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선(十善)의 수행 / 일붕 서경보 큰스님

2013. 3. 23. 11:4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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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선(十善)의 수행    / 일붕 서경보 큰스님

 

 

 보살이란 무엇이며 보살의 뜻은 무엇인가? 이 말은 늘 입에 담으면서도

그뜻에 있어서는 막연히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

 

보살의 보(菩)란 보리 라는말,즉 깨친다는 뜻이고,살(薩)은

살타(薩타)라는 말,즉 중생이라는 뜻이니 곧 대보리를구하는

중생이라는 말이다 보살의 지체는 일률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같은명칭으로 사용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보살의 정도는 여러 층이다.높은이는 극히 높고 ,낮은이는 극히 낮다.

관음보살.문수보살.보현보살.지장보살 같은 이는 그 지체가 극히 높고

초발심(初發心)보살은 아주 낮아 우리들과 같은 범부(凡夫)인 것이다.

 

이 초발심 보살이 공부를 도중에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정진해서

공부를 수행해 나간다면 최고지위에 이르러 관음.문수.보현.

지장보살같은 대보살이 되는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높은 지위에 있는 보살행은 우리들의

세계와 너무나 멀고 먼거리에 계시므로 감히 우리가 따라가기가

어렵지마는

 

초발심보상은 멀지않는 지척지간에 있는것이므로 우리는 초발심 보살의

학문을 배우면,필경 대보살의 지위에 오를수가 있으므로 초발심보살의

십선 부터 차근히 배우라는것이다

중략,,,,,

십선(十善)이라는것은 십악(十惡)에 대치하는 10가지 불교인들이

지켜야 하는 선행이다

제1은 살생을 하지 마라.

제2는 토도를 하지 마라.

제3은 사음을 하지 마라.

제4는 망어를 하지마라.

제5는 양성을 하지 마라.

제6은 악구를 하지 마라.

제7은 기어를 하지 마라.

제8은 탐심을 내지 마라.

제9는 진심을 내지 마라.

제 10은 사견을 내지 마라.

 

살생을 피하는것은 중생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요,투도하지 않는것은

중생의 재산을 아끼는 것이요, 사음하지 않는 것은 타인의 정조를

존중하는 것이요,망어  하지 않는 것은 신의 를 지키는 것이요,

 

양설하지 않는 것은 화합을 유지하는 것이요,악구하지 않는 것은

타인의 신분을 존중하는 것이요, 기어를 않는것은 잡설이나 한담을

금하는 것이요 탐심을 내지 않는것은 지족소욕(知足少慾)하는 것이요,

 

진심을 내지 않는것은 시비투쟁을 방지하는것이요,사견을 내지 않는것은

정도를 좋아하는 것이니, 이것을 초발심 보살의 대비심으로

주를 삼아서 성불도 중생을  요구하는 행문(行門)이다.

 

불교에서는 자기라는 존재를 높이 생각한다.일반세속에서 생각하는

존중과는 의미가 다르다. 세속에서 말하는 존중은

자기 만족.허세.아집같은것이 범벅이 된 자기 환상속에서

자기가 제일 잘났다는 행동이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자기 존중은 차원이 다른 데 있다.

 

첫째,경행심 (慶幸心)을 든다.나의 몸은 오직 나의 것이고,세상에

어느 것 보다 소중하다.이렇게 소중한 몸을 얻었으니 이보다 더 경사

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느냐 하는 마음이요.

 

둘째,결정심(決定心)이니 내가 육도 중에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었으니 이 몸을 간수하고 중히 여겨 다시 이몸을 잃지 않겠다는 것이요.

 

셋째,분발심이다.이는 나에게도 여래(如來)와 같이 佛性이

있으므로 분발만 하면 여래와 같이 성불할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이와같은 의미에서 자기를 존중하므로 한량없는 중생을 내가 제도하겠다.한량없는 법문도 내가 다 배우겠다.다함이 없는 번뇌도 내가 끊겠다.

위없는 佛道도 내가 기어이 이루겠다는 서원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대자대비.대희대사.대지대원.대용맹이 구비한

대인격자를 요구하며 인격자를 조성하기로 인도한다.

 

이런 인격자가 아니고는 능히 오계십선(五戒十善)으로부터

육도.만행을 완전히 닦아서 기약하는 바 성불도 중생을 할수가 없는 것이다.

십선은 인생의 길이다.삼계대도사.사생자부가 되려는 보살행도

십선에서부터 시작된다.

 

만일 숭고한 덕이 있고 십선을 닦았다 하더라도

대비심이 결핍하면 다만 인간에 군자가 되든지 성인이 되지만

 

불교에서는 그와 달라서 대비심이 주로하고 보리심을 발하는데 있어서

십선법이 인도가 된다.그러므로 인간의 몸으로부터 불타의 몸을 향해

나아가는 제 1보가 되는것이다.

 

사람들이 불타를 이상으로 하고 보리심을 발하여 10선행을 닦는이외도

참회.발원.예불.송경.지주를 하겠지만 더욱이 호법에 주의해서 불법을

자기의 생명으로 알고 불교를 배우는 데만 그쳐서는 아니된다.

