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좋은 날 모두 좋은 사람/청화큰스님

2014. 3. 12. 20:3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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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좋은 날 모두 좋은 사람

청화큰스님

 

 

앞으로 올 날들

  상당(上堂)이라는 자리는 그렁저렁 상대 유한적인 말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오직 상(相)을 떠나고 개념을 떠난 절대적인 말을 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예전에 어떤 도인은

지지리 애써서 상당에 모셔 놓았더니, 눈만 끔벅끔벅 하시다 법문도 하지 않고 내려와서는 가

버리더랍니다.

그래서 원주스님이 뒤따라가면서 우리가 애써 모셨는데 왜 한 마디도 않고 가시느냐고 물었습

니다. 그 도인은, "경(經)을 잘 설(說)하는 데는 강사(講師)가 있고, 법(法)을 잘 설하는 데는 법

사(法師)가 있고, 나는 선사(禪師)인데, 선사인 나한테 무슨 말을 하라고 하느냐?"고 했다는 것

입니다. 

 

  우리는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합니다. 그러나 원래 부처님 법에는 묵은 해, 새해라는

관념이 없습니다.

다만 중생들이 상대적인 시간 속에서 약속으로 묵은 해, 새해를 정했을 뿐입니다.

중국 당나라 때 운문(雲門)스님은 정월 초하룻날 원단의 상당(上堂)에 올라가셔서 대중들한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나간 달의 소식은 묻지 않고 닥쳐오는 달의 소식을 물을 테니 어디

한 번 말해 보아라." 즉 지나간 달의 소식에 대해서는 대중들에게 묻지 않고 앞으로 도래하는 달

의 소식을 한 마디 말해 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대중 가운데서는 한 마디의 말도 없었습니다.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성질의 물음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운문대사는 스스로 자문자답했습니다. "연년시호년(年年是好年) 일일시호일(日日是好

日)이라" 즉 해마다 좋은 해요, 날마다 좋은 날이라는 뜻입니다. \

 

  운문스님께서 말씀하신, '해마다 좋은 해, 날마다 좋은 날'이라는 말의 뜻은 과연 재수가 좋고

운수가 좋은 사람한테만 해당하는 것일까요? 운문스님 말씀은 절대로 재수가 좋고 운수가 좋고

그런 사람들한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한테나 해당되는 보편적인 말씀입니다. 따라서 설사 지금 당장 아파서 곧 죽어

버릴 것 같다 하더라도 그 사람한테도 날마다 좋은 날이라는 말이 해당됩니다. 

 

  불교의 팔만 사천 법문, 그 모든 법문의 뜻이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해마다 좋은 해, 날

마다 좋은 날, 때마다 좋은 때입니다. 이렇게 해서 항시 행복한 것이 부처님 법문의 대요(大要)입

니다. 바꿔 말씀드리면 인생의 모든 고통을 몽땅 소멸시켜서 정말로 위없는 행복을 체험하고, 자

기 이웃들도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하면 인생고(人生苦)가 충만한 우리 중생들이 날마다 좋은 날이 되고 해마

다 좋은 해가 될 것인가? 오직 한 길뿐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바로 보면 날마다 좋은 날이고 해마다 좋은 해이며, 바로 못 보면 날마다 불행한

날일뿐입니다. 

 

  사업에 이득을 좀 보고,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하더라도 이것은 결국 불행한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그런 문제는 모두가 다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행복이라는 것은 그 행복

'같은' 것이지 참다운 행복은 못 되는 것이고 결국은 인생고로 끝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가령 부자가 되었다고 합시다. 부자가 되기 위한 노력 없이 부자가 되었겠습니까? 갖은 고생을

다 한단 말입니다. 그런 가운데는 또 몹쓸 일도 하겠지요. 자기 양심에 가책된 일도 하고, 또는 남

한테 원망도 받고, 자기 이웃은 배고픈데 자기만 배부르게 먹으니까 그 자체가 벌써 죄란 말입니

다. 따라서 부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죄나 허물 위에 이루어진 허깨비 같은 것입니다.

모래 위에 쌓은 탑이나 마찬가지로 금방 허물어지고 맙니다. 좀 오래 간다 하더라도 자기 생명과

더불어서 흔적도 없습니다.

 

  상대적이고 세속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이면서 보편적인, 어느 누구한테나 어떠한

경우에나 어느 때나 행복하게 되는 것,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운문대사의, "연년시호년

일일시호일"이란 말씀은 이런 말씀입니다.

