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으로 이끄는 부처님 가르침(dhamma,法)/법현스님

2013. 3. 8. 17:0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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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으로 이끄는 부처님 가르침(dhamma,法)

월간불교 2월 법문 열린선원 무상법현스님

 

 

“아난다여, 이와 같이 비구는 자신을 등불(섬)으로 삼고
자신을 의지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의지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다.
법을 등불(섬)으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의지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다.


아난다여, 누구든지 지금이나 내가 죽고 난 후에
자신을 등불(섬)으로 삼고 자신을 의지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의지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등불(섬)으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의지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면서
공부하기를 원하는 비구들은 최고 중의 최고가 될 것이다."

 

 

남을 등불 삼아 길을 가거나 의지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힘이 들거나 누구에게 맞을 때 큰 목소리로 울면서 엄마를 부릅니다.
그런데 엄마가 대강 어디 있을 지 아는 아이는
엄마 있는 방향으로 시선과 고개를 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밤에 산길을 갈 때 불빛이 나오는 곳이면 어디라고
그곳을 지향점으로 삼아서 길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가능하지 않으면 하늘을 보고 별자리를 보거나
그것도 안 되면 훤한 쪽을 바라보게 되지요.
나름대로 갈 곳을 찾는 기준이나 의지처를 찾는 것이지요.

빠알리어로 된 초기 경전인 니까야 가운데
길이가 긴 것들을 모아 놓은 경전군을 『디가 니까야(장부경전)』라고 합니다.
이 가운데 부처님의 열반에 관하여 설법한
「마하빠리닙빠나숫따(대반열반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 말은 다른 경전에도 같은 형식으로 많이 나와서 ‘정형구’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불빛이 새어나오는 곳이나 하늘을 보고 걸어갔는데
도둑의 소굴에서 나오는 빛이거나, 골짜기가 너무 깊어서
길이 나오지 않으면 낭패가 아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인생 전체를 걸고 하는 수행에서
올바른 의지처를 찾지 못하면 공부가 진행되지 않습니다.
더 나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른 의지처를 찾는 것은 현실적인 길을 찾는데서나
최고의 행복인 닙빠나(열반)을 얻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바른 종교, 바른 가르침, 바른 스승이 더욱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자기 스스로를 의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떤 법을 의지해야 할까요?

 

 

“담마는 잘 설해진 것이고,
즉시 확인할 수 있고,
결과 바로 나타나니,
와서 보라는 것이며,
도움이 되는 것이고,
스스로 체험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은 『상윳따니까야』의 1권에 실린
「깃발경(다작가숫따)」에 담겨있는 말씀입니다.


『상윳따니까야』는 부처님 당시의 구어(口語)인 빠알리어로 된 경전묶음 가운데
주제별로 묶은 가르침 또는 가르침의 제목과 내용이
서로 상응하는 것들의 묶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담마(dhamma)는 중국에서 법(法)으로 번역했습니다.
법(法)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들이 무엇인가를 알아차리는 것을 감각(感覺)과 지각(知覺)이라고 합니다.
감각은 몸으로 느끼는 것을 말하고, 지각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몸으로 느끼는 것은 다섯 기관을 통해서 합니다.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이 그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눈으로는 모양이나 색깔(色)을 느낍니다. 본다고 하지요.
귀로는 소리(聲)를 느낍니다. 듣는다고 하지요.
코로는 냄새를 느낍니다. 맡는다고 하지요.
혀로는 맛을 느낍니다. 맛본다고 하지요.
몸으로 감촉을 느낍니다. 대본다고 하지요.
그리고 지각기관은 마음(意)이라고 합니다.


마음으로 느끼는 것을 법(法)이라고 합니다.
느낀다(感)기 보다는 안다(知)고 표현합니다.
합쳐서 지각(知覺)이라고도 하지요.

그러니까 법의 첫 번째 뜻은 지각기관인 마음(意)의 지각대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지각대상으로서의 법은 나누어 보면
현상(現象)이나 법칙(法則)이나 진리(眞理)를 말합니다.


물론, 앞에서 말한 다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받아들인
감각대상에 관한 느낌을 정리하는 것도 또한 현상이나 법칙이어서 마음의 지각대상입니다.


두 번째 뜻은 지각 대상의 법들 가운데 법칙이나 진리라고 인식되는 것을 법이라고 합니다.


세 번째는 우리가 스승으로 믿고 따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법이라고 합니다.
가르침 자체가 현상이나 법칙을 정확하고 알아듣기 좋게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라는 뜻이기도 하지요. 진리(眞理),가르침(訓戒)의 뜻으로 많이 쓰입니다.

