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보현행자

2013. 10. 10. 18:4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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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현행자

 

 

 

환희주 김숙자(歡喜住 金淑子)|우바이 도피안사

 

 

 

“부처님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큰스님의 이 말씀은 어느새 나의 입에 옮겨 붙어서 기도송이 되었다.

 

 

내가 지금처럼 기도송을 입에 달고, 저녁마다 사경을 하며 또 일상생활에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앞으로 남은 인생을 봉사하고 열심히 수행정진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불자가 되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이 모두가 큰스님의 은혜 덕분이다. 이런 결론을 먼저 내려놓고 인연담을 이야기하고 싶다.

 

 

어느 따스한 봄날, 나는 이웃에 사는 지도(홍성재)거사의 간곡한 권유에 일끌려 외가집 가는 소녀처럼 설레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연거푸 심호흡을 해가며 불광사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가는 탐험가의 심정이 그때 내 심정 같았을까. 그렇게 설레는 가슴을 눌러가며 처음 마주한 불광사는 무슨 교육기관 같기만 했다. 법회시간에는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경문을 한글로 독경하는 것을 보고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왜냐하면 집에서 생각하고 왔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면 흥미롭기도 했다. 거의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고 절은 고리타분한 분위기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남자들도 많았고 젊은 사람들도 많았다. 힘이 넘쳤고 활기가 솟아나는 역동성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런 느낌을 인연이라고 해야 할까.

 

 

지도거사의 권유가 인연이 되어 나는 불광 불자가 되었고, 마침내 우리 가족들 모두 불광사 신도가 되었다. 나는 그 중에서도 가장 모범적으로 열심히 다녔고 법문을 잘 듣는 것을 비롯해 여러 가지 수행을 착실히 쌓아 나갔다. 큰스님 말씀을 한마디라도 더 들으려고 노력했으며 잊지 않으려고 혼자서 자꾸만 되뇌어 보기도 했다.

 

 

그때는 초발심의 감동과 환희심이 내 몸에 넘칠 때였으므로 항상 『불광요전』을 손에 들고 다니며 어느 때나 시간이 있으면 『천수경』과『반야심경』을 읽고 외웠다. 돌아보면 참 순직한 초발심의 수행시절, 환희에 찬 세월이었다.

 

 

이제 이 글을 쓰며 그때의 광경을 다시 돌이켜보니, 부지런히 잠실벌을 건너다니며 환희에 젖어 기뻐하던 이십여 년의 불연들이 낱낱이 뇌리를 스친다. 그러나 이제 내 나이도 인생의 무상을 뼈저리게 느낄 정도가 되었으니 무심한 세월이 안타깝기도 하고 현실이 더욱 숙연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뉘라서 이 인생무상을 피할 수 있겠는가 하는 체념도 든다. 아니, 그동안의 수행에 의한 달관이라고 말하고 싶다.

 

 

오늘이 나를 있게 만든 분은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이시지만 우주와 인간의 참뜻인 불법을 알게 해준 분은 불광사의 법주 큰스님(光德)이시다. 인간으로서 바른 정신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주어 비로소 사람노릇을 하도록 하셨으니 이 어찌 작은 일이며 가벼운 인연일까. 참으로 무겁고 소중한 은혜이시고 갚아야 할 보답이리라. 쉽게 말하여 나의 육신을 낳아주신 분이 부모님이시고 정신(佛法)을 낳아주신 분이 큰스님이라는 이야기다. 그러하신 큰스님을 생각하면 왜 이리 안타까운 심정이 드는지 모르겠다.

 

 

지금 내가 원주보살로 부처님 시봉하고 있는 이곳, 도피안사에서 큰스님을 친견하고 삼배를 올리며 우러러 뵈옵던 인자하신 그 모습, 그리고 산 너머 불광원에서 마지막으로 뵙던 병약했던 그 모습을 나의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다.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바람에 흔들릴 것 같은 허약하신 모습으로 대중 가운데 모습을 드러내실 때, 그 애잔한 안타까움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큰스님 생각을 하면 무시로 눈시울이 뜨거워 견딜 수가 없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기도한다.

