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대주혜해스님이 마조스님을 찾아갔습니다.

마조스님이 “어떻게 왔는가” 물으니 대주스님이 “불법을 배우러 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마조스님이

“너한테 있는 보물창고는 어떻게 하고 내게 법을 구하러 왔는가” 하고 말했습니다.

대주스님이 “나에게 있는 보물창고가 무엇입니까” 또 물으니 마조스님이

“네가 묻는 바로 그놈이다”라고 했습니다. 

 

운문스님은 부처님이 탄생하고 동서남북 칠보를 걷고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말씀하신데 대해 “부처님을 때려서 죽게 해 개에게 먹이로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렇듯 마조스님이 말씀한 개개인이 본래 갖고 있는 ‘보물창고’를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대주스님이 마조스님이 묻는 “그놈이 보물창고”라는 소리를 듣고 깨쳤습니다.

깨치고 보니 본래 우리가 부처로 존재하고 있다는 얘기를 제가 옛 고사를 통해

신도들에게 말씀드린 것입니다. 우리는 수행을 하거나 깨치거나 상관없이 본래

부처로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을 수행이라 하고, 이것을 아는 것을 깨쳤다고 합니다.

 

임제스님이 깨친 얘기를 하겠습니다. 임제스님은 황벽 회상에서 열심히 수행하고

있을 때, 목주스님이 대중 가운데 임제스님이 제일 진실하게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임제스님에게 “조실 스님에게 법에 대해 물었는가” 하니 임제스님이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몰라서 못 물어봤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목주스님이

 “그럼 조실스님에게 가서 불법의 적적대의(的的大意)에 대해 물어라”고 했습니다.

임제스님이 황벽스님에게 물으니 몽둥이로 20방을 때렸습니다. 맞고 나오니

목주스님이 또 물었다. “조실 스님이 뭐라 하시던가.”

“몽둥이로 때리셨습니다.” “그럼 또 가서 물어라.”

그렇게 해서 세 번을 가서 물었는데 모두 몽둥이를 맞고 나왔습니다.

 

그러자 임제스님이 난 황벽스님과 인연이 없는가 보다 하며 다른 회상서 공부해야

겠다고 마음 먹고 목조스님에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목주스님이

“네가 여기서 3년간 스님의 은혜를 입고 살았는데 인사를 드리고 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후 황벽스님에게 가서 “임제가 진솔히 수행하고 있으니 잘 지도해 주십시오”

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임제스님이 황벽스님에게 작별인사를 하자 “대우스님이 계신 곳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먼 거리를 임제스님이 걸어서 대우스님을 찾아갔습니다.

이 분이 걸어가면서 ‘왜 때렸을까’라는 생각이 화두가 돼서 잠시도 간단없이

의심하면서 갑니다. 그 후 대우스님을 만나 인사 드리고 황벽스님에게 맞은

얘기를 했습니다. 임제스님이

“내가 무슨 허물이 있어 세 번이나 몽둥이로 때리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임제스님이 황벽스님을 떠나 대우스님에게 가는 내내 매맞은데

대해 잠시도 생각을 놓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대우스님은 “너를 위해 정말 노파심으로 깨치게 하기 위해 때렸는데 왜 원망심을

품고 있느냐”고 하자 거기서 임제스님이 깨달음을 얻습니다.

임제스님은 깨달음을 얻은 후 “황벽 불법도 별거 아니네”라고 말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대주스님이 깨닫고 나서 “이 자리는 깨달음과 상관이 없구나”라고

한 것과 같은 말입니다.

 

임제스님의 말을 들은 대우스님이 “무엇을 봤길래 그러느냐” 하니 임제스님이

대우스님의 옆구리를 세 번 쥐어박았습니다.

대우스님이 보니 황벽스님과 가풍이 같았습니다. “너는 황벽스님의 제자가 되라”

하고 돌려보냈습니다. 황벽스님이 마당을 거닐다가 임제스님이 돌아온 것을 보고

“그렇게 돌아다니고 언제 공부하겠는가”하고 꾸짖었습니다.

 

   
 

여기부터 제가 각색하겠습니다. 임제스님은 “스님의 알량한 자비 때문에 그 먼

곳에 다리품을 팔고 왔습니다”라고 답했다. 왜 그랬을까요. 깨치게 해주기 않았습니까.

