 지혜 있는 쪽으로 이야기 할 때는 문수보살(文殊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또는 원력(願力) 분야에서 말할 때는 보현보살(普賢菩薩), 또는 우리 중생의 영혼(靈魂)을 저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그런 의미에서 볼 때는 지장보살(地藏菩薩), 우리 중생의 병고(病苦)를 다스리는 의미에서 보면 약사여래(藥師如來), 이렇게 있는 것이지 따로따로 있지가 않습니다. 다만 중생(衆生)이 잘 모르므로 중생의 생각은 구분해서 있는 것만 생각하고 분별 밖에는 모르기 때문에 그 사람들한테 알리기 위해서 잠시간 이름이 붙은 것이지 따로따로 있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명호(名號)는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를 의미해서 있습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라는 그런 명호도 부처님의 자비(慈悲)가 관세음보살이지 따로 있지가 않습니다. 관세음보살 상호(相好)를 우리가 자세히 보면 여기 머리의 정상(頂上)에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미타불과 둘이 아닌 아미타불의 자비란 뜻입니다.

아미타불은 또 무슨 뜻인가. 아미타불은 우리가 소박하게 방편설(方便設)로 해서는 저 십만억 불토(佛土) 밖에 있는 극락세계의 교주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씀한데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은 같은 경전(經典) 내에도 방편(方便)을 떠난 진실(眞實)한 말씀도 있고, 또 진실한 말씀을 방편으로 잠시간 말씀한 것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들은 일차 방편으로 해서 쉽게 알아서 거기에 들어 갈 수는 있다 하더라도 종당(終當)에는 방편을 버리고 진실로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는 것도 방편으로 말할 때는 저 십만억 불토 밖에 있는 극락세계(極樂世界)의 교주(敎主)라 이렇게 말씀을 했는데 극락세계가 우리 사바세계(娑婆世界)를 떠나서 어디 저 하늘 공중(空中)에 있다고는 말씀 아니 했습니다. 극락세계가 무량무변(無量無邊)이라 끝도 갓도 없습니다. 끝도 갓도 없다고 생각할 때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도 거기에 다 포함 되어야 하겠지요.

 

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몸은 어떠한가.

아미타불의 몸은 육십 만억 나유타(那由他) 유순(由旬)이란 말입니다. 육십 만억 이라는 수(數)는 한도 끝도 없는 수(數)입니다. 유순(由旬)이나 나유타(那由他)는 수십억 한도 끝도 없는 수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몸이라는 것이 우리 사람 몸과 같이 국한적으로 공간적으로 이렇게 크고 작고하는 몸이 아니라 우주(宇宙)에 가득 차 있는 몸입니다.

바꿔서 말하면 우주가 바로 부처님 몸입니다.

부처님 불경(佛經)이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만 알아버리면 엉뚱한 오류(誤謬)를 범합니다.

그러한 무량무변한 뜻으로 새긴다면 모두가 다 진리(眞理)에 합당한 것입니다.

바로 우주(宇宙)가 다 아미타불(阿彌陀佛) 몸입니다.

그리고 아미타불이라는 것도 또 뜻으로 해석하면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

목숨 수(壽)자, 수명(壽命)이 끝도 갓도 없습니다. 따라서 영생(永生)의 생명(生命)이라는 뜻이 되겠지요. 부처라는 것은 결국은 생명이라는 말이므로, 또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빛은 바로 지혜를 말하는 것이므로 그 지혜의 빛이 끝도 갓도 없이 시공(時空)을 초월(超越)해서 온 우주를 감싸고 있습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는 것도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 보면 그 생명(生命)이 끝도 갓도 없다고 해서 무량수불(無量壽佛), 광명(光明)이 한없이 비추인다고 그래서 무량광불(無量光佛), 또는 상대(相對)할 수 없다고 해서 무대광불(無對光佛), 또는 갓도 없다고 그래서 무변광불(無邊光佛) 또는 청정(淸淨)하다고 그래서 청정광불(淸淨光佛), 이렇게 모든 이름이 있습니다.

그 부처님께서나 조사(祖師)스님들께서 우리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렇게 고구정녕(苦口煗娡)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하나의 것에만 집착(執着)해 가지고서 거기에 딱 국집(局執)해 버립니다. 그것은 왜 그러는 것인가?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반야(般若)의 지혜(智慧)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야지혜(般若智慧)로 볼 때는 가상(假相), 가명(假名)은 원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모두가 가짜입니다. 가짜이므로 진짜로 본다면 있을 수가 없겠지요.

가짜에다 이름을 붙인 것이므로 원래는 이름도 없습니다.

아! 저 같은 존재도 이제 과거에 청화(淸華)란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미래에 있겠습니까.

이 몸뚱이가 이만큼 이렇게 나왔으므로 여기다가 임시(臨時)간 청화(淸華)라고 이름을 붙였단 말입니다. 따라서 몸뚱이 이것도 역시 각 세포(細胞)가 모여서 진동(振動)하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움직이는 그것이 그대로 항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순간순간 변(變)하는 것입니다.

