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일에 크게 기뻐하라-기쁨에도 훈련이 필요하다

2013. 3. 8. 17:2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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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에 크게 기뻐하라-기쁨에도 훈련이 필요하다


작은 일에 크게 기뻐하라.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기쁨에도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
우리가 얼핏 생각할 때는 기쁨은 우리 본성이라 훈련이 필요없을 것 같지만,
그래서 언제 어느 때건 기뻐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기쁨에도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살면서 우리 마음이 닫혀 가기 때문.

 

어릴 때 우리는 마음이 열려있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든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자라면서 마음은 점점 닫혀져갔다.
삶의 고통이 우리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웃음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기뻐할 줄도 모르게 되었다.
본래 맑고 넘치던 그 기쁨을 우리는 잊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조건이 있을 때만 기뻐한다.
어릴 때 무조건 기뻐던 그 마음이, 이제는 기뻐할 일에만 기뻐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기쁜 일에도 제대로 기뻐할 줄 모른다.
그저 기뻐하는 흉내만 내는 것이다.
참되게 기뻐할 줄은 모르는 것이다.

 

둘째, 우리 삶에 큰 기쁨이 별로 안 오기 때문. 대신 작은 기쁨은 자주 온다.
그래서 큰 기쁨만 기뻐하게 되면 인생에 기뻐할 일이 별로 없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 마음은 점점 더 닫히게 된다.

 

셋째, 기쁨은 기쁨을 낳기 때문.
우리 마음은 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기에 기뻐하는 마음은 기쁜 일을 불러 일으키고 실지로 기쁜 일이 우리에게 오게 한다.
즉, 기쁨은 기쁨을 낳는 것이다.

작은 일에도 기뻐하는 마음이, 굴비 엮듯 기쁨을 불러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마침내 어마어마한 큰 기쁨도 오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작은 일에도 기뻐해야 하는 이유이다.

 

감사하고 찬탄하자

 

영적 생명을 키우는 것

 

우리는 우선 육체를 나로 알고 있다. 이 육체적 생명은 많은 물질과 육체적 요건이 어울려서 보존되고 성장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생명을 보존하고 키우기 위해서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된다. 잘 먹어야 한다. 잘 입어야 한다. 환경이 잘 조화 되어야 한다. 이러한 환경 속의 생활을 유지 할 수 있는 물질적 수요가 풍성히 보장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온갖 노력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육체적인 조건, 물질적인 수확, 감각적인 조화가 얻어지면 우선은 행복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행복이 얼마만한 것일까? 육체적인 생명은 그것이 아무리 풍성하게 생활여건을 보장하고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 주어도 그는 무참히도 그 자신을 보존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다. 육체적 생명 위에 걸치고 있는 위세, 재산, 지위, 그 모두는 죽음과 함께 사라지고 만다.

 

사람이란 육체적 생명을 그 모두로 알고 있는 한 실로 행복이란 없다. 죽음이라는 한계 앞에 놓여 있는 공허한 그림자다. 하지만 육체를 바로 인생 전부로 아는 견해는 이것이 망견임을 알 때, 또 하나의 행복이 여기 나온다. 육체가 생명을 넘어선 영원을 잇는 생명을 발견하는 것이다. 사람은 죽는다. 육체적인 것, 물질적인 것, 감각적인 것, 그 모두는 필경 공허를 실현한다.

 

그러나 그러한 망각적인 것 아닌 것은 허망이 아니다. 거기에는 영원과 무한과 진실이 넘쳐 있는 것이다. 육체적인 생명이 요구하는 안일, 무사, 환락, 만족은 우리로 하여금 나태와 무기력과 퇴폐와 무능으로 치 닫게 하고 마침내 육체라는 건축이 허물어질 때 함께 자취를 잃지만, 육체를 통한 단련과 고난은 우리애게 정신적인 힘을 축적해 주고 영적 생명을 키워주며 진실 생명의 길로 유도 한다.

 

부처님께서는 [매욕(罵辱)]을 감로로 알라고 말씀 하셨다. 감로는 죽지 않는 생명을 키우는 약이다. 이 말씀은 결코 수난 예찬이거나 도덕적 교훈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진실한 사실의 설파인 것이다. 행복이라는 것 이것이 어쩌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위험물이 아닐 까. 고난이라는 것 이것은 영원한 생명에로의 길잡이가 아닐까.