 

 

“큰스님, 어서 이 땅에 오시어 중생을 제도하시고 법문을 설해 주시옵소서. 큰스님의 목소리가 그립고 자애어린 모습이 그리워 큰스님을 생각하면 마치 어린 아이가 어미를 찾는 것처럼 눈물만 흐릅니다. 우리 주지스님의 천일기도를 받으시어 속히 사바세계로 오시옵소서.”

 

 

우리들의 정신적 지주이셨던 큰스님은 항상 자애로우시고 티 없이 정결한 동자 같았다. 큰스님은 당신의 그 뛰어난 지혜 자비를 베풀어서 아무것도 모른 채, 오직 내 몸. 내 가족. 내 자식만 제일로 알던 무지렁이들을 참된 불자로 만들었고 바라밀 동지로 키우셨다. 그러하신 큰스님 안 계신이 세상은 마치 텅 빈 세상 같기만 하다.

 

 

그러나 지극한 효자이신 이곳 도피안사 주지스님은 법당에 들어오면 큰스님 진영 앞에서 절을 하고 기도를 드린다. 마치 살아 계시는 스승께 아침저녁 문안을 드리는 것처럼. 그런 모습을 바라보면 괜히 콧등이 시큰해질 때도 있다. 나는 합장하고 주지스님의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

 

 

큰스님께서는 항상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라고 우리들에게 이르셨다. 그런 간곡하신 설법도 이제는 한갓 지나간 과거지사가 되고 말았으니 이것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무상한 인생의 속절없는 사연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아쉽기 때문이다. 불법을 일러주시는 선지식은 인생사 숱한 인연 속에서 그냥 잠시 스쳐가는 또 하나의 인연이 아니라 부처님과의 인연(법연)이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가도 나의 인생 속에서 우리의 생활 속에서 진리로 남아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스승을 정신적인 아버지라고 하며 또는 인생의 지주라고도 한다. 나는 항상 이 고귀한 인연의 소중함을 깨달아 큰스님을 더욱 정성껏 모시고 싶다. 큰스님께서 입적하셨다고 관계가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 토피안사에서 ‘원주보살’ 소임을 보는 것도 바로 큰스님의 인연을 소중하게 하고 싶은 생각 때문이다.

 

 

돌아볼수록 큰스님께 무한정 감사하고 싶다. 그리고 주지스님께도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큰스님은 법을 설하시고 오늘의 나를 있게 만든 장본인이시고, 주지스님은 그러한 큰스님의 뜻을 계승하고자 이곳 시골에 묻혀서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곁에서 보기에도 아름다운 스승과 제자의 모습이다.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일이 이곳 도솔산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고귀한 두 분의 스승을 만나서 불법의 가르침을 받았고 뛰어난 미묘법문을 듣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앞으로 남은 인생을 더더욱 경건한 마음으로 생활하고 분발하여 기도 정진할 것을 큰스님의 진영 앞에서 약속했다.

 

 

나에게 혈친 못지않게 중요한 사람들은 큰스님 슬하에서 지금까지 함께 수행해 온 우리 불자 형제들이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내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을 통해 얻은 것이 너무나 많다. 그들은 나의 약함을 부축해 주었고 게으름을 채찍질해 주었으며 잘못된 생각을 일깨워 주었다. 나는 다행히 사람 몸을 받아서 태어났고 또 불법을 만났으며, 좋은 벗들로 인하여 정진할 수 있었고 큰스님으로부터 반야바라밀을 배웠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기에 더욱 발심하여 참되게 살 것을 거듭 다짐해 본다.

 

 

우리 주지스님의 『광덕스님 시봉일기』를 다 읽고는 너무나 감격하여 마치 큰스님을 눈앞에서 다시 뵙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내 자신을 보면 스님의 노고에 항상 미안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큰스님이나 현재의 주지스님이나 항상 가르침의 핵심은 반야바라밀이다. 사실 반야바라밀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핵심적인 교법이라고 알고 있다. 사실 굳이 큰스님의 가르침이라고 하기보다는 불교의 근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가르침을 큰스님께서 집중적으로 우리들에게 강조하시고 체험시켜 나갔던 것이다.

