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된 참선과 세 가지 병 - 청화 스님[淸華]

2013. 9. 5. 18:5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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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삿된 참선과 세 가지 - 청화 스님[淸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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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종사선<三種邪禪> ─────────────────────────────────

 

 

우리는 지금 생사의 가장 큰 일을 위해 모였습니다. 불교말로 하면 일대사인연이라,

이 세상만사 중대한 일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른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공부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일입니다.

 

                                               

 

 

우리는 보통 초상初喪을 당한다던지 관혼상제冠婚喪祭가 있으면 그런 일을 큰일이라고

합니다마는 그것은 세간적世間的인 큰일인 것이고 정작 큰일은 생사해탈의 문제, 비단

지금 今生뿐이 아니라 영생불멸永生不滅하는 문제,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윤회를 벗어

나는 문제,

 

 

우리 인간이 번뇌에 따라서 업을 짓고 업을 지으면 그것에 상응하는 과보果報를 받고,

이른業報를 받는단 말입니다. 그리하여 윤회를 떠나서 해탈의 길로 가는

일이야말로 어느 누구한테나 가장 중요한 대사大事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모인

은 그 대사를 위해서 모인 것입니다.

 

 

그러면 대사大事를 어떻게 치러야 할 것인가?

일대사인연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간단명료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개시오입 開示悟入 이라, 열 개자, 부처님 법문을 열어서 보인다는 말입니다. 불경이나

조사어록들은 모두 부처님 가르침을 우리에게 열어서 보이신 것입니다. 개시開示는 진리

를 열어서 보이시는 것이고 그 다음에 오입悟入이라, 깨달을 오자, 들 입자입니다.

 

우리 중생으로 하여금 가장 중요한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 인간성이 무엇인가?

우리 자아 문제는 또 무엇인가? 라는 가르침을 열어 보이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자아

自我의 상실喪失이라는 말들을 합니다마는 사실로 보면 성자 이외에는 모두가 다 자아를

상실해 있습니다.

 

 

성자聖者만이 우주의 도리인 참다운 자아를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의 일대사는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들에게 생사해탈을 열어서 보이고

<開示>동시에 깨달아서 그 속에 들게<悟入>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깨달아서 우리 스스

증명證明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이와 같이 철저합니다. 그냥 교리적인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념

적인 이해도 알아야 되겠지만 그와 아울러서 꼭 증명해 들어가야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

는 불교의 구경究竟 목적을 달성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지도 할 때도 역시 꼭 그 사람에게 부처님 법을 여실

하게 개시오입開示悟入이라 진리에 어긋나지 않게 가르쳐야 할 것이고 그와 동시에 깨달

아서 자기 스스로 증명하도록까지 해야 합니다.

 

 

그런데 깨닫는 법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먼저 시간에 말씀했던 참선參禪입니다.

선 禪Zen 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고 비중을 갖는 문제입니다.

 

어느 누구나 다 참선을 해야 됩니다. 자기를 찾는 공부 가운데서 가장 고도한 수행법이

참선인데 모르면 할 수 없다하더라도 한 번이라도 안 다음에는 꼭 참선을 해야 합니다.

 

 

참선, 그러면 아주 고도한 사람이나 하는 것이지 세간적인 사람은 엄두도 못내는 어려운

이라 생각들을 보통 합니다마는 참선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알고 보면 제일

운 것입니다. 제가 결코 과장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참선이 왜 제일 쉬운 것인가, 참선은 조금도 무리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 몸에

제일 편안便한 자세가 바로 가부좌跏趺坐한 자세입니다. 반듯하게 가부좌한 자세가

소화도 제일 잘되고 피도 가장 맑게 하는 것입니다. 안주부동安住不動해서 가장동요가

없는 자세란 말입니다.

 

                           

 

 

 

용수보살龍樹菩薩의 지도론智度論에도 보면

“시가부좌좌 최안온불피극是跏趺坐坐 最安穩不疲極” 이라,

 가부좌 한 자세가 가장 편안하고 피로를 없앤다는 말입니다.

