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 아닌 것이 없다/현정선원

2013. 2. 28. 21:5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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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실제(實際)라고 여기는 이 세상을 허공으로 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답>실제라고 보건, 허공으로 보건 모두 꿈속이오. 모두가 꿈인데 굳이

          이 꿈을

 

저 꿈으로 바꿔야 하겠소?
하늘도 땅도 이 몸도 모두 허깨비요. 모두 인연(因緣)화합으로 된 것이란 말이오.

그런데 그 인연의 소재(素材)를 살펴보면 딱히 이것이라

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 역시 모두 인연으로 나툰 것이기 때문이지요. 즉 인연이라 할만한 인연이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인연이 화합할 때에 화합한 인연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 무엇을 무엇으로 바꿀게 있겠습니까? 본래 아무 일 없는 겁니다.

미혹한 중생들이 헷갈려서 무슨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하기 때문에 그것이 모두

꿈같고 환(幻)같은 것이라고 일러주는 것이오.

그 말을 들으면 깨끗이 끝내질 못하고 다시, "어떻게 하면 그 꿈같고 환같은 것을 깨끗이
쓸어버릴 수 있겠습니까?"하고 묻습니다. 이미 꿈같고 환같은 것인데 굳이 쓸어버릴

게 뭐가 있겠어요, 모두 꿈인데?··· 꿈이라고 알았으면 이미 여읜 겁니다.

확철히 사무치질 못하고 한 토막 지견으로 알아서 탈이지.


질문자가 허공으로 봐도 허공이고 허공으로 안 봐도 허공이오.

허공이란 이름은 억지로 빌려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허공'이란 말을 듣고
그에 상응하는 그 어떤 이미지를 머리에 떠올린다면 그 사람은 허공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제가 머리로 지은 망상을 굴리고 있는 겁니다.

문제는 자기 자신이 허공이란 것이오. 이 세상에 허공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허공 아닌 게 없다면 그 '허공'이란 이름이 어디에 해당하겠소?

 

         

          -현정선원 법정님-

 

 

 

<문>제가 유독 법정님의 글에 대한 집착이 있어서 질문드립니다.
법정님 글을 빠짐없이 잘 이해하면 뭔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이번이 벌써 4번째인데,이제는 차라리 제가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려서

'이도리'고 '저도리'고 다 잊어버리고,외딴섬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경책부탁드립니다.


<답> 대개, 이른바 <진리탐구>(眞理探究)에 뜻을 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공통의 오류는,「내가 꼭 '진리'를 탐구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면서,

지금 그렇게 다짐하고, 또 그와 같은 희망을 추구하면서 노력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바로 '진리' 그 자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거두절미하고, 이 세상은 ― 유정(有情) 무정(無情)을 막론하고 ― 온통
'진리' 그 자체입니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이른 바 「'마음'이 그대로 '부처'요, '마음'이 그대로

'법'이니, 결코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지 말고, '마음' 밖에서 '법'을 구하지 말라

고 한 말이 다 이 뜻이 아니겠어요? 이 말을 듣고 알아들은 바가 있을까

걱정이군요. 왜냐하면, <무엇인가를 알아들었다>는 것은 곧, '마음' 밖에서

<다른 것>을 알아차렸다는 뜻일 테니,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히 '진리'가 아니고, ― 자기 자신이 평소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지견(知見)의 한 토막을 되살려낸 것에 불과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 '진리'(佛法)는 결코 학인(學人)에 의하여 증득(證得)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구경의 깨달음>(究竟覺)은 전체(全體)가

<참된 하나>에 융즉(融卽)하여, 도무지 자타(自他) 피차(彼此) 내외(內外) 등의

구분이 전혀 없는 경지이니, 그렇다면 대체 <누가> 있어서 <무엇>을

<보고 듣고 깨닫고 알고>(見聞覺知) 하겠어요?

그러므로 고인이 이르기를, 「앎이 있으면 범부요, 앎이 없으면 목석이리니,

<알되 앎이 없는 앎>(知而無得)이라야 비로소 참되니라.」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여여부동(如如不動)한 <본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본래 구족히

갖춰져 있는 <천진(天眞)한 본래 마음>인데, 사람들이 늘 쓰고 있으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헛되이 밖을 향하여 헛애를 쓰고 있으니, 딱한 일입니다.

원래 <영지>(靈知)는 <알고 모름>(知·不知)의 포섭이 아니니, 모름지기 사물을

대하여 알음알이를 짓지 말고, 그저 무념(無念)으로 <고요히 비출 수 있으면>(寂照)

그제야 모든 것을 다 쉬어서, 구경(究竟)에 상응할 수 있으니,

결코 다른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정선원 법정님의 문답법문- 

< 질문 >

 돌기둥의 피곤함이 참 피곤함이라는 말씀과

돌계집이 아이를 낳는다는 말씀이· · · · · ·


< 답변 >

 노상 '같습니까, 다릅니까', '맞습니까 틀립니까'· · · · · · 그렇게 기존의

상식을 앞세워 머리를 굴려 계속 '이쪽일까, 저쪽일까' 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인연이 없는 거요.
이 길을 가려면 세속의 일체의 기존상식이 종언(終焉)을 고해야 하오.· · · · · ·

내가 지금까지 하는 말들은 전혀 내용이 복잡하거나 어렵고 난삽한 얘기가

아니오. 다만 여러분 안방을 차지하고 있는 그 케케묵은 기존의 상식과

기억이 새로운 정보를 계속 거부하고 차단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공부의

진척이 없는 거요.

 예전에 몰랐던 것을 새로 알아내는 것이 질문이 아니오.

마음 밝히는 이 자리에는 묻는 자와 대답하는 자, 물음의 내용과 대답의

내용, 그런 능·소(能所)가 전부 자체의 성품이 없어서 도무지 뭐 하나 딱히

이것이라고 가리킬 것이 없다는 것이 이미 밝혀졌소. 그러니 도무지 보고

듣고 해서 뭔가를 안다, 모른다 하는 것은 전혀 말이 안 되는 소리요.· · · · · ·

이 말은 안 보고 안 듣는다는 얘기가 아니고, 지금처럼 다 보고 다 듣지만,

법성의 도리에 비추어 보면, 볼 때에 보는 자도 보는 바도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거요. 그렇게 보는 자도 보는 바도 없는 게 진실이라면,

지금 '내'가 보고 듣고, 또 그 본 바, 들은 바 때문에 이러쿵저러쿵 하는

일련의 일들은 전부 꿈속에서 잠꼬대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거요.

 '이겁니까, 저겁니까' '맞습니까, 틀립니까' 에만 늘 코가 꿰여있는 있는

사람은, 같음과 다름이 전혀 다르지 않은 동이법문(同異法門)을 확실히

알아야 하오.· · · · · · 근본에서 보면 같은데 작용에서 보면 다른 거요.

체(體)와 용(用)이 둘이 아니라 소리는 늘 하는 말인데도 그 말을 깊이

참구하질 않고, 늘 건성건성 흘려듣고 있는 거요.· · · · · ·

 

항상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항상 같은 것이 진실임에도, 어리석은

중생이 노상, 같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늘 다르게 드러난 모양만 보고

울고불고 하고 있는 거요.


- 현정선원> 법정>님의 법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