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본연 (淸淨本然) / 일붕 서경보 스님

2013. 5. 2. 20:2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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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정본연 (淸淨本然) / 일붕 서경보 스님

 

다만 한생각의 차이로 인하여

만 가지의 형상을 나타내었도다

 

본래 청정한 법신체에서 어찌하여 무명이 일어나서 산하대지의

세계가 생기고 태란습화(胎卵濕化)의 중생이 생겼났느냐는 것이

불교의 교리면에서 근본이 되는 문제라고 하겠다.

우리의 미한 눈으로 보면 세계가 더러운 것으로 보이고,

중생이 죄악의 뭉치로 보이지만 깨달은 눈으로 보면 세계가

유리세계 로 보이고 중생이 부처로 보인다는 것이니,

법계가 본래 청정한 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

대승불교의 이념이다.

 

이것을 겅전에서 살펴볼것같으면 <대불수능엄경>에서는

본래 깨친성각(性覺)이 망념으로 인해 본연청정한 것을 가리우고,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견(見).식(識)의 7대만법이

연기되어서 무기물(無機物)의 세계와 또한 생명계의 중생이 생겼다고 보고,

기신론에서는 만류의 실상인 진여자성은

본래 청정하여 온갖 망념과 분별의 차별이 없건마는 그것이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을 따라 변할 수도 있기때문에

불생불멸로 더불어 화합하여 하나도 아니요,

다르지도 않는 것이 아울러 함유하여 있으니 이것을 가르켜

중생심이라고도 하고 여래장이라고도 하며, 아뢰야식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이 더러운 연기(緣起)로 순류하면 중생의 세계로 이루고

초졸한 연기로 거술러 올라가면 부처의 세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종에세는 단적으로 말하되, 한 생각이 쉬면 본연청정한 세계요,

선악간에 한생각이 일어나면 오탈악세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만 한생각의 차별로써 만가지의 형상이 나타났다고 했다.

 

<능엄경>에서는 부루나존자가 부처님께[ 질문하되,

청정본연한 여래장 묘진여성속에서 어찌하여 문득 산하대지가

생겼느냐고 물으니까 부처님께서는 '무명의 망념으로 인해

세계도 생기고 중생도 생기고 기타 만물이 생겼느니라' 하셨다.

이것을 선가에서는 단도직입적으로 잘 밝힌 계가 있으니

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엣날 중국에 장수선사라는 이가 있었는데, 그는 낭야선사에게 가서 묻되,

<능엄경>가운데 부루나존자가 부처님께 묻기를 청정본연커늘

어찌하여 문득 산하대지가 생겼습니까? 한것을 인용하여 다시

'청정본연커늘 어찌하여 산하대지가 생겼습니까? 하였더니

낭야선사가 반문하되, 청정본연커늘 어찌하여 문득 산하대지가 생겼는고?

하였더니 장수선사가 그 언하에 깨쳤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법문에 의의가 어떠한 것인가? 이것도 선가에서는

공안화두로 쓰이는 것이라, 납자로 하여금 제스스로 의심하여

깨닫게 하는 것이요, 설화하는 것이 아니지만 현대사람으로서는

고심참담의 신고를 겪어서 깨달으려 하지 않기때문에

설화하는 것이니, 그것은 장수가 물을 것도 없는 것에 한생각을

공연히 일으켜서 묻는 그 자체가 산하대지를 나타나게

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영대(靈臺)가 밝은 장수선사는

더 물을것도 없이 언하에 깨치게 된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치를 오래 의심하고 정진하다가 깨치면 자기 밑천이 되고

살림이 되지만 상식적으로 알아 넘기면 확실하게 깨쳤다고

할수가 없는 것이다. 그이유는 아래 인용한 고인의 문답을 보면 알수있다.

 

옛날 중국땅에 법안스님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법안종을 세워 한 종파를

이루고 회상(會上)을 꾸며 5백명의 납자를 지도하고 계셨다.

이때 현칙이라는 납자가 와서 감원직책을 맡아 5백명 대중에 대한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법안스님 회상에 와서

있은지가 3년이 지나도 조실에 들어와 법문을 묻는 일이 없었다.

 

법안스님이 보기에는 그가 계행이 엄정하고 지식이 해박하며

마음씨도 고우나 선지(禪旨)에 대해서는 조금 부족한 것 같이 보이는데,

한번도 와서 법문을 묻지 않는 것이 이상스러워 현칙을 점검하여

보려는 생각이 나서 어느날 그를 방장실로 불러 들였다.