 

자세姿가 좋은 사람들은 건강도 좋습니다. 어디 앉더라도 삐뚤게 앉게 사람들은 대체

소화도 잘 안 되고 병도 오기 쉽습니다. 너무 긴장하지 않고 단정端正하고 꼿꼿하게

앉는 자세를 취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사상思想도 건전하고 건강도 그에 따라서 좋은 것

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형태구도 중에서도 정삼각형 같이 안정된 모습이 없지 않습니까. 피라미

보십시오. 이집트의 피라미드Pyramid 그것도 역시 심심미묘한 기하학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삼각추의三角錐 중심에다가 무엇을 두면 썩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바로 가부좌<降魔坐/吉祥坐>한 모습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습 가운데 가장 안정된 모습인 동시에 제2석가라고 불리는 용수보살龍樹

Nagarjuna, 그 분 말씀에 마왕견지 기심수포魔王見之 其心愁怖라, 마왕魔王들이

이 가부좌<如來坐>모습만 봐도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사상이 확실하고 자세가 단정할 때는 그 어떤 삿된 기운도 우리를 침범하지 못

니다. 비스듬히 드러눕거나 엎드리거나 하는 자세 가운데 망상妄想도 생기고 하는 것

이지 우리가 바른 사색思索을 하고, 바른 관념觀念을 하고, 바른 자세姿勢를 취한다고

할 때는 나쁜 기운이 근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남하고 대화를 할 때도 똑바로 단정하게 앉아서 정색으로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섭니다. 절대로 남이 섣불리 못하게 됩니다. 부처님 제자는 부처님 뜻에 따

릅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어떤 면에서나 가장 좋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참선參禪할 때는 가부좌하는 것이 원칙입니다마는

우리 마음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설사 모양은 제법 태산같이 든든하게 앉아있다 하더

라도 마음으로 남을 미워하고 욕심내고 해서는 참선이 못 됩니다.

 

주인공은 역시 마음인지라, 설사 자기 인연 따라서 가부좌 하는 모습을 못 취한다 하더

라도 사업도 해야 되고 장사도 해야 되고 우리가 고객도 만나야 되고 그런 처지에 있는

그런 가운데서는 참선은 할 수가 는일이 아닌가?..

 

참선은 어느 때나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

꼭 가부좌만 틀고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조단경에 보면 “내 법은 본체本體를 여의지 않는다.<我所說法 不離自性>” 성자의

이란 어느 때나 본체를 떠나지 않습니다. 본체란 것은 근본성품을 떠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절대적인 근본본체本體를 떠나서 자기가 보고 배운 대로만 느끼고

현상만 보고 상식적으로 따집니다. 우리 상식常識이란 것은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나와서 보고 듣고 배운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십인십색十人十色이,

은 갑대로 느끼고 은 을대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사상

思想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겠지요.

 

 

배운 대로 느낀 대로 따지기 때문에 기성세대世代와 새로운 세대가 서로 뜻이 충돌하

노동자나 사용자使用者도 역시 자기 배운 대로 느낀 대로 주장하기 때문에 싸울 수

밖에 겠지요. 그러나 본체本體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다 동일한 것입니다.

 

 

불교의 위대한 점은 하나의 진리로 해서 귀결歸結을 시키는데 있습니다. 귀일일심원

歸一一心圓 이라,  마음의 근원으로 귀결시키는 것이 성자들의 가르침의 특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설사 우리가 어디 공장에 가서 일을 한다하더라도 할 일이 생기면 마땅히

야겠지요. 부처님 법은 절대로 인연을 소홀히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자기

인연 따라서 최선을 다하고 남보다 훨씬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상황에 임해야 합니다.

 

 

일본사람들이 지금과 같은 풍요로운 기술문명을 열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 사상으로 무

기 때문입니다. 그네들은 불교가 아주 체질화 되고 있어요. 저번에 고베神戶의 대지

地震 때 신문을 보니까 그 고난苦難 중에도 사람들이 굉장히 침착하고 질서 있게 남

보다 앞서 구출 되려고 서두르지 않는 모습을 보고

 

 

미국 사람들이 아주 찬탄을 하고 박수를 보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봤습니다만 그 사람들

불교佛敎가 몸에 배여 있어서 남이 보나 안보나 매사에 성심을 다 합니다. 그것은 부처

님이라 하는 진리의 실체를 그들이 여의지 않고 산다는 증거입니다.