 

  그러나 절대시간이 존재하고, 절대공간이 존재하는 우리 중생의 차원에서는 그렇게 될 수가 없

습니다. 우리 중생의 육안으로 보면 내 몸뚱이가 이렇게 존재하고, 내 미운 사람이 대상으로 저렇

게 존재하며, 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존재하고, 또는 그렇게 욕심내는 감투도 존재하고,

뿐만 아니라 다른 물질도 역시 존재하는, 이런 차원에서는 날마다 좋은 날이 절대로 될 수가 없습

니다. 따라서 우리 사고의 패턴, 의식을 전환시키지 않으면, 성자의 보편적인 말씀이라도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사업에 실패하면 그냥 자결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마음은 무한의 컴퓨터

  부처님께서는 80 평생을 지내시다가 구시나가라 성(城)의 사라쌍수 밑에서 나뭇잎 같은 것들을

깔고, 당신 법의만 덮고 오른쪽 팔뚝을 베시고 열반에 드셨습니다. 우리의 스승은 그렇게 가셨습

니다. 그런데 가실 때가 임박해서 이웃 나라들에도 공포(公布)를 했단 말입니다.

 

  그때 구시나가라 근처에 있는 비아리국에는 기운이 아주 센 역사(力士)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역사들이 "우리가 부처님께서 구시나가라로 가시는 길을 좀 다듬어야 되겠다" 하고 울력을 부쳤

습니다. 부처님께서 통과하실 길이 소로(小路)였기 때문에, 그야말로 편히 가실 수 있도록 시원

스럽게 길을 다듬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험로(險路)에 집채만큼 큰 바위가

가로막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역사들 몇 십 명이 모여서 그 바위를 움직이려고 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바위를 치워 버려야 부처님께서 험로를 걷지 않으시고 편한 길로 가시는데, 지금같이 포크레

인도 있고 하면 오죽이나 좋았겠습니까마는, 아무리 기운이 세다 해도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겠

지요. 그래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함께 모여 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부처님 법을 알고 믿은 것이 아니라, 기운이 좀 세다고 그것만 믿었습니다.

당시 각국의 16왕자가 모두 부처님을 숭상하므로 자신들도 부처님을 숭상하기는 했지만, 사실 부

처님 법을 제대로 몰랐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자신들의 기운을 믿고 그 행패가 매우 심했습니다.

남의 것을 윽박질러 강제로 빼앗아 먹기도 하고, 폐해가 여간 심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부

처님께서는 내가 열반에 들기 전에 저들을 제도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허름한 수행

자의 몸으로 변신을 했습니다.

 

  부처님이나 도인들이 경우에 따라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중생을 제도할 때는 몸을 바꾸기도

하는데, 그것을 동사섭(同事攝)이라 합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우리 범부들이 앉아서 이말 저말 하

고 생각하는 것이 동사섭이 아니라, 도인들이 중생의 근기를 보고 그 근기에 맞추어서 몸을 변신

하는 것을 '동사섭'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와 같이 허름한 수행자의 모습으로 변

신했습니다.

 

  우리는《아함경》이나《화엄경》혹은《법화경》이나 기타 경론(經論)에 나오는, 신통자재하는

것을 절대로 미신이라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저 같은 사람도 부처님 덕택으로 가끔 비행기를 탑

니다만, 한 삼백 명이나 이백 명, 그 많은 사람을 태우고 비행기가 공중을 난다고 생각할 때, 그야

말로 참 희귀한 신통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게 다 사람 머리에서 나왔습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대체 무엇인가? 인간의 머리란 대체 무엇인가? 인간의 마음이라 하는 것,

그것은 무한공덕과 가능성이 입력된 컴퓨터나 똑같습니다. 원만한 자비도 그곳에 다 갖추어져 있

고, 지혜도 다 입력되어 있고, 행복이나 다른 어떤 것도 마음이라는 컴퓨터에 다 입력되어 있습니

다. 마음은 이른바 무한의 컴퓨터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혜 나와라!" 하면 지혜가 나오는 것이고, "행복 나와라!" 하면 행복이 나오고, 무엇이든

주문만 하면 다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마음, 즉 불심을 가리켜서 여의주(如意珠)라, 혹은 여의보주(如意寶珠)나 마니

보주(摩尼寶珠)라 합니다. 그로부터 모든 것이 다 나온다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그런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성자한테만 있는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은 모든 존재의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아직

계발이 못 된 사람도 역시 갖추고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잘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 인간한

테만 갖추어져 있고, 일반 동물들은 갖추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반 동물한테도 똑같이 있습니다. 동물이나 식물 혹은 무생물이나 지극히 미세한 존재라

할지라도 모두가 다 불심(佛心)이라 하는 인생과 우주의 근본실체를 똑같이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디에나 똑같이 갖추고 있다고 생각할 때, 사실 천지우주는 불심이라 하는 청정무구한 무

량공덕을 갖춘 마음 그 자체입니다.