 

이 담마의 특징을 여섯 가지로 나타낸 말씀입니다.


첫째. 잘 설해진 것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부처님의 법인 담마는 성전(聖典,pariyatti)과 네 가지 수행 길 및
네 가지 수행 결과 그리고 열반을 설합니다.
성전은 진리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네 가지 수행길은 수다원 길(道,向), 사다함 길(道,向), 아나함 길(道,向), 아라한 길(道,向)을 말합니다.

 

수행을 통해 얻는 네 가지의 성인의 과위에 오르는 수행방법 즉 도(道,magga)를 말합니다.
지향한다고 해서 향(向)이라고도 합니다.


네 가지 수행결과는 수행 길(道,向)을 닦아서 얻는 결과(果,phala)를 말합니다.
수다원과와 사다함과 및 아나함과와 아라한과를 말합니다.


수다원은 성인의 흐름(流)에 들어간(入) 이를 말하고,
사다함은 성인에 들었다가 다시 범부로 떨어지기를 일곱 번 하는 이(七往來)를 말합니다.
아나함은 다시는 범부로 떨어지지 않아 불환과(不還果)라 합니다.
아라한은 욕탐을 완전히 벗어나 누구나 공경하고 공양하고 싶어지는 이(應供)를 말합니다.


그리고 열반은 욕탐을 완전히 벗어나서 다시는 태어나지 않음을 확실하게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나지 않으므로 죽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른바 삶과 죽음을 뛰어넘은(生死超越)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담되 문장의 구성이나 내용과 조리가 잘 갖춰져서
처음도, 중간도, 나중도 흠 잡을 데 없이 잘되어 있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의심도 없어서 두려움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상태에서 가르친 법입니다.
그래서 ‘잘 설해진 것’입니다.

 

둘째,즉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도는 지체하지 않고 결과를 맺습니다.
이익을 얻게 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세간적인 선업(善業)이나 이익은 현재에 결과를 맺는다 해도
몇 년, 몇 달, 몇 일이나 빨라도 하루나 최소한 몇 시간이 걸립니다.
꽃이 피거나 열매를 맺거나 어떤 결과를 맺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도심(道心) 즉 도의 마음은 단 한 번의 심찰나
즉 짧은 순간의 마음에 일어나고 바로 과심(果心) 즉 결과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단 한 순간의 틈도 개입하지 않습니다.


도심만이 아니라 내 스스로 화나고 기쁜 마음 알아차리는데
시간이 걸리지 않지 않습니까?
그래서 ‘즉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셋째, 결과 바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본 것이기도 합니다.
성인은 자신이 스스로 닦은 길의 지혜를 통해
그 결과(果,phala)를 체험하고 끝내는 열반을 증득합니다.
그 결과가 바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누가 가르쳐 준 것이거나, 책이나 신문이나 방송에서 보고 들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과 바로 나타난 것 ,스스로 본 것’입니다.

 

넷째, 와서 보라는 것입니다.


이 법들은 맑은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과도 같고, 흰 우단에 박힌 홍옥과도 같아서
한 점의 흠도 없는 실재입니다.
그래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보여줄 만하고, 보여주어도
직접 해보지 않으면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해 보면 누구나 직접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와서 보(하)라는 것’입니다.

 

다섯째,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도움이 되고 선(善)하다는 말은
열반 즉 깨달음에 보탬이 되는 것을 도움이 되고, 선한 것이라고 합니다.


어느 때 부처님은 “내 손톱 위에 있는 흙과 대지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많은가?”라고 물었습니다.
당연히 대지가 많다가 대답하자


 

“성자가 예류도에 의해 일어나지 않도록 막은 재생(再生=輪廻)의 수는
대지처럼 많고 일어나도록 남아있는 것은 손톱 위의 흙처럼 적다.”

 

하셨습니다.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깨닫도록 마음에 ‘새기는 것’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렇게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여섯째, 스스로 아는 것입니다.


겨울에 몸이 얼었을 때 먹은 따뜻한 국물 맛,
달고 맛있는 뜨끈한 군고구마 맛, 달콤한 호떡 맛처럼
먹어 본 사람만이 아는 그 맛은 먹어보지 않은사람은 설명해 주어도 모릅니다.


그와 같이 도의 마음과 과의 마음을 얻어 본 적이 없는 범부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요, 열반입니다.


그런데 많은 설명과 안내를 받고 나서야 점진적으로 진리를 이해하든,
가르침을 다 듣고 도과를 이루든, 요점만 듣고도 도과를 이루든
그 어느 성인이든 도를 이룬 뒤에 스스로 얼마나 자신이
성스런 수행을 했으며 도과를 성취했고 열반을 증득했는지를 알아냅니다.