황벽스님이 보니 갈 때와 달랐습니다.

“대우스님을 만나고 왔느냐.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물으니 임제스님이 있는

그대로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자 황벽스님은

“대우 그놈 나중에 만나면 혼내줘야겠다”고 했습니다.

당신의 상좌를 깨닫게 했는데 왜 혼을 내주나. 임제스님이 “기다릴 거 뭐 있습니까.

스님이나 대우스님이나 똑같은 사람 아닙니까” 하면서 황벽스님을 후려쳤습니다.

우리가 세속적인 입장에서 보면 스승을 때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깨달아서 그 마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은

우리가 본래부처라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 올라온 것은 너무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다 완성돼 있습니다.

<금강경>에도 우주의 모든 존재를 태(胎) 란(卵) 습(濕) 화(化) 유정무정 유상무상

비비상처 등 9가지로 나눴는데 모두가 완성돼 있는 것입니다.

사람만이 완성돼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완성돼 있는 것을 도로 회복하기 위해 우리가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제가 아는 것 없지만 고사(古事)를 들어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본래 존재로 돌아가 행복하게 살 것인가에 대한

안내문을 설명하겠습니다.

설악산 등 경치 좋은 곳에 가려면 노정기(路程記)가 필요하듯이 우리도 본래자리로

돌아가기 위해서 노정기가 필요합니다. 여러분도 노정기를 통해 본래 완성돼 있는

그 자리에 돌아가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2600년 전에 왕자로 태어나 몸짱, 얼짱에 학문 권력까지 갖췄습니다.

세속적 기준으로 보면 부족한 것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다만 어머니 일찍 돌아가신

것에 마음 아파 생로병사에 대해 고뇌하고, 당시 인도의 사성계급으로 인해

하층민이 고통 받고 있는 불평등한 사회 현상을 보며 고뇌하셨습니다.

인간이 평등하게 행복하게 삶을 살 수 없을까 해서 출가를 단행해 모든 수행집단에

가서 체험을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고뇌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독자적으로

붓다가야 보리수 아래서 정(定)에 들었다가 새벽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습니다.

깨달음을 얻자 개인적 고뇌가 모두 해결되고 깨달음대로 생활하면 잘못된

사회제도도 고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단을 조직해 깨달은 내용을 전파하며 포교한 것이 불교입니다.

2600년 후에도 한국에서도 개개인 스님이 깨달아 사회의 여러 계층에서 고통 받는

이들을, 물질 제도도 중요하지만 물질 제도를 갖고 사는 그 마음을 바꿔야 행복하게

살기 때문에 마음을 바꾸는 집단으로서 교단이 운영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은 도대체 무엇을 깨달았나, 우리와 무엇이 달라졌나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나’라는 생각을 전제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나라는 생각을 1초도 놓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이 깨닫고 보니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이것 때문에 모든 사람이 고통을 당하면서 살아왔던 것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았다는 것은 존재원리를 바로 봤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본 존재원리로 자신을 보니 내가 있다고 살아왔던 시간들이 너무 잘못됐던

것입니다. 여기 계시는 신도들도 예외는 아니라고 봅니다. 나라고 생각한 것이

잘못됐다는데 부처님은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본 것일까요.

부처님이 깨친 얘기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겠습니다.

 

나라는 생각이 있어 그동안 삶이 잘못됐다면 나를 어떻게 봐야 진실 되게 보고

마음이 바뀌어 매일매일 행복하게 살아가는 계기가 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이 깨달은 후에 개개인을 어떻게 봤을까요. 사람뿐 아니라 이 우주의 모든

존재가 같은 원리에 의해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있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중도(中道)로서 존재하고 있다고 봐야 바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중도는 무엇인가. <반야심경>에서 오온(五蘊)이 개공(皆空)이라고 했습니다.

오온이 개공하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오온은 육신과 정신입니다.

색(色)은 몸뚱이, 수상행식(受想行識)은 정신입니다. 몸뚱이와 정신이 공한 것을

알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겁니다.

몸뚱이와 정신이 공함을 아는 것이 중도입니다. 부처님이 중도를 이해하니 우리가

기존에 봐왔던 존재원리 말고 하나가 더 있더랍니다.