 

 

기독교를 잘 믿는 분들도 역시 하느님을 항시 여의지 않고 삽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주의 실체實體 아닙니까.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고 해서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가질 이유가 조금도

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고 무소불능無所不能이라’, 어디에나 안 계시는

데가 없고 또는 능하지 않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진리인 동시에 우주의

광명입니다.

 

 

따라서 우선 그 개념으로 본다하더라도 부처님의 법신法身이라, 석가모니가 나오고 안 나

고 관계없이 진리 자체인 부처님은 참다운 부처님은 바로 우주의 생명生命 그 자체입니

다. 석가모니Sakyamuni는 인간으로 해서 진리를 깨달았을 뿐인 것입니다.

 

 

예수Jesus도 사람으로서 우주의 진리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주의 도리를 깨달아버리면

宇宙와 하나가 됩니다. 따라서 그 때는 하나님이라 부르나 무엇이라고 부르나 상관이

없겠지요, 지금은 세계화 시대라고들 말합니다.

 

그리고 경제는 벌써 세계화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다국적 기업 같은 것은 우리가 싫으나

좋으나 세계화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서로 사상적으로 교류하지 않을 수가 없고

인간적으로 교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다종多宗敎 다민족多民族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지금은 사상의 혼란기입니다. 사상이 혼란스러우면 도덕道德도 혼란스럽게 됩니다. 이런

가운에서는 모든 것을 하나로 합치는 통일원리가 필요합니다. 그 지도 원리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21세기의 새로운 문명의 지도 원리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각기 성자들도 다 동향성은 비슷한 말씀은 했으나 그래도 적어도

계적으로 통일원리를 말씀한 것은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를 건설하

이끌어간다고 할 때는 그것에 맞는 철학은 사실 우리 불교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느끼면서 참선문제도 생각해야 됩니다. 참선參禪은 그러한 우주의

다운 진리를 순간도 떠나지 않고서 공부하는게 참선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진리란 것이,

없는 것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면 어려운 것이겠지만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우리 마음이 본래 부처기 때문에 그저 마음의 도리에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마치 기

레일을 바로 따라가야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전복되지 않듯이 우주의 도리에 따르기

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성자聖者의 진리란 것은 우주의 궤도軌道입니다.

 

 

우리가 성자의 길을 따르지 않는 것은 우주의 길에서 탈선하는 것입니다. 우주의 도리

道理에 따라서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듯이 우리도 역우주

도리에 따라야 살기가 참 편한 것입니다. 인간人間도 하나의 자연自然이니까요.

 

 

우주의 도리道理란 무엇인가? 바로 우주는 하나의 생명이고 하나의 동일생명同一生命

다. 천지우주는 나와 더불어서 한 뿌리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우리들도 모두 하나인

입니다. 이러한 도리道理에 따르는 것이 참선參禪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은 중생의 그릇 따라서 방편법문을 하셨지만

방편법문方便法門종국적終局的으로는 본체本體로 돌아가는 법문입니다.

 

 

그러나 참선參禪만큼은 바로 직설直說'그대 마음이 바로 부처다'.

즉심시불卽心是佛 일체존재一切存在의 근본성품根本性品이 부처다,

 

 

따라서 모든 여러 가지 사설을 다 배제하고서 그냥 직통으로 우주의 진리 핵심으로

바로 들어가는 것이 참선參禪공부입니다. 그래서 여러 방법도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가령 외도인들이 하는 것은 모양은 가부좌도 하고 그럴 듯하지만 그들은 因果

믿지 않고 또 자기自己가 무엇을 하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덮어놓고 합니다.