 

  그 무량공덕을 갖춘 마음을 토대로, 그 위에서 물리적ㆍ화학적 변화와 같은 작용에 따라, 다시

말씀드리면 인과의 법칙을 따라서 이것이 되고 저것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같이 아직 공부가 안 된 사람들은 안 되겠지만, 부처님 같은 분은 그러한 불심과 하나로 계합

되신 분입니다. 무량공덕인 마음과 딱 하나가 된 사람을 부처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량공덕인 불심과 하나가 된 부처님이 신통묘지(神通妙智)를 갖추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때는 이러한 신통묘지가 부사의(不思議)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입니다.


  과학이 기기묘묘(奇奇妙妙)한 방법으로 원자력과 같은 무서운 힘을 내지만, 그 원자력과는 비교

도 할 수 없는 무한의 성능인 불심과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할 때,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당신 몸을 허름한 수행자로 변신하셔서 그 역사(力士)들 앞에 나투셨습니

다. 그리고는, "동자들아!" 하고 불렀습니다.

그야말로 나이도 많고 육중한 사람들을 '동자'라고 불렀으니 다들 기가 찼겠지요. 부처님께서 "동

자들아! 그대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는가?"라고 핀잔 비슷하게 말씀하시자, 평소

아만심에 가득 차서 행패나 부리던 역사들은 당연히 골이 났겠지요.


  그러나 그 역사들은 자신들이 부처님을 믿는데, 그 수행자가 승복을 입었으니 함부로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대체 누구인데 그와 같이 오만불손하게 말을 하느냐?" 하며, "눈으

로 뻔히 보다시피 이렇게 집채만 한 바위를 치우려고 애쓰고 있지 않느냐?" 하고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때 허름한 수행자로 변신하신 부처님께서 미소를 띠시며, "아니, 그것 하나 움직이지

못하느냐?"라고 응대하셨습니다. 그러자 더욱더 골이 난 역사들이 "그러면 그대가 한 번 해보아

라" 하고 대꾸하였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손도 대지 않으신 채 발가락 두 개로 그 바위를

휙 들어 올려 버렸습니다. 그러자 꼼짝도 하지 않던 바위가 몇 십 미터 밖으로 굴러갔습니다.

그런데 그 바위가 길 밖으로 굴러나간 것이 아니라 길 가운데로 갔단 말입니다. 또 치워야 했겠

지요.


  역사들은 그야말로 경천동지(驚天動地)했습니다. '저 스님이 보통이 아니다.

우리가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구나' 했겠지요. 그래서 그때부터는 공대(恭待)를 했습니다.

"기왕이면 길 밖으로 치워 주십시오" 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부처님께서 손으로 바윗

덩이를 들어서 저 공중으로 내던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바위가 윙 소리를 내면서 역사

들의 머리 위에서 빙빙 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금방 그네들의 머리 위에 떨어질 듯이 말입니다.

이윽고 부처님께서 그 바위를 손바닥으로 받아 훅 불어 버리니 가루가 되어서 간 곳이 없어져 버

렸습니다.

 

  역사들도 이젠 눈이 좀 틔고 귀도 좀 열리고 했겠지요.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야말로 삼십이

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를 갖춘, 본래의 원만한 모습으로 다시 환원하셨습니다.



   몇 십 번 곱해도 영은 영

  그때 그 역사들의 환희심은 그야말로 얼마나 마음에 사무쳤겠습니까?

역사들이 부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과연 그 돌은 실체가 있습니까? 우리 범부의

견해로는 공간성도 있고 시간성도 있어서, 돌고 있는 그 돌의 실체가 실제로 있다고 대답해야 되

겠지요. 그런데 만약 실체가 있다고 대답하면 색즉공(色卽空)이라는 그 말이 맞지 않게 됩니다.

