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의 종류(種類)/청화큰스님

2013. 2. 21. 22:2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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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禪)의 종류(種類)

청화큰스님

 

 

 

   

그러면 선에는 어떠한 선이 있는가? 선()의 종류(種類) 문제입니다.

   

지금 ‘선’ ‘젠’ 이것은 비단 불교에서만 말하지 않습니다. 힌두교(Hi-ndu敎)의 요가법(yoga法)에서도 선을 말했습니다. 또한 불교도 아닌 다른 종교에서도 역시, 말은 좀 달리 한다 하더라도, 선을 말했습니다. 명상법(暝想法)이나, 또는 도교(道敎)에서의 태식법(胎息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와 같이 선이라 하는 것을 이름은 달리한다 하더라도 거의 비슷비슷한 형태로 해서 다 말씀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종류를 알아야만이 선 가운데서 가장 최선의 선()인 부처님 정통선(正統禪)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 외도선(外道禪)이라, 외도가 닦는 선이라는 말입니다. 외도(外道)는 불도(佛道) 즉 부처님 가르침 외에 다른 가르침이 외도(外道)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외도(外道)와 정도(正道)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것을 또 우리가 알아야 하겠지요. 정도(正道)는 일체 만법(萬法)을 다 자기 마음의 소조(所造)로 봅니다. 일체 만법을 다 자기 마음 안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부처나 극락이나 또는 천체 우주 전부를 다 자기 마음 안으로 봅니다. 반대로 외도(外道)는 자기 마음 밖에 법()을 두는 것입니다. 즉 말하자면, 일체를 일원적(一元的)으로 안 보고서 이원적(二元的)으로 보는 것입니다. ‘마음과 물질이 별도로 있다’ 하는 것은 역시 외도입니다. 마음 밖에 물질이 있다면 벌써 외도입니다. 마음 밖에 태양이 있다는 것도, 내 마음 밖에 네가 있다고 하는 것도 외도입니다.

불법은 오직 한마음이요, 한마음 속에 천지우주를 다 넣어 버려야 정도입니다. 마음 밖에 도를 구하면 외도고 일체를 마음 안에서 구하면 정도입니다. 이런 것은 꼭 마음에 다 명심하여야 합니다. 이런 것이 어째서 그러는가? 이제 설명을 좀 하겠습니다.


1. 외도선(外道禪) : 인과(因果)를 불신(不信)하고 유루공덕(有漏功

                             德)을 위하여 닦음


외도선(外道禪)은 인과(因果)를 불신(不信)하는 것입니다. 인과를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선()을 행하면 반드시 선()의 과보로 해서 락()의 보()가 있고, 악()을 행하면 악의 과보로 해서 나쁜 고()가 있고, 또 도업(道業)을 닦으면 그 과보로 성불(成佛)이 있다고하는 이러한, 인과(因果)를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유루공덕(有漏功德)이라, 루()는 샐 루자로 번뇌나 때라는 뜻으로 해석이 됩니다. 따라서 유루라는 것은 번뇌가 있다는 것이지요, 번뇌가 있는 그런 공덕을 위해서 닦는 것입니다.

가사, ‘높은 지위에 오르고 싶다’ ‘남한테 대우를 받고 싶다’ 또는 ‘무슨 재주를 부리고 싶다’ ‘오행에 통해서 무슨 술법을 하고 싶다’ 이런 등등의 것이 유루공덕입니다. 다시 바꿔서 말하면 해탈을 구하지 않고 즉, 자기라는 개성의 망아(忘我), 망령된 나를 버리고 해탈한다 하는 해탈을 구하지 않고서, 무엇인가 자기 이익만을 구하는 공덕, 그것이 유루공덕입니다. 따라서, 가사 우리가 불공(佛供)을 모신다 하더라도, 불공 모시면서 자기 집안의 여러가지 운수도 좋은 방향으로 나가기를 바라지마는, 성불을 바라는 마음이 꼭 깃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유루공덕이 안됩니다.

인과를 믿지 않고서 그러한 때묻은 공덕을 구해서 닦는 것이 외도선입니다.


2. 범부선(凡夫禪) : 인과(因果)를 신()하고 유위공덕(有爲功德)을

                             위하여 닦음.


그 다음은 범부선(凡夫禪)이라,

범부(凡夫)란 성인(聖人)과 상대해서 하는 말 아닙니까, 우리가 모두 성인이 못되었으면 범부 아닙니까, 인과(因果)를 믿고 불법을 믿는 가운데서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사람이 범부입니다. 범부는 불법을 안 믿는 사람은 제외합니다. 불법을 믿는 가운데서 아직 성도(成道) 즉, 견성오도(見性悟道)를 해서 성자가 못된 때가 범부입니다.