 

명상을 하고, 참선을 하면 기분도 좋아지고 힘도 나고 건강에도 좋다하는 정도로 하나의

유위有爲공덕, 자기 이익을 위해서 계산부터 하는 그런 선은 진정한 참선參禪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참선參禪 공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한테 복이 온다거나 재물이 온다는 따위의 생각

은 아주 없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부처가 돼야한다는 일념一念 부처가 되면 그 어떤

복락도 그 안에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가볍게 생각할 때는 ‘지금은 현대화 시대니까 생활 불교를 해야 할 것인데

활은 어떻게 하고 참선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참선參禪

을 하는 것이 생활 불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참선이라는 것은 근본도리道理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근본도리에 따라 살면 남하고도 다툴 일이 없고 집안도 화목하게 되고 또는 국가國家

이나 민족民族간에도 화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동일한 생명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참선공부를 한다면 앞서 말씀과 같이 일체 존재의 뿌리가 하나이고

또 현상적으로 달리 모양을 하고 있더라도 달리 나와 있는 나나 너나 모두가 다 하나

의 고유한 실체가 없고 다만 현상적인 전변무상轉變無常한 것에 불과하고 모가 다

하나의 생명이다.

 

이렇게 굳건히 생각한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 몸이 어디에 있으나 무슨 일을

하던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건 간에 모두가 다 참선參禪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증도가證道歌에 보면 그냥 가부좌 틀고 앉는 것만 참선이 아니라 행주좌

住坐臥라 좌역선坐亦禪이고 횡역선橫亦禪이라, 앉으나 서나 모두 참선이란 말입니

다. 이것은 본체를 여의지 아니해서 그럽니다.<行亦禪 坐亦禪 語黙動靜體安然>

 

 

가사 우리가 밤에 잘 때도 삿된 생각이나 하고 텔레비젼 같은 것에 정신精神이 팔려 잠

들면 잠 잘 동안에 별별 꿈을 다 꾸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에 몇 시간을 자도 몸만 피

곤하고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는 순간에 마음을 정리하고 우리 생명의 고향故鄕이요, 일체존재의 진리眞理

의 고향인 부처님을 생각하고 잠이 든다고 생각 할 때는 잠자는 그 순간에 우리 마음은

부처님 쪽을 지향을 합니다.

 

 

마치 시골 들에서 논에 물꼬를 낼 때에 물꼬를 내는 대로 물이 흘러가듯이 그와 똑같이

우리가 자는 그 순간에 마음의 코스를 부처님 한테로 고정 시키고 잔다면 우리 의식은

잠들어도 잠재의식潛在意識은 부처님 쪽으로 끊임없이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쁜 꿈도 꾸지 않고 몸도 개운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 법은 모든

에서 다 편하고 잠 잘 때도 편합니다. 이 참선參禪 공부도 동양권의 대승불교에서

<중국, 일본, 한국 등> 하는 참선법이 최상승법입니다.

 

 

저 다른 나라에서 하는 법도 부처님 법이지만 그것은 동남아 불교나 소승불교에서

 ‘본래 그대 마음이 바로 부처다.’ 이런 식으로는 말하지 않습니다. 공부를 해서 꾸벅꾸벅

올라가는 식으로 말 합니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우리마음이 시원스럽지는 않습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이 말은 석가모니만 이 천상천하에 제일 높다는 말

아닙니다. 어느 누구나가 다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인 것입

니다. 우리가 바로 부처님이고 하느님입니다.

 

 

다만 자기가 번뇌에 가려서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이렇게 느끼고 공부를 해야 이른바

최상승선最上乘禪이라,  동양권에서 가장 발달된 대승선법大乘禪法이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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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종사선三種邪禪

 

그 다음은 삼종사선三種邪禪이라, 삿될사자, 고요할 선자입니다. 참선을 해 가는 데

장애가 많이 있습니다. 그 장애를 어떻게 없앨 것인가, 또 어떤 것이 나쁜 방법인가,

이런 것도 알아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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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말씀 드린 대로 참선은 선방禪房에서 앉아서 하는 것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지 간에 우리 마음이 진리의 고향인 부처님한테 있을 는 참선인 것입니다.

선방에 있다 하더라도 마음이 부질없는 망상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선이 못됩니다.

 

 

꼭 부처님만 부르고 ‘이뭣꼬’ 화두를 든다고 참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사 하느님을

를지라도 우리 ‘마음이 본체자리에 생명의 실상實相이요 우주만유의 본체인 진여불성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을 부르나 ‘이뭣꼬’를 하나 ‘옴마니반메훔 Om Mani Padme

Hum 외우나 다 참선인 것입니다.

