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편안해야지요 /청화큰스님

2014. 3. 6. 10:5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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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편안해야지요

청화큰스님

 

 

  알고 가는 길

 대체로 우리 인간 가운데 마음의 안락이나 평안 같은 자기 안정을 도모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행복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으면 아무리 얻고자 해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 부처님 법문의 대요 또한 안심법문(安心法門), 즉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달마스님께서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신 뜻도 안심법문을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길을 갈 때 평탄하게 갈 수 있는 순로(順路)나 길목을 잘 모르면 마음이 안정될 수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살이도 '인생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하는 의미를 알고,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목적의식도 알아서, 갈 길을 훤히 알고 살아간다면 참으로 수월할 것입니다. 반면에 삶의 목표는 물론이고 그 방법도 제대로 모르고 살아가면 불안하기 이를 데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의 혼돈상태 또한 불안한 마음을 제거할 수 없는 데서 오는 당연한 귀결입니다. 마음에 불안이 있기 때문에 괴롭기도 하고 때로는 불행하다고 느끼기도 하는 겁니다.


대체 우리의 마음은 어떤 것이며, 또한 물질이란 무엇인가? 그토록 우리가 생명을 바쳐 서로 사랑하고 또한 서로 증오하기도 하는 것은 모두 다 우리 눈앞에 전개되는 상황에 대해서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결과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즉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투명해서 혼란스럽기만 한 것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평생을 두고 의식주 때문에 고생스럽게 헤매거나 또는 아귀다툼을 하면서까지 권력을 추구하기도 합니다만, '의식주란 대체 어떤 것인가?' '물질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인생관이 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불안하게 되고, 따라서 안심입명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누구 할 것 없이 사람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성패 여부가 불확실하면 괴롭게 마련입니다. 괴로울 때는 '괴로운 마음이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고 끝까지 그 정체를 파헤쳐서 알아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괴로운 마음의 정체를 알려고 하지는 않고, 그냥 잘못 보면 잘못 본 그대로, 자기 마음속에 번뇌를 짓고 꾸며서 고통을 받습니다. 남을 미워하거나 증오할 때도 역시 '미워하는 이 마음의 정체는 무엇인가?' 하고 파악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대체로 우리는 별로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냥 덮어놓고 미워하다가 마침내는 죽고 죽이고 합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우리가 남을 미워하거나 증오하고 혹은 너무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은 모두 다 실제로는 아무런 자취가 없는 것입니다. 자취가 없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가령 우리 범부중생들이 가장 중히 여기는 것은 자기 몸뚱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자기 몸이라는 관념, 즉 '나'라고 하는 이 몸에 있어서도 몸뚱이라는 현상적인 상(相)이야 있겠습니다만, 이 몸뚱이가 '내 몸'이라고 하는 관념은 사실 자취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심할 나위 없는 진실입니다.


부처님 법문을 보면, 우리 마음 - 좋든, 궂든, 싫든 또는 어떻든지 간에 - 이 자취가 없다는 것은 짐작이 될 것입니다. 당연히 마음은 모양이 없으니까 자취가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판단하고 인식하는 대상은 어떻습니까? 우리 범부들은 분명히 대상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부처님 법문은 그러한 대상까지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불교가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 주관적인 관념으로, 마음은 형체가 아닌 것이니까 무(無)라 하고, 공(空)이라 하면 납득이 되겠습니다만, 우리 눈으로 인식되는 모든 천차만별의 대상 자체가 비어 있다는 말은 납득이 안 갈 것입니다. 비록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것을 납득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인생의 고난을 해결할 수 있고, 불안의식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눈으로 인식되는 대상도 모두 공이라는 것을 몰라서는 아무리 불교를 많이 안다고 할지라도 인생고와 번뇌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번뇌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바로 인생의 제반문제를 해결할래야 해결할 길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성품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과거 전생에 설산(雪山)에 들어가셔서 구도의 고행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때는 부처님의 법도 없었던 때라서 어떻게 무엇을 구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부처님은 선근(善根)이 깊으셨으므로 무엇인가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고행을 하신 것입니다. 선근이 깊은 사람들은 그와 같이 무엇인가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업장이 무거워서 눈에 보이는 세계에 만족하는 그런 천박한 사람들은 구도와 무관하게 살아가지만, 업장이 가벼워서 깊이가 있는 사람들은 그만큼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업장이 무거운 사람들은 인간성이 얕아서 눈에 보이는 세계에만 머물러 버리지만 업장이 가벼워서 깊이가 있는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구합니다.


우리는 또한 그 이유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본래 부처인지라 모두가 불성(佛性)이라고 하는 기묘한 성품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석가모니 부처님이 안 나오셨다면, 부처님 성품인 불성이 무엇인가를 알 길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설사 알 턱이 없다 치더라도 역시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은 실존적 사실이므로 우리는 불성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설령 불교를 배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또 젊어서는 이성에 대한 욕망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 보아도 그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마음이 있다는 말입니다. 현상적인 것은 제아무리 많이 소유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의식은 절대로 해소시켜 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에게는 본래 불성이라고 하는 것이 갖추어져 있어서, 불성이라고 하는 뿌리까지 가지 못하면 평안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불교는 우리가 불성까지 미처 못 가면, 즉 성불하지 못하면 윤회라고 하는 인생고를 면할 수 없다는 내용을 근본교리로 하지 않습니까?