1년이나 2년이나 10년이 지나면 이제 주름살만 더 늘어나기 때문에 변화(變化)하는 것을 알 수가 있지만 우선 순간순간 사람들이 봐서는 잘 모릅니다.

분명히 순간순간 변하는 것이며, 어느 한 순간도 같은 모습이 지금 없습니다. 어느 순간(瞬間)도 같은 모습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어려운 말로 하면 어느 순간(瞬間)도 어느 공간(空間)을 점유하고 있지 않단 말입니다. 어느 순간도 어느 공간에 없다고 생각할 때는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이것은 물리학적(物理學的)인 도리(道理) 아닙니까.

 

따라서 색즉공(色卽空)이라.

물질 그대로 바로 공(空)이라, 분석(分析)한 뒤에 공이 아니라 바른 눈으로 보면 우주의 정기(精氣)인 불성(佛性)의 차원에 보면 이대로 바로 공(空)입니다. 이대로 공(空)이라고 생각해야 이제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비로소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야심경 가지고도 충분히 깨닫는 것입니다.

나도 공, 너도 공, 색도 공, 소리도 공, 또는 맛도 공, 모두가 공입니다. 이것들이 원래 있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병(病)이 발생하여 아프다는 것도 본래는 공(空)입니다.

우리 육감(六感)이 바로 못 보아서 아프다고 하는 것이지 우리 육감이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를 바로 본다면 내 몸뚱이가 없거니 세포(細胞)도 원래 공(空)하거니 아픔이 어디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 명호(名號)를 우리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르나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부르나 다 한도 끝도 없는 그런 실상(實相) 그 자리입니다. 지장보살(地藏菩薩)이라고 해서 조금 못하고 관음보살(觀音菩薩)이라고 해서 더 나은 것도 없는 것이고, 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고 해서, 부처님이라고 해서 더 좋고 또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이라고 해서 더 낮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벌써 보살(菩薩) 지위(地位)라는 것은 우리가 이(理)에서 본다면 모두가 다 원융무애(圓融無碍)한 하나의 진리(眞理)입니다. 따라서 지장보살을 좋아서 외운다 하더라도 다른 부처나 보살하고 원융무애하게 둘이 아니고 원만한 부처님의 성품(性品)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원만한 부처님의 성품(性品)자리,

우리 중생이 부처님의 그런 공덕 가운데서 중생의 영혼(靈魂)을 극락세계(極樂世界)로 인도하는 그 자리, 또는 우리 지구의 이 대류권 속에 갖추고 있는 부처님 공덕, 이것을 보고 지장보살(地藏菩薩) 그러는 것이지 따로 있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불자님들은 부처님 명호를 우선 그와 같이 절대로 구분을 세우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른다 하더라도 다른 것도 거기에 다 들어 있고, 어떤 것이나 모두가 벌써 보살, 부처 자리를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원융무애라,

일즉다(一卽多)라, 하나 가운데 다(多)가 들어 있고, 다(多) 가운데 하나가 들어 있습니다.




-. 참선(參禪)의 요체(要諦) [4]


보살, 부처 자리뿐만 아니라 우리 중생 자리도 역시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인데 우리가 미처 못 느낀단 말입니다. 관세음보살의 생명 가운데 내가 없으면 관세음보살이 못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징그럽게 미워하는 독사 한 마리라도 그 속에 없으면 관세음보살이 못됩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어느 것도 티끌 하나라도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이나 그 보살 부처 가운데 포함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나 가운데도 우주 전체가 다 들어 있고 또는 개별적인 모든 것들 가운데도 우주가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법성게(法性偈)를 외우지 않습니까. 화엄경(華嚴經)까지는 아직 못 배웠다 하더라도 법성게 도리는 화엄경의 대요를 말한 것입니다. 법성게 도리는 일중일체(一中一切)라, 하나 가운데 일체가 다 들어 있습니다. 일체 가운데도 하나가 다 들어 있는 것이고, 이런 도리를 알아야 비로소 반야(般若)의 도리를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 공(空)이거니, 모두가 다 본래가 공이거니, 하나 가운데 전체가 안 들어 있고 전체 가운데 하나가 안 들겠습니까. 다 공이라는 소식만 안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도리가 다 통한단 말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가 전체요, 전체가 하나요. 물질이라고 생각할 때 하나 가운데 전체가 다 들어가겠습니까?

안 들어가나 물질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는 겨자씨 가운데도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가 다 들어가는 것이고 또는 한 덩이의 흙더미 가운데도 우주가 다 들어갑니다.

