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예경찬탄불기도)는 기적을 낳는다

2013. 2. 28. 21:3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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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는 기적을 낳는다

 

[보현행원품]에는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말씀하시고 이 공덕을 성취하려면 열 가지 행원을 닦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열 가지의 첫째는 모든 부처님께 예경하는 것이고, 둘째는 모든 부처님을 찬탄하는 것이다.

 

예경은 여러 뜻이 있지만 그 근본은 허망을 버리고, 진실을 받아 들이는 것이며 찬탄의 극치는 감사이다. 그러므로 감사는 예경과 찬탄을 하나로 묶은 것이라 하겠으며 그것은 곧 여래공덕의 성취법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감사에는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위덕이 따라 다닌다.

 

어찌하여 감사에 여래공덕이 따른다고 하는 것인가?

대개 만인은 누구나가 부처님 공덕을 풍성히 갖고 태어났으며 이 땅 구석 구석에는 부처님의 자비 공덕이 가득 실려 있는 것이다. 범부는 이것을 모르고 엉뚱한 계교를 한다. 

 

그런데 감사하는 것은 바로 이 사실의 긍정이며 믿음의 표출이다. 그것은 끝없이 펼쳐있는 무량청정 국토의 무량공덕을 우리 앞에 나타낸다.

 

원래 이것만이 있는 것이다. 원래로 중생이니 번뇌니 죄악이니 업보니 고난이라 하는 것은 기실 없는 것이며 이름조차 없는 것이다. 있다고 보고 어루되는 데서 중생세계는 이루어 간다. 이것이 오온이며 전도몽상이다.

 

감사는 이런 전도몽상을 단번에 끊어버리고 즉시 부처님의 무량청정공덕을 자신 앞에 현출시키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감사에는 한량없는 불가사의 공덕이 따를 수 밖에 없다. 여기에는 이유가 없다. 조건이 없다. 많은 수행도 어려운 고행도 오랜 염불도 자비 보시공덕도 필요 요건이 아니다.

 

오직 합장하고 진정으로 감사할 때 단번에 부처님 은혜를 수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본래로 있는 진리 실상을 긍정하기 때문에 실상 공덕이 나타나는 것이다. 천년 묵은 암흑의 동굴이라도 빛을 받을 때 즉시에 밝아 지듯이 감사하는 찰나에 본분 공덕은 넘쳐나는 것이다. 참으로 신기하고 불가사의한 감사의 공덕이다.

 

 

혹자는 나는 행복하다. 누구의 덕도 아니다. 누구에 감사하랴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진리 실상을 모르는 망견의 망언이다. 이 사람이야 말로 [찰나무상]에서 영원과 평화를 착각하는 가련한 중생인 것이다.

 

감사하자. 오늘의 이 현실속에서 감사하자. 부처님께 감사하고 부모님과 아내와 가족에게 감사하자. 모든 이웃, 모든 형제, 모든 일에 감사하자. 그곳에 자비하신 여래공덕은 넘쳐날 것이다. 실로 감사는 부처님의 무한 자비공덕의 문을 여는 성스러운 작법임을 명심하자.

 

<75.>

 

광덕 큰스님 지음 빛의 목소리 p417 – p418 감사하고 찬탄하자에서, 불광출판사

 

새로운 인생창조

 

불자의 가을수확

 

깊어가는 가을, 산과 들, 개울과 언덕에서 결실의 물결, 수확의 송가는 너울 친다. 더위, 가뭄, 다시 폭우그 모두를 이기고 그를 거름 삼아 풍성한 결실은 왔다.

돌이켜 보아 우리의 수행, 우리의 정진의 결실은 어떠한가. 풍요한 수확을 거두어 들이게 되었는가. 곰곰히 돌이켜 보아지는 가을이다.

 

부처님은 법이시고 진리이시다. 일체에 두루하시고 완전하시다. 절대로서 피아(彼我), 고금(古今), 거래(去來)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처님을 염하고 법이 현전하다는 것은 부처님과의 교통이며, 일체와 통하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닌가.

 

[마하반야바라밀]은 제불과 제불의법의 근원이라 했다. 그러므로 바라밀을 염하고 청정이 현전하다는 것은 바로 부처님과의 교통이 아니겠는가.