범부선은 무엇인고 하면, 인과는 믿지마는, 또 역시 유위공덕(有爲功德)이라, 이것도 유루공덕이나 대략 같은 뜻으로 풀이가 됩니다. 다만 번뇌가 유루에 비해서 약간 적은 그런 음영(陰影) 즉, 소위 말하는 뉘앙스(nuance)가 있겠지요. 인과를 믿지마는 아직은 번뇌를 못 떼어버린 공덕을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범부인지라, 다만 번뇌를 못 떼어버린 범부니까 재수 바라고 운수 바라고, 시험에 합격도 바라고 그런 것을 희구하겠지요. 이런 것은 아직은 범부선으로 범부가 하는 공부에 불과합니다.


3. 소승선(小乘禪) : 아공(我空)을 신()하고 해탈(解脫)을 위하여

                             닦음.


그 다음은 소승선(小乘禪) 이라,

도인(道人)도 역시 지위가 있는 것입니다. 범부를 넘어서 도인 지위에는 올라갔지만, 대승과 소승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소승선은 아공(我空)을 신()하고 즉, ‘나’ 라는 것이 비었다는 것을 믿고, 해탈(解脫)을 위해서 닦는 선입니다. 자기 재수나 운수를 생각하는 정도는 넘어버려서, 벌써 내가 비었다하고, 아상(我相)을 넘으니까 그때는 그런 섣부른, 어중뙨 어떤 것은 바라지 않겠지요.

   

그러나 이 아공(我空)을 즉, 내가 비었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불교가 들어가기도 어렵지마는 정작 목적을 이루기는 참으로 어렵고 오랜 길입니다. 그러나 참선(參禪)만 바로 닦으면, 그때는 비약적으로 쉬운 길입니다.

왜 내가 비었는가? 우리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임시간 모아진 세포에 불과합니다. 다시 현대적으로 말하면 산소, 수소, 탄소, 질소 등 여러 원소가 그때그때 우리 업() 따라서, 업의 에너지(energy) 기운 따라서, 이렇게 임시간 모여있습니다. 즉 불교에서 말하면 인연생(因緣生)이라, 각 원소가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여 있다는 말 입니다. 그리고 인연이 다 하면 그때는 흩어지고 맙니다.

텅 빈 들 가운데다 집을 하나 짓는다고 하면, 집을 짓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지요. 집을 지었다가 필요 없어 뜯어버리면 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라는 존재가 부모님이 계시기 전에 어디에 있었습니까, 내가 생겨나기 전에는 우리가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모습은 절대로 아닙니다. 나라는 존재가 없다가 무수한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런 몸이 되었습니다. 마치 들 가운데다 집 한 채 지었다가 집을 뜯어버리면 아무 것도 없듯이 그와 똑같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이런 모양은 다시 없습니다. 죽어지면 또 다른 모양으로 태어나겠지요. 십년 뒤에 지금 이런 모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공(我空)을 신()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만 꼭 그래야만이 공부가 됩니다. 나()란 사실은 비어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무엇인가? 내 마음은 불교말로 해서 수상행식(受想行識)이라, 우리가 감수(感受)하고, 상상(想像)하고, 의욕(意慾)하고, 분별(分別)하고, 이런 부스러기가 모여서 내 마음이 되었습니다. 물론 마음의 본체는 부처이지만, 우선 내가 쓰는 이 마음은 본체인 부처마음에다가 금생에 나와서 감수하고, 상상하고, 의욕하고, 또는 분별시비하고 이런 부스러기가 모여서 내 마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떠나서 내 마음은 없습니다.

내 몸도 각 세포가 잠시간 모여 있고 내 마음도 역시 감수, 상상 또는 의혹, 분별시비하는 이런 것이 모여 있기 때문에 이것을 떠나서는 내 몸이나 마음이 없습니다.

불교말로 하면 인연가화합고(因緣假和合故)로 즉공(卽空)이라, 인연으로 잠시간 화합하였기 때문에 즉시 공이라는 말입니다. 인연이 잠시간 화합되어서 그때그때 순간순간 변화해 갑니다. 이 몸은 1초 전과 1초 후가 똑같지가 않습니다. 우리 중생은 바로 못 봐서 그런 것이지, 우리 세포는 1초 전과 1초 후가 똑같지가 않습니다. 그냥 변화되어 갑니다. 내 마음도 역시 조금 전의 마음과 지금 마음이 똑같지가 않습니다. 오직 한결된 마음은 도인이 되어야 비로소 한결됩니다. 그래야 변치 않는 영생에 안주하여 있게 됩니다.