이렇게 물질은 눈곱만큼도 없고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 말씀대로 본래 무일물(無一物)이라. 물질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본래 아무 것도 없거니 우리가 좋다, 궂다 나쁘다, 그르다 하는 그런 소식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자리를 느끼고서 그런 자리에서 스승을 생각하고, 제자를 생각하고, 아들을 생각하고, 자기 재산(財産)을 생각하고, 지위(地位)를 생각해야 그래야 우리가 그르치지가 않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자기 아들을 사랑하고 딸을 사랑하고 해야 자기 아들 딸 만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은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금방 깨달아 버리면 오랫동안 고생할 것도 없고 우리가 아미타불이고 관세음보살이고 할 필요가 없지만 우리 마음이 그렇게 깨닫지를 못합니다.

나쁜 버릇 때문에, 습관성(習慣性)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화두(話頭)라는 그런 문제를 들고서 우리가 이제 때 묻지 않은 그런 문제를 들고서 우리가 오랫동안 의단(疑團)도 하는 것이고 참구(參究)도 하는 것이고 또는 아미타불이나 관음보살이나 부처님 명호를 들고서

생각 생각에 하마 그런 나쁜 습관성이 나올세라 우리가 공부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에 염염상속(念念相續)이라, 생각 생각에 우리가 공부하는 때 묻지 않은 그런 생각을 하여 나아가야, 우리의 그런 때 묻어 버린 우리 마음에 들어 있는 잠재의식(潛在意識)같은 것이 차근차근 힘을 못 쓰고 이제 줄어져 갑니다. 본래 그런 것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결국 바른 생각만 하면 없어져 버립니다.

그림자가 있다 하더라도 해가 뜨면 사라지듯이 우리 번뇌 망상(煩惱妄想)은 그와 똑 같습니다.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존재가 아닌 그런 그림자만 두었기 때문에 우리 중생이 그림자에 속지 않고서 그림자의 노예(奴隸)만 안 되고서 정말로 바른 생각만 쌓아 나간다고 하면 그런 것은 흐트러지고 맙니다. 그런 것이 너무나 오랫동안 습관(習慣)을 붙여 놓아서 갑자기 안 나가므로 우리가 바른 생각을 하기 위해서 화두(話頭)를 들고 염불(念佛)을 하는 것입니다.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할 때 그 문제는 여러 가지 것이 많이 있으나 육조단경(六組檀經)에서 한 가지 규범(規範)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시삼마(是甚徼) 선(禪)이라!

한문(漢文)을 우리식으로 발음하면 '시심마'라. 이 시(是)자, 심할 심(甚)자, 어찌 심(甚)이라고도 합니다. 어찌 마(徼)자. 따라서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뜻입니다. 심할 심자를 중국식 발음을 하면 '삼'이라고 발음을 합니다. 같은 뜻이지만 중국식 발음을 할 때는 시삼마, 우리식 발음은 시심마입니다.

그것은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육조단경식으로 말하면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밝기는 해와 달보다도 더 밝고 - 우리 중생들의 생각에는 해와 달보다 더 밝은 것이 없지 않습니까 - 검기는 칠(漆)보다 더 검고, 하늘을 받치고 땅을 괴이고 그런 것이 항시 조금도 나와 떨어짐이 없이 나와 더불어 있지만 내가 미처 거두어 얻지 못하는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우리가 그것은 내내야 불성(佛性)이 아닌가. 그냥 짐작이 되시겠지요.

따라서 따지고 보면 불성(佛性)이 무엇인가? 법계(法界)가 무엇인가란 말입니다.

내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가? 그 뜻이나 똑 같은 뜻입니다. '시심마'라는 것과 똑 같은 뜻입니다.

나한테 한 물건이 있는데 그것은 해와 달보다 더 밝고 또 검기는 칠 보다 더 검고, 그러므로 제일 밝고 제일 검고 하므로 모든 것이 무한한 가능성이 거기에 다 들어 있다는 것이 되겠지요. 하늘을 받치고 땅을 괴이고 있다는 말은 천지(天地)를 두루해 있다는 말입니다.

천지를 두루해 있는 그것이 나와 항시 같이 있단 말입니다. 그것이 불성(佛性)이 아니고 따로 무엇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불성 도리를 그와 같이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성입니다' 그래버리면 간단히 끝나겠지요. 그러나 그건 불성 도리를 우리 중생들이 보고 체험한 것이 아닙니다.

습관성(習慣性)이 다 나가버려야, 습관성이 다 걷혀버려야 불성을 우리가 증명(證明)할 수가 있는 것이지 습관성이 남아 있을 때는, 쉬운 말로 약해서 말하면 습기(習氣) 아닙니까. 갖추어 말하면 습관성이고, 습기가 녹아지기 전에는 우리가 이치(理致)로만 알 뿐이지 증명(證明)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증명해서 알아야만 이 불성공덕(佛性功德)이 무한의 공덕인데 그 무한의 공덕을 자기도 좀 맛보고 좀 쓸 수가 있는 것이지 그냥 이치로 해서는 내내야 무어 밥 좀 덜 먹으면 배고프고, 또 욕계(欲界)에 있어 놓으면 이성적(理性的)인 욕심 이것저것 다 못 떠나고 그럽니다.