이런 점에서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는 우리의 기도는 부처님과의 인격적 교통이고 끝없는 대자대비와 걸림없는 위신력이 우리에게 넘쳐오고 온 생명에 압도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불가불 일념이어야 하고, 무념이어야 하고, 공심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깊고 맑고 가없이 넓은 데에 이르고, 그리고 거기에 잘못된 온갖 상념 등이 께끗이 비워지고 말끔하게 버려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서 부처님의 풍성한 은혜는 참으로 가득 받는 것이 아니겠는가.

 

부처님은 법이시므로 만인에게 평등하시다. 태양의 빛살이 온 누리에 고루 퍼지듯, 차별 없이 모두에게 한없는 자비의 축복이 내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 은혜로운 햇살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 받고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어둠을 헤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것은 창문을 닫고 눈을 감은 사람일 것이다. 청정본성을 외면한 사람일 것이다. 미혹과 욕망에 사로 잡혀 현상 경계로 내어 닫는 자일 것이다.

 

부처님은 자비의 빛이시고, 밝은 빛이시고, 너그러움과 기쁨과 지혜의 빛이시고, 화합과 무위(無爲)의 위신력이 아니신가. 그러므로 이러한 불심광명을 외면한 마음들이 바로 부처님 광명 앞에 눈 감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살펴 볼 때 무엇이 불심에 순응하고 무엇이 불심에 반역하는지가 명백해진다.

 

노여움, 미움, 원망, 슬픔, 질투, 시기, 불행의 예상, 묵은 고통 감정, 억울한 생각, 이것들은 바로 불심에 대한 반역 현상이 아닌가.

어두운 생각, 대립심, 투쟁심, 불평불만, 인색한 마음 내지 남을 가혹하게 비판하는 마음 등, 이 모두는 불심의 반역자가 아닌가.

 

밝은 태양을 가리는 어두운 구름이고, 청풍을 가로막는 두터운 커튼이며, 밝음 앞에 눈을 감고 방황하는 자가 아니겠는가. 그것은 부처님의 걸림 없는 위신력을 믿지 않는 것이며, 끝없는 대자비를 믿지 않는 것이며, 일체에 두루한 원만성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서야 어찌 부처님 자비 은덕이 그 앞에 꽃피게 되겠는가.

 

우리들은 이 한여름을 보내고 가을의 깊이에 잠겨들어 우리 마음 하나하나를 돌이켜 본다. 대자비의 광명이 찬란한가. 가슴속 구석구석에 은혜로운 위덕에 감사한 마음이 충만한가. 감사는 부처님 대자대비 전면긍정이다. 대자비 은혜에 대한 직접 반응이다. 마음을 다시 돌이켜 살펴 보는 것이다.

 

깊어가는 가을, 만상이 고요를 향하여 잠들어 가는 가을, 우리 모두 생각을 거두어 고요에 잠겨보자. 우리의 생각, 우리의 감정이 과연 비었는가. 잘못된 상념, 비뚤어진 격한 감정은 없는가.

 

마음의 고요, 마음의 청정, 너울치는 환희 그리고 활기가 우리의 참 수확이 아닌가. 아름답고 지혜롭고 끝없는 용기는 여기서 용솟음치고, 부처님의 무한 창조의 위신력이 우리의 생각위에 피어나고 뻗어 나가는 것이다. 고요를 여물어 가는 가을의 복판에 서서 불심의 고요한 맥박에 깊이 귀 기울인다.

그리고 대지에 뿌리내려 새로운 연륜을 준비하는 새로운 정진을 구성하고 다짐한다.  

 

 

<84.>

 

광덕 큰스님 지음 빛의 목소리 p212 – p215 새로운 인생창조에서, 불광출판사

 

새로운 인생창조

 

저물지 않는 태양을 지닌 자

 

우리 세간에는 나는 범부다. 인간은 육체적 존재다.’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통용되고 잇다. 그 중에서도 겸허한 종교인이 되면 우리는 죄인이다라는 생각에 얽혀있는 것을 본다. 이런 점은 불교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흔히 보는 현상이다. ‘나는 업이 중한 중생이라든가, 인간은 모두가 죄업소생이라든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좀 불교 수행을 하였다는 사람들은 범부가 성불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 성불이라는 것이 무량겁을 두고 수행한 연후에 이루어질 먼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며 희망이다. ‘지금 나는 중생이다하는 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의견들에 대하여 반야를 아는 사람이나 불법을 제대로 수행한 사람이면 의례히 부처님의 말씀을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원래로 범부가 아니며, 속박된 자가 아니며, 죄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래 닦아서 미래에 성불할 가능성을 지닌자가 아니라 지금 이미 완성자이며 무량한 공덕을 갖춘 자인 것임을 믿는다.

