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암(聖母庵)과 진묵대사

2013. 6. 20. 19:5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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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묵대사 어머님 고조의씨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성모암(聖母菴) 전경 -

 

성모암(聖母庵)과 진묵대사

 

 

 

 

 

여름장마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오늘은 부모님에 대한 효도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요즈음 부모님들은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고

노인이 된 지금 자식의 봉양을 직접 받는 것보다

노인병원등 시설에 가 계신 분이 많습니다.

 

 

출가한 스님들은 가족을 떠나 생활하므로

부모님을 모시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입니다.

 

그런데 조선 중기의 고승 중에 진묵스님이란 분이 계시는데

어머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진묵대사와 어머니 고조의씨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합니다.

 

 

 

 

 

 

 

 

 

 

◈ 진묵(震黙)대사

진묵대사(1562년~1633년) 조선조 명종과 인조시대에 활동한 고승으로 선(禪)과 교(敎)와 문자에 두루 뛰어났습니다.

스님은 조선중기 전북 김제 만경현에서 진묵(震黙)대사가 태어났습니다.

어느 날 스님은 목욕. 삭발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지팡이를 짚고 시냇가에서서 시자에게 물속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가르치면서 “저것이 석가의 그림자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시자가 “스님, 이것은 스님의 그림자가 아닙니까?”라고 하니 “너는 어찌 나인 줄로만 알고 석가의 화신인 줄은 모르는가?”라고 하시고 방안으로 들어가 가부좌를 하시고 조용히 앉아서 입적(入寂) 하셨습니다.

스님은 신승(神僧)으로써 법력은 물론, 신통과 이적(異蹟)으로 많은 사람들을 교화했습니다. 또한 노모(老母)를 모시는 효심이 지극하였습니다.

스님은 쇠퇴해가는 조선불교를 일시 중흥시킨 위대한 스님이셨습니다.

 

 

 

 

고시례전(高氏禮殿). 진묵대사 어머니를 위해 지은 독특한 전각이다.

대사의 어머니 관향 제주고씨 에서 유래된 전각이라는설

 

 

 

 

◈ 진묵스님의 효행

스님은 효행이 지극하여 출가한 뒤에도 효도를 다하여, 어머니를 절 가까운 곳에 받들어 모셨으니 효양(孝養)이 두루 지극하였다. 출가 인으로서는 드문 일이었습니다.

전주의 일출암에서 지낼 때 어머니 조의씨를 근처 왜막촌으로 모셔왔는데. 여름에 모기 때문에 어머니가 고생하자 스님은 산령들에게 부탁해서 그곳의 모기를 전부 다른 곳으로 쫓아버리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지역에는 아직도 모기가 거의 없다고 전합니다.

 

어머니가 세연을 마치자 어머니를 만경의 북쪽 유앙산(維仰山)에 장사지내 묘(墓)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제문에 이르기를

<태중의 열달 동안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하겠으며 슬하에서 3년 길러주신 것도 잊을 수 없도다. 만세(萬歲)위에 다시 만세를 사신다 하여도 자식의 마음은 오히려 부족하거든 백년 동안에 백년도 채우지 못하였으니 어머니의 목숨은 어찌 그리 짧습니까?>하였습니다.

스님의 효성과 도력으로 “만일 이 묘(墓)를 쓸고 제사지내는 자는 농사가 잘되고 복과 이익을 얻으리라”하였습니다. 그 후 이곳에 묘를 쓸고 제사를 지낸 주민들이 번번히 농사에 큰 도움이 되자 주민들이 다투어 와서 묘를 돌보고 성묘하고 제사를 지내며, 지금까지 분향하는 일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후 이곳에 사당을 짓고 그 자리에 암자를 지으니 성모암(聖母庵)이다.

성모암은 전북 김제시 만경면 388번지에 소재하고 있습니다.

 

 

 

어린 진묵대사와 어머니 상

 

 

 

◈ 진묵대사(震默大師)

진묵대사(震默大師)는 1562(명종 17년) 김제군 만경면 화포리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일옥이고 호는 진묵이다. 대사에 관한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는 초의스님의 <진묵조사 유적고(震默祖師 遺蹟攷)>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태어날 때 불거촌의 초목이 3년간 시들었으므로 사람들은 ‘세상에 드문 인재가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또 어려서부터 파 ․ 마늘 등의 신 음식과 비린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천성이 슬기롭고 자비심이 있어 주위에서는 ‘불거촌에서 부처님이 나셨다.’고들 했다. 7세 때 봉서사로 출가했는데, 불경을 공부하면서 스승도 없이 경전의 내용을 홀로 터득했다. 언젠가 이 절의 주지가 스님에게 신장단의 신중들에게 향불을 사르는 일을 맡긴 일이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주지 스님의 꿈에 신중들이 나타나, “우리는 부처님을 호위하는 신중들인데 도리어 부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향을 사르게 하지 않게 해달라.”는 말을 했다. 이 일이 있은 뒤 비로소 대중들이 비록 어리지만 진묵스님의 비범함을 깨닫고는 ‘부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신 것’이라고 했다. 스님은 일생을 통해 숱한 신이한 일을 남겼는데. 『진묵조사유적고』에는 스님의 이적 18가지가 기록되어 있다. 이같은 이적은 단순히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신술을 부리려는 것이 아니라 불도를 깨우치지 못한 대중들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려는 방편이었음은 물론이다.

  스님은 봉서사에 머물 때 ‘전국승려대조사’로 추앙받았는데, 그 밖에도 변산의 월명암, 태고사, 완주의 대원사 · 원등암 등에서 스님의 행적이 전해져 내려온다. 봉서사에서는 스님의 영정을 모신 영각이 있고 『어록』판각이 있으며, 부도와 비가 세워졌다. 대원사에서도 스님의 영정이 전한다. 또한 김제시 조앙사는 바로 진묵 대사를 모시는 절이며, 성모암은 진묵 대사의 어머니 조의씨를 모신 곳이다.

   스님이 살았던 시대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 참혹한 전쟁으로 인해 피폐되고 암울했던 때였다. 비록 직접 구국의 대열의 나선 것은 아니었으나 대중과 관계된 수많은 이적과 전설을 남긴 것으로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스님은 대중과 아픔을 함께하며 그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역대 고승들 가운데는 스님의 행장에 나타난 의미를 찾아 수행의 지표로 삼은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성모암 대웅전

 

 

저 남쪽 멀리

어머님의 평생 소원으로

건립한 불당이 있다네.

 

지금은 다른 스님들이 계시지만

어머님의 추모비에 가 본지

어언 30년

 

오늘따라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어머님 기일이 다가오니

더욱 어머님 생각이 간절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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