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기고 공양하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2013. 2. 21. 21:2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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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행원]섬기고 공양하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필요한지...


섬기고 공양하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된가, 얼마나 많은 것들이 필요한지.
그 중 가장 필요하고 절실한 것이 지혜.
지혜야말로 모든 섬김의 모든 것이니, 올바른 지혜 없이는 제대로 된 섬김을 이룰 수 없다.
따라서 섬김의 마음이 강할수록 지혜에 대한 열정 또한 불타오른다.


보현행의 위대함도 여기에 있다.
흔히 보현행을 깨달음과는 무관한 것으로 알지만, 보현행이 깊어질수록 깨달음, 반야에 대할 열망이 끝없이 깊어진다.
마치 갈애, 갈망이라고 할 정도로 그렇게.
그래서 보현행을 하고 보현 속에 들리는 화두는 일반 선승들이 부처되기(?) 위해 드는 화두와 질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진실한 보현행자들이 드는 화두는 처절하다.
마치 설산의 부처님이 그러하셨듯, 일체의 중생들을 생노병사 우비고뇌에서 건져내려는 그 간절한 사무침이, 깨닫기 위해 오직 내가 부처되기 위해 화두를 드는 일반 선자(禪者)들하고는 다른 것이다.


부처님의 성불인연은 무엇이라 보는가? 수행방법의 뛰어남? 아니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행? 그 어떤 것도 바른 답은 되지 못하리.


부처님의 성불은, 그 간절함에 있다.
불전(佛에傳도) 전하듯, 일체중생의 생로병사의 원인과 그 해결방법을 알지 못하면 결단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이 자리에서 죽으리라!

수자타의 우유공양을 받고 기력을 회복하시고, 그리고 보리수 아래 세운 그 간절한 마음이, 마침내 뜨는 새벽별과 함께 무상의 대도를 이루게 한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보현행을 강조하신 우리 광자 덕자 큰스님이, 왜 그렇게 반야법문을 불자들에게 많이 설하셨는지도 알 수 있을 듯.


이렇게 보면 반야와 행원은 둘이 아닌 것. 진실로 반야를 제대로 보신 분만이 보현을 알며,
진실로 보현을 실천하시는 분만이 반야를 아시는 것.


그러나 오늘 날 반야를 아는 분이 보현은 없고,
보현을 하는 분은 반야가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감사하고 찬탄하자

 

기뻐하면 운명이 열린다

 

몸이 정상적인 사람이라도 권위있는 의사가 중병을 선언하면 그때부터 환자의 증세를 호소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이런 일도 있다. 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한 병사는 별안간 고열이 닜다. 군의는 후송해야 될 것이라는 의견이다. 병사 본인은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후송된다는 것이 하도 기쁘고 기뻐서 뛸 듯 싶었다. 그러나 그는 오래지 않아 곧 정상이 되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가 기뻐한 것이 병을 고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대개 공포심을 가지면 병증세가 나타나고 기뻐하면 병은 빨리 낫는다. 이것은 진실이다. 이 진실은 널리 활용되어야 한다. 이 진실은 병에만 적용 되는 것이 아니다. 일체 불행한 일을 몰아내는 데는 기뻐하는 것이 제일의 첩경인 것이다.

 

건강해지면 기뻐할 수 있으리라 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건강해 질까? 약을 먹어서…, 이렇게만 알고 있다면 잘못이다. 약을 먹고 있다는 안심감이 치료에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불안, 초조, 회의, 공포심은 병을 급격히 악화 시키고 없는 병도 불러 일으킨다. 사업도 경색으로 몰아 넣는다. 불행이 몰려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생명력이 활기를 잃었기 때문이다. 왕성한 생명력을 떠나서 행복이 올 수 없고 번영이 올 수 없다.

초조 불안에 싸인 사람에 건강이 올 리 없다. 의기 소침하고 처량한 표정의 사람에게는 행운이 찾아 들지 않는 법이다. 왕성한 활력-이것이 인생에 승리를 가져온다.

 

마음에서 기쁨이 솟아날 때 건강은 조절되고 행운은 모여 든다. 희망과 활기가 넘치는 사람을 사람들은 신뢰하고 협력하는 것이다. 기가 없는 사람, 표정이 어두운 사람, 거기에는 오던 벗도 그에게서 떠난다.

 

우리는 환경이 이루어져야 기뻐지고 표정이 밝아지고 생기가 난다고 하지 말자. 주인은 우리의 마음이다.