 

불법을 만나 바르게 믿고 배운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문자 그대로 속박과 해탈의 차이며, 어둠과 밝음의 차이며, 범부와 성인 만큼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상태, 믿음의 내용에 따라 그 인간성과 활동이 달라지고 필경 그 환경과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불안으로써 일체 중생을 보건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번뇌가 있어도 그 가운데 여래의 지혜(如來智) 여래의 눈(如來眼)과 여래의 몸(如來身)이 있어 엄연 부동하다.

 

일체중생은 비록 여러가지 번뇌에 싸여있다 하더라도 여래장이 있어 언제나 물들음이나 더러움이 없이 덕상(德相)을 두루 갖추어 여래와 다를 바가 없느니라.]<여래장경>

 

부처님의 이 말씀은 [진실] 그대로의 설파이시다. 진리의 안목으로 인간의 실상, 진리의 실상을 여실하게 보시고 여실하게 설하신 말씀이다. 누가 있어 이 말씀에 이의를 할 것이며, 조건을 말할 것인가.

 

 위대한 진리의 말씀이며 눈부신 인간 선언인 것이다. 푸른 하늘에 영겁으로 빛나는 찬란한 태양을 부처님은 친히 보시고 사실 그대로를 말씀 하셨다.

 

그렇지만 문제는 이 말씀을 믿지 않는 법부들에게 있다. 자신의 생명에 진리의 태양이 빛나고 있어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다고 하여 자신의 생명 깊이에 타오르는 진리의 태양이 변할 리가 없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믿든 믿지 않든 인간은 불성이요, 위대한 창조의 중심인 점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이 점을 알게 되면 인간은 먼저 스스로를 존경하고 크게 자중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한 가족 또는 이웃과 벗, 또는 거리에서 만나는 그 모든 사람에게 존중을 바치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한 걸음 더 나아가 반야의 가르침을 이해하게 되면 온 이웃 온 중생 온 세계가 자신과 더불어 대립된 몸이 아님을 알게 되는데 이르러서는 더 말할 나위 없다. 받들어 섬기고, 상대방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스스로의 이익이고 성장이며 기쁨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대립이 무너지고 화해의 문이 열리고 기쁨과 행동의 뜨거운 흐름이 열리는 것이다. 이 점은 누차 언급한 바이므로 중언부언을 피하거니와 어쨌든 믿음이 확립된 불자에는 자신과 존경과 감사가 언제나 넘치는 것이다.

 

우리들의 겉모습은 천태만상이다. 또 각자가 지닌 개성도 가지 각색이다. 그런데 우리의 천태만상 가지각색의 개성의 말 뿌리에 진리의 무한력, 부처님의 무한 위신력이 깃들어 있는데야 어찌하랴. 세간에서 어떻게 평가되든 우리가 지닌 개성의 뿌리에 부처님의 무한 위신력이 이어져있고, 부처님의 무한 위신력은 우리의 개성을 통하여 구체적 형태를 나투는 것이다. 우리의 개성이라는 통로를 통하여 부처님의 대자비 무한 위신력이 솟아 나오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존재인 듯이 보여도 우리 자신의 생명에 부처님의 대진리 생명이 하나로 이어져 팽팽히 넘치고 있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런데서 우리는 내 생명, 부처님 생명, 무한공덕 생명, [나무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밝은 태양 밑에서 혹은 밝게 살고, 혹은 어둡게도 산다. 대 진리 생명을 지닌 불자이면서도 혹은 환희를 살고, 혹은 우수와 비탄에 젖는 사람도 있다. 대 진리의 물결이 생명의 깊이에서 물결치는데도 어찌하여 이런 차이가 있을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자기 생각 자기 감정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에 달려있다. 마치 푸른하늘에 걸친 한 가닥 구름을 하늘 전체로 삼고 구름에 묻힌 것과 같다.