관세음보살의 상호는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두려움을 없애주는 무외시인(無畏施印)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무외시인의 구체적인 의미는 중생들을 향하여 "모든 것은 내가 다 안심시켜 줄 테니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런 뜻입니다. 즉 우리 중생의 공포심이나 불안한 마음을 제거하기 위한 하나의 형상입니다.


만약 저 같은 사람이 이렇게 무외시인을 짓고 서 있다면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진실로 자광삼매(慈光三昧), 즉 자비로운 광명이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비치는 그런 분이므로, 이렇게 손을 드시면 실제로 모든 중생의 고난이 소멸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안심입명(安心立命)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데바닷타가 부처님을 살해하고자 하여, 독주(毒酒)를 먹여서 영악스러워진 코끼리를 부처님이 오시는 길에다 풀어 놓았습니다. 독주를 먹은 코끼리는 어떻게 할지를 몰라 울부짖으면서 부처님에게 돌진해 갔습니다. 바로 그때 부처님께서 하신 형상이 무외시인이요, 그때 하신 믿음이 이른바 무외심(無畏心)입니다. 부처님께서 무외시인 형상으로 이렇게 손을 턱 드시자 그렇게 영악스럽던 코끼리가 마치 순한 양처럼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고서 눈물을 철철 흘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비유나 상징적인 말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의 힘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 레이저 광선이 저 산을 뚫고, 말 그대로 철벽을 뚫고 저쪽까지 다 비치는 것을 보십시오. 부처님의 신통묘지(神通妙智)가 그 정도 힘도 없겠습니까?


우리 중생의 눈에는 지금 안 보이지만 물리학적으로 보면 천지우주라는 것은 전자장(電磁場), 즉 전자기광파(電磁氣光波)로 충만해 있습니다. 어느 공간이나 어느 별이나 어떤 것이든 모두가 다 전자기 파동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나 또는 너라는 존재도 말입니다. 산천초목 모두가 다 전자기 광명, 전자기 파동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만 사이클(cycle)과 진동의 차이 때문에 각 원소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소중한 내 몸이나 미워하는 사람의 몸, 혹은 좋아하는 사람의 몸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존재는 다 전자기 파동으로 되어 있습니다.


만약 지금 우리가 전자기 파동을 볼 수 있는 안경을 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전자기 파동만 눈앞에서 꾸물꾸물 진동하고 있을 것입니다.


삼천대천세계는 찬란한 부처님의 광명이 충만해 있는 화장세계입니다. 전자기 파동 차원에서는 아직 그 형상이 있으므로 공간성을 지닌 것이 되고, 따라서 물질이라 할 수 있겠으나 부처님께서는 그보다 더 생생한 생명, 즉 전자기 파동을 일으킨 본체인 생명을 바로 보십니다. 전자기 파동도 그것이 본래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순수생명이 파동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합니다. 파동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진동하고 움직이므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따라서 현미경으로 보든 육안으로 보든 우리 중생이 볼 수 있는 모든 존재는 파동치는 무상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고유한 존재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것이든 모두가 다 무상합니다. 일체가 다 무상뿐이라는 말입니다. 내 몸뚱이도 무상이요, 내 관념도 무상입니다. 관념이란 것도 결국 금생에 나와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그런 것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관념 또한 그러한 마음이 잠시 찰나 순간에도 가만히 정지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 마음이 동요부단(動搖不斷)해서 요시랑 저시랑 하는 것을 비유하여 '경거망동하는 원숭이'라 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마음으로 우리가 행복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마음으로는 우리가 안심(安心)을 할래야 할 수가 없습니다. 수험생은 수험생대로 그 시험에 꼭 합격해야 되겠다는 강박관념이 앞서 있고, 부모님들은 거의 협박 비슷하게 아이들을 졸라대는 상황에서는 마음이 안심할래야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모두가 다 이렇습니다. 한 당파든 무엇이든 할 것 없이 조직이 있으면 이른바 집단 이기심이란 것이 생기기 때문에 자기 본마음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범부의 마음은 하찮은 양심에 불과합니다만, 이렇게 하찮은 양심마저도 하나의 조직에 들어가면 마음대로 할 수 없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나'라는 상황은 어떠한 환경에 처해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상황판단을 잘 해야 합니다. 상황판단을 잘 해야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평안히 마음을 못 가지면 그만큼 불안하게 되고, 따라서 자기가 하는 일이 잘 안 됩니다. 공부를 하든 또는 사업을 하든 간에 우리 마음이 편안해야 됩니다.