 

우리가 마음에 기쁨을 일으킬 때 우리의 환경에는 밝은 일이 모여든다. 건강도 있고 사업의 번영도 있고 행운은 그를 따르는 것이다. 고난을 당하면 이것이 나의 밝음을 더하는 한 소재인 것을 알고 보다 크게 활기를 내고 희망을 부풀게 하며 기쁨과 용기를 온 몸에 가득 채우자. 그리고 모든 생활에서 나의 밝고 발랄한 기쁨을 발휘하자.

 

이것이 주체적인 자기를 사랑하는 길이다.

 

<75.>

 

광덕 큰스님 지음 빛의 목소리 p415 – p416 감사하고 찬탄하자에서, 불광출판사

 

깨달음의 신기루에서 벗어나야-깨달음의 본질은 행(行)과 실천


일반적으로 초기불교(소승불교)는 깨달음이 마치 따로 있어 이것을 우리가 닦아서 구해야 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반면, 대승불교의 가르침은 한결같이 <우리는 이미 깨달아 있다>라고 말합니다. 즉, 닦아서 따로 구할 깨달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불교는 이원론인데 반해 대승불교는 일원론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인 것입니다. 무명도 깨달음도, 번뇌도 해탈도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있는데 다만 우리가 어리석어 자꾸 나누고 분별하므로 없는 무명이 나타나고 없는 깨달음이 있는 것처럼 나타나 우리는 점점 더 거기에 빠져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무얼 닦아서 아는 것도 아니며 무얼 구해야 오는 것도 아니니, 단지 지금 이 자리에서 생각 한번 바꾸면, 즉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꾸면 바로 알 수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강조한 가르침이 선(禪)입니다.


깨달음은 이미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이미 완전하다(本來成佛)! 깨달음은 구할 필요가 없다! 바로 알면 바로 이 세상이 깨달음 투성이인 걸 알게 된다!... 이렇게 대승불교는 수없이 외치나 우리는 도무지 그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자꾸 깨달음을 구하는 가르침에 관심이 쏠리고 깨달음을 닦는 가르침에 솔깃해집니다. 그럴수록 깨달음은 점점 오지 않고, 세상은 깨달음이 따로 있는 듯이 보입니다.


없는 깨달음, 이미 이루어진 깨달음을 그럼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행(行)입니다. 실천을 함으로써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이 세상이 완전하다면, 이미 이 세상에 깨달음이 넘쳐있다면, 우리가 잡을 수도 볼 수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잡고 보는 것 자체가 행입니다. 행을 하지 않으면 아무리 깨달음이 넘쳐도 붙잡을 수도 나툴 수도 없는 것입니다.

 

관음보살이 이 세상이 모두 공(空)한 것을 알아 열반에 이르게 된 것도 그냥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반야바라밀, 바라밀행을 했기에(行深般若波羅密) 일어난 일입니다. 만약 바라밀행이 없었다면 관음같은 대보살도 열반에 이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오로지 깊은 바라밀, 반야의 바라밀행이 있었기에 관음은 이 세상이 모두 공한 것을 알고 마침내 모든 고뇌를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깨달음의 본질, 본체는 행이요 실천입니다. 반야바라밀행이 있어야 반야를 보고 피안에 이르게 됩니다. 그저 가만히 앉아있고 입으로만 깨달음을 논한다고 깨달음은 오지 않습니다. 원효가 말씀하듯 이 세상은 부처님의 보신(報身)입니다. 이미 시공을 초월한 법신불이 시공 속으로 나툰 곳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행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깨달음을 구하기보다 깨달음을 행하라! 없는 신기루를 붙들지 말고 눈앞에 현실에서 깨달음을 실천으로 나투라! 이것에 오늘날 21세기에 요구하는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일 것입니다.


 

 

하니족(哈尼族) 마을의 풍경

 

운남성에만 존재하는 민족으로 거주지역은 홍허(紅河)와 란창지앙

(瀾滄江)의 중간지점인 아이라오산(哀娃)지역에 위치한다.

이 민족의 기원은 수· 당(隨·唐)시기의 허만(和蠻)족속과 관련이 있다.

하니(哈尼), 허니(和尼), 푸뚜(布都), 야니(雅尼) 등 20여종의

종족명칭을 지니고 있었으나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이후 하니족으로 공식명칭을 정하였다.

 

이번호에는 여행객들도 많이 찾는 하니족 마을 풍경을

감상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