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2. 1. 07:44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영원하신 부처님
부처님은 기다리고 계시다
범부들의 삶은 욕망의 삶인가. 끝없는 망상으로 그릇된 자기를 집착하고 그 집착으로 인하여 미움과 애착이 또한 끊일 날이 없다. 그 사이에 온갖 욕망이 움직여 그릇된 망상과 탐착을 더해 간다.
우리의 욕망이, 미혹이 근원인 만큼 망령된 욕구가 끊임없이 따라 붙지만 우리의 본성이 불성인 까닭에 불성에 근거한 진실한 삶의 충동도 끊임없이 이어간다. 이 사이에서 거룩한 가르침을 만나 스스로의 마음자세를 가다듬으며 욕망을 선택하고 또는 억제하면서 진실한 빛의 생명을 추구해 가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들 내면에 움직이고 있는 진실한 빛의 발동은, 때로는 욕망의 억제, 고통의 감수를 동반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 마음 속에 밝고 시원스러운 기쁨이 확대되며 참된 자기 확립을 가속화시켜 간다. 그것은 진실한 자기에 눈 뜨고 진실한 법에 눈떠서 진실한 자기성장을 가져온다는 말이다.
이러한 범부들의 삶에 있어 부처님은 위 없는 지혜이시고, 용기이시고, 은혜이시다. 길을 열어 주시고, 성취의 과실을 여물게 하신다. 미혹된 생각을 밝혀 병고와 재난을 소멸시키시고, 다시 위 없는 진리에 눈 뜨게 한다. 이것은 우리가 구해서가 아니다. 대자대비 부처님의 원래 은덕인 것이다.
경에 말씀 하셨다.
[여래는 구하는 자에 주고 언제나 줄 준비를 하고 있는 깨달은 몸이다. 위 없는 큰 의원이다.]
부처님은 법이시며 영원이시며, 진리의 완전으로 우리를 감싸고 계시는 것이다. 완전한 진리로써 우리의 완성을 위하여 기다리고 계신다. 부처님은 진리의 몸 이시다. 영원하시고 보변하시고 자재하시고 원만하시다. 온 누리 어느 국토, 어느 중생 예외 없이 부처님의 거룩한 빛으로 충만하시지 않은 곳이 없다. 그리고 그 거룩한 빛은 생사고해에 빠진 중생들에게 위 없는 의사이시다. 모든 중생들은 이와 같은 부처님의 무애 위신력 대자비 광명 속에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주시며 또한 기다리고 계신다. 욕망의 어둠 속을 헤매는 중생계를 밝힐 위 없는 횃불을 들고 우리 앞에 다가와 계신다. 그런데 이토록 자비하신 부처님의 은혜의 횃불을 보지 못하고 받지 못하는 자는 누구일까.
그것은 부처님을 만나지 못한 자, 믿지 못하는 자다. 마음 어둡고 탐욕에 불타는 자다. 대립하고 불효하고 미움과 애착에 절박된 자다. 이기와 아집에 사로 잡히고 교만의 깃대에 묶인 자다. 원망하고 슬퍼하고 또는 시기하고 불행, 고난을 예상하는 자다. 다른 이의 허물 보기에 바쁘고 비판의 칼을 품으며 불평, 불만 하는 자다.
왜 그러할까? 마음이 어두운 까닭이다. 복된 인연이 눈앞에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돌이켜 보아 우리 마음의 어둠, 불신의 마음은 없는가 살피자. 그리고 어둡고 거칠은 온갖 잡심을 깨끗이 비우자.
부처님께서는 은혜로운 횃불을 드시고 지금 우리에게 와 계신다.