 

 

이제 나는 조금이나마 부처님의 은혜를 갚고 또 큰스님의 은혜를 갚아서 제대로 된 사람 노릇을 할까 한다. 사람은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내가 숨쉬는 날까지 보살이란 믿음을 놓지 않고 자비행을 실천하며 올바른 불자가 될 것이다. 또 아침저녁 수행 일과를 열심히 닦아 청정한 일심을 얻어야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몸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도 생각해 본다.

 

 

큰스님과 인연한 이 땅의 불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반야바라밀에서 물러서지 말고, 오직 반야바라밀로 보리 이루고 보현행원으로 불국토 성취하는 대불사를 이루자.”하고

 

 

 

광덕스님 시봉일기 7권 사부대중의 구세송 중에서- 글 송암지원, 도피안사

 

 

 

수행의 길

 

각운동의 횃불을 드높이자

 

 부처님의 법문을 들은 세존 당시의 사람들은 그환희와 감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세존께서는 쓰러진 것을 붙들어 일으키듯이, 덮인 것을 활짝 제치듯이, 미혹한 길을 바로 일러주듯이, 어두운데에 등불을 들고 이것을 보라 하듯이 저희들의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당시의 스님들이나 재가인들이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쁜 것은 마음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마혹의 마음을 깨우쳐 활짝 밝게 하였으며 어두운 마음에 불을 붙여 처처에 힘을 가득 채워 주었으며 흔들리는 생활에서 굳건한 자기를 세워 주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미혹을 돌려 깨달음을 열게 하였던 것이다.

 

 부처님의 설법은 그럴 수 밖에 없다. 근본적인 진리를 사무쳐 아시고 중생의 모습을 너무나 밝게 꿰뚫어 보신 부처님으로서는 중생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깨달음뿐이라는 것을 아셨던 것이다. 모든 중생은 원래로 모두를 갖추고 있었고 아무런 결함도 없었다. 가난하지도 않으며 약하지도 않으며 어리석지도 않다. 다만 착각으로 인한 [미혹] 한가지가 중생이라는 끝 모를 악몽을 헤매게 하였다.

 

 그러니 눈 밝은 사람은 중생에게 착각을 깨우치도록, 미혹을 돌리도록 하는 밖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기에 불교는 깨닫는 방법을 가르치고 깨달은 행을 가르치며 필경 깨달은 자임을 깨닫게 한다. 이래서 불교는 깨달은 이의 깨달은 말씀이 되는 것이다.

 

 예를 정신 착각자에게서 찾아보자. 어떤 환자가 정신질환으로 입원 감호만 받고 있다고 하자. 그에게는 명예도 재산도 신체적 건강도 천하인의 찬사도 문제가 안 된다. 그에게는 오직 정신을 바로 들게 하는 것만이 필요하다. 정신건강 연후에 부귀도 영화도 그를 따르게 되며 의미가 있게 된다.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시종 깨달음의 가르침임을 착안하여야 한다. 우리가 행할 바도 스스로 깨닫고 이웃을 깨닫게 하고 사회를 깨닫게 하고 겨레와 국가를 깨닫게 하며 인류 세계 내지 중생을 깨닫게 하는 것이 근본임을 알아야 하겠다.

 

 깨닫는 것이 무엇일까? 가까운 말로 제 정신이 들게 하는 것이다. 정신병자가 제 정신이 들 듯이 미혹한 인간이 제 정신이 들어 정상적인 자기를 회복하는 것이다. 무엇을 하고 안하고는 제2, 3의 문제이다. 병든 자에게 어진 의원이 되고 사람에게 음식을 베풀어주며, 헤매는 자에게 바른 길을 가리킨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제 정신을 잃은 사람에게는 제 정신을 찾기보다 더 급하고 절실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인간이 제 정신을 찾고 사회가 제 정신이 들 때 이 땅에 평화가 온다. 참된 인간의 평화와 행복이 있게 된다. 인간이 미혹으로 제 정신을 잃고 있는 한 어떠한 복지도 안락도 인간에게 참된 기여를 하지 못하며 평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여기에서 불자가 가야 할 공도를 다시 발견하는 것이다. 불자는 이웃과 나라가 복되고 풍요롭기를 바라며 겨레의 건강과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 방법은 기계를 만들어 내고 의약품을 만들어 내는 것에 앞서 국민 정신을 바르게 들게 하는 자각운동에 있다 하겠다.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라 할 것이다. 국민정신 바로 찾기 운동은 바로 국민의 계몽이며 역사와 사회를 향한 사상 운동이다.

