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 설우스님

2013. 10. 3. 19:0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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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 설우스님

 

 

신수… 번뇌 없애 무심에 이른다    혜능… 닦을 마음도 본래 없다

 

신수스님이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 같나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 끼지 않게 하라”는 게송을 벽에 붙였다.

오조 홍인대사는 이 글을 보고 능가변상도(楞伽變相圖) 그리는 것을 그만 두게 하고,

신수스님 게송을 벽에 써 놓게 하고서는 <금강경> 사구게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를 말했다.

하근기에게 그림을 그리는 방편법을 쓰지 않고 벽에 게송의 글을 외우고 의지하게 했다.

오조(五祖)가 반야사상이 담긴 <금강경> 사구게를 언급하는 것은 <육조단경>을 편집한

후학들이 첨가한 것이다. <금강경>을 끌어옴으로써 남종의 종지가 <능가경>에서

벗어나 <금강경>으로 바로 이어지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인용한 사구게야말로 남종의 종지를 드러내는 글인 것이다.

 

신수의 게송이 드러내는 문제점은 ‘몸’과 ‘마음’ ‘보리’와 ‘밝음’ ‘나무’와 ‘거울’ 등으로

분별한다는데 있다. 결정적으로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 끼지 않게 하라’는,

점수(漸修)를 내세우는 대목이다. <금강경> 사상을 끌어들인 이유도 여기 있다.

<금강경> 사상은 즉비(卽非) 논리이고, 즉비(卽非) 사상이다.

즉비사상의 곧 즉(卽)자는 같을 동(同)자와 같다. 번뇌가 바로 보리이고, 생사가 그대로

열반이고, 중생이 본래 부처인 것을 즉(卽)이라 한다. 그런데 아닐 비(非)자를 중간에

넣은 것은 부정을 거쳐서 드러내는 절대적 긍정을 위함이다.

각심(覺心)은 중생심이니 불심(佛心)이라는 분별의식을 부정함으로써 부정된 주체가

그대로 보리심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이것을 즉비(卽非)라 한다.

신수스님의 방편법문은 떠날 이(離)자를 썼다. 떠난다는 것은 더러운 것을 떠나서 깨끗한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으로, 번뇌를 완전히 없애버리고 보리심을 성취해야 함을,

“계(戒)로 인해 정(定)이 생기고, 정으로 인해 혜(慧)가 생긴다”라는 법문을 통하여

단계적인 차제법을 설하였다.

 

신수스님은 현실적으로 중생 업식이 있다는 방편수행을 요구하면서, 번뇌를 녹여 없애서

보리가 되고 열반이 되고 또 무심이 되게끔 닦음을 강조하여, 그 닦음은 번뇌가 본래

실체가 없는 공(空)이라는 것을 깨치게 하는 방편법이다.

반면 혜능스님은 ‘떠날 이(離)’가 아닌, ‘곧 즉(卽)’이다. 번뇌 즉 보리며, 생사 즉 열반이며,

오염(汚染) 즉 청정(淸淨)이다. 신수스님은 청소를 해서 청정으로 가는 차제법을 설한다.

 그런데 마음은 허공과 같기에 어떻게 걸레질을 할 것이며, 어떻게 닦느냐, 그리고 어떻게

오염시킬 수가 있었느냐, 어떻게 어둡게 만들었느냐에 대해 혜능스님은 달의 입장에서

철저한 반야 공(空) 사상으로 바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깨달은 본상에서 볼 때, 닦을 것이 근원적으로 없다.

 

신수스님은 본질이 공(空)하고 업(業)도 공(空)하고 복(福)도 공(空)하지만, 복도 지어야

하고 공덕도 닦아야 하고 학문 공부도 해야 하고 수행도 해야한다고 본다.

그렇게 애를 많이 써서 깨치고 나면, 그 일이 꿈속의 일이고 본래 그대로 원만구족되어

있는 도리를 안다는 것이다. 이것은 돈오견성한 부처 입장에서 보면 닦은 것이 모두

부질 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마치 나무 속에 불(火)의 성질을 본래 갖추고 있으나, 애를 많이 써서 비벼서 열을 냈을

때 비로소 불(火)이 일어나 나무가 타듯이, 마음을 항복받는 닦음을 말한다.

닦음이 부질없는 것 같아도 닦음으로 인해서 본래 중생이 문제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치게 된다는 것이 신수스님의 입장이고, 혜능스님은 오직 유심(唯心). 마음 본체 자리를

그대로 바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이 점수법과 돈교법의 차이점이다

 

- 불교신문2936호/2013년8월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