감사하자, 그리고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여건이 은혜로운 광명의 실현인 것을 생각하고 공경하고 정성 바쳐 거룩한 뜻을 배우자. 그리고 우리는 부처님의 거룩하고 간곡하신 뜻을 온 국토, 온 시대에 펼쳐낼 거룩한 사명을 지닌 자임을 깨닫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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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광덕 큰스님 지음 빛의 목소리 p76 – p78 영원하신 부처님에서, 불광출판사
부처님은 자비하신 아버지시다
불자들 사이에서도 부처님에 대한 이해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믿음의 내용이 이해일진대 부처님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는 것은 믿음의 내용에 차이가 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어쩌면 그럴 수 밖에 없는 당연성을 지닌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에 대한 이해는 깨달음의 내용이며, 깨달은 정도에 따라서 부처님에 대한 이해가 차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깨달음에 근거한 이해라 하는 것은 스스로 닦고 증득한 경계이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과는 좀 다르다. 부처님 나시어 감로법문이 펼쳐진지 3천년이 되는 오늘의 우리에 있어서는 깨닫고 증득하기 이전에 부처님에 대한 근본적 믿음이 있는 것이다. 그 믿음에 근거해서 닦아가며 자기 변혁을 가져오고 정불국토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 불자들이 가지는 부처님에 대한 믿음의 내용은 수행도 깨달음도 논하기 이전에 이미 확고한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여기에 혼란이 있어 문제다. 수행과 깨달음을 토대로한 믿음의 형성이라면 그것은 부처님을 믿지 않은 것이 된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말씀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부처님은 깨달음이시고 우리들은 범부다]하는 범부로서의 고집이 있다.
그리고서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은 부처님의 것으로 돌리고 마는 것이다. 여기에 믿음의 공허지대가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
믿음의 공허지대, 참으로 중대한 문제다. 믿음이 공허하기 때문에 제각기 자기 소견대로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날 가장 흔하게 나도는 부처님에 대한 이해는 [부처님은 역사상 인류의 위대한 교사다]라 하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부처님은 약 2천 5백년전에 인도에 나시어 80년쯤 세간에 머무시면서 위대한 진리의 말씀과 거룩한 행적을 남기신 인류의 스승이라고 말을 한다.
그에게 이어서 부처님은 이미 가신 고인이고 오늘날에는 그 말씀의 기록과 유적만이 남아 있는 것이 된다.
다시 말을 바꾸면 부처님은 과거 역사상의 인물이요, 지금은 죽고 없다는 말이 된다.
이런 사람에게 있어서 불교는 철학이요, 수행 본 이요, 종교 사상이다. 고준한 도덕교훈과 수행이론을 닦아가는 사상체계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
여기에서는 명백하게 부처님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누구나 알 것이다.
[부처님은 항상 머무는 몸이요, 허물어지지 않는 몸이요, 금강의 몸이요, 법신인 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역사상 기록에 남은 형상의 부처님만을 생각하고 경전을 배우지 않고 믿지 못하는 주장이다. 그런데도 이런 주장들이 아직도 우리 불교계에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것은 한심한 노릇이다.
둘째로 부처님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이해는 [부처님은 법이다]라는 이해이다. 저 옛날 바가리 비구가 병 들어 몸져 누워 있을 때 그를 찾아오신 부처님께 바가리는 일어서서 예배 하고자 하였다. 부처님을 뵈옵고 예배하고 싶은 것이 그의 마지막 소망이었다. 부처님은 일어나 절하고자 하는 바가리를 말리시면서 말씀하셨다.
[이 몸을 예해서 무엇 하겠느냐. 법을 보는 자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 법을 보느니라.]
부처님은 법이시라는 말씀은 여러 경전에서 볼 수 있다. 형상이 부처님이 아니기 때문에 형상으로 부처님을 삼고자 하는 견해를 강하게 배제하고 있다. 그런데 법이신 부처님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공적한 경계를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일체 형상과 한계를 초절한 무상 무주 무한을 관념하고 있지는 않은가. 또는 우주에 두루한 바연의 법칙처럼 냉엄한 진리성으로 보고 있지는 않은가.
또는 한 물건 설 수 없는 허공성으로 보고 있지는 않은가.