 

마음이 일체를 만든다고 했다. 무한한 생명의 빛이 비쳐드는 창문을 어떻게 관리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밝은 마음, 밝은 감정에서 밝은 것이 나타나고, 어두운 감정, 어두운 생각은 어두운 환경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가, 우리 생명의 진실이 태양 같은 부처님의 공덕인데 어찌하여 어두운 마음, 어두운 감정에서 어두운 환경을 불러들인단 말인가. 이것은 진리이신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요, 진리를 거역하고, 자신을 불행으로 떨어뜨리는 근원이 된다.

 

참된 불자라면, 비록 일찰나라도 어두운 감정을 품는 것은 부처님에 대한 거역이요, 진실 자신에 대한 배반이며, 불행을 장만하는 죄악인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본래 밝고 위대한 자기에 대한 부정내지 거부가 불법에 대한 불신이며, 불행의 씨앗인 것을 다시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 생명인 자신을 믿고, 진리공덕을 갖춘 온 이웃을 믿고 마음의 밝음을 품은 자, 이 사람이 진실 불자다. 참으로 아름다움 덕성을 지닌 자다. 그런 만큼 악덕 가운데에 첫째가는 악덕은 불신과 어두운 마음인 것도 또한 알 수 있다.

 

밝은 생각 밝은 감정을 항상 지키자. 내 생명 깊이에서 밝아오는 부처님의 은덕 광명을 감사하게 받자. 이것이 밝은 마음인 것이다. 마치 내 생명의 진리 광명이 넘쳐오도록 개아 생명의 창문을 활짝여는 것과도 같다. 거기서 대자비 위신력이 거침없이 비쳐들어 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진리광명 아래 온갖 개성을 키운다. 개성을 통하여 자기를 표현하고 자신을 성장시키며, 사회의 수요를 채우고 다양한 아름다움을 보탠다. 개성이 지닌 무진장의 재능이 싹을 티우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는다. 이렇게 해서 진리의 말씀에 대한 믿음은 밝은 마음으로 나타나고 우리 환경 국토에는 조화롭고 풍요로운 화장장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달이 가고, 또 한 해가 간다. 진리의 태양 찬란한, 다함 없는 밝은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자. 축복 가득한 새해의 문이 열릴 것이다.

 

 

<86.>

 

광덕 큰스님 지음 빛의 목소리 p216 – p220 새로운 인생창조에서, 불광출판사

 

새로운 인생창조

 

진리가 나를 움직인다.

 

우리는 흔히 몸은 육체이고 물질의 공급이나 환경조건의 조절로 살아 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 육체인가 물질인가 묻는다면 분명 육체가 내가 아니고 물질이 내가 아니라고 대답하게 된다.

 

[]라고 하는 나는 육체를 움직이고 물질을 사용하며 한경에 적응하고 또한 적응하며 살아가는 [나 자신]이다. 육체가 나라면 오척단구 백년 미만의 육체가 어찌 영원을 생각하고 무한을 꿈 꾸겠는가.

 

 분명 육체로 사는 나는, 영원과 무한으로 사는 자임에 틀림없다. 또한 우리가 물질이라면 어찌 물질에 없는 지성과 감성과 예술적 능력이 있다는 말인가. 밝은 지성, 높은 도덕성 아름다운 감성을 물질에서 찾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원래로 물질에는 사고 능력이 없다. 없는 사고 능력을 물질은 내지 못할 것이다.

 