 

 깨달은 사상을 가르치고 펴고 겨레에 심으며 세계에 펼쳐가는 이것이 깨달음의 가르침을 배우는 불자에게 주어진 책임이며 의무가 아니겠는가. 각 운동이야말로 불자에게 주어진 무상의 영예이며 권능이며 사명인 것을 알아야 하겠다.

 

 이제 8.15 광복 36주년이 된다. 우리는 그처럼 몽매에도 잊지 않고 피를 뿌리며 절규했던 독립한 조국을 찾았지만 국토는 반 동강이 나고 말았다. 겨레도 두 쪽이 나고 말았다. 36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분단의 구렁텅이는 좁혀지지 않는다.

 

 우리 민족은 이조 5백년에서 갈기갈기 찢기고, 일정 36년에 먹고 살기에 바빠 민족의 사상이 비었던 것이다. 무장된 민족정신이 굳건할진대 외세가 강요한 분단에 결코 우리 스스로가 나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떠한 상항에서라도 자력자강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바른 깨달음으로 겨레의 사상이 무장될 때 조국의 통일, 세계의 평화는 열매를 맺을 것이다.

 

 광복 36돌을 맞으면서 불자로서 각운동이라는 본연의 임무에 소흘 하였음을 자책하며 각운동만이 오늘의 우리와 인류가 살 길임을 거듭 확인한다. 그리고 새로운 용진의 자서로 삼는 바이다.

 

<81>

 

 광덕 큰스님 지음 빛의 목소리 p286 – p289 수행의 길에서, 불광출판사

 

사진작가 최민식, 시인 조은이 엮어낸 감동적 사진에세이

삶이 고단하고 힘드신가요? ‘인간의 불행이라는 악성바이러스를 꿋꿋이 이겨낼 수 있게 하는 항체’가 여기 있습니다. 50년간 인간을 주제로 삶의 진실을 파헤쳐왔던 사진작가 최민식(76)씨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불행'을 껴안는 그의 넉넉한 품이 그려집니다. 최근 시인 조은씨가 최씨와 함께 펴낸 사진집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샘터)는 고단한 삶을 응시하는 두 사람의 영혼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최씨는 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사진으로 담아왔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장사하다 끌려가는 아주머니와 고구마 몇 개 얹어놓고 행상을 벌이는 아이와 어머니, 길가에 지친 몸을 기댄 부자(父子) 등 고단하고 남루한 일상이 연이어집니다. 그 자신 또한 팔리지 않는 사진만 찍느라 줄곧 가난과 함께 살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네들 삶의 진실이 더욱 진하게 그의 사진에 묻어나는지도 모릅니다.

최씨의 카메라가 이처럼 언제나 낮은 곳을 향해 치열하게 움직이며 찍어낸 사진에 시인 조은씨가 간결한 글로 새로운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는 최씨가 1950년대 후반부터 2004년까지 담아온 여러 서민들의 모습과 느낌에 감동을 더해주었습니다.

그들이 찍고 써 내려간 과거의 불행으로 잠시 되돌아가봅니다. 과거를 보면서 힘겨운 현재를 잠시 위로 받아봅니다. 인생을 담은 노사진작가와 한 중견시인의 질퍽한 감동의 사진에세이를 이제부터 간략하게 소개해봅니다.

어머니...어머니...

왜 어머니의 팔은 아이를 품어줄 수 없는 것일까요? 왜 어린 소녀는 힘겹게 누군가를 업고 있는 것일까요? (1969년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서 있는 어머니 젖을 누나 등에 업힌 채 물고 있는 아이의 모습. 어머니는 손에 밴 비린내 때문에 아이를 안지 못 하고 있다.)