'자네가 이곳에 온지가 몇해가 되었나?"

"벌써 3년이 되었나 봅니다"

'이미 3년이 되었다면서 자네는 나에게 법문을 한 번도 묻는 일이

없으니 어지된 까닭인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만심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미 이곳으로 오기 전에 청봉스님 회상에서

참선공부를 하여 안심처를 얻고 ,또 그 스님께 법문을 묻고

깨친 바가 있어서 다시 의심할 것이 없기로 스님에게 법문을

묻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것 참 고마운 일일세,그러나 청봉스님께 무슨 법을 묻고 무슨 대답을

얻어서 깨달았는지 한번 말해보게'

'"제가 청봉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학인이 본래 갖고 있는자기 자성입니까?

하였더니 '병졍동자가 와서 불을 구하는 것이니라'고 대답하시므로,

그 언하에 깨친 바가 있습니다"

"옳기는 하나 아직 옳지 못한 곳이 있도다 "

"그렇다면 스님은 저의 깨달은 곳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겁니까?"

'쾌하게 허락할 수가 없노라"'

'병정동자가 와서 불을 구한다는것은 갑을(甲乙)은 목방(木方)이요,

병정(丙丁)은 화방(火方)이요,무기(戊己)는 토방(土方)이요,

경신(庚辛)은 금방(金方)이요, 임계(壬癸)는 수방(水方)이라

병졍동자는 화방을 맡은 화신의 형제인즉, 화신이 화방에 와서

불을 구한다는 대답인즉, 자기가 자기자신을 구하는 것 밖에

별다른 밀지가 없다는 뜻이니, 본래 갖고 있는 자기가 부처이라

별달리 마음밖을 향하여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할것이 없다는

법문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틀림없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만 알아 갖고는

청봉스님의 뜻을 알수가 없는 것이니라, 만약 그렇게도 불법을

쉽게 알아 버린다면 불법은 벌써 망해버리고 지금까지 전해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네는 청봉의 불법을 꿈에도 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일쎄'"

현칙화상은 법안스님에게 이 말을 듣고 모욕을 당한 것 같아서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법안스님 회상을 떠나 다른 곳으로

행각을 나섰다. 그러나 몇십리를 가다가 흥분이 가라앉아 생각하되,

'법안스님이 인정하여 주지않는 것은 분한 일이지만 그러나

500여 화상의 지도자인 방장화상으로서 공연히 그럴 이치가 없다,

하여간 나에게 미진한 곳이 있기에 그러할 것이 아닌가.

 이런 의심이 나서 다시 한 번 돌아가서 사과하고 물어보리라"

하고  되돌아 왔다.

그래서 지나간 자기의 심경을 법안 스님께 말하고,

'다시 찾아 왔나이다' 하였더니 법안선사도 그럴 것이라 하고 그러면

다시 물어보라고 한다. 현칙이 일어나서 절하고,

"어떠한 것이 학인의 본래 갖고 있는 자기 자성입니까?"

하였더니 법안스님은 큰 소리로,.

'병정동자가 와서 불을 구하는 것이니라'" 했다

 

현칙이 생각하되  법안화상은 별다른 법문을 일러 주는가 하였더니,

내내 청봉스님의 법문을 되풀이 하는 것이 었다,

그러나 현칙은 청봉스님께 듣던 바와는 달리 뼈속까지 감촉되어

그 언하에 확철대오를 했다, 그러고 본즉 청봉스님이나

법안스님의 대답이 동일한데 법안스님의 대답에 확철대오 한 것은

그 차이가 어디에 있는가?

같은 대답이지만 전자는 사량심 에서 였고 , 후자는 말과 생각이 모두

끊어진 긴장한 곳에서 오묘한 이치를 체득하여 깨친 까닭이다.

선험적으로 피부로 느기고 골수에 사무쳐 깨달아야 되는 것이요,

사량분별이나 의리상량(義理商量)으로 논리 분석에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식에 흐르고 마는 까닭이다.

 

 

    주고 받는 것이 생명이다 많은 사람들은 받기를 좋아하고 주기는 싫어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받는 일이 곧 주는 일이며 주는 일이 곧 받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주었기 때문에 받고, 받았기 때문에 주는 것이다. 준다는 일은 결코 주어 버린다는 관념만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주는 것과 다시 돌아오는 것의 순환은 너무나도 보편적이다. - '변화하는 시대의 지혜/윤준호'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