 

 

참선은 좁은 의미가 아니라 훌훌 털어 버리는 넓은 의미입니다. 참선은 부처에도 착

하지 않고 조사祖師에도 착하지 않습니다.<殺佛殺祖> 오직 진리에 따를 뿐입니다.

 

 

삼종사선三種邪禪이라, 세 가지 삿된 참선을 말하는 것인데, 그 하나가 ①암증선暗證

  禪요, 어두울 암자 증명할 증자 암증선이고, 그리고  ②문자선文字禪이라, 오직

  문자나 이론적인 개념으로만 따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③야호선野狐禪이라 들자, 여우호자, 여우란 놈은 재주와 꾀가 있어서 자기

필요할 때는 세 개의 구멍을 판다고 합니다. 구멍을 한 개 파놓으면 적들이 침범하면

로 잡히니까 세 개를 파놓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서 피한다고 합니다.

 

그와 같이 여우 모양으로 잔꾀를 부려 미처 못 통하고 통했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재주가 좀 있고 위풍도 좀 갖추고 큰소리치면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도인처럼 보이기도

하겠지요. 못 통했으면서 통했다고 하고 증명하지 못했으면서 증명했다고 거짓말 하는

것이 야호선野狐禪, 즉 여우같이 삿되게 하는 참선입니다.

 

 

먼저 암증선暗證禪은, 부처님 가르침이나 조사들 가르침에는 참선하는 방법과 진여

眞如佛자리를 증명해 가는 과정을 우리에게 극명하게 밝혀 놓았는데도 게으른 사

람들은 책도 보기 싫어하고 더구나 불경이 한문으로 되어 있는지라 보기가 좀 어렵고 하

니까 그저 화두만 들고 다른 것은 다 무시를 해 버립니다.

 

 

우리 선방에서도 전혀 경을 못 보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해서,

물론 정진 할 때 경을 보면 방해가 되는 수가 있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부처님 경전은 소중한 생명 글입니다. 다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금옥 같은 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경서나 훌륭한 선지식善知들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고서

덮어놓고 하는 참선을 암증선暗證禪이라 합니다.

 

                           

 

 

그렇게 암증선을 하면 자기 공부가 얼마나 진전 되었는지 스스로 점검할 길이 없는 것

니다. 그래 놓으면 섣부른 걸 가지고 다 되었다고 교만심을 부리기도 하겠지요. 선지식

들의 말씀도 곧이듣지 않고 남의 충고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멋대로 행동할 때는 틀림

없이 아만심我慢心에 빠지고 맙니다.

 

 

우리는 겸허하게 앞서간 선배들, 선지식들, 부처님 경전들을 충분히 참고로 해서 공부해

나가야 합니다. 그 말씀들은 모든 중생들이 성불成佛에 이르는 길을 명료明瞭하고 소상

하게 밝혀 놓은 길잡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길을 게으름 부리고 업장이 많으면 더디게

갈 것이고 부지런하고 업장이 가벼우면 훌쩍 뛰어 빨리 갈 수도 있겠지요.

 

 

우리가 이런 길을 무시하고 외면할 필요는 절대로 없습니다.

 

따라서 암증선을 피하기 위해서는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경전經典도 많이 보시

특히 선에 관한 여러 가지 책들도 보고 선배들에게 묻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암중모색

暗中摸索하는, 길도 모르면서 헤매는 암증선을 피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문자선文字禪이라, 참선이라 하는 것은 실지로 마음을 닦아야 하는 것인데

만 많이 보고 이론적인 쪽으로 너무 치우쳐서 실지로 참선을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수행인들은 아무리 바빠도 조석朝夕으로 삼십분 정도는 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죽어서 갈 때는 자기 몸뚱이를 버리고 가지만 오직 생전에 닦은 법력만<業>은 가지고

갑니다. 이것이 우리한테는 가장 큰 자산입니다.