습기(習氣)가 빠져버려야 욕심(慾心)도 빠지고 진심(瞋心)도 빠지고 다 빠져 버립니다.

불성(佛性) 가운데는 세간적(世間的)인 욕심이 있을 수가 없으므로 그렇게 되어야 하겠지요.

 

따라서 우리가 그와 같이 미처 증명을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알기는 알았지만 '이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내내야 '불성이 무엇인가?' 불성(佛性)이라는 것은

우주에 충만(充滿)해 있고 바로 우주가 불성이다. 이런 도리야 불교 초보인도 대부분 알 것이지만 증명(證明)은 못 해 있습니다.

증명을 못 한다고 생각할 때는 괴로운 것은 괴롭고 남이 자기를 좀 구박(驅迫)하거나 자기를 비방(誹謗)하면 성을 내곤 합니다. 죽을 때는 자기(自己) 몸뚱이 아까워서 죽기 싫고 말입니다. 이래 버리면 결국은 생사해탈(生死解脫)은 어림도 없습니다.

 

우리 고통(苦痛) 가운데 가장 지독한 고통이 죽음에 대한 고통 아닙니까. 불교(佛敎)라는 것은 죽음을, 생사해탈을, 생노병사(生老病死)를 떠나서 위없는 도리를 깨닫는 것이 불법인데 우리가 그냥 이치(理致)로만 알아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증명(證明)을 하기 위해서 그 불성 도리와 자기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우리 마음을 하나로 추스리는, 마음을 통일시키는 방법이 기도(祈禱)를 모시는 것이고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고 또는 참선(參禪)을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화두(話頭)를 들고 어느 문제(問題)를 '이뭣고?'라든가, 또는 조주(趙州) 스님께서 말씀하시 무(無)자라든가, 보조국사(普照國師)나 그런 어른들은 무자화두(無字話頭)를 제일 많이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화두문중(話頭門中)에서는 무문관(無門關), 즉 제일 먼저 무자화두를 말씀했습니다.

 

무자화두는 어떤 것인가 하면은 어느 스님이 조주스님한테 - 조주 스님은 당나라 때의 위대한 대선사(大禪師)입니다. - '개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부처님 경전에 개나 소나 사람이나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모든 중생은 다 부처님의 성품(性品), 부처가 되는 성품이 있다고 말했으므로 어렴풋이 그 분도 믿었겠지요.

 믿었으나 자기가 보지 아니 했으므로 확실히는 느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개 같은 막나니 짓도 많이 하고 판단도 못하고 자기 먹을 것만 좋아하는 그런 중생이 무슨 놈의 불성이 있을 것인가? 불성이라는 것은 완전무결(完全無缺)한 것인데 그런 개 따위에 무슨 불성이 있을 것인가? 이렇게 의심을 품어가지고 이제 조주스님한테 가서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단 말입니다. 그때 조주스님 말씀은'무(無)'라. '없다'.

어째서 없다고 했겠습니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개한테는 불성이 개 안에만 있고 밖에는 없다고 보겠습니까. 또는 그 불성이 개 머리에가 있다고 보겠습니까, 가슴에가 있다고 보겠습니까. 우리 사람한테 불성이 있다고 보겠습니까. 우리 사람한테 불성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 불성이 우리 발에가 있습니까? 머리에가 있습니까?

그 불성이라는 것은 바로 우주의 성품(性品)인데 우주(宇宙)의 법계성품(法界性品) 이것이 불성인데, 법계성(法界性)이나 불성(佛性)이나 같은 뜻입니다. 모두가 다 우주의 본성(本性), 우주의 정기(精氣)입니다. 그런 것이 불성인데 불성이 개 안에가 있고 밖에가 있고 그렇게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 말씀으로 일체중생 개유불성이라, 모든 중생이 다 부처의 성품이 있다. 이러해서 잘 몰라서 잘 못보고 안에가 있는가? 밖에가 있는가? 그렇게 의심이 나서 그렇게 물었지만 적어도 이치라도 안다고 생각할 때는 밖에가 있고 안에가 있고 하지가 않단 말입니다. 도처(到處)에 개 몸 전체에 개 몸 전체가 불성 덩어리고 또는 밖에도 역시 불성 덩어리고 또는 우리가 현재 이와 같이 있는 우리 분위기(雰圍氣) 내에도 결국은 불성 덩어리 뿐 입니다.

 

이런 도리를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물리학적(物理學的)으로 맡겨버려야,

물리학은 실험(實驗)을 통한 것이므로 사실로 믿겠지요. 물리학적으로 믿어버리면 확신(確信)이 더 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 분위기 가운데 산소(酸素)나 수소(水素)나 탄소(炭素)나 질소(窒素)나 그런 각 원소(元素)가 있다는 것은 시인 하겠지요. 산소나 수소나 질소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이 분위기가 못됩니다. 저 진공(眞空) 상태까지 올라가 버리면 모를까, 또 이 대기권(大氣圈) 내에는 희박(稀薄)하고 농(濃)하고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산소, 수소, 탄소, 질소 이런 것들이 모두가 다 혼합 내지 결합되어 있습니다.  또 산소나 수소나 그런 것들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산소나 수소 그런 것은 전자(電子)나 양자(陽子)나 중성자(中性子)나 그런 것들이 적당히 결합해서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되고 했습니다.