 

우리는 모름지기 행복에서 감사하고 그에 빠짐이 없이 분발하자. 고뇌에서 좌절하지 말고 감사하고 환희심을 갖자. 이것이 현실을 무한 생명의 꽃으로 수용하는 도리가 될 것이다.

 

 

<75.>

 

광덕 큰스님 지음 빛의 목소리 p419 – p420 감사하고 찬탄하자에서, 불광출판사

 

 

 


 

새로운 인생창조

 

지금 내 마음에 있는 것

 

우리들의 국토는 어떤 곳일까? 고난과 불행이 첩첩 엉킨 불안한 세상일까. 아니면 기쁨과 화목과 번영이 넘치는 아름다운 국토일까. 그것은 사람 나름 또는 인생을 보기 나름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인즉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 무엇으로도 비유할 수 없는 아름다운 땅. 부처님의 국토가 우리의 본래 땅인 것이다. 이것은 결코 종교적 환상이 아니라 진리적 현실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느끼고 사는 이 세간은 그렇지 못하니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경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의 국토 환경은 유심소현(唯心所現) 이라 했다. 오늘의 우리 환경은 국토이든 생활이든 신체 요건이든 이 모두는 남이 만들어서 준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만들었다는 말이다. 우리의 일상의 마음 씀씀이가 우리 자신과 생활 환경을 만든 것이다. 이점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일상생활이 사뭇 엄숙해지지 않을 수 없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곧은 마음, 깊은 마음이 보살의 정토]<유마경>라 했다. 그래서 아첨하지 않고 공덕이 부족한 중생이 보살 정토에서 태어난다고 했다. [보시와 지계와 인욕이 보살의 정토]라고도 하였다. 그래서 보살이 성불할 때 능히 애착을 놓고 십선도를 원만히 행하며 32상이 구족한 중생이 그 나라에서 태어난다고 하였다.

 

우리들이 장차 성취할 불국정토에서 태어날 사람도 우리가 닦음을 따라 그에 상응하는 공덕을 갖춘 사람과 장엄이 모여들고 이루어 진다는 말이다. 이 점은 멀리 불국토만에 한한 것이 아니다. 우리들의 오늘날 생활황경도 우리 자신의 심신 요건도 이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 마음에 있는대로 우리와 환경이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자비하고 너그럽고 보시하는 사람에게 자비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모여 들며 보시하는 복된 자신이 되게 한다.

 

밝고 따뜻하고 기쁜 마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밝고 따뜻한 환경은 찾아오고 기쁜 벗들과 함께 있게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마음에서 일체를 이룬다]는 가르침을 배우고 있지만 바로 이 가르침의 참된 실천이 우리와 국토환경을 꾸며 가는 것이다.

 

우리가 이웃에게 밝고 자비한 마음을 보내면 그 마음은 우리에게 돌아와 우리 생활이 밝을 것이다. 반대로 미워하거나 거칠은 마음, 또는 인색한 마음을 품고 그것으로 이웃을 대할 때 우리 환경이 어둡고 거칠은 것은 당연하다. 어떤 마음으로 있는가, 이웃에게 무엇을 주고 있는가. 우리에게 준 것 만큼 되돌아오고 마음에 있는 만큼 환경이 짜여온다.

 

이 점을 생각 한다면 우리 마음에 지금 무엇이 있는가?’ 물어보고 싶어진다. ‘이웃에게 무엇을 주고,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반성하고 싶다. 밝은 마음 자비한 마음인가? 힘껏 도와주고 있는가? 착한 보살심으로 살고 있는가? 매사에 너그럽고 인욕하고 이는가?

 

올해라는 한해도 저물어 간다. 올해의 삶이 자신을 어떻게 가꾸어 왔는가. 돌이켜 보아지는 시점이다. 해는 지고 어둠은 오고 무거운 겨울은 닥쳐 오고, 찬바람 하늘에 가득해도 우리는 지금 내일의 새아침 따뜻한 봄을 생각한다. 그리고 마음이 능히 온 국토를 봄빛 찬 동산으로 만드는 권능자임을 다시 생각한다.

 

이 한 해가 참으로 완성, 건강, 행복으로 이어지는 역사가 되고 청정 불국토를 완성시키는 시간이 되기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다.

 

 

 

<83.>

 

광덕 큰스님 지음 빛의 목소리 p205 – p207 새로운 인생창조에서, 불광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