부처님 도리에서 본다면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제법공(諸法空)이 아닙니까?"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인지라, 제법이 다 공한 것입니다.

그렇게 역사 몇 십 명이 들어도 움직이지 못한 바위이지만 본바탕은 역시 공인 것입니다.

그래야《반야심경》의 색즉공도 맞고 오온개공도 맞고 그렇게 되겠지요.


  어째서 공(空)인가? 아시는 바와 같이 돌이나 가장 단단한 다이아몬드나 내 몸뚱이나 결국 각

원소로 되어 있습니다. 각 원소는 또 전자나 양자나 중성자들이 적당히 결합해서 운동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전자나 양자나 중성자나 그런 미세한 소립자는 또 무엇인가?

이런 것이 본래 물질이 아니라 에너지라 하는 하나의 정기(精氣)가 적당히 진동하고 적당히 운동

해서 하나의 모양을 낸, 그것이 양성자요 중성자요 전자입니다.


  이것은 이미 현대물리학이 다 증명한 도리 아닙니까? 뉴턴의 고전물리학은 물질 따로 있고 마음

따로 있다고 합니다만, 현대물리학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양자역학에 따르면,

다만 에너지의 파동이 전자요 양성자며 또한 중성자입니다. 그런 미립자들이 적당히 결합되어서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됩니다. 또한 그런 원자들이 모여서 분자가 되고, 돌이 되고, 다이아몬드가 되

고, 무엇 되고 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자면 모든 존재는 근본물질인 에너지 또는 정기뿐이며,

그것은 공(空)인지라, 그것이 이렇게 합하나 저렇게 합하나 공은 공이란 말입니다. 제로(zero)를

몇 십 번 곱하거나 더하거나 혹은 나누든 간에 영(零)은 영 아닙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원래 물질

이 아닌, 시간성도 공간성도 없는 그러한 미립자들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모여서 모양이야 어떻게

나오든 간에, 그림자 같은 모양을 어떻게 나투든 간에 결국은 끝내 공은 공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인 반야바라밀은 그런 도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본래 공한 자리라

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색이 곧 공인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을 분석해서 모두 쪼개 본 뒤에 나오는

결론이 공이란 뜻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색즉공이란 물질이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물질이 바로 공이므로 내 몸뚱이도 이대로 바로 공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들은 지금 이렇게 움직

이는 겉모습, 즉 그림자만 봅니다. 따라서 실체는 못 봅니다.


  그러면 실체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에너지이고 우주의 정기이고, 불교식으로 말하면 진여

불성입니다. 중도실상인 우리 불성입니다.

따라서 성자는 나를 보나 남을 보나 이목구비가 잘생기고 못생기고를 안 봅니다. 나를 보나 남을

보나 '모두가 다 법계연기, 즉 모두가 다 진여불성이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냈구나' 이렇게

본단 말입니다. 산도 냇물도 모두가 다 진여법성이 인연 따라서 연기법(緣起法)으로 잠시간 모양

을 냈을 뿐이란 말입니다. 잠시간입니다. 아주 잠시간! 잠시간 모양을 내 가지고라도 그것이 머물

러만 있는다면 공간성도 있고 시간성도 있을 테지만, 잠시간 인연 따라 모양을 나투어서도 순간

찰나도 머물러 있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시간성도 공간성도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 중에,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 미래심불가득

(未來心不可得)"이란 구절이 있습니다. 과거도 얻을 수가 없고 현재도 얻을 수가 없으며, 미래도

얻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것은 우리 중생들이 하나의 물질이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멸되어 없어지거나 지나가면 과거

라 하는 것이고, 아직 오지 않았으면 미래라고 하며, 시시각각으로 변동하고 있으면 현재라고 할

뿐이지, 원래는 과거도 현재도 물론 미래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도리에서 볼 때는, 즉

본체에서 볼 때는 시간도 공간도 없습니다. 절대공간도 절대시간도 없고, 절대물질 또한 없습니

다. 이것이《반야심경》의 도리입니다.