친구나 스승이 얻은 결과를 아무리 가까운 제자나 도반이라 할지라도
직접 닦아 얻지 못한 처지로는 알 수가 없으나 직접 닦아 얻으면 ‘스스로 아는 것’입니다.

 

첫 번째의 잘 설해진 법이라는 말은 부처님 법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고,
뒤에서 말씀하신 다섯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잘 설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확실하고 훌륭한 법이기에 의지해서
삶과 죽음을 어쩔 수 없이 계속하는 인생이라는 파도,
괴로움으로 가득 찬 사바의 고해를 건널 때 믿고 의지하면 안심이 되고 힘이 생깁니다.


그리고 끝내는 바라는 목표인 삶과 죽음이 끝나는 자리,
삶과 죽음을 뛰어 넘는 자리인 열반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풍랑이 거센 바다를 건널 때 좋고 큰 배를 의지해야 바람이
자고 쉬면서 먹을 것이 있는 섬이나 뭍에 이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법(담마)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밀우(密友) 와 외우(畏友) - 벗의 분류


 

"친구란 사회적 지위나 경제생활이 서로 비슷해야지,
차이가 심하면 따뜻한 우정을느끼기가 어렵다"
중국 역사의 아버지, 사마천(司馬遷)이 쓴

史記 계명우기(鷄鳴偶記)에는 친구를 4종류로 구분한다.

첫째 (畏友)는 두려워할, 존경할 외字의 뜻처럼
서로 잘못을 바로 잡아 주고
큰 의리를 위해 함께 노력하는 친구이다.

 

둘이서 친구 사이지만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며
존경하는 두려운 존재의 친구를 일컫는다.


둘째 밀우(密友)는 힘들 때 서로 돕고
늘 함께 할 수 있는 절구공이와 절구같은 친밀한 친구이다.


셋째 '놀다'라는 뜻의 일우(?友)는
좋은 일과 노는 데에만 잘 어울리는 놀이친구를 말하며,

넷째 적우(賊友)는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며
걱정거리가 있으면 서로 미루고 나쁜 일에는
책임을 전가하는 기회주의적인 친구이다.

 


이 밖에도 사마천은 史記에서 친구의 구분에 관한
故事成語를 예시하고 있다.

관중과 포숙의 "관포지교(管鮑之交)" 외에도
수레를 타고 다니는 사람과
패랭이를 쓰고 다닐 정도로
생활 수준은 차이가 나지만 절친한 친구사이인
"거립지교(車笠之交)",

서로 뜻이 통해 거슬리는 일이 없는
"막역지교(幕逆之交)",

나이를 초월한 깊은 우정이나 친구 사이인
"망년지교(忘年之交)",

서로 죽음을 함께 할 수 있는
"문경지교(刎頸之交)",

가난할 때의 참다운 친구라는 뜻의
"빈천지교(貧賤之交)"가 있다.

물과 물고기의 관계처럼 친밀한 우정의
"수어지교(水魚之交)",

절구공이와 절구처럼 절친한
저구지교(杵臼之交)"가 있다.

어릴 적부터 친한
"총각지교(總角之交)"가 있는가 하면

백성인 民草들 간의 우정인
"포의지교(布衣之交)"도 있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이웃을 위해, 인류를 위해서
성실하고 올바르게살아 가며

맑고 깨끗한 인연(因緣)인
청연(淸緣)을 하늘로부터 점지받은 우리들은
밀우(密友)와 외우(畏友)로 변치 말고 살아가자


추가열 / 나 같은 건 없는 건가요 (Dont Go Away)

그대여 떠나가나요 다시 또 볼 수 없나요 
부디 나에게 사랑한다고 한 번만 말해 주세요
제발 부탁이 있어요 이렇게 떠날거라면 
가슴속에 둔 내맘마저도 그대가 가져가세요
혼자 너 없이 살 수 없을거라 그대도 잘 알잖아요 
비틀거리는 내 모습을 보며 그대 맘도 아프잖아요
그대만 행복하면 그만인가요 더이상 나 같은건 없는건가요
 한 번만 나를 한 번만 나를 생각해 주면 안돼나요
혼자 너 없이 살 수 없을거라 그대도 잘 알잖아요 
비틀거리는 내 모습을 보며 그대 맘도 아프잖아요
그대만 행복하면 그만인가요 더이상 나 같은건 없는건가요 
한 번만 나를 한 번만 나를 생각해 주면 안돼나요
그래도 떠나 가네요 붙잡을 수는 없겠죠 
부디 나에게 사랑했다고 한 번만 말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