   

이와 같이, 나란 것이 허망한 것이니까, 내가 공하다는 것을 믿고서 해탈을 위해서 닦는 것이 소승선(小乘禪)입니다.

그러니까, 여기는 벌써 도인(道人) 지위입니다. 내가 없음을 깨달으면 벌써 도인입니다. 우리 번뇌의 종자는 못 끊었다 하더라도 내가 없음을 느끼면 그때는 벌써 도인입니다. 그냥 느낌이 아니라 체험으로 느껴 깨친다는 말입니다.


4. 대승선(大乘禪) : 아공(我空) 및 법공(法空)을 신()하고 해탈(

                             )을 위하여 닦음.


그 다음은 대승선(大乘禪)이라,

이것은 아공(我空) 및 법공(法空)을 믿는 것입니다. 내 몸이나 마음을 구성하는 것도 공()이지만, 일체만법(一切萬法) 즉, 산이나 들이나 또는 태양이나 별이나 천체나, 남이나 나나 일체 법이 다 비었다는 법공(法空)을 믿는 것입니다.

소승들은 내가 비어 있는 것을 느낀다 하더라도 일체 법이 비었다는 줄은 모릅니다. 그러나 대승은 일체만법이 비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영가현각(永嘉玄覺 647∼713) 스님도 ‘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千)이라’ 깨달은 뒤에는 삼천대천 세계가 다 텅 비어 있다고 했던 것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아()도 공()이요 또 일체만법도 공()이란 것을 말씀한 법문입니다. 금강경(金剛經) 또한, 나도 공이요 일체만법이 공인 것을 해설한 경전입니다.

불교 공부는 내가 원래 비어 있고 우주 전부가 비었다는 것을 모르면은 잘 안 되어지는 것입니다. 참선도 역시 우리가 화두를 드나 염불을 하나 이와 같이 아공, 법공을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 망상이 잘 끊어집니다.

   

망상(妄想)은 무엇인가? 좋다 궂다 하는 그런 망상은 어디서 연원(淵源)되는고 하면, 그런 것은 모두가 ‘네가 있다 내가 있다 또는 만법(萬法)이 있다’ 고 하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내가 없고 네가 없어 보십시요. 또 천지 만물이 텅 비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무슨 망상이 나오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번뇌를 녹일 때는 반드시 이와 같이 공()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반야심경을 외우는 것이 그런 소이(所以) 아닙니까, 반야심경은 어떤 불사(佛事)에나 외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체만법이 원래 비었기에 그러는 것입니다. 또 번뇌를 녹이기 위해서는 그와 같이 빈 마음으로 다 놓아버려야만이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조주(趙州 778∼897) 스님한테 엄양(嚴陽) 스님이란 분이 가서 ‘한 물건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어떻게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참선에서는 한 물건도 가지지 말라는 것이거든요. 그것은 물질적인 물건보다도 우리 마음으로 시()야, 비()야, 좋다, 궂다, 이쁘다, 밉다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물으니까 조주 스님께서 말씀이

‘놔 버려라, 방하착(放下着)하라’ 하니까 그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한 물건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 무엇을 놓을 것입니까?’ 가지고 있어야 놓을 것인데, 가지고 있는 것이 없는데 무엇을 새삼스럽게 놓을 것입니까? 그러니까 조주 스님께서

‘그러면 지고 가거라’ 하셨습니다.

   

선문답(禪問答)은 이같이 아주, 그야말로 참, 절실하고 직절(直截)한 것입니다. 세상에 한 물건도 없는데 말입니다. 조주스님한테 묻는 그 사람은 한 물건도 없다는 거기에 집착했던 것입니다. 있고 없는 그러한 자리를 떠나기 위해서 이런 법문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여러분들이 앞으로 음미해보시면 되겠습니다만, 아무튼, 우리는 먼저 천지우주가 텅텅 비어 있다는 소식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 눈앞에 아무 것도 없지는 않지만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가짜고, 앞서 시간에 말씀한 바와 같이,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 중생의 망념으로 보아 있는 것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괴로워하는 것은 자기가 잘못 보고, 자기의 망념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나쁘고 좋은 것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은 범부의 지위에서, 자기가 잘못 봐서, 잘못 본 그것 가지고 스스로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5. 최상승선(最上乘禪)

    ○ 여래선(如來禪) : 지적(知的) ┓본래(本來), 부처로서, 일체무루

    ○ 조사선(祖師禪) : 리적(理的) ┛공덕(一切無漏功德)이 원만히

                                                  족(具足)함을 신해(信解)하고

                                                  는 선()


그 다음 다섯번째는 최상승선(最上乘禪)이라, 이것은 가장 높고 수승한 참선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문제로 할 것은 최상승선입니다. 우리가 아직은 저급하고 비록 대승, 소승의 성자(聖者)라 하더라도 아직 부족한 셈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문제시 할 것은 역시 가장 최고의 선, 최상승선을 문제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최상승선(最上乘禪) 가지고서 씨름하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것인고 하면, 여래선(如來禪), 조사선(祖師禪)을 말합니다.