분명 우리는 육체로 사는 듯 하지만 실로는 육체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닌 것이다. 육체를 넘어선 어떤 위대한 존재가 살고 있는 것이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신묘하기 이를 데 없는 생명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영묘한 법성의 표현인 것이다. 우리의 생명은 바로 무한 진리의 표현이고, 우리의 생명은 물질을 살고 육체를 살고 환경 조건을 살아가고 있는 주인공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들의 삶의 실존은 바로 법성이며 부처님의 은혜로운 공덕이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무한과 영원을 생각하고 행복과 평화를 생각하며 성취와 자재와 무한을 추구한다. 우리들 자신이 진리 생명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 자신은 육체만을 보거나 육체를 믿지 말아야 할 것이다. 환경 조건만을 보고 그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아니된다. 마땅히 육체를 믿지 말고 환경에 사로 잡히지 말고 자기 생명을 바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내 생명이 법성 무한공덕의 표현임을 볼 때 우리의 능력은 무한대로 확대되고 온갖 장애를 극복하여 위대한 자기를 실현할 수 있다. 육체와 물질은 유한이지만 법성진리는 무한인 것이다.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면 우리는 걱정하고 때로는 절망한다. 그것은 어렵게 문제성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압도 되었기 대문이다. 그 결과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실망에 빠진다. 걱정과 불안이, 생명의 위대한 진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무한 성취 진리의 통로를 가로 막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때는 모름지기 모든 생각 다 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 참된 자기 생명의 무한력을 신뢰하고 큰 희망을 부풀려야 한다. 내 힘으로 힘써 무엇이 된다고 생각하지 말자. 진리의 무한성이 우리를 움직여 우리가 노력하고 길을 열어가는 것임을 알자.

 

불안, 초조 온갖 집착을 말끔히 포기할 때 진리의 밝은 달은 우리 생명 전면에 그 빛을 가득히 펴 오는 것이다. 새로운 지혜, 성공의 물줄기는 거기서 흘러 나온다. 실로 진리의 위신력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이니 어려울 것 없고 두려울 게 없는 것이다. 나의 생명 깊숙히 간직된 위대한 위신력을 우리의 아집이나 공포심으로 가로 막지 말자.

 

생명을 꽃 피우고 국토를 성취하는 위대한 힘이 우리에게는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우리들은 너무나 한눈을 팔고 있지 아니한가. 현상에 사로 잡히고 경계에 집착하고 감정의 포로가 되어 스스로의 전면에 어두운 구름을 망각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육체의 힘, 환경요건에 매달려 일희 일우하고 있지는 않는가. 모름지기 자성 태양 무한공덕인 반야바라밀을 염하여 법성 무애 위신력에 귀의 하여야 하겠다. 그래서 우리의 생활과 환경과 국토 위에 무한한 창조를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83.>

 

광덕 큰스님 지음 빛의 목소리 p202 – p204 새로운 인생창조에서, 불광출판사

 

 

새로운 인생창조

 

청정광명으로 마음을 채우자

 

우리들은 맑은 가을 하늘과 같이 마음을 맑게 해야 한다고들 한다. 거기에는 번뇌가 없고 탐심이 없고, 성내는 불꽃도 없는 청정, 평화, 본심의 경계가 열려 있다. 맑은 하늘에 시원스러운 달빛이 가득하듯, 청정한 기쁨이 자약하다. 거기서 진실도 지혜도 희망도 용기도 너울쳐 나온다.

그런데 번연히 그런 줄 알면서도 우리의 마음은 어지럽기 일쑤다. 경계가 고요하면 고요한 망념이 생기고 경계가 거칠면 거치른 망념이 소용돌이 치고 경계가 자신과 어긋나면 분노의 불빛이 활활 타 오른다. 이루지 못한 한에서 원망이 싹트고, 뜻을 따라주지 않는 세간과 환경을 저주스럽게 내다본다. 뜻대로 되지 않는 세간 속을 헤매다 보면 우리의 마음은 어둡게 되고 소침해 오는 것이 일상이다.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다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빈집처럼 동풍도 서풍도 먼지도 날아온다. 노인도 행상꾼도 거지도 머물다 가고 향기로운 꽃잎도 날려 든다. 우리 마음을 빈집처럼, 임자 없는 집처럼 맡겨두고 있지는 아니한가 살필 일이다. 우리들은 모름지기 우리 마음을 가을 달처럼 맑게 지키고 다듬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지 못하고 임자 없는 집처럼 내어 버리는 데서, 방황하고 미혹은 더해가며 고난과 장애는 밀려 들고 앞 길에 어두운 그림자가 밀려 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우리의 마음을 지켜 갈까! 미움과 번뇌의 물결을 잠재우고 분노 불꽃을 꺼 버릴 수 있을까? 경전에는 많은 말씀이 있다. 그 중에서 우리의 격심한 분노. 적개심을 잠재워 주신 부처님의 자비하신 방편은 영원히 우리의 마음을 붙들어 준다.