거리의 어머니는 아이의 잠을 지켜주고 있는 것일까요, 아이의 죽음을 거부하고 있는 것일까요? 어머니는 이 순간, 손을 내밀 사람이 있기나 할까요?(1961년 부산. 길가에서 구걸하고 있는 모녀의 모습이 뒤에 있는 간판과 대비된다.)


삶을 응시하는 자들이 키워가는 세계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1976년 부산. 자갈치 시장의 생선장수 아주머니가 아이를 업고 자장면으로 점심식사를 대신 하고 있는 모습)


고되게 살아가는 자들에게서 느껴지는 아슬아슬한 질서와 안정감이 외면하고 싶을 만큼 서글픕니다.(1959년 부산. 한 부둣가에서 생계를 위해 찐고구마를 팔고 있는 모자의 모습은 오히려 잘 먹지 못 해 영양실조에 걸린 것처럼 보인다.)


일찍 어른의 모습이 되어버리는 아이들의 얼굴에선 미래가 암초처럼 모습을 나타내곤 합니다.(1957년 부산. 이 시절에는 두 소녀처럼 학교도 못 가고 가사를 돌보며 사는 아이들이 많았다.)


거리의 부녀를 눈여겨보세요. 손으로 소음을 막아주고, 다리로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잡아주며 아버지는 딸아이의 잠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1963년 부산)

인생이란...

본질에서 떨어져야만 아름다운 것들이 있습니다. 그만큼의 거리에서 빨래는 남루를 씻어버린듯 눈부시고 햇살은 명랑한 아이들처럼 골목을 뛰어다니지요.(1963년 부산. 태극촌이라는 종교마을의 전경. 기하학적으로 보이는 이 판자촌은 당시 북한과 타지방에서 이주해온 피난민들이 주로 살고 있었다.)


불순함이라고는 없는 노동에 저토록 수모를 당해야 하다니 때로 세상의 정의가 불한당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1972년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한 노점상 여인이 단속반에 끌려가고 있는 애처로운 모습)


육신의 한 부분을 미리 자연 속으로 돌려보낸 사람들의 삶도 도무지 가벼워 보이지가 않습니다.(1985년 부산. 극장가에서 비가 오거나 눈이 와도 그곳을 지키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청년의 모습)


삶의 속도에 의해서 진창을 벗어날 때도 있고 속도 때문에 진창에 처박힐 때도 있습니다.(1978년 부산. 역전에서 비오는 날 한 아이가 자전거를 타다가 물이 튈까봐 다리를 들어올리는 모습)


이토록 다른 정서적 이질감 때문에 웃을 수 있는 것도 아직은 우리의 정신이 여유 있기 때문이지요. (2002년 부산. 역전의 공중전화에서 두 여인이 전화를 걸고 있지만 그 모습이 묘한 대비를 보이고 있는 장면)

희망은...

구불구불한 길에 뒤덮인 저 육체! 산다는 것은 제 몸속에 길을 내는 것입니다. (1975년 부산. 범어사에서 주름이 깊은 할머니가 열심히 기도를 드리고 있는 모습)


어른들 세계로 팔을 쭉 뻗는 아이들은 언제나 밝은 것을 희망합니다. 그 아이들은 어둠 속에서도 열심히 빛을 향해 발돋움하겠지요. (1980년 부산. 용두산 공원에서 놀고 있던 두 소녀가 손을 번쩍 올리고 있다. 가난하지만 행복해 보이는 모습)


자신의 삶을 스스로 더 가파른 곳에 올려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때라야 평지에 있는 자신을 향해 웃을 수 있는 것일까요? (1968년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짐을 기다리던 지게꾼이 사진작가를 보며 활짝 웃고 있는 모습. "잘 찍어달라"는 부탁까지 했다고.)


외로움과 죽음의 관념을 이겨내고 비로소 환해지는 우리의 영혼처럼... (2004년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갈매기 한 마리가 할머니 머리에 잠시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