 

자 그러면은 전자나 양자는 또 무엇인가? 그것은 알 수 없는 소립자(素粒子)라 하는 알갱이란 말입니다. 알 수 없는 소립자는 또 무엇인가? 그것은 에너지의 파동(波動)에 불과합니다. 「에너지」라는 이것은 물질(物質)이 아닌 것입니다.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에너지」라고 했지 않습니까. 따라서 현대 물리학은 우주를 구성하는 장(場)에너지가 즉 우주에는 마당 장(場)자, 장(場)에너지가 충만(充滿)해 있다고 봅니다.

장 에너지 속에는 그야말로 전자기장(電磁氣場) 에너지가 거기에 가득히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가 전자나 양자나 그것도 역시 에너지라 하는 것으로 이루어지고 모두가 다 소립자(素粒子)같은 - 그야말로 물질인가 아닌가 모르는 가장 미세한 것이 중성미자(中性微子)라는 것인데, 중성미자는 공간성(空間性)이 없습니다. 공간성이 없으므로 물질이라 할 수도 없겠지요. - 그런 것들이 이렇게 쌓이고 저렇게 모이고 해서 전자가 되고 양자가 되고 또는 전자, 양자가 모여서 산소가 되고 했습니다.

산소나 수소나 그런 원소가 적당히 결합하여 분자(分子)가 되어서 이렇게 우리 세포(細胞)들을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에너지 차원(次元)에서 보면 내내야 우리 몸뚱이도 에너지의 형상화(形象化) 에너지의 상(相)에 불과하고 나무나 흙이나 다이아몬드나 모두 다 하나의 에너지의 상에 불과합니다. 상(相)을 떠나서 볼 때는 무엇인가? 상을 떠나 버리면 에너지뿐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우리가 한 번 돌이켜 봅시다. 색즉공(色卽空)이요, 공즉색(空卽色)입니다.

색은 바로 물질 아닙니까. 물질 바로 공이요, 내 몸 바로 공입니다.

허나 인연(因緣)이 익어져서 이루어져서 인연이 모아지면 그때는 역시 상(相)을 낸단 말입니다. 상을 나투므로 그때는 공즉색입니다.

 

 

-. 참선(참선)의 요체(요체) [5]


이렇게 현대 물리학이나 현대 철학이나 모든 것이 이런 것이 내내야 가까스로 부처님의 반야심경(般若心經) 도리에 이르러 있습니다. 그야말로 부처님 가르침 심심미묘(甚深微妙)하고 참 감사(感謝)해서 마지않는 가르침입니다. 현대물리학 철학 모두 다 해서 현대 문명이라 하는 것이 간신히 불교에 이르러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겨우 현미경(顯微鏡)이나 기타 여러 가지 논리체계(論理體系)나 그런 걸로 해서 추상적(抽象的)으로 증명(證明)한 것이지 그네들이 에너지 자체가 무엇인가? 그것은 아직도 모릅니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같은 천재(天才)도 몰랐습니다.

그러한 것은 순수(純粹) 생명(生命)이기 때문에 우리 번뇌(煩惱)를 다 멸해 버린 성자(聖者)의 안목(眼目)에서 밖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성자의 청정한 안목에서 볼 때는 [그 에너지(Energy) 실체(實體)가 우주(宇宙)에 충만(充滿)해 있고 모든 공덕(功德)을 갖춘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훤히 보이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보는 것을 보고 견성(見性) 그럽니다. 볼견(見)자 성품 성(性)자, 그런 우주의 본래 성품인 그 불성을 우리가 직접 본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까지 보기 위해서는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과거 전생(前生)에 나쁜 습관성(習慣性)을 많이 안 짓고 또는 금생(今生)에도 좋은 선근(善根)을 타고 나와서 금생도 환경이 좋아서 어릴 때부터서 아! 물질(物質)은 다 허망(虛妄)하다 그대 몸도 허망하다. 이와 같이 허망무상(虛妄無常)한 소식을 자꾸 들었으면 모르려니와 학교에서 배운 것은 모두가 있다는 것만 배웠기 때문에 즉 말하자면 무명(無明)만 배웠기 때문에 우리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화두를 들고 오랫동안 앉아 놓으면 차근차근 습관성이 힘을 못 쓰고 그때는 그림자같이 이스러집니다. 바로 염불(念佛)로 오래 해야 한번하면 한만큼 부처님 명호(名號)라는 것은 바로 본체(本體)를 불성(佛性)자리를 상징적(象徵的)으로 표현하는 말이기 때문에 한번 나무아미타불, 한번 관세음보살 하면 그때는 한번 한만큼 우리 업장(業障)이 녹아지는 것입니다.