  참선 공부

  우리가 하는 공부가 참선 공부 아닙니까? 참선 공부는 안락법문(安樂法門)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참선이 굉장히 고차원적인 공부니까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참선이 제일 쉽고 안락한 공부입니다.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하면 안락하다고 할 수 있고, 안락하다는 것은 곧 행복과 직결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참선 공부가 안락한 것인가? 참선 공부에 대해서 우리는 알음알이, 다시 말해서 인식이나 이해로는 모든 것을 다 압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란 대체 무엇인지, 내 몸뚱이는 무엇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소중하게 여기고 아낍니다. 이토록 소중하게 아끼는 내 한 몸 잘 먹이기 위해서 별짓 다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자기 몸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은 자기 몸뚱이가 무엇인지 잘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몸뚱이가 무엇인지 잘 안다면 그와 같이 자기 몸뚱이를 살리기 위해 남의 몸뚱이를 죽인다거나 또는 엉뚱한 짓을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여러 가지 사회적 불안 현상을 치유하기 위해서 이러저러한 치유방법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정치적 차원에서는 또 그 나름대로 적당한 방편을 내세우고, 일반 종교는 종교인대로 여러 가지 사회적인 병폐를 치유하는 방법을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 현대사회가 앓고 있는 병은 그런 미봉책으로 치료될 수 있는 정도의 병이 아닙니다. '고황(膏肓)에 난 병은 백 약이 무효'라고 하지 않습니까? 고황은 명치끝의 안쪽에 난 병입니다. 고황은 속 깊숙한 곳에 난 치명적인 병이므로 그 누구도 손을 쓸 수 없는, 그야말로 백 약으로도 고칠 수가 없는 병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 중생들이 걸려 있는 병이 바로 백 약이 소용없는 중병인 것입니다. 그 병은 무슨 병인가 하면, 이른바 무명병(無明病)입니다. 무명병은 무지몽매하여 진리를 모르는 병입니다. 무엇이 무지인가 하면 '나'가 무엇인가를 잘 모르는 것이 무지입니다.


내 생명이 대체 무엇인가 하는, 다시 말하면 내 생명을 모르고, 내 관념의 형태가 무엇이며 그 근본이 무엇인지, 내가 소중히 아끼는 내 몸뚱이가 무엇인지 등 이러한 것들을 모르는 것이 가장 근원적인 무지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로 그러한 무명을 제거하자는 것입니다. 12인연법문(十二因緣法門)이나 사제법문(四諦法門)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무지를 제거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무명 때문에 행(行)이 있고, 식(識)이 있고, 결국은 인간의 번뇌가 거기에 이어져 연결되어 갑니다. 무명 때문에 옳지 못한 행(行)이 있다는 말입니다. 행이 있으면 따라서 망식(妄識)인 식이 생긴다는 뜻이고 말입니다.


우주는 또 무엇입니까? 우주의 모든 것들, 그야말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을 포함한 각각의 별들은 또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 것인가?


그 답도 또한 간단합니다. 이들도 역시 무명 때문에 생길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과학을 좀 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천체나 우리 지구가 어찌하여 무명이라고 하는, 형체도 없는 것이 형체가 있는 지구를 낳았다는 말인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좀 전에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형체가 있는 모든 것은 사실 실체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잘 몰라서, 즉 무명 때문에 형체가 있다고 보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는 안 보이고, 또 현대의 과학적인 지식으로도 납득이 안 갈지라도 부처님 말씀은 믿어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은 실상지혜이자 실존지혜입니다. 키에르케고르나 하이데거 같은 분들에 의하여 시작된 현대 실존철학은 불안의식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불안을 제거하려면 인간, 즉 우리 인생의 실존을 파악해야 됩니다. 따라서 실존철학에서의 문제의식은 우리 불교에서 무명을 떼라고 하는 것과 사실은 똑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들은 깊이가 좀 부족하므로 실존을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20세기 후반기에 살고 있는 현재 우리들이 느끼고 있는 고황에 나 있는 것과 같은 무겁고도 깊고 깊은 병, 말하자면 백 약이 무효인 병을 치료하자면 그저 보통 약으로는 안 됩니다. 다들 "자비를 베풀어라" "봉사를 많이 해라" 합니다. 또한 실제로 봉사도 많이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으로는 치유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누구나 자비심을 베풀고 싶겠지요. 자비심을 베풀고 싶지만 자기 몸뚱이와 남의 몸뚱이는 별개로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몸을 더 중히 여기고, 남의 몸은 나중으로 여기게 됩니다. 자비라는 것이 원래 말은 쉬워도 무명을 제거하지 못하면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자비에 대한 강조만으로는 우리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중병을 치유하기는 어렵습니다.


좋든 궂든 우리 마음이 비어 있다는 것은 인식합니다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 몸이나 상대의 몸이나 할 것 없이 객관적인 모든 것이 텅텅 비어 있다는 것은 인식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도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반야심경》의 '제법(諸法)이 공(空)'이라고 하는 것은 다 아시지 않습니까? 제법이란 것은 일체만유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일체만유가 다 비어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지구 땅덩어리를 포함한 끝도 갓도 없는 은하계의 수백억의 별들도 모두가 다 텅텅 비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생겨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질이 물질을 낳는 것이 아니라, 본래는 물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만 우리 무명심이 움직여서 잘못 보는 현상이라는 말입니다.



