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의 자격

2013. 10. 25. 23:2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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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 / 아띠샤존자

 

만약 그대가 속인들이 하듯이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면, 

자신을 수행자라 하지 마라.

비록 수행처에서 세속잡사를 버리고 살아간다 하더라도, 

이미 내버린 것에 미련을 두고 있다면 

수행자라고 자처할 자격이 없다.

세속의 좋은 것을 바라는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고, 

그것을 향해 방황하는 사념이 일어나고 있다면

수행자라 하지 말라.

 

속인들과 어울려서 다니거나 

같은 수행자끼리 세속적인 빈말을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비록 수행처에서 살아가고 있더라도

수행자라 하지 마라.


“만약 그대가 관대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얕잡아 본다면  

게다가 다른 이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면

수행자라 하지 마라.

 

그런데도 속인들에게 수행자를 자처한 다면 그대는 형편없는 거짓말쟁이다.

그와 같이 말하면서 진실을 가장하고 살수는 있지만  

천안을 갖추신 분들을 속일 수는 없으며, 

법안이 자유 자재한 붓다를 속일 수는 없다.

그대자신 또한 속일 수 없다. 

까르마의 결과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수행처에 머무르려면 

모든 세속적 삶의 방식과 모든 인간관계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이런 모든 것을 버림으로서 

집착과 열망을 형성하는 그 모든 인연들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런 뒤에 더 나아가 수승한 보리심을 일으켜야 한다. 

단 한 순간이라도 세속의 것에 연연하는 옛 망념이 

다시 고개를 쳐들도록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그대들은 제대로 법 수행을 하지 못 했고,

수행의 힘을 약하게 하는 옛 습관에 지배되어 

끊임없이 속인의 관념을 만들어 내었다.

그러한 관념이 압도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강력한 처방을 하지 않는다면 

수행처에 머물러 봐야 아무 이득이 없다.

 

수행처에 살고 있는 새들이나 들짐승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요컨대, 속세의 좋은 것들에 대한 미련을 끊지 못하고 

세속적 삶의 행위를 내버리지 못한다면 

수행처에 머물러 있어 본들 별로 얻는 것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속적인 성향을 끊어버리지 않고서, 

지금의 세속적인 삶과 영적인 성취의 두 목적을 동시에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것은 모양새만 흉내 내는 수행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수행은 

자기 복을 비는 위선적이고 거짓으로 꾸민 행위가 아닐 수 없다.

 

- 아띠샤존자의 가르침에서 -

 

티벳불교의 씨앗을 뿌린 인물이 빠드마삼바바라면 42대 왕 랑다르마에 의해

철저히 훼손된 티벳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운 사람이 아띠샤 존자이다

 

아띠샤 존자님의 법어 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엉터리거짓으로 스스로를 불자라 칭하고 있는지

우리중생들에게 그들 스스로 모범이 되지 못하시는 몇몇,,,스님분들이

얼마나 엉터리로 가증스러운 삶을 살아가는지를

여기 아띠샤 존자님의 자격법문으로 알수있음이며

제 스스로도 참회합니다

수행에 목적이 있어서는 안 된다

 

수행에 목적이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참된 수행은 수행 자체가 우리 삶이요, 내 본연의 모습, 내 참 자성이 현실로 나투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행에 무슨 이유가 붙고 무슨 목적이 따라서는 아니 됩니다. 수행은 밥 먹고 잠자는 것처럼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물론 밥 먹고 잠자기 위해 사는 분도 계시겠지만, 밥먹고 잠자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삶이 피곤해집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닫기 위해 행복하기 위해 수행한다는 분들이 계십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 하는 분들이 많은 게 현실이고 또 그런 목적은 우리에게 수행에 대한 동기 부여를 하는 건 사실이지만 수행은 사실 그런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수행을 하지 않는 분들의 이야기입니다. 수행이 뭔지 모르고 수행을 하지 않는 분을 수행으로 모시기 위해 잠시 거짓으로(?) 드리는 이야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마치 법화경의, 화성(化城)의 비유처럼...


수행은 처음부터 목적이 없든지, 처음엔 그렇지 못하더라도 결국엔 목적이 없어질 때까지 가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이라는 것 자체가 없고 수행을 한다는 생각도 닦는다는 마음도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비소로 참된 수행이 시작되고,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제대로 수행을 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닦는 게 있고 얻는 게 있고 하는 게 있는 수행은 겉모습은 수행이 될지언정 참다운 수행은 되지 못합니다. 아직 본 궤도에 이르지 못하고, 그저 흉내만 내고 있는 것이 그런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수행을 하면서 수행한다고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런 수행은 초보일 때나 보이는 수행입니다.


참된 수행은 함도 없고 얻는 것도 없고 그저 고요한 법열만 솟습니다.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없이 늘 여여(如如)히 비추고 늘 여여하게 빛납니다. 우리의 본래 모습이 그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 정호승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낙엽이 떨어질 때를 아는 사람을 사랑하라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낙엽이 왜 낮은 데로
    떨어지는지를 아는 사람을 사랑하라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한 잎 낙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시월의 붉은 달이 지고
    창밖에 따스한 불빛이 그리운 날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한 잎 낙엽으로 떨어져 썩을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한 잎 낙엽으로 썩어
    다시 봄을 기다리는 사람을 사랑하라

 



(오늘의 꽃) 산비장이


산비장이는 [Serratula coronata var. insularis]
국화과의 속하는 다년생 초본입니다.
보랏빛 복스러운 꽃송이의 아름다움을
늘 기억하라는 뜻인지 꽃말은 ‘추억’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산에는 약초와 나물이 많은데
산비장이 역시 어린순을 나물로 먹을 수 있고.
여름부터 가을까지 예쁜 핑크보라색 꽃을 피우는 산비장이는
생김새가 엉겅퀴와 비슷하지만, 
엉겅퀴가 여름에 들판에서 피는 것과 달리,
산비장이는 늦은 가을까지 산에서 만날 수 있고
잎에 털이나 가시가 없는 것도 엉겅퀴와 크게 다른 점이지요.

산비장이라는 이름은
'산에서 들풀을 지키는 비장'이란 뜻이라고 하네요.
 그러고 보니 훤칠한 산비장이가 가을 야산의
  들풀, 들꽃 지킴이로서 손색이 없을 듯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