 

화두(話頭)도 ‘정말로 화두 이것이 진여불성을 의미했다’ ‘우주의 본체를 의미했다’ 이렇게 생각하고 참구할 때는 한번 참구한 만큼 우리 업장이 녹아 옵니다.

따라서 묵조선(黙照禪)도 지금 원불교(圓佛敎)는 묵조선을 합니다. 또는 중국이나 일본이나 조동종파(曹洞宗派)에서는 묵조선을 합니다. 그도 그것이 선(禪)이 아닌 것이 아니라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를 관조(觀照)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 자리를 우리가 구한다면 다 선(禪)입니다.

가사 하다못해 기독교식으로 하나님을 참구하고 ‘오, 주여!’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저 내 밖에 있다 이럴 때는 그게 선(禪)이 될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법신불(法身佛)과 똑같이 무소부재(無所不在)하고 무소불능(無所不能)이라 안 계신 곳이 없고 능하지 않음이 없고 이것이 바로 우주의 본체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하나님!’ 해도 좋습니다.

지금 앞으로의 시대는 이렇게 해야 할 그런 시대입니다. 불교는 원래 모든 문화를 다 포섭하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에는 무엇은 들어 있고 무엇은 안 들어 있으면 불성이 되겠습니까.

일즉일체(一卽一切)라 하나 가운데 다 들어있어야 그래야 불성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적인 요소나 이슬람교의 요소나 다 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선은 앞서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하는 선은 그런 화두를 참구하는 선 ‘이뭣꼬’도 좋고 ‘무’자도 좋고 ‘뜰 앞에 잣나무다’라는 화두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 자리를 의미해 있습니다.

 

그렇게 분명히 제일의제(第一義諦) 그 자리를 딱 느끼고 그 자리를 우리가 참구해 나가는 태도를 갖추어야 하지 그렇지 않고서 상대적인 문제 가지고 의심하면 그것은 상기(上氣)만 되는 것이지 공부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묵조(黙照)하시는 분도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 이른바 법계연기(法界緣起) 자리 -불법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연기법이 불법 아닙니까. 불법은 바로 연기법입니다. 연기법도 그냥 방편 연기법은 이것저것 다 모아서 인(因)과 연(緣) 따라서 잠시간 모아 있다. 그러므로 고유(固有)한 것이 없다. 이렇게만 보는 것은 이것은 천박한 방편연기입니다.

참다운 연기법은 법계연기(法界緣起) 진여연기(眞如緣起)입니다. 진여법성이 인연(因緣) 따라서 그때그때 이 현상세계를 만듭니다. 나나 너나 또는 하늘에 있는 천체나 모두가 다 법계 진여 법성 불성이 그 때 그때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진여불성이 법계연기 따라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어느 것도 진여 불성이 아님이 없습니다.

 

이렇게 해야 화엄경 법화경 능엄경 도리입니다. 이렇게 해야 이른바 선 도리(禪道理)입니다. 선 도리(禪道理)라는 것은 순간 찰나도 진여법계를 안 떠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본체이기 때문입니다. [본체(本體)에서 하나하나 용(用)을 해야지 본체를 떠나버리면 그때는 선객이 아닙니다]

남한테 얻어맞으나 자기 제자한테 매를 때리나 법계에 입각해서 나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자리에서 때리면 무방합니다. 그러면 절도 있게 꼭 알맞게 합니다.마땅히 이렇게 묵조 하는 선, 잠자코 자기 불성을 비추어 보는 선, 이런 때는 나나 너나 모두가 다 우주 만유의 진여법계로부터 되었다. 이렇게 생각해야 그래야 참다운 연기법입니다.

염불도 아미타불을 외우나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외우나 모두가 다 부처님의 그런 법계로 부터서 법성으로 부터서 되었다 이렇게 하면서 법성자리 그 자리를 우리가 목표로 해가지고서 염불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참다운 진여염불입니다.

 ‘절’도 지금 삼천 배 해라 몇 천배 해라 그런 말 저런 말 많이 합니다. 그런 절도 반야(般若)와 더불어서 해야 참다운 절입니다.

그냥 몇 천배 해라 그래가지고 다리가 아프네, 공덕이 있네, 없네 어쩌고 합니다만 그렇게 할 때가 지금 아닙니다. 꼭 반야와 더불어서 해야 합니다. 반야의 지혜와 더불어서 하는 절은 무엇인가 하면은 지금 절을 하는 대상(對象)이나 절을 하는 나나 모두가 둘이 아닙니다.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고 천지가 바로 둘이 아니다. 이런 자리에서 우리 마음이 진여법성 자리 그 부처의 자리로 가고 싶어 하는 그런 간절한 갈앙심(渴仰心)으로 절을 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참다운 절이고 그래야 몸도 가볍습니다.

내 몸뚱이도 물질이 아닌데 ‘이 몸뚱이가 절대로 물질이 아닙니다.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신통자재한 사람들은 자기 몸뚱이도 하늘로 올라갑니다. 무게가 몇 십 킬로그램[Kg]이 된다고 생각하면 공기를 타고 공중으로 올라가겠습니까.