  감사한 세상

  철학을 공부하신 분들도 많이 계시겠습니다만, 이른바 칸트 철학은 그야말로 굉장히 천재적인 동시에 위대한 철학 아닙니까? 칸트 철학이 왜 위대한가 하면 우리 인식(認識)이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서 칸트는 우리 인식이라는 것은 오직 인식의 주체인 내 주관(主觀)을 떠나서는 성립될 수가 없다는 것을 파헤쳐 놓았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인식은 우리 주관에 의존해 있다'는 것이 이른바 칸트 인식론의 대요입니다. 이렇게 말해 놓고 칸트는 이 말이 얼마나 훌륭한 말이라고 느꼈던지 자기 스스로 감탄하기를, 마치 코페르니쿠스가 말한 지동설(地動說)과 같은 위치에 있다고 보았을 정도입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말하기 이전에는 지구는 가만히 있고 하늘이 움직인다고 하는 천동설(天動說)이 천문학을 지배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코페르니쿠스가 반대로 지동설을 주장하는 바람에, 당시 기독교의 교조(敎條)와 상치되어 박해를 받았습니다만, 아무튼 그것이 하나의 정설로 되면서 천문학의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되었듯이 칸트도 자신의 이론이 그런 지동설과 같은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칸트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외계에 단단한 것이 있으니 우리가 단단하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내 관념, 내 주관이 그렇게 보므로 그렇게 인식된다고 보았습니다. 밉게 보는 것도 미운 사람이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밉게 본다는 말입니다.


모든 인식은 자기 주관에 의존해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미운 저놈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더러 있겠습니다만, 이럴 때도 그 대상은 내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의 관념일 따름인 것입니다.


물론 행실이 좋지 않은 사람일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아무튼 그런 나쁜 사람이라 하더라도 부처님이나 어떤 성자가 보신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런 분들은 그런 사람도 나쁜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곧 죽일 놈이라 하더라도 미울 수가 없습니다. 본래는 부처님인데, 그야말로 부처와 똑같은 하나의 생명존재인데, 다만 잘못 생각해서 나쁜 행동을 나한테 보이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 은혜 가운데, 제가 가끔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만, 은승창렬(隱勝暢劣)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즉 좋은 것은 숨겨 놓고 용렬한 것을 나타낸다고 하는, 다시 말하면 진여불성이라고 하는 좋은 것은 숨겨 놓고서 그냥 나쁜 상(相), 못된 현상만 우리한테 보이는 은혜란 말입니다. 똑같은 부처이므로 만일 어느 것 하나도 부처 아닌 것이 있다고 한다면 불법이 성립되지 못합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심지어 티끌 하나까지도 모두가 다 불법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나쁜 사람이나 지금 곧 죽일 듯이 미운 사람도 역시 부처님 은혜라는 말입니다.


무엇이 부처님 은혜인가 하면, 불성이라는 그 소중하고도 영원히 변치 않는,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한 그러한 생명 자체는 숨겨 놓고서 우리한테 겉의 상만 나쁘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부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바르게 보고, 바르게 판단하여 실상을, 실존을 알고 느끼게 된다면 모든 것이 사실은 감사할 뿐입니다. 누구에게 따귀를 얻어맞아도 감사한 것이고, 그러기에 진실로 겸허한 사람들은 누가 얼굴에 침을 뱉어도 자기 손이나 손수건으로 침을 닦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러는 것인가? 그 사람이 무안할까 봐서, 까닭 없이 애매하게 침을 뱉었어도 말입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그냥 참기도 어렵겠지요. 그러나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닦지도 않는단 말입니다. 그 사람이 무안할까 봐서, 그런 것도 역시 그렇게 하라고 시키면 쉽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근본 뿌리를 생각하지 않고, 본래 성품을 생각하지 않고 현상만 생각할 때는 한 대 맞으면 두세 대를 때리고 싶겠지요.


부처님 제자라는 것은 어째서 부처님 제자인가? 밉고 곱고 그런 형상만을 보지 않고 본 성품을 보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본 성품을 본다는 점에서 우리 불자는 일반 중생과 차이가 있습니다.