괴테식으로 말해서 내일 당장에 최후의 심판이 다가와 모두 다 사라진다 할지라도, 그들은 슬퍼

할지 모르지만 우리 불교인들은 '일일시호일'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사라진 뒤에도 날마다 좋

은 날뿐입니다. 설사 내 몸이 금방 사라진다 하더라도 생명 자체는 죽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 같은 어른이 태어났으니 석가족은 그야말로 부자가 되고 감투를 많이 쓰고

오래 살고 그랬어야 되겠지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인과는 그렇지 않아서 부처님의 종족인 석가

족이 몽땅 몰살당하게 되었단 말입니다. 그도 한둘이 아니라 대대로 이어져 온 석가 귀족들을, 여

인들도 그 땅에 묻어서 죽이기도 하고 창으로 죽이기도 했단 말입니다.

석가족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또 무거운 돌을 등에 업고서 밧줄에

묶이어 호수에 던져지고 그랬습니다.


그 당시에 신통자재(神通自在)하던 분은 부처님뿐만 아니라, 부처님 제자 가운데 신통제일이던 마

하목건련(摩訶目犍連)이라는 존자도 있었습니다. 당시 아사세왕이 그렇게 잔인무도한 짓을 할 때

목건련이 부처님께, "아사세왕을 저쪽 삼천대천세계 밖으로 던져 버리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지금 아사세왕이 내

말을 들으면 재앙을 면할 수 있지만 업장이 무겁고 선근이 없어서 도저히 듣지 않을 것이니, 그대

로 둔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이레를 넘기지 못하고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핍박을 당하고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석가족들은 생전에 부처님 법을 닦았기에 죽자

마자 바로 도리천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생명이라는 것이 현상적인 차원에 입각해서 '오직 이것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때는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고 그런 것들이 최상이겠지만, 생사를 초월한 도리에서 볼 때는 그런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비참하게 죽은 석가족도 오히려 해마다 좋은 해[年年是好年]이

고,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이 되어, 죽으면 당장에 천상에 태어나 인간세상보다 훨씬 고통이

적은 곳에서 살게 된단 말입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이니 당장에 깨달아 버리면 오죽 좋겠습니까만 그렇게 안 되므로 공부를 하거나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서 고행도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부처님 법을 어떻게 닦아야 본래 부

처의 자리, 생사를 초월한 자리를 얻을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냥 그렁저렁 닦아서는 그

렇게 될 수 없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은 그렇지 않겠습니다만, 대체로 모두가 다 범부입니다. 범부는 자기의 본바탕도 모르고 우주의 본질도 모릅니다. 석가나 달마스님, 혹은 서산대사나 공자,

예수, 노자와 같은 분들은 우주의 실상과 자기의 참정신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자가 아닌 사람들은 본바탕을 못 봅니다. 본바탕을 보게 되면 본바탕하고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그런 사람들이 성자입니다. 겉에 뜬 그림자와 같은 현상만 보는 사람들은 성자가 못 된

우리 범부중생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범부중생 차원에서는 아무리 애쓴다 하더라도 그냥 쉽게

본바탕인 우주와 인생의 본 생명자리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쉽게 볼 수가 없으면 차라리

그렁저렁 살면 될 것이지, 출가도 하고 자기 가족을 떠나 와서 선방에 들어앉아 애쓸 필요가 있을

까?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다 현실적으로 사는 것인데 돈도 많이 벌고, 모두가 다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하는 이런 때 선방에 가만히 앉아서 지내는 것은 그야말로 지독히 비생산적인 것이 아닐까?'

이렇게 느끼는 것이 지금 현대식 사고방식입니다.


물질만능주의나 권력만능주의, 혹은 황금만능주의자인 우리 견해로는 절에 가서 공부하는 것은

아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같은 스님 네들 가운데도 사회에 나가서 참여도 하고, 도시에 나가서 중생들과 더불어 같이

아파하고 그래야지 산중에서 자기만 좋자고 공부하면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고 생각하는 분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이런 때일수록 꼭 바른 견해를 가지셔야 합니다. 우리가 산중

에 있든 도시 가운데 있든 그 처소는 문제가 아닙니다. 도시에 있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런 처소가 문제가 아니라 성자가 되기 위해서 바른 길로 가야 한다는 게 중요합니다. 교육자는

교단에서 자신과 학생들의 성불을 위해서 애써야 되는 것이고, 부모님들은 가정에서 자기 자녀와

더불어 성불하기 위해서 바른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 못하면 또 허물 많은 공산주의 국가

가 나오고, 또 허물 많은 자본주의 국가가 나와서 부자는 더욱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돈이 제일이고 물질이 제일이고 권력이 제일이고 자기 몸뚱이가 제

일이고 자기 가족이 제일이라고 생각할 때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자기와 자기 가족의 영달을 위해서는 별스러운 짓을 다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무슨

주의가 생기고 무슨 운동을 한단 말입니다.