법을 명료하게 깨닫기 이전에 있어서 부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명료해야 하고 확고해야 한다. 그런데도 법이 부처님이라는 이해에는 명료성 확고성이 결여되어 있지 않은가 의심이 된다.
부처님에 대한 확고한 그리고 명료한 믿음과 이해가 없을 때 우리의 수행생활 창조생활은 허약하고 흐트러지기 쉬운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말씀 하셨다.
[나는 성인 가운데 다시 성인이며, 일체세간의 아버지 이니라. 이 삼계는 모두 나의 소유이고, 그 가운데 중생 모두는 나의 자식이라, 나만이 능히 이들을 구호한다.]
이 밀씀은 누구나 다 잘 아는 [법화경]의 말씀이다. 부처님은 법이시로되 단순한 진리이거나 법칙이 아니다. 유무다. 유무를 초월하였다는 등 온갖 희론이 당치 않다.
구태여 말해서 부처님은 법신이시고 무량공덕신이시며 한량없는 변화신을 나투시는 대제헤 대자비의 몸이시다. 부처님은 명백히 [나는 일체 중생의 아버지]라고 하셨다. 자식에 있어 아버지 보다 더한 의지처가 있을까. 아버지는 무조건의 자비이시고 일체 지혜의 근원이시고 무한 위덕의 근원이시다.
부처님은 우리의 말로 규정지을 수 없는 무한자이시로되 우리에게는 끝까지 자비하신 아버지인 것이다. 지혜의 눈으로 시간 이전에서 이후까지를 사무쳐 보시고 범부 중생들의 성숙을 위하여 무한 지혜 무량 방편이 쉴날이 없으시다. 자식의 성숙을 위하여 잠시도 마음을 놓지 않으시는 아버지. 그는 바로 부처님이었다.
그러기에 부처님은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나는 항상 생각하기를 어떻게 하면 중생으로 하여금 무상도에 들어서 속히 불신을 성취하게 할 것인가]한다고 하시지 않았던가.
부처님은 형상이 아니고 마음도 아니신 법이시고 또한 끝없이 자비로우신 인격이신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끝없이 자비로우신 부처님에 의해서 우리들은 미혹의 밤을 지내고 깨달음의 아침을 만나도록 되어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85.>
광덕 큰스님 지음 빛의 목소리 p79 – p83 영원하신 부처님에서, 불광출판사
지난 일에 미련을 두지말자
바람이 성긴 대숲에 불어와도
바람이 지나가면 그 소리를 남기지 않는다.
기러기가 차가운 연못을 지나가도
기러기가 지나가고 나면 그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일이 생기면
비로소 마음이 나타나고 일이 지나고 나면
마음도 따라서 비워진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소유하기를 원한다.
그들의 눈을 즐겁게 해 주는 것,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해 주는 것,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는 것이면
가리지 않고 자기 것으로 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남의 것이기보다는 우리 것으로,
그리고 우리 것이기보다는 내 것이기를 바란다.
나아가서는 내가 가진 것이 유일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기 위하여 소유하고 싶다고
거리낌 없이 말한다.
얼마나 맹목적인 욕구이며 맹목적인 소유인가?
보라.
모든 강물이 흘러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듯이,
사람들은 세월의 강물에 떠밀려
죽음이라는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된다.
소유한다는 것은 머물러 있음을 의미한다.
모든 사물이 어느 한 사람만의 소유가 아니었을 때
그것은 살아 숨쉬며
이 사람 혹은 저 사람과도 대화한다.
모든 자연을 보라.
바람이 성긴 대숲에 불어와도 바람이 가고 나면
그 소리를 남기지 않듯이,
모든 자연은 그렇게 떠나며 보내며 산다.
하찮은 일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지나간 일들에 가혹한 미련을 두지 말자.
그대를 스치고 지나는 것들을 반기고
그대를 찾아와 잠시 머무는 시간을 환영하라.
그리고 비워두라.
언제 다시 그대 가슴에
새로운 손님이 찾아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좋은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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