 

만일 불교가 해를 당하고 좌절을 당하거든 자기의 신앙과 중생의

혜명을 위하여 두호 하라, 만일 불교를 유지치 못하면 중생은 건질수 없는

영원한 암흑의 세계에 빠져버리고 말아서 나라는 혼란되고 인심을

흉흉해져서 상상할수도 없는 참담한 겁계(劫界)를 이루는것이다.

 

우리는 모두 부지런히 10선을 닦아서 보살도를 행해야 할것ㅇ;며,

좋은 사람이 되어서 우리의 사회건설이나 국가적 안정내지 모든 불교의

겅덕이 어느 구석구석까지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끔 그 혜택에

배려해야 할것이다.

 

다시한번 강조하건대 진정한 자존의 완성과 인간이 되고자 한다면

10선행 ( 十善行)을다하여 보살도(菩薩道)를 향하게 해야 할 것이다.

 

   원공법계제중생자타일시성불도 ()...      

<불교명저)(서음미디어 발행) 제9권 

 "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에서 발췌

 

           

   

 

찰나찰나 자유를 누리는 현명한 사람

 


“일체는 본래 공(空)하여

잠시도 쉴 사이 없이 나투며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만약 나투지 않는다면

 이 몸이나 우주가 형성될 수도 없고 또한 바뀔 수도 없다.

쉴 사이 없이 바뀌고 돌아가기에

 어느 때를 꼭 집어 ‘이것이다’ ‘나이다’라고 할 수 없어서

공이요, 오직 나툰다고 할 뿐이다.

 

처음과 끝이 따로 없다.

 시발점이 종점이고 종점이 시발점이다.

 들어가면 나오고 나오면 들어간다.

 무의 세계 유의 세계가 따로 있는게 아니다.

그냥 찰나찰나 변하는 이법(理法)만이 여여하다.

 

찰나로 변한다는 것은

 찰나에 죽어간다는 뜻이 되지만

한편으로는 찰나에 되살아 난다는 뜻도 된다.

어리석은 사람은 찰나로 죽어가는 이치에 매달려 살지만

 현명한 사람은 찰나에 되사는 이치로써 자유롭게 산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떤 사물을 상대할 때에

대체로 고정된 생각에 사로잡힌다.

 사람은 언제나 같은 사람이며 그것은 언제나 그것으로서,

이것은 언제나 이것으로서 존재한다고 믿는다.

 

우리들의 의식세계 속에서 한 대상은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른다.

찰나찰나 변하고 나투는 이법(理法)의 존재로서가 아니라

연속되는 실체로서 뚜렷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것은대상에 대한 나의 지각일뿐

막상 대상이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사물은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어느 것이라도

고정되게 존재하는 것은 없다.

 변함없는 것은 오로지

모든 사물은 변한다는 사실 그것 뿐이다.

 

‘나’라고 할 때의 나의 실체는 무엇인가?

 육신인가 영혼인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리워하는 사람,

내가 미워하는 사람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의 육신인가 영혼인가, 아니면 그의 성품인가?

 

‘나’도 그렇고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도 그렇고

 찰나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거기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오로지 시제(時際)가 없는 지금의 나,

순간의 그가 있을뿐이다.

그것을 우리가 연속적인,

 고정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그 대상과 나의 지각 현상이 어우려져 만들어 낸 개념,

메시지 같은 것일 뿐이다.

 

영화배우가 분 바르고 연지 찍고 나와서 

대본대로 역할을 할 때

우리는 악역을 맡는 배우를 어느새 미워하게 된다.

선한 역할을 맡은 배우는 영화 속에서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좋아하게 된다.

그러나 그 배우는 무대에서 내려오는 순간부터

악인도 선인도 아니다.

미워할 대상도 좋아할 대상도 아닌 것이다.

 

잠시나마 그를 좋아하고 미워했던 것은

대상인 그 배우가 밉거나 좋아서가 아니라

그 대상을 보고 내가 만들어 낸 개념이 그랬을 뿐이다.

우리가 고정된 것으로 보고 생각하는 것들은

 다 영화 속의 장면같이 영화속의 배우같이

실상이 아닌 허상에 불과하다.

 

하루 밤 꿈 속에서

보고 듣고 느꼈던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생시가 꿈이고 꿈이 생시와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은

바로 찰나찰나의 나툼이 있을뿐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본래로 나툼일 뿐이라면

유의 세계다 무의 세계다 하는 것이 무의미해진다.

고정된 것이 없는데 어떻게 유,무가 따로 있겠는가.

 

 본래로 나툼일 뿐이라면

'과거다 현재다 미래다하는'

 시간의 흐름도 무의미해진다.

고정된 것이 없는데 어떻게 사물의 어제,

 사물의 내일이 따로 있겠는가.

고로 내가 지어낸 개념이라는 것도

실은 고정될 수가 없다.

 

다만 기억이라는 작용을 통해

고정된 것으로 만들어질 뿐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고집을 부린다.

고정된 ‘나’가 있고 ‘대상’이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고 거기에 얽매여 일희일비(一喜一悲)한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그런 실상을 알기에 얽매이지 않는다.

'깃발 때문도 바람때문도 '아니라

마음이 움직인 것인줄 알기 때문에

찰나찰나 자유를 누리며 산다.

 

 

- 무유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