자기 국가만 좋아지고 자기 민족만 좋아지는 국수주의(國粹主義)나 민족주의(民族主義) 말입니다.


성자의 길, 예수나 석가 혹은 공자가 가신 그러한 길을 벗어나서, 현상적인 것을 진실로 있다고 생

각하고 그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인생은 달라질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있고 네가

있으며, 나를 위해서 남을 해치고, 그렇게 싸우고 아귀다툼하다 끝나 버립니다. 우리는 싫든 좋든

간에 범부의 껍데기를 벗어야 합니다. 싫든 좋든 간에 중생심(衆生心)을 꼭 벗어나야 합니다.

끝내 못 벗고 그대로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몇 생 몇 만 생에 가서라도 끝내는 다 벗고 맙니

다. 금생에 잘못 살면 지옥에도 가고 아귀로도 가고 하면서 윤회의 고통을 계속하여 받게 됩니다.

분명히 윤회는 있습니다. 개미나 구더기가 될 수도 있고, 땅벌레가 될 수도 있는 것처럼, 그렇게

지옥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와 같이 계속 윤회를 한다고 하더라도 끝내는 모두 윤회를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늦으면 늦을수록 그만큼 고생을 더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몸뚱이를 뛰쳐나오는 법

  우리가 윤회를 할 때에는 마음을 어떻게 썼느냐에 따라서 거기에 상응하게 과보를 받게 됩니다.

탐내는 마음, 분노하는 마음, 혹은 표독한 마음을 쓰게 되면 그 과보를 다 받게 됩니다. 마치 공부

를 열심히 하면 대학교에 합격하는 것과 같습니다. 낙방한다는 것은 어딘가 부족했으므로 낙방하

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도 이와 같아서 낙제가 될 사람을 꼭 합격하게 하는 법이 아닙니다.

부처님 법은 인과 그대로입니다. 5만큼 공부하면 5만큼 이루어지고, 5만큼 좋게 마음 쓰면 5만큼

좋게 됩니다.


부처님 법의 요체는 삶의 고통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중생의 허물을 벗는 것입니다.

매미도 허물을 벗어야 성충이 되고, 누에고치도 자신의 몸에서 실크를 뽑아 누에고치를 만들지만

그 속에서 안주하면 영원히 갇혀 버리게 됩니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껍질을 벗고 뛰쳐나와야 합니다.


우리 인간도 이 몸뚱이를 뛰쳐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것

처럼, 모든 것은 텅텅 비어 있고 실체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바윗덩어리도 사실은 텅

텅 빈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잘못 보아서 바윗덩어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여의통

(身如意通), 즉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도인들은 바위 구멍에도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래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단단하다거나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중생 차원에서 보는 것입니다. 물질은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 마음의 패턴입니다.


우리는 중생심을 벗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고, 수녀가 되며, 신부가 됩니다.

따라서 그렇게 한 번 되었을 때는 응당 준엄하게 계행(戒行)을 지켜야 합니다. 계행이란 우주의

모든 것이 본래 텅텅 비어 있고, 다만 진여불성뿐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형성된 우리의 말[口]과

우리의 몸[身], 그리고 우리의 사고[意]를 말합니다.


남과 내가 둘이 아닌데 살생을 하면 되겠습니까? 또한 음탕한 짓을 하면 되겠습니까?

물질이란 도대체 허망한 것이고, 본래는 나도 없고 내 소유도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몸뚱이 편하자고 부당한 수입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훔칠 이유도 없고, 부정을 저지를 필요도 없습니다. 거짓말이나 욕설, 혹은 이간하는 말

은 모두가 허망무상한 것이므로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우며, 마약을 복용하겠습니까? 부처님 계율은 모두가 다

근원적인 본래 무아, 무소유, 바르게 본 견지에서 우러나오는 우리의 행동, 우리의 말입니다.