아쇼카 왕의 왕자 가운데 눈이 하도 예뻐서 '구나라'라고 이름 붙여진 왕자가 있었습니다. 인도에는 눈이 굉장히 예쁜 구나라라는 새가 있었습니다. 눈이 예쁘기도 하고 소리도 영롱하여 천하에 명성을 내는 새입니다. 그 왕자가 장성해서 결혼까지 했는데, 아쇼카 왕의 여러 왕비 가운데 마음이 못된 어떤 왕비가 구나라의 눈이 하도 예쁘니까 그냥 반해 버렸단 말입니다. 물론 구나라의 생모는 아니었겠지요. 그래서 그 왕비는 구나라 왕자에게 접근하면서 음탕한 말을 자꾸 했습니다. 왕자는 처음에는 좋은 말로 뿌리치다가 나중에는 준열하게 뿌리쳐 버렸습니다. 그러자 그 왕비가 왕자에게 '이놈 두고 보자'고 하는 원망의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이웃나라에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아쇼카 왕은 석가모니 부처님보다 대략 250년 뒤에 나셔서 인도를 통일한 왕 아닙니까? 그래서 이집트까지 부처님 법을 홍포(弘布)하신 분입니다. 사실 예수가 태어난 유태 지방도 아쇼카 왕 때 부처님 법이 포교가 된 지역입니다. 우리는 그걸 생각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신약과 우리 부처님 법과는 상당히 유사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예수가 나오시기 200여 년 전, 아쇼카 왕이 이집트에까지 불교 포교사를 보냈으니 그보다 가까운 유태까지도 부처님 가르침이 유포되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웃나라에 반란이 일어나자 아쇼카 왕의 그 잘생긴 왕자가 반란을 평정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좋은 사람이 가면 그 사람의 모양만 보고도 마음이 순화되는 것입니다. 선근이 매우 좋은 왕자가 가자 반란군이 별 싸움도 없이 굴복해 와서 반란은 쉬이 평정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반란을 평정한 후에 왕자가 그 나라에서 떠나오려고 해도 못 가게 말리게까지 되어, 결국 못 떠나오고 그곳에서 십여 년 동안이나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던 그 왕비는 이 기회에 복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사연이 많이 있습니다만 생략을 하겠습니다. 아무튼 그 왕비가 아무도 모르게 왕의 직인을 찍은 문서로 "지금 아쇼카 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구나라의 그 예쁜 양쪽 안구를 먹으면 병이 낫는다고 한다"는, 즉 구나라의 눈알을 빼서 보내라는 교칙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효심도 극진한 구나라는 정말 자기 안구를 빼서 보냈단 말입니다.


아쇼카 왕이 실제로 그런 명을 내렸을 리는 만무합니다. 그 당시에는 치아(齒牙)에 인주를 묻혀 가지고 인장을 대용하던 때입니다. 그래서 아쇼카 왕이 잠들었을 때 그 왕비가 몰래 아쇼카 왕 치아에 인주를 물려서 직인을 찍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보냈기 때문에 구나라도 결국은 곧이듣고 자신의 안구를 빼서 보냈습니다. 따라서 구나라는 소경이 되어 버렸겠지요.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소식, 저런 풍문을 통하여 구나라는 자신의 안구를 보내라는 교칙이 정작 자기 아버님이 내리신 것이 아니라, 자기한테 음탕한 짓을 하려고 했던 그 왕비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구나라는 워낙 선근이 깊은 사람인지라, '내가 지금 양쪽 눈알을 빼앗긴 것은 왕비가 나빠서가 아니라 과거 무수한 생을 지내오면서 그이한테 내가 나쁜 짓을 했으니까, 내 업장이 금생에 내 눈알을 뺀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용맹정진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육안(肉眼)은 어긋나 버렸지만 참다운 마음의 눈인 천안(天眼), 즉 참다운 법의 눈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경인지라 살던 곳에서 가만히 빠져 나와 내외간에 걸식행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생전에 아버지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어찌어찌하여 자기 나라로 돌아와서 부왕을 만났습니다. 물론 그 사이에도 사연은 많이 있습니다만 아무튼 부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쇼카 왕이 보니까 분명히 윤곽은 자기 아들인데, 그 아름답던 눈이 없을 뿐만 아니라 쑥 들어가서 컴컴하게 보였겠지요. 그토록 사랑하던 아름다운 아들이 그렇게 되어 버렸으니, 부왕은 그만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단 말입니다. 왕자는 자기 아버지를 겨우 일으켜 세워서 다시 자리에 앉게 한 다음 "아버지시여! 슬퍼하지 마십시오.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며, 모두가 다 과거 전생 또는 금생의 저의 무거운 업(業)이 제 눈을 뺀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원망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분노에 떨면서 누가 어떤 연유로 눈을 빼앗았는지 아들을 추궁했습니다. 그러나 구나라 왕자는 이에 대해 전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구나라 왕자는 말을 하지 않았으나, 이렇게 저렇게 추궁도 하고 수소문도 해서 나중에는 아쇼카 왕도 자기의 왕비가 그렇게 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왕비를 극형에 처해서 죽였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구나라 왕자는 슬픔에 잠겼습니다. 왕자는, 결국은 제 업이 제 눈을 뺀 것인데 아버지가 잘못하셨구나 생각하고는 병석에 누웠다가 얼마 안 가서 죽고 말았다는, 그런 애화(哀話)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업연의 사슬은 비단 법을 깊이 알아서 그렇게 했던 구나라 왕자에 한한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은 누구나 지금 어떤 상황에 있든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하든 간에 모두가 다 자기 업장이 자기를 괴롭히고 자기를 죽이고 합니다.