 

따라서 평소에 조석으로 삼십분이면 하루 한 시간.. 한 시간 정도면 그렁저렁 헛생각도

하고 그냥 지나가 버리는 그런 시간입니다. 여기 젊은 스님들도 있지만 이 분들은 하루

다섯 시간도 못 잡니다. 재가불자在家佛子들도 하루 다섯시간 정도 자면 충분합니다.

 

부를 많이 하신 스님들은 안자고 몇 달이고 몇 년도 배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한테 갖추고 있는 진여불성眞如佛性, 우리 본성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가 정작 원력願力을 가지고 한다면 능히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부처님 당시

에 바구라Vakkula존자라, 그 분은 140세를 사신 분인데 장수제일 바구라라 그 분은 자기

평생 승려가 된 뒤에 한번도 누운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른바 장좌불와長坐不臥라, 항시 앉아서 생활했다고 합니다. 요새 장좌불와 하는 사람

들을 보면 벽에 기대기도 하고 합니다마는 그 분은 한 번도 벽에 기대지도 않고 오로지

앉아서만 지냈다고 합니다. 장수제일長壽第一의 바구라존자는 음식도 하루 한 끼만 먹

었다고 합니다.

 

그 분은 또 무병제일無病第一이라, 승려가 되어서 140세까지 살면서 한 번도 앓아 누운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 할 때는 그렇게 무리를 하면 몸이 어떻게 당해

낼 것인가, 신경통도 생기고 영양실조로 쇠약해져서 쓰러지지 않겠는가하고 생각 할 수

도 있겠지만,

 

무병제일無病第一, 장수제일長壽第一의 바구라존자, 그 분은 그와 같이 평생을 앉아서

하루 한 끼만 먹고도 무병無病하게 장수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한테 들어있는 부처님 기운, 우주의 정기精氣 에너지는 무無限 힘이 있는 것입니

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광파光波도 초속이 30km나 되지 않습니까. 그

것보다 훨씬 더 무한 고성능의 기운이 우리에게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불성佛性에 들어있는 그 기운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대승신앙大乘信仰은 우리한테 들어있는 무한의 공덕을 믿는 것입니다.<本來是佛>

 

 

불경佛經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들어있는 그 무한의 공덕을 믿으면 바로 ‘즉시입필정卽時入必定’이라, 그 믿음

으로 바로 선정禪那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나한테 있는 무한력을 믿으면 즉시에 삼매에

어간다는 것인데도 우리 중생衆生은 자꾸만 의심을 합니다. 신앙이란 것은 성자의 말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문자도 많이 배우고 불경도 많이 봐야 되겠지만 參禪을 해서 우리

마음을 자꾸 맑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경험하신 것처럼 반야심경 한 편을 보더라도

참선參禪 한 철하고 볼 때와 두 철하고 볼 때와는 해석解釋이 다릅니다.

 

똑같은 법문이지만 성자의 법문은 우주의 본질을 말한 법문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정화되면 정화淨化된 만큼 해석을 달리 합니다. 참선을 오랫동안 하고서 경을 보면 “그렇

구나, 그렇구나”하고 평소에 풀리지 않던 까다로운 문제가 잠을 자면서 꿈속에서 문득 풀

려 버리수가 있습니다.

 

무엇이든 일구월심一久月深로 생각하면은 우리 마음이란 것이 원래原來

뿌리가 부처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풀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도 젊었을 한 때 꿈을 꾸었는데, 도륜스님이라는 도반하고 꿈에 어디를 가는데 아주 장

엄스런 궁전이 나왔어요. 그 궁전 앞에 문지기가 지키고 있었는데 그 문지기가 문 앞을

로 막고 서서 자기가 묻는 말에 답을 못하면 못 들어간다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물어보라고 하니까 저한테 먼저 묻기를 “지옥地獄이 어디 있는가?”하고 묻는 것

이었습니다. 평소에 저한테 그런 질문을 했더라면 그 때 당시는 삼십대도 미처 못된 나이

분명한 답을 못했겠지요. 그런데 꿈에서는 아주 명쾌하니

 

 “혜안관시 지옥공 慧眼觀時 地獄空”, 이렇게 대답이 나온단 말입니다.

