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립문자不立文字 / 일붕 서경보 큰스님

2013. 2. 28. 21:5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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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자어구 불입문자  / 일붕 서경보 큰스님

 

 

 <원각경>에 이르시되,<수다라경>은 달을 표하여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으니라 하셨다 .그런데 슬픈 것은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 심월을 보지 못하고 대개 손가락만 보고

손가락에 대한 의론(議論)에만 몰두하고 있는것이다.

 

그러므로 실제의 입장에서 본다면 비상한 견해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선종에서는 경전 경문인 문장에 대하여

두가지 구분을 하고 있으니 하나는 종(從)이라는 입장이요,

다른하나는 탈(奪)이라는 입장이다.

 

어떤납자가 선사에게,"선종에<소의경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물은즉 선사 이르되,"권(權)으로 놓아주어

종(縱),이것을 논하자면 <일대장경>이 모두가 <소의경전>이요,

탈(奪)하여 이것을 논하자면 일언반구의 소의(所依)도

없느니라"고 했다

 

이 두가지 입장에 나아가서 설명을 첨부하되,먼저 세존께서

설법하신 사실부터 말하자면 미(迷)하여 있는 중생을 위해

그 깨달음의 길을 말씀하신 것이므로 어느 경전이나

모두가 귀중한 것 뿐이다.아무리 얕은 법문이라도 상대방의

미혹한 중생을 건져주시려고 설하신 법문이기 때문에 하나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만한 이익이 있는 것이니까

 

이러한 사정을 허락하여 종(縱)해 주어서 보면 <일대장경>이

다 선종의 <소의경전>이 되고 조도품(助道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범부가 집착을 가진 상정(常情)으로 본다면

 

모두가자기가 보는경전에만 집착하고 구속되어서

 다른 경전들을 자유롭고 공평하게 읽지못하고

대승이니 소승이니 하여 심천(深淺)을 가리어

 

혹 읽는다 할지라도 그 문자 어구의 이론에 팔려서

조문(條文) 해석에만 몰두하여 귀중한 수행을 등한히 하고

자기의 본분각하(本分脚下)나 자심을 구명하는 일을 망각한다면

도리어 폐해가 백출(百出)할 뿐으로 일생을 허송하고 말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하든지 본래의 입장으로 돌아가 깨달아서 스스로 증득하기전에는 그 본성을 설명할수 없는 것이요,

 

구경진리는 불가언불가설(不可言不可說) 의 묘한 곳에 있기

때문에 인인각자(人人各自)로 하여금 실참실구(實參實究)할 것을

권할 수밖에는 별도리가 없기 때문에 탈(奪)하여 일체 경전을

부인하는 것이요, 일체선사의 법어 어록까지도 보는 것을

부정하고 불입문자를 내세우는 것이다.

 

 

 

 

   원공법계제중생자타일시성불도 ()...

     

 <불교명저)(서음미디어 발행) 제2권 

 "선이란무엇인가 "에서 발췌

선과 언어 (2) /김 태환

<현대불교신문> 기고글.

 

나가르쥬나의 중관사상은 ‘삿됨을 깨뜨리는 것이 곧 올바름을 드러내는 것

(破邪卽顯正)’이라 하여 삿됨을 깨뜨리는 희론적멸(戱論寂滅)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에 비하여 ‘바로 마음을 가리킴(直指人心)’과 ‘성을 보아 깨달음을 성취함

(見性成佛)’이라는 특성을 가진 선은, ‘삿됨을 깨뜨리는 것(破邪)’ 보다는

 ‘올바름을 드러내는 것(顯正)’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 점은 규봉종밀이 <도서>에서 마조(馬祖)의 선을 가리켜 직현심성종(直顯心性宗)

이라 부르고 있는 것에도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중관사상이 희론적멸이라는

파사를 통하여 현정을 성취하는 구조라면, 선은 현정을 바로 성취함으로써

파사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즉 선에서는 궁극의 목적인

견성을 중간과정 없이 바로 성취하려 한다.

 

선(앞에서 말했듯이 여기서 선이라 하면 곧 조사선을 말한다)을 돈교(頓敎) 혹은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중관사상에서 파사를

 희론적멸이라고 하는 것은 곧 언어의 구속으로부터 해탈함을 말한다.

언어로부터의 해탈은 달리 말하면 분별의식 혹은 관념으로부터의 해탈이며,

이것은 불교의 본질이다. 선에서의 견성 역시 언어의 자성(自性)을 바로 봄으로써

언어(곧 분별의식)의 질곡에서 벗어나는 체험이다.

선사들이 언어관념의 구속을 풀어주는 구체적 방편은 △논리적으로는 결코 풀 수

없는 모순적 상황을 연출하거나 △현재의 경험 사실을 그대로 가리키거나 하는,

두 가지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의 경우는 ‘이렇다고 말해도 안되고 이렇지 않다고 말해도 안된다’거나,

 ‘들어가도 안되고 나가도 안된다’ 하는 등 이른바 사구(四句)를 여의고 백비(百非)를

끊고서 한 마디 말해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한 모든

종류의 생각과 언어를 배제시킴으로써 언어관념의 길을 차단시켜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쥐가 소의 뿔 속으로 기어들어가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설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경우에 봉착하여 꼼짝하지 못하는 것처럼, 언어관념을 통한 사려분별

로서는 어떻게도 손을 쓸 수 없는 극한 상황을 연출하여 언어관념을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이 경우는 희론의 적멸을 먼저 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의 경우는 불교의 진리를 묻는데 답하여 ‘뜰 앞의 잣나무’처럼 눈앞에 보이는

사물을 지시하거나, ‘절 한번 하라’고 어떤 행위를 요구하거나 ‘할‘과 ‘방’처럼

행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 역시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경우는 오히려 심성(心性)의 직지(直指)에 초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와 같은 직지인심의 경우는 희론의 적멸과 심성의 직지를 동시에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선을 공부하는 학인이 이러한 상황에 처하여 언어를 포기하지 못하면 안타까움과

답답함만 있을 뿐이지만, 만약 모든 언어를 완전히 포기해버리면 이제 그곳에는

다만 심성의 작용만이 여여(如如)하게 드러날 뿐이다. 바로 이 순간 이 여여함이

자각(自覺)된다면, 이것이 바로 견성(見性)이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마치 지금까지 발딛고 있던 언어라는 발판을 버리고

허공으로 발을 내딛는 것과 같다. 언어는 분명하고 친숙하지만 밖으로 떨어질

염려가 있는 좁고 불안한 발판이었는데, 이제 허공이라는 발판은 비록 분명하지는

않으나 안팎이 없으므로 불안과 갈등의 요소가 조금도 없는 가장 안전한 거주처가

된다.

 

언어는 분명한 상(相)이므로 집착하고 매이기는 쉽지만 놓기는 어렵다.

러나 한 번 놓아서 허공의 안전함을 맛보고나면 이제 더이상 불안하고 답답한

언어에 매이지 않는다. 즉 언어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언어생활을 할 수 있게

되므로, 언어에게 휘둘리는 하인이 되지 않고 언어를 부리는 주인이 된다.

이처럼 선의 목적은 언어에서 출발하여 그 언어를 극복함으로써 성취된다.

즉 선이란 언어를 극복하고 견성하여 자유를 얻는 것이 핵심이지,

언어와의 특정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