우리는 자기 어버이를 원망하고, 스승도 원망하고, 또 사회도 원망하고 합니다만, 이런 것은 사소한 하나의 계기에 불과한 것이지 근원적인 것은 모두가 다 자기 업에 원인이 있습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야말로 우리 마음은 고요한 것입니다. 이런 것은 비유도 무엇도 아닙니다. 과거 전생까지 소급해서 올라간다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모두 인연이 얽히고설킨 고리인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그것이 이러저러하다는 것은 천지우주가 거기에 다 같이 동참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기분 사나운 누군가를 딱 때린다고 생각합시다. 때리는 손을 움직이는 그 하나의 행동에도 역시 천지우주가 다 동참되어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구도, 천지에 있는 모든 별들도 인간의 무명이 쌓이고 쌓여서, 무명심의 파동이 달같이 보이고 해같이 보이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구사론(俱舍論)》이나《기세경(起世經)》같은 경에도 나옵니다. "중생의 공업력(共業力)으로, 즉 우리 중생의 공통 업력이 모이고 모여서 그 모인 번뇌의 그림자로 인하여 은하계같이 보이고, 또는 태양계가 성립되며, 지구가 성립된다"고 했습니다. 조금 어려워도 이런 문제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불교라는 것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아닙니까? 모두가 다 마음뿐이라는 것이 일체유심조입니다.



  '마음'인가 '물질'인가

  다시 말하자면 불교는 마음 일원주의(一元主義)입니다. 인류역사를 통하여 가장 치열한 이데올로기 싸움이 무엇이었습니까? 유물론(唯物論)과 유심론(唯心論)의 싸움이었습니다. 유물론은 "모두가 물질뿐이다"라고 말하고, 유심론은 "모두가 마음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여러 가지 형태의 이데올로기가 많이 있으나, 따지고 보면 결국은 '마음'인가 '물질'인가 하는 싸움인 것입니다. 일반 중생들은 자기 마음의 깊이를 짐작하지 못하니까 눈에 보이는 대로 '아! 이놈의 몸뚱이는 다 물질이 아닌가?' 합니다.


마르크스의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은 유물론의 기조 위에서 세워졌습니다. 따라서 공산주의도 "모두가 다 물질뿐이다. 마음은 결국 우리 육체에 있는 뇌의 반사(反射)에 불과하다" 이렇게 말합니다. 따라서 불교나 기독교에서 본다면 그런 입장을 진리로 볼 수 없습니다.


물질은 허망한 것이지만, 가급적이면 마땅히 평등하게 경제적으로 공정한 분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 앞서 인간성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부터 풀어 나가야 됩니다. 인간성 문제만 바로 풀어 버리면 다른 문제는 저절로 풀립니다. 그런 것이 부처님 법문에서 "약명료심(若明了心) 하면 만행구비(萬行具備)"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만약 마음을 깨달아 버리면 만 가지 행이 거기에 다 따라간다는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근본적인 치유약을 아가타약(阿伽陀藥, 不死藥)이라 합니다. 즉 만병통치약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아가타약은 반야의 약 혹은 반야의 탕(湯)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야의 사상을 가지지 않고서는 절대로 고황에 들어 있는, 백 약이 무효한 그런 병은 고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반야의 약을 아십니까? 반야는 모든 법이 공하다는 도리입니다. 제법이 공하다는 것은, 이것은 나요 혹은 저것은 너요 하는 모든 것이 다 비었다는 도리입니다. 미운 마음도 비어 있고 미워하는 몸도 비어 있으며 미운 대상도 비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초기설법은 모두가 다 무상(無常)이요 무상(無相)이며, 무아요 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보면 다 무상인 것이고, 무상이어서 '나'라고 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나'라는 고집을 한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이런 도리를 두고두고 그때그때 천만 번 되풀이해서 새겨 봐야 합니다. 따라서《반야심경》도 그냥 얼른 가져다가 소리 좋게 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뜻을 음미하면서 봐야 됩니다. 그렇게 음미하고 생각하다 보면 자기 암시가 되어서, 실제로 본래 비어 있는 것이므로 결국은 "아!" 하고 텅 비어 온단 말입니다. 이것을 불교용어로 신심탈락(身心脫落)이라고 합니다. 몸과 마음의 탈락이라는, 즉 다 떠넘겨 버려질 때는 몸과 마음이 그렇게 텅텅 비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불교는 그냥 이론적으로 알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는, 즉 실체화시켜야 하는 진리입니다. 그래야 본체를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본래 빈 것인데, 우리 중생의 번뇌 낀 마음으로 보기 때문에 모두가 다 물질뿐이란 말입니다. 천지우주가 다 물질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다 비었다'고 말하면 납득이 안 가는 게 당연하지요.


그러나 훤히 다 알고 있는 부처님 말씀이므로 우리는 우선 믿어야 하겠지요. 믿은 다음에는 우리 스스로도 체험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체험해야 하는가? 우리 마음을 오로지 한마음으로 통일시킨단 말입니다. 좋다 궂다 밉다 예쁘다 혹은 이래저래 그것이고 이것이고 하는 그런 산란한 마음 때문에 우리 마음이 흩어져서, 혼탁해져서 바닥이 안 보이게 됩니다.