혜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지옥은 공이다, 평소 같았으면 그런 질문에 그

대답이 나오기가 어려웠을텐데 꿈에서는 아주 명쾌하게 대답을 한 것입니다.

 

 

투철하게 혜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 지옥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慧眼時地獄空”이라,

지옥이라는 것이 우리 중생의 어두운 눈으로 봐야 있는 것이지 정말로 맑고 투철한 마음

으로 보면 지옥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상시에 무던하게 부처님 생각하고 정진하다보면 이런 때 신기하게 꿈에도 나올

수 있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불교를 안 믿는 분도 난해한 수학문제 같은 것을

골똘하게 생각하다보면 꿈에 그 문제가 풀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 정신精神이라는 것이

이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렇게 무한無限의 힘이 있는데도 우리는 아주 조금밖에 못 쓰고 사는 것입니다.

 

 

인간의 뇌세포腦細胞가 백억개가 넘는다고 하지마는 결국은 십분의 일도 못 쓰고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 사상은 백 억 개가 아니라 무한의 능력을 내포內包해 있는 것이고

꼭 자기 에만 그것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정기精氣는 우주에 충만充滿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성자들은 꼭 뇌 속에 들어있는

뇌세포만 가지고 이래저래 쓰는 것이 아니라 우주 에너지를 그대로 잡아 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는 허상虛相과 법상法相이 나옵니다. 허상 이것은 부질없는 상을 말합니

다. 어떤 때는 정당한 상이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않고 한계를 모

르는 사람들은 허상虛相과 법상法相을 구분을 못합니다.

 

 

법상法相은 차근차근 챙기고 허상虛相은 그냥 부정을 해 버리면 되는 것인데, 그 구분을

못하면 이래저래 손해를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이나 선지식들 말씀을 참고로

해서 암중모暗中摸索하는 참선은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문자만 따지고 실참實參하지 않는 그런 문자선文字禪도 경계를 해야 합니다.

우리經典을 대할 때도 적어도 그 경을 보기전에 다만 몇 분이라도 고요히 마음

가다듬고 참선을 하고 보아야 경전의 뜻과 내용의 갈래가 잡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경장과 논장을 다 외운다 해도 그것이 갈래가 안 잡히고 통일이 안 되면 자기

것이 못 됩니다. 이른바 문리文理를 알아야 할 것인데 문리를 모르면 가닥을 못 잡습니다.

참선과 더불어 해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하나하나 가닥이 잡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야호선野狐禪이라, 여우같이 교만한 짓은 정말로 우리가 피해야 됩니다. 기독교

회나 불교사회나 여우같은 무리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래 놓으면 자기도 망치고 남도 망

니다. 한 소경盲人이 무수 소경을 인도引渡하다가 수렁으로 몰아놓는 것이나 똑같은 것

입니다.

 

 

경에도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일맹인중맹一盲引衆盲이라, 한 소경이 많은 소경을 데려

가 한 함정에 빠져 죽는다는 얘기지요. 잘못된 스승이 이끌면 그리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남을 지도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두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잘못 지도

한 사람은 불교 말로 병도사病導師라 그럽니다. 우리 중생을 병들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처님 법대로 여실하게 말하고 증명하지 않고서 꼭 자기 의견을 보태서 함부로 말한단

니다. 우리는 남을 지도할 때 병도사病導師를 피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처님

말할 때 자기가 잘 모르는 것은 꼭 그대로 옮겨주고 자기가 증명證明한 것만 남한테

밝혀야 하는 것입니다.

 
                           

                             

 

♧. 의 삼종병<三種病> ───────────────────────────────

 

 

 

 

 

 

 .미도주작 未到走作     .이도주착 已到住着     .투탈무의 透脫無依        꿰뚫을 투

 

 

 

 

에는 세 가지 병이 있습니다.

 

그 한 가지는 미도주작未到走作이라,

미처 이루지 못하고 너무나 성급하게 이럴까 저럴까 헤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력을 다해서 부지런히 노력해서 하루 빨리 부처가 되어야겠다는 분심奮心

좋습니다마는 그렇게 공부는 별로 않고 기분만 앞서서 빨리 도인道人행세行世하고 싶

고 남앞에 나서고 싶어서 서둘러서 가는 것을 미도주작未到走作이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마음만 가쁩니다. 참선할 때 마음이 차분해야 호흡呼吸도 조용해집니다.

