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2. 28. 21:19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한낮에 등불을 든 까닭은/원철스님
그동안 많은 등을 보고 듣고 또 만났다. 그래서 등은 이 세상 사람들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임을 알았다. 남포등 이야기는 불일암 후박나무 밑에 잠든 법정 스님의 글에 나온다. 남포는 램프를 동아시아식으로 표기한 말이다.
그런데 당신은 그 등을 굳이 ‘호야등’이라고 표현했다. 이 한마디 단어 속에서도 나름의 개성이 알게 모르게 드러난다.
스님은 해인사 시절, 밤새 등을 켜놓고 책을 읽었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경전을 번역했고, 또 윤문하는 일까지 돕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큰 절에서는 밤 아홉 시만 되면 무조건 불을 꺼야 하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럼에도 그때 이미 ‘큰 그릇임’을 알아본 산중 어른인 자운(慈雲·1911~1992) 대율사의 배려로 밤새도록 불을 밝힐 수 있었다.
등피인 유리를 닦으며 마음을 함께 닦았을 것이고, 기름을 채우면서 젊은 날 괴팍했던 당신을 이해해 주고 알아주었던 그 어른을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남포등은 당신에겐 추억의 등이었다.
얼마 전, 일본 나라(奈良)에서 만난 가스가타이샤(春日大社) 신사의 삼천등(三千燈)은 소원의 등이었다. 목재로 만들어진 가장 큰 건물로 이름 높은 도다이지(東大寺)와 사이좋게 권역을 함께하고 있었다.
입구부터 본당까지 참배로에는 석등 2000여 기가 일렬로 섰고, 회랑에는 크기가 만만찮은 구리로 만든 등 1000여 개가 줄을 지어 처마에 매달려 있다. 이끼 낀 석등과 푸른 녹이 슨 구리등은 오랜 연륜을 과시하고 있었다.
더불어 사이사이에 방금 만든 듯한 새 등도 함께 끼여 있어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별다른 차이가 없음을 말없이 증명했다.
1년에 두 번, 밤에 일제히 불을 켜는데 그때를 제대로 맞추어 오면 수많은 등불이 온 세상을 밝히는 장관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등불 축제 기간에는 등을 시주한 후손들이 불을 밝힌다. 그리고 자신과 가족의 안녕과 복을 비는 내용을 적은 종이를 붙이고 정성스럽게 기도하는 전통이 오랜 세월 면면이 이어진 원당(願堂)이었다.
작은 방석 한 개를 갖고도 절반씩 나누어 같이 앉을 만큼 ‘절친’ 관계를 수십 년 동안 유지해 온 여든 살 중반의 두 노장님이 주인공이었다. 그 옛날 젊다는 호기만을 믿고 무리하게 길을 나선 것이 화근이었다. 심심산골의 암자는 생각보다 훨씬 멀었다.
이미 산 언저리에서 날이 어두워지는 바람에 길을 잃고 만 것이다. 한참을 헤맨 후 칠흑 속에서 저 멀리 가물가물 비치는 창호문의 불빛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기진맥진한 터라 더 이상 걸을 수조차 없는 지경이었다.
할 수 없이 불빛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질렀다. 얼마 후 멀리서 등불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인기척을 내면서 아래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처음 얼굴을 마주한 후 오늘까지 수행길을 함께해 온 둘도 없는 벗으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 등은 ‘만남의 등’이라고 할 것이다.등은 예나 지금이나 한밤중에 들어야 제격이다. 깜깜한 산길이라면 더욱 빛날 것이다. 하지만 알렉산더대왕과 또 다른 의미에서 단짝이었던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한낮에 등불 들기를 즐겼다.
온 시내를 쏘다니면서 입으로 연방 “어둡구나! 어둡구나!”를 외치며 천천히 걷곤 했다. 안근(眼根·눈) 없는 그에게 곁을 지나가던 호기심 많은 사람이 이유를 물었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듯이, 한낮에 등을 든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세계에만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훈계하려는 선지식의 대중을 향한 사랑이었다.
사실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래서 정말 어두운 줄조차 모르는 내면의 마음세계도 함께 비춰보라는 자비심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연등불’이란 우아한 이름을 가진 낭자가 진흙길을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모두 덮어버리듯이, 연등빛으로 마음의 어둠까지 환히 밝혀야겠다. 그리고 디오게네스처럼 이렇게 혼잣말을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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