100미터 고도에 올라갔을 때하고 지금 지상에 있을 때하고 무게가 같지 않습니다. 저 성층권에 올라가 있을 때하고 여기 있을 때의 우리 몸무게가 같지 않습니다. 인력권 밖의 먼 진공(眞空)속에 들어가면 우리 몸무게는 없어져 버립니다.

 

우리가 느끼고 무겁다 가볍다 좋다 궂다 하는 것이 모두가 상대적인 하나의 식(識)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절대적인 식(識)에 있어서는 절대의 관념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제법공(諸法空) 도리(道理)로 생각하면 그때는 근본 에너지가 이것이 공이므로 에너지가 이렇게 모이고 저렇게 모였다 하더라도 그림자가 몇 천개 모여도 그림자이듯이 그것들이 몇 천개 모여서 세포가 되고 세포가 몇 천개 모였다 하더라도 공은 결국은 공입니다.

따라서 무게가 없습니다. 내 몸뚱이 무게가 없다고 믿고서 절을 하시는 것과 나는 분명히 육십[킬로]다 오십[킬로]다 이렇게 생각하고 절하는 것과 어디가 더 편하시겠습니까?

화두를 참구하고 염불을 한다 하더라도 나도 공 너도 공 모두가 다 텅텅 빈 불심(佛心)뿐이다. 환희심이 넘치는 그런 광명, 행복이 넘치는 그런 광명의. 불심뿐이다, 불성(佛性)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공부하는 것과 어느 것이 더 빠르겠습니까.

 

내 몸뚱이 암(癌)이 있다 무엇이 있다 이것도 중생들이 하나의 범부 의사(醫師)가 약간 부조화(不調和)스럽게 세포가 구성된 것보고 암이다. 그렇게 말한 것이지 암도 본래는 공(空)입니다. 근본 원소가 공이므로 암 그것도 원소로 구성된 것인데 암이 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것을 포함한 나한테는 모두가 공이 다 아픈 것도 공이다 이렇게 확실히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병(病)도 사실은 없는 것입니다.

인도의 신지학(神智學)이나 귀신 신(神)자 지혜지(智)자 배울 학(學)자입니다. 신지학은 모두가 다 범신론적 브라흐만(Brahman)이라 하는 정신 법으로 해서 병을 고칩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과 몸이 둘이 아니고, 몸 이것은 마음의 그림자에 불과 하기 때문에 마음 만 바로 먹으면 음식은 먹은 듯 만듯해도 무방합니다. 욕계에만 음식이 있는 것이지 색계 이상은 음식이 없습니다.

 

-. 참선(參禪)의 요체(要諦) [6]


세 가지 수행 방법(話頭禪, 默照禪, 念佛禪) 가운데서 간추려서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노는 입에 염불이라, 아직 자기 행법(行法)이 굳어지지 않은 분들은.....

어떻게 해도 다 무방합니다만 반야지혜(般若智慧)와 더불어서 하셔야 참다운 선(禪)입니다.

저 서산(西山)에 뉘엿뉘엿 지는 태양(太陽)을 관(觀) 하나, 또는 극락세계(極樂世界)의 땅을 관하나 모두가 다 제법공(諸法空) 자리, 제법공인 동시에 모두가 다 불성(佛性)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관(觀)해야 합니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십육관(十六觀)처럼 지상관(地想觀)이라. 땅을 관찰하는 법이 있습니다. 그 땅은 우리가 일반적인 관념으로 보는 땅을 관찰(觀察)하는 것이 아니라,

극락세계(極樂世界)의 영롱한 땅으로 관찰합니다. 물질이 아닌 영롱한 땅을 관찰합니다.

따라서 그런 것이 모두가 다 바꿔서 말하면 반야지혜와 더불어서 관하는 것입니다.

제법공 도리를 보고서 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모두가 다 선(禪)입니다.

그러나 아직 자기 행법이 정해지지 않으신 분들은 우선 제일 쉬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그런 부처님 명호(名號)로 염불(念佛) 하면서, 자기 속으로 염불을 되 뇌이면서 생각 생각에 그런 염불한다는 생각마저 끊어지도록 까지 한다고 생각할 때는 참 쉽습니다. 화두를 하시고 관법을 하시고 그렇게 이미 하신 분들은 좋지요.

모두가 다 다만 거기다가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반야의 지혜와 더불어서 해야 참다운 참선(參禪)이 됩니다.