호흡과 참선은 중요한 상관성相關性이 있습니다. 따라서 호흡법도 중요합니다. 우리

마음이 거칠면 호흡도 거칠고 또 호흡이 고요하면 마음도 고요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에도 초기에는 중생을 제도 할 때에 부정관不淨觀이라,

우리 몸뚱이는 모두가 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不淨하고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죽을 때까지 죽어서 시체되어 썩어서 구더기가 나오고

처음부터 끝까지 더러운 것 뿐이다,

 

우리가 죄업罪業을 짓는 원인은 대체로 자기 몸뚱이를 금쪽 같이 아끼는데서 부터

시작하는 것인데, 털. 피. 창자. 뼈. 골수. 대변. 지방. 땀. 고름. 간. 소변. 침... 이렇게

부정不淨한 몸뚱이를 아끼고 말고 할 것이 없이 모두가 더러운 것뿐이다. 이렇게

우리가 관찰하는 것이 부정관不淨觀입나다.

 

그런 관법觀法이 있고 또 한 가지는 호흡관呼吸觀이 있습니다. 호흡수를 헤아리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고 그렇게 하면서 참선을 하는 것인데 호흡법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인도印度의 요가수트라Yoga Sutras 같은 것은 주로 호흡법을 수행으로 하는 방법인데,

결국 참선하는 자세를 올곧게 만드는 행법들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마는 마음이

산란散亂스러워 참선이 잘 안 되는 사람들은 참선하기 전에 얼마 동안이라도 호흡을

고르게 하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호흡을 고르게 하려면 되도록 숨을 느리게 쉬고 들숨과 날숨을 조절해서 될 수록 들숨

보다 날숨을 길게 쉬어야 합니다. 또는 유식留息이라해서 호흡을 오래 멈추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호흡이 저 아래 丹田까지 쑥 들어가서 마음이 차분해

지고 호흡도 점점 느려져서 차근차근 참선이 익어지면 그 때는 자기가 숨을 쉬고 있는지

없는지도 느끼지 못하는 단계가 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호흡이 딱 끊어져 버립니다.

 

 

참선하는 사람들은 자기 호흡이 끊어질 정도로 숨결의 고요함을 느껴야 됩니다. 그러면

止息이라, 지식이 되어야 참다운 삼매에 들어갑니다. 이와 같이 호흡은 우리 마음의

상황 따라서 그것에 상응된 문제이기 때문에 굉장宏壯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은 화두話頭나 염불念佛이나 주문呪文이나 자기 인연 따라서 해야 되

지만 잘 안 되는 경우는 처음 몇 분 동안은 자기 호흡을 다스리고 몸과 마음을 추스리는

것이 하나의 방편方便으로 중요합니다. 따라서 너무 서두르지 말고 차분히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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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이 이도주착已到住着이라,

공부가 무던히 되어서 재미가 붙는다는 말입니다. 몸과 마음이 텅 비어 오고 아는 것도

전보다 훨씬 명석해지고 그 만족감에 이만하면 되겠다싶어 그 자리에 머물러 버린단말

입니다. 그것이 도인道人의 경지가 아닌데 몸과 마음이 좀 개운해지면 그만 그 자리에

집착을 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공부는 더 이상 진전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이도주착已到走着이라 합니다.

이미 어느 경계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러 버린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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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는 투탈무의透脫無依라,               

 

투탈무의는 아무 것에도 의지 할 바 없이 모두가 다 허망무상虛妄無常하고 텅 비어있다.

 

이렇게 공사상思想에 너무 젖어서 모두가 다 우리가 의지할 것이 없다. 우주라는 것은

본래가 다 공인 것이거니 이와 같이 공으로만 치우치고 다른 것에는 조금도 의지意志

두지 않는 것이 투탈무의透脫無依입니다.

 

 

따라서 이런 세 가지 참선병을 치유治癒하셔야 합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