부처님 공부는 모두가 다 바닥을 보기 위해서, 우리 마음의 본성품인 진여불성 자리를 보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가만히 두면 본래 부처인지라 앙금이 가라앉을 텐데, 자꾸만 시비 분별하므로 흩어진 마음이 안정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험공부 하는 사람도 공부를 몇 시간 하면 머리가 띵 하고 그럴 것입니다만, 그런 머리도 가라앉히려면 내 몸뚱이도 여러 종류의 원소들이 결합되어서 빙빙 돌고 있는 세포들의 유기적인 집합체에 불과한 것이라 생각해야 합니다. 내 몸뚱이를 구성하는 원소도 모두가 다 본래는 물질이 아닌 순수한 진여불성의 파동입니다. 그 파동이 원자가 되고, 원소가 되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존재든 모두가 다 진여불성의 한 파동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마음의 파동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천지우주가 텅텅 비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무명심으로 생겨난 번뇌가 상(相)을 만들고, 그 상으로 말미암아 달이 되고 해가 되고, 은하계가 되고 태양계가 되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렇게 상을 낸다 하더라도 그것은 있는 그대로 고유한 실체를 지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달도 별도 태양도 모두가 한 순간도 한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매순간 변화해 마지않는 것입니다.


내 몸도 역시 매순간마다 변동해 마지않습니다. 일반 중생들은 그걸 보지 못하므로, 내가 고유하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무상(無常) 아닙니까? 무상은 항상(恒常)이 아니다, 항상한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일체만법 모두가 다 무상입니다. 무상한 것은 어려운 말로 하면, 한순간도 공간성을 지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매순간 변화하는데 어떻게 고유한 공간성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것이 공(空)이란 말입니다. 여러분은 무상을 잘 느껴야 됩니다.


《반야심경》의 제법공 도리는 그렇게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도리입니다. 그저 '물질은 물리학적으로 분석하면 에너지가 되겠지' 하는,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가령 수분은 0도에서 냉각되어 얼음이 되겠지요. 즉 고체가 된다는 말입니다. 또 100도 이상으로 가열하면 비등해서 수증기가 되겠지요. 그리고 그것이 공중에 올라가서 식혀지면 구름이 되지요. 그러므로 수분이 얼음이 되든 물이 되든 간에 수분이라는 것은 조금도 변질이 없지 않습니까? 그와 똑같이 진여불성이 달을 구성하건 태양을 구성하건 우리 몸을 구성하건 간에 그 자체는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물질이 아닌 진여불성, 우리가 그것을 마음이라 한다 해도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일 뿐, 본래 이름을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다만 공간성과 시간성이 없으니까 우리가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질이 아닌 진여불성이 이렇게 저렇게 모여서 된단 말입니다. 그것이 내 몸이요 네 몸이며, 모든 물질이란 말입니다.



  행복을 누리시기를

  우리는 근본적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왜 우리가 아까운 생명을 낭비해야 합니까? 우리가 할 일은 근본으로 가는 것이며, 그 외에는 모두가 다 헛것입니다. 석가모니가 못나서 집을 나갔겠습니까? 그렇게 잘난 분이 집을 나오고 재산과 지위를 포함한 모든 것을 뿌리쳐 버렸단 말입니다. 석가모니는 자신이 왕이 되고자 했으면 충분히 될 수 있었던 분입니다. 그러나 자기 생명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석가모니가 무슨 필요로 출가를 했겠습니까? 오직 한 길, 바르게 사는 길을 찾으려는 것밖에는 없었습니다. 다만 세속에서 그런대로 닦을 것인가, 출가해서 온 힘을 다해 100퍼센트 수행할 것인가 하는 그 차이뿐이었습니다.


우리는 누구 할 것 없이 행복을 추구합니다. 인간 존재 그 구조 자체가 행복을 추구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왜인가 하면 인간 존재는 원래 모든 행복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진여불성의 자리는 자비도 지혜도 혹은 능력도 행복도 본래로 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본성은 본래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갖추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자리에 가야만 비로소 안심입명(安心立命)합니다. 자비도 지혜도 행복도 능력도 다 갖추고 있는 그 본성의 자리에 가기 전까지는 어떤 것도 우리한테 만족을 못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이라는 그 파랑새를 찾기 위해 산으로 들로 그토록 헤매었지만 안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보니까 집 안의 새장 속에 그 예쁜 파랑새가 있단 말입니다.


행복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어느 누구나 자기에게 본래 갖추어져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물질이 아닌 마음, 그 마음이 행복을 본래로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렇게 아끼는 몸뚱이가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과거 생에 우리 마음 씀씀이에 따라서 부모와의 인연 따라서 금생에 이런 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몸을 얼마나 씁니까? 저 같은 사람이야 이제 십여 년도 못 쓰면 흔적도 없어져 버리겠지요. 젊은 사람들의 몸이라 하더라도 더러는 비명횡사(非命橫死)에 간다고 생각하면 몇 년도 못 쓰고 가게 되고, 또 수(壽)를 다 누리고 간다고 해도 고작 몇 십 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발 생각을 바로 해야만 합니다. 어차피 없어질 이 몸뚱이에는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게 꾸며 놓아도 결국은 땀 한 번 흘려버리면 냄새가 나는 게 바로 그 몸입니다.