 

그러나 아직 정하지 않은 분들은 염불을 화두로 해서, 염불(念佛)도 '나무아미타불' 할 때는 가사 '나무' 빼버리고 될 수록 간략히 '아미타불'을 화두로 해서 하셔도 좋고, 아미타불 화두가 근래에 와서는 저 만공(滿空) 스님이나 더 올라 가서는 저 서산(西山) 스님이나 다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고 또 관음(觀音)이 좋으신 분들은 똑같은 것이므로 관음송(觀音誦)을 하시는 것이고,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좋으신 분들은 또 그렇게 하셔도 무방합니다. 다만 관음(觀音)과 지장(地藏)과 아미타불(阿彌陀佛)과 진여불성(眞如佛性)과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시고서 원융무애(圓融無碍)라. 이렇게 생각하시고 하면 다 좋습니다.

이렇게 하시는데 공부해 나갈 때는 여러 가지 어려움도 많이 있습니다. 다리도 아프고 그야말로 평소에 못 느꼈던 것이 자꾸만 자기 몸을 괴롭힙니다. 평소에 그렁저렁 살 때는 그렇지 않지만 정말 우리가 진여불성 자리로 간다고 생각할 때는 반발이 옵니다. 평소에 아프지 않은 것도 아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반야 지혜와 더불어서 이러한 것들이 모두가 다 허망무상(虛妄無常)한데 내가 범부(凡夫)이므로 아픔을 느낀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부지런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이라. 색도, 소리도, 향기도, 맛도, 촉감도, 또는 우리가 분별하는 관념(觀念)도 모두가 원래 있지가 않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범부가 잘 못 보아서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느끼고 부정을 다 해버려야 합니다.

성불(成佛)까지는, 견성(見性)까지는, 진여불성(眞如佛性)하고 온전히 하나가 될 때 까지는 쉽지가 않습니다. 쉽지 않기 때문에 그 가운데 여러 가지 그 경계(境界)가 많이 나옵니다.

법당에 모신 부처님 같은 모양도 나오고 별스러운 모양이 다 나옵니다. 더러는 몸이 뜨겁기도 하고 몸이 차갑기도 하고, 더러는 몸이 공중에 뜨기도 하고 별별 것이 다 나오나 그러한 것들은 모두가 다 하나의 경계이므로 그런 경계에 대해서 절대로 붙잡히지 마십시오. 붙잡히지만 않으면 몸이 제아무리 천근만근 무겁다 하더라도 이것이 허망한 것이다. 착(着)만 안하면 얼마 안가서 사라지고 맙니다.

이렇게 해서 꼭 상(相)이 없이 원래가 상이 없는 것이므로 우리 진면목은 원래가 상이 없습니다. 상이 있는 것은 우리 무명(無明)으로 봐서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이 없이 공부를 하실 때 정말로 가속도(加速度)로 공부가 익어 갈 것을 믿어 마지않습니다. 화두(話頭)나 염불(念佛)이나 관법(灌法)이나 주문(呪文)이나 모두가 다 좋은 수행법(修行法)입니다. 다만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과 더불어서 하셔야 그래야 참다운 공부고 참다운 염불(念佛)이고 참다운 주문(呪文)이고 참다운 화두(話頭)고 참다운 관법(灌法)이고 참다운 선(禪)입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南無摩訶般若波羅蜜)

 



 

 

그리운 강 _ 도종환

존 메이스필드의 [ 그리운 바다 ] 운을 빌어

 

 

사람들은 늘 바다로 떠날 일을 꿈꾸지만

나는 아무래도 강으로 가야겠다

가없이 넓고 크고 자유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버린것은 아니지만 작고 따듯한 물소리에서

다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해일이 되어 가까운 마을부터 휩쓸어버리거나

이 세상을 차갑고 거대한 물로 덮어버린 뒤

물보라를 날리며 배 한 척을 저어나가는 날이

한 번쯤 있었으면 하지만

너무 크고 넓어서 많은 것을 가졌어도

아무 것도 손에 쥐지 못한 것처럼 공허한

바다가 아니라 쏘가리 치리 동자개 몇 마리만으로도

넉넉할 수 있는 강으로 가고 싶다

 

급하게 달려가는 사나운 물살이 아니라

여유 있게 흐르면서도 온 들을 다 적시며 가는 물줄기와

물살에 유연하게 다듬어졌어도 속으론 참 단단한

자갈밭을 지나 천천히 천천히 걸어오고 싶다

 

 

욕심을 버려서 편안한 물빛을 따라 흐르고 싶다

너무 많은 갈매기 가마우지떼가 한꺼번에 내려앉고

한꺼번에 날아오르는 바다가 아니라

내게 와 쉬고 싶은 몇 마리 새들과도

얼마든지 외롭지 않을 강으로 가고 싶다

 

은백색 물고기떼를 거느려 남지나해에서

동해까지 거슬러 오르는 힘찬 유영이 아름다운 것도 알지만

할 수만 있다면 한적한 강 마을로 돌아가

외로워서 여유롭고 평화로워서 쓸쓸한 집 한 채 짓고

맑고 때묻지 않은 청년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 강 마을에도 어린 시절부터 내게 길이 되어주던

별이 머리 위에 뜨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호젓한 바람 불어오리니 아무래도

나는 다시 강으로 가야겠다

 

 

                            _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도종환 시 _

그림 / 정봉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