 

중도를 쌍차(雙遮), 쌍조(雙照)라고 설명합니다. 몸뚱이가 있다고 본 것은 쌍조에

해당합니다. 쌍차는 못보고 있으니 바로 보지 못한다. 쌍차는 오온이 공(空)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저는 이를 손으로 비유합니다. 내가 본다는 것을 손바닥이라고 하면,

쌍차는 손등입니다. 손에는 손바닥과 손등이 아울러 있지, 하나만 있지 않습니다.

이처럼 손바닥과 손등처럼 쌍조라고 할 때 쌍차는 항상 붙어있습니다.

그 반대로 마찬가지로, 분리돼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잠시 찰나에도 생멸

(生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을 중도라 합니다.

 

중도를 이해하면 마음이 굉장히 편안하고 지혜롭고 행복감을 느낍니다.

이것을 부처님은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손바닥)만 있다고 여기지만 저것(손등)도

같이 있습니다. 이를 <반야심경>에서 공이라 했는데 왜 그랬을까.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옛 사람은 이를 소박하게 비유했습니다.

시골에 가면 새끼가 있고 망태기, 짚신이 있습니다. 모양과 쓰임새가 모두 다르지만

그것을 만든 재료는 짚입니다. 남녀가 다르고 미국인과 한국인이 다르지만 그것을

만드는 재료, 즉 ‘본질’은 하나입니다.

 

때로는 연기(緣起)이기 때문에 공이라고 합니다. 연기는 우리가 단일로 독립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있다, 나는 단일된 독립 개체라고 생각하고

생활하는, 그 사고가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지수화풍 4가지 원소가

몸뚱이를 구성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현대과학은 어떻게 말할까요. 1965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리처드 파인만이라는

 학자는 몸뚱이가 단일로 독립된 것이 아니라 수억만개의 원자 덩어리로 구성됐다고

밝혀냈습니다. 또 현대 물리학자들은 우주가 무(無)에서 탄생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수억만개 원자 덩어리이자 세포 덩어리입니다. 단일로 독립된

개체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독립된 개체로 보면서 나에 대해 애착을 느끼고

물불을 가리고 않고 싸우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역사입니다.

해묵은 얘기지만 미국 인종갈등이 이런 이유로 발생하는 것입니다.

내가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구상 유일하게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분단돼 핵을 만들고는 전전

긍긍하고 있습니다. 또 지구상 가장 갈등을 많이 하고 있는 것이 종교 갈등입니다.

다른 종교를 비방하려고 하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한국은 불교가 넉넉한 마음을

갖고 있어 전쟁이 안 일어났지, 상대가 하는 대로 따라했으면 우리도 전쟁이

일어났을 겁니다. 불교는 아무리 핍박을 하고 위해를 주더라도 똑같은 존재로 봅니다.

 

개개인이 갖고 있는 것을 자성(自性)이라 하고 자성을 통합하면 법성(法性)이라

합니다.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인종, 민족, 이데올로기 등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이 불교입니다. 우리가 힘이 없고 논리가 부족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끝까지 부처님이 발견한 존재원리를 이해하고 체험하고 그 마음으로 생활하고

삶을 살면 개인도 주변 사람도 편안하고 행복하게 됩니다.

 

제가 중도를 이해하고 달라진 것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쌍차를 이해하고 나서 남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쌍차로 보면 하나인데 이를 모르니 비교하는 것입니다.

앞집 아이는 서울대 가는데 넌 왜 그 모양이냐고 합니다. 남과 비교하며 대형차를

탄 사람보다 비교하지 않으며 소형차를 탄 사람이 훨씬 더 행복합니다.

 

쌍차 쌍조 중도를 모를 때는 저와 주변에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차라리 속가로 갈까 등 갈등도 많았습니다.