어떤 분별하기 좋아하는 분들은 여래선은 밑에 있고 조사선은 위에가 있다고 합니다만 실은, 그렇게는 안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문에서 미루어 보나, 그 뒤에 정통 도인 말씀을 미루어 보면 이것은 둘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인 것입니다. 단지 그런 가운데서 지적(知的)인 면은 여래선에 해당하고, 또 리적(理的)인 면, 본체적(本體的)인 체적(體的)인 면은 조사선에 해당한다고 비유해 볼 수 있는 정도입니다.

이런 문제는 전문적인 문제니까 이것을 연구할 분들은 연구하시고 우선은 그러한 줄만 대강 알으시면 됩니다.

   

따라서, 가장 높은 선은 어떤 것인고 하면, 본래 부처로서, 일체 무루공덕(無漏功德), 번뇌가 없는 공덕을 원만히 갖추고 있음을 확실히 믿고서 닦는 선입니다.

우리는 지금 번뇌(煩惱)에 결박(結縛)되어 있습니다마는 부처의 안목에서 본다면 번뇌에 결박된 그대로 부처입니다. 최상승선을 닦는 분들은 그것을 잘 느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못 나고 못 생기고 남도 미워하고 있습니다만, 그러한 번뇌로 묶여있는 채로, 우리가 보면 범부라 하더라고, 부처의 청정한 눈으로 보면 똑같은 부처입니다.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할 때는 짐짓코 일부러 중생의 근()을 빌려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려 안 쓰고 부처의 안목 그대로 보면 다 부처뿐 입니다. 그 한계를 잘 알아야 합니다. 닦은 뒤에 부처가 아니라 번뇌가 구족한, 번뇌가 있는 그대로가 바로 보면 다 부처입니다.

‘내가 지금 구박(具縛)되어 있지마는, 번뇌에 묶여 있지마는 바로 본래 부처니까, 나한테는 석가모니나 어떤 부처님이나 도인들이나 그분들과 똑같이 일체 공덕을 다 갖추고 있다’ 고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도인이 된 셈 치고 닦아야 합니다. 그래야 최상승선인 것입니다.

‘과거에 내가 무슨 허물이 있다. 내가 잘못했다. 참회해야 하겠다’ 그런 것은 마땅히 해야하지만, 그것은 아직은 높은 단계는 못됩니다. 과거는 다 잊어버리고, 오직 나한테 갖추고 있는 불심(佛心)만 문제로 해서 ‘내가 본래 부처인데’ 하고, 아만을 부리면 안됩니다만, 부처가 된 셈치고 닦아야 최상승선인 것입니다.


나도 비고 천지도 비었으니까 역시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닙니다. 따라서 여기에 있는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우리가 꼭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입각해서 내가 부처임을, 즉 아공, 법공으로 해서 다 비었지만 또 다만 빈 것이 아니라 부처와 똑같이 무량공덕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최상승선을 문제로 하여 닦도록 하십시다.


 

 

                         - 창녕 관룡사 용선대

                                                                                     

 

 

자유인이 되라 / 대행스님

 

 

빈 배와 같은 자유인이 되라.
대상을 높게 볼 것도 없고 낮게 볼 것도 없다.

 

훌륭하다 해서 훌륭한 게 아니고,

높다 해서 높은 게 아니며,
낮다 해서 낮은 게 아니니 평등하게 보라.

 

대상을 내 몸과 같이 보라.
그것이 불심이다.

 

부처님이 지금 내 앞에 계신다 하더라도
높이 보지도 말 것이며 개미 새끼 한 마리,
풀 한 포기라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

 

벌레를 보고 징그럽다 하고, 똥을 보고 더럽다 하지만
그것은 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상대를 보고 어떻다고 할 것이 아니라
그 형상, 그 마음이 둘이 아니니 주인공 자리에
계합시킬 수 있어야 한다.

 

높은 산 위에 올라서서 마음을 내려다보라.
그러면 크다 작다의 구별에 앞서서

평평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와 같이 생활에서도 그 위치를 활용해 보라.
모든 경계의 높고 낮음, 좋고 싫음의

차이가 달라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