그게 바로 계행의 본래 의미입니다.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계행은 부처님 당시에나 어울리는 것이었고, 현대에는 현대에

적합한 계행이 필요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여 혼란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잘 지키려고 애써도

빗나가고 마는데, 합리화시키면 그때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우리가 과거 전생에도 잘못 배우고 금생에도 잘못 배워 버릇이 잘못 들었기 때문에, 지키려고 아

무리 애써도 미끄러지고 실패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다니면서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물리학도 배우고 법학도 배우고 다른 여

러 가지 학문을 많이 배우지 않았습니까? 모두가 다 소중한 공부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깨닫고 참다운 자기가 된다는, 참다운 진아(眞我)를 발견한다는 차원에서 보면, 모

두가 '있다' '없다' 하는 분별시비와 사변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은 아무리 많이 쌓아도 바벨탑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에는 다 허물어지고 말 것들입니다.

기능적으로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 필요하기는 하지만,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참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참다운 사람이 못 되면 다시 무슨 주의, 무슨 철학이 나와서 옥신각신하고 또 싸우게 됩니다.


오히려 '있다' '없다' 하는 것들을 다 내려놓아야 부처님 마음과 우주만유의 참다운 에너지인 우주

정기하고 하나가 되고 가까워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잠재의식에는 워낙 배운 것이 많기 때문에,

염불도 하고 화두도 참구하고 또는 주문도 외워서 본래적인 우리 마음자리인 진여불성으로 가려고

애쓰지만, 자꾸만 반발이 나옵니다. 그래서 선방에 두 시간이나 세 시간 동안 앉아 있다 하더라도

아무런 사념 없이 오로지 맑은 마음으로 지속될 때가 별로 없는 것입니다.



  용맹정진

  납월(臘月) 8일, 즉 음력 12월 8일은 부처님께서 도(道)를 이루신 날이므로, 12월 초하루부터

납월 팔일까지는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합니다.

칠일 동안의 용맹정진은 집중적으로 간단없이 번뇌를 공격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수행을 할 때, 했다가 쉬었다가 하면 잠재의식이 또 나오게 되어서 망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낮에는 그런대로 괜찮다가도 밤에 잠잘 때는 꿈속에서 잠재의식이 발동되어 이상야릇

한 꿈을 꾸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 중생놀음입니다. 그러므로 용맹정진을 하는 것입니다.

용맹정진은 화두나 염불, 혹은 주문을 통해서 오직 부처님께로 지향하는 마음을 순간 찰나도 쉬

지 않고서 지속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음식의 영양을 섭취하기 위해서 입으로는 먹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부처님, 즉 본

체를 지향하는 마음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용맹정진 기간 동안에는 원칙적으로 묵언(默言)을 지켜야 합니다.

말을 하면 개념이 나옵니다. 개념이 발동되기 때문에 또 역시 분별시비가 있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말을 않습니다. 식사 또한 꼬박꼬박 세 끼를 먹지 않고 원칙적으로 하루 한 끼를 먹습니다.

본래 우리가 잘 참지 못해서 하루에 세 끼를 먹고, 거기에 덧붙여 간식도 합니다만 사실은 하루 한

끼를 먹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그래서 말도 않고 또 하루에 한 끼만 딱 먹고 맙니다. 우리 마음을 부처님 생각에다 딱 머물게 해

서 간단없이 밀어붙입니다.

그렇게 정진할 때는, 즉 반주삼매(般舟三昧)를 할 때는 우주본체의 진여불성 자리가 훤히 다가옵

니다. 반주삼매란 불립삼매(佛立三昧)로서 부처님이 훤히 앞에 나오신다는 뜻입니다.

그와 같이 간단없이 정진하면 일주일이 미처 못 가서 틀림없이 부처님 광명이 나옵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과 몸이 온전히 그 광명과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라는 생각도

초월해 버립니다. 그것을 심월고원(心月孤圓)이라 합니다. 일주일 해서 안 되면 삼칠일, 즉 21일

동안 그렇게 하고, 그래도 안 될 때는 49일 동안 하고, 그래도 안 되면 90일 동안 합니다.


'일주일이면 되는데 설마 90일 하면 안 되겠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해보면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 같은 사람도 삼동결제(三冬結

制)를 그렇게 많이 했지만, 지금도 번뇌의 찌꺼기를 다 못 떼고 있습니다.

용맹정진은 상의해서 하셔도 좋고 안 하셔도 좋고 합니다.

왜 그런고 하면 꼭 해야 한다고 하면 의무감 때문에 구속을 받습니다. 그리고 또 가부좌를 제대로

익히지 못하신 분들은 굉장히 고생합니다. 이레 동안 밤이나 낮이나 안 눕고 안 자므로 버티기가

힘들어서 그냥 미쳐 버린 분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억지로 하다 보니까, 한 열 명쯤 시작하면 그중 몇 명은 쓰러지고 맙니다.