중도를 이해하고 나니 제가 하고 있는 생활과 일이 너무 가치가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둘러보니 그들도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중도를 이해하면 이 세상에 가치 없고 의미 없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함경>에서 그 대목을 찾아봤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똥 푸는 청년이 있었는데,

그 사회에서 가장 낮은 천민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부처님과 마주치는 것을 괴로워

했습니다. 오염시키겠다는 생각에 보면 도망갔습니다. 부처님이 그 마음을 읽어보니

생각을 잘못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을 뿐 본심은 착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을 중도로 바꿔줘야겠다 여겼습니다. 그 청년이 도망가면 부처님이

앞질러 마주쳤습니다. “저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전 천민이고 냄새도 나고 위대한

이에 가는 것만으로 죄 짓는 것 같습니다” 하니 부처님은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 생각을 바꾸라. 천민이라는 것은 힘 있고 많이 가진

이들이 부려먹으러 만든 제도지 태어날 때부터 천민과 귀족이 어디 있는가.

그들에게 속지 말라.”

 

청년은 “똥 푸는 것은 천하지 않습니까” 하니 부처님은

“아니다. 고관대신이라도 국민을 괴롭히는 사람이 많다. 너는 고관대신이

아니더라도 남이 안하는 것을 대신해 남을 돕고 너를 돕는 일을 하고 있으니

고관대신보다 훨씬 났다.”

 

다음 날부터 청년은 부처님을 만나지 않으면 못 견뎠습니다. 그날부터 부처님이

뒷집 아저씨, 옆집 할머니로 보인 것입니다. 두려움이 없어졌습니다.

결국 똥 푸던 청년은 출가해서 큰 도인이 됩니다. 천한 직업을 가졌지만 마음은

착하게 살았습니다. 그런 분은 훨씬 빨리 깨닫습니다. 비교하지 마십시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가치와 의미 알게 됩니다.

 

세 번째는 자주적인 사람이 됩니다. 저는 지금도 내 빨래를 직접 합니다.

올해 일흔일곱이니 아직 할 수 있습니다. 남이 하는 것이 불편합니다.

처사들이 이 말을 들으면 틀림없이 설거지를 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가치와 의미를

알고 비교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의 직업과 성격 등을 인정하게 됩니다.

부부간에 성격이 안 맞아 다투다보니 OECD 회원국 가운데 이혼율이 최고 높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안 되서 그런 것입니다. 손가락도 길고 짧습니다.

이렇듯 길고 짧은 것으로 시비하면 결국 이혼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긴 것은 긴 것대로 짧은 것은 짧은 것대로 서로서로

 인정하면 됩니다. 이것이 소통입니다. 정치도 진보와 보수가 서로 인정하고 함께

국민을 위해 지혜롭게 의논해 오순도순 정치하면 얼마나 잘 살겠습니까.

우리나라가 갈등으로 인해 없어지는 돈이 270조원이라고 합니다.

3년 전 얘기입니다. 거의 국가 예산과 맞먹습니다. 270조원을 갖고 반값 등록금

이든지 복지든지 모든 것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만 바꾸면 됩니다. 돈 드는 것이 아닙니다. 중도를 제대로 이해하고

정치하는 이는 낭비 않고 모든 국민들이 잘 살게 하고 가정에 계신 신도들,

처사나 보살이 중도를 이해하면 앞서 말한 네 가지가 달라지게 됩니다.

이를 불교에서 지혜라 합니다.

 

불교만이라도 부처님 가르침대로 중도를 이해해 마음이 바뀌어 개인과 가정이

잘 살면 사회와 국가에도 영향을 미쳐 남북문제, 여야 갈등, 개인 삶의 질 등이

좋은 방향으로 바뀌어 매일매일 좋은 날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저는 출가할 당시 폐결핵을 심하게 앓는 등 누구보다 마음이 아팠던 사람입니다.

절에 와서 부처님이 깨달은 세계, 즉 중도를 이해하니 지금 정말 행복합니다.

중도가 부처님이 깨달은 세계이자 우리 존재의 원리임을 잊지 말고 공부하기를 바랍니다.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을 보면 부처님 가르침은 결국 중도라는 것이 어느 책보다도

쉽게 쓰여 있다. 이를 보면 중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선서화전’을 하고 있는데 그 글귀도 모두 중도입니다. 저도 선사들의 글귀를 족자에

담아 보고 있습니다. 그 글귀가 제 스승입니다.

오늘 여러분들도 스승이 될 만한 글귀가 있으면 한 점을 방에 걸어놓으면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고, 그 공부가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개인적으로 행복하게 하고 이웃과

더 나아가 국가, 세계도 행복하게 하는데 분명한 역할을 하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