그 때는 부처님이 성도한지 4년 쯤 되는 해로 전해온다. 가비라성과 코올리성 중간을 흐르는 강물이 마를지경으로 오래 가물었다. 원래 이 강물은 양쪽사람들이 물을 끌어 농업용수로 쓰는 물이다. 날이 가물으니 제방을 만들어 양쪽에서 물을 끌어 들였다. 물이 달리자 물싸움이 벌어졌다. 서로 욕질하고 폭력이 오고 가고 마침내는 양쪽 왕까지 동원된 군대의 싸움으로 발전했다.

이 사실을 삼매중에서 지켜보신 부처님은, [내가 가야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양쪽이 모두 멸망한다], 생각하시고 군중이 대결하고 이는 강 복판 상공에 좌선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강 양쪽에 진을 치고 있던 사람들은 부처님을 뵙자 모두 무기를 버리고 합장 예배 드렸다. 부처님은 말씀 하셨다.

[왜들 싸우려 하는가?]

결국 물 때문에 싸우는 것이고 물과 사람은 바꿀 수 없는 것인데 물 때문에 사람 목숨을 버리려 하고 있는 어리석음을 스스로 깨닫게 하셨다.

 

쌍방이 무기를 들고 맞싸우려는 싸움의 현장에 부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분노의 복판에 부처님이 임하심으로써 분노는 가라앉고 이성은 회복되고 싸움은 멎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많은 것을 배운다. 분노의 불꽃에서는 이성의 성이 타버리고, 부처님을 생각할 때 분노는 잠자고 지혜의 달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부처님을 잊은 데서 불길은 타오르고 탐욕의 구름은 두터워지며 고난의 가시덤불은 깊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분노가 치밀어 오는 것을 가라 앉히고 어리석은 마음이 복 받쳐 오는 것을 해소 시키고 탐욕의 구름이 밀려 오는 것을 흩어버리자면 우리마음에 부처님을 모시는 것이었다.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부처님을 일심으로 염하면 번뇌의 불길이 사라지고 무지의 성이 무너지며 지혜의 태양이 솟아오르는 것을 알 수 있다.

 

저때에 인도 로히니강 상공에 부처님을 맞이하고서 살기 서린 전쟁이 멈췄던 것을 생각하면, 오늘날 파도 높은 물결 속을 헤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마음을 지켜 끊임없이 밀려드는 삼독의 물결을 소멸하자면 끊임없이 부처님을 염하여야 할 것을 다시 배운다.

 

 부처님을 염하여 마음에 밝은 달을 지키고 불신력을 가득 채우자. 우리의 마음을 진정 주인 있는 마음으로 다듬어가자. 이렇게 해서 우리의 마음에 밝은 달이 교교히 빛나게 되는 것을 다시 생각한다.

 

 

 

<83.>

 

광덕 큰스님 지음 빛의 목소리 p198 – p201 새로운 인생창조에서, 불광출판사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친구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처럼
언제나 따뜻한 마음 한 줄기가 고요하게
가슴으로 흐르는 것이 친구입니다.

매일 만나도 매일 만나지 않아도
가까이 있든 멀리있든 고요히 흐르는 강물처럼
늘 가슴 한켠에 말없이
잔잔한 그리움으로 밀려오는 친구가

진실한 마음의 진정한 친구입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늘 그 모습 그대로 오염되지 않는
맑디맑은 샘물처럼 우정의 마음도 솔솔 솟아나는
그런 친구가 맑은 영혼의 친구입니다.


 

 
친구간에는 어떤 언어가 필요없습니다.
그 친구가 지금 어떤 상황이든
어떤 심정이든 굳이 말을 안 해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친구
가슴에 담아져 있는 친구
그런 친구가 진정한 마음의 친구입니다.

마음을 담아 걱정해 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얼어붙은 가슴을 녹이고
바라보는 진실한 눈빛이 아픈 마음을 적시게 하는

그런 친구가 영원히 변치 않는 우정의 친구입니다.

 


친구 지간에는 아무런 대가도
계산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멀리 있어도 마음으로 의지하고
그리워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동반자 같은 진정한 친구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같이 아파하고 함께 웃을 수 있는

희로애락을 같이 할 수 있는 지란지교 같은
그런 친구가 진정한 친구입니다.

우리 마음 한자락 비우고
이런 친구가 되지 않으시렵니까?

- 좋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