그리고 겨우 버틴 분들도 다리가 아프고 어디가 아프고 하여 그 아픈 것만 생각하지 공부에는 별

로 생각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또 억지로라도 해놓고 보면 하신 다음에는 이것을 하면 좋겠구나, 나 같은 별것도 아닌

사람이 일주일 동안 안자고 안 눕고 버텼구나 생각되어 자기를 이겼다는 강인한 의지가 생기기

도 합니다.

그래서 참선을 많이 하신 분들은 그저 무난하게 그때그때 편안하게 하시는 것이 좋은데, 사실

신참들은 어거지로 한번 해보시는 것도 좋기는 합니다.

그러나 무리는 마시고 선방 스님들은 입승스님과 상의해서 하시고, 정중당(淨衆堂)에서 공부하신

분들도 이제 알아서 하십시오. 너무 무리하면 도리어 병이 되는 수도 있습니다.

또 그냥 참선이라는 것이 원래 참 좋고 쉬운 것인데 참선은 굉장히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셔서

다시는 안 오려고 하시는 분들이 있으면 곤란합니다. 때문에 그런 점을 감안해서 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참선은 제일 쉬운 것입니다. 몸도 가부좌가 가장 편한 것입니다. 호흡도 가부좌를 해야 상하

호흡 순환이 제일 좋습니다.

그래서 드디어는 항시 머리도 시원하고 가슴도 시원하고 눈도 시원하고 합니다. 아랫도리는 따습

고 단전에는 힘이 꽉 차 있게 됩니다.

참선을 많이 해서 가부좌를 많이 한 사람들은 틀림없이 아랫배에 힘이 꽉 차 있습니다. 그러면 나

쁜 병이 올 수가 없습니다. 잔병도 다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억지로 잘못한 사람들은 도리어 없던 병이 생깁니다.


참선을 잘 하면 내가 없고 네가 없고 미운 사람, 좋은 사람도 없어집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날이 좋은 날이고 때때로 좋은 때입니다. 우리 마음이 나다, 너다, 좋

다, 궂다, 시비를 다 떠나서 천지우주의 순수 에너지, 순수 정기인 부처님만 생각하는 것이 참선

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화두를 드는 것이고, 염불도 그 자리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훤히 빛나는 자리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행복도 지혜도 자비도 능력도 원만히 갖춘 무한의 공덕과 가능성을 입

력한 컴퓨터, 이것이 우리 마음이란 말입니다. 그 자리를 계발하는 데 가장 요령 있고, 가장 쉽고,

가장 확실한 방법이 참선입니다.

우리 몸을 바르게 하고, 우리 호흡을 바르게 하는 것이 참선입니다.

몸을 바르게 하려면 철저한 계행을 지켜야 됩니다. 몸을 바르게 한 다음에는 호흡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호흡은 자연스럽게, 될수록 가늘고 길게 그리고 고르게 해야 합니다.


자기 분수에 맞게 구해야 합니다. 분수에 넘치는 허튼 권리나 권력을 구하고, 돈을 구할 때는 마

음이 괴로워집니다. 모든 게 분수에 맞으면, 우리 마음은 내 생명의 근본인 동시에 우주만유의 근

본자리인 우리 부처님을 생각합니다. 이렇게 분수에 맞게 하면 되므로 어렵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시면 우리 몸이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세월은 참 무상합니다. "그동안에 공부를 얼마나 했는가 내놓아 보시오" 하면 우선 저부터가 따분

하게 생각합니다. 후회가 없도록 공부 부지런히 하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반야바라밀을 본다면,

찰나찰나가 좋은 때요, 다 좋은 때요, 사람마다 좋은 사람입니다. 설사 내가 아무 허물도 없는데

내 목에 칼을 겨누는 사람도 좋은 사람이 됩니다. 천지우주가 오직 부처님뿐이요,

천지우주가 다 화장세계(華藏世界), 즉 부처님 나라뿐입니다. 그러므로 나날이 좋은 날이요,

분명히 해마다 좋은 해입니다. 부지런히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 불기 2536년 1월, 동리산 태안사 신년 상당법문(上堂法門) >



 

 

 

 

 

 

Send In The Clowns(소치, 여자 피겨 싱글 '김연아' 쇼트프로그램곡)
 - Antonio Serrano & Romantic Harmon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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