진여불성 자리에 이르는 것만이 사람으로 태어난 근본목적입니다. 공자도 소크라테스도 모두 다 그 길로 갔던 것입니다. 니체나 칸트나 쇼펜하우어나 모두가 그 길로 갔단 말입니다. 다만 각도에 따라서 조금 차이가 있게 표현했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그 길을 지향했습니다. 자본주의나 무슨 주의나 모두가 그 길로 가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다만 바른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자꾸만 이렇게 저렇게 한 것이지 인간 자체는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완전해야겠다' '모두가 평등해야겠다' '모두가 자유로워야겠다'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진여불성 자리로 가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내 마음도 허망하고, 내 앞에 선 대상도 허망하고, 모두가 다 허망무상한 것입니다. 허망무상하기 때문에《금강경》에서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하였으며,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라 한 것입니다. 즉 꿈이요, 허깨비요, 물거품이요, 그림자요, 풀끝에 이슬이요 또는 번갯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지랑이를 구해서는 안 됩니다. 저 멀리 아지랑이가 그렇게 좋게 보이고 꿈같은 신기루가 좋게 보인다 하더라도, 고생고생해서 달려가 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하는 대통령 자리나 또는 부자나 모두가 다 구해 놓고 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검소하게 살아야 됩니다. 검소하게 살면 그만큼 죄를 덜 짓고 빚을 덜 집니다. 몸뚱이 하나 잘 먹이고 잘 입히기 위해서 사치하고 과소비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만큼 더 많은 죄를 짓고 빚을 많이 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인과이기 때문에 어떠한 것도 인과를 벗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 몸뚱이 하나 보존하기 위해서 너무나 과다한 물질을 소모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꼭 그에 따르는 보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몸뚱이로 금생에 와서 먹고 입지만, 우리가 부처님 길을 가는 데에는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군이 모조리 포위됐을 때, 잔 다르크는 16세의 어린 소녀로 선두에 서서 그 포위망을 뚫고 오를레앙 성을 탈환했습니다. 그런 힘이 잔 다르크한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석가모니에게 있는 힘, 예수에게 있는 힘이 우리에게도 똑같이 있습니다. 다만 어둠에 가려서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는 자기 스스로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 힘이 있는데 하물며 대학입시 하나 합격 못 하겠습니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님 힘은 무한의 힘입니다. 다만 우리는 무한의 힘을 자아내서 쓰지 못하고, 자꾸만 이것을 생각하고 저것을 생각합니다.


입시 준비하는 수험생이든 누구든 우선 마음을 가라앉혀서 맑게 해야 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도 텅텅 비어서 자취가 없고, 자기 집안 식구 가운데 동생이 밉다고 하는 것도 자취가 없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아무것도 흔적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어머님 아버님이 섭섭하게 해도 그 섭섭한 것도 흔적이 없고 말입니다. 이런 것 저런 것 다 허망한 것이니까 생각 자체를 그렇게 바꾸고, 오직 부처님만 생각하면서 공부한다면, 기억력이라든지 그런 모든 것이 다 완벽하게 됩니다. 따라서 입시든 다른 무엇이든 다 이룰 수 있습니다. 천재적인 능력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다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우리 학생들이 공부할 때 머리가 아프거나 한 것은 머리에 필요 없는 것들이 많이 차 있기 때문입니다. 다 버려야 합니다. 모두가 다 원래 허망한 것인데, 우리가 괜히 그런 것들을 머리에 채워 놓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 자취 없는 것이고, 사실은 꿈이나 그림자뿐인데, 꿈의 자취가 어디에 있다고 채워 놓습니까?


우리 범부중생은 자꾸만 필요 없는 생각을 떠올립니다. 그러므로 이러저러한 생각을 내려놓기 위해서 염불도 하고 화두도 듭니다. "염도념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하니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이라." 생각생각을 하다 보면 결국은 그야말로 무념처인 무념지에 이르게 되고, 무념처에 이르면 육문, 즉 자기 눈과 입, 코, 귀에서나 자기 몸 전체에서 그야말로 훤히 트여 있는, 빛나는 우주와 둘이 아닌 자마금색(紫磨金色)이, 오색찬란한 광명이 항시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그 한 길,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참다운 반야의 지혜를 떠나서는 도저히 우리에게 행복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나 할 것 없이 꼭 행복해야 합니다. 또 행복은 본래로부터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대무량의 보배가 원래 갖추어져 있습니다. 대무량의 보배란 물질적인, 즉 세간적인 보배가 아닙니다. 물질은 본래 자취가 없는 것이라서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고 맙니다. 참다운 보배인 우리 불성보배만이 영생불멸하는 대무량 보배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염송하는 '지장보살!'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또는 '나무아미타불!' 혹은 화두를 잡으셔서, 앞서 제가 말씀드린 마음이 하나로 딱 모아지는 일념무심(一念無心) 공부를 해야 합니다. 일념무심은 우주를 움직입니다. 그와 같이 공부를 해야만 진여불성인 우주의 근본 핵심을 움직이게 된단 말입니다. 우리가 진여불성까지 움직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꼭 그와 같이 하셔서 마음이 편안해지고 다시없는, 위없는 행복을 누리시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불기 2535년 6월, 태안사 정기법회>  


 

붉은 동백 / 문태준 신라의 여승 설요는 꽃 피어 봄 마음 이리설레 환속 했다는데 나도 봄날에는 작은 절 풍경에 갇혀 우는 눈먼 물고기 이고 싶어라 찌렁찌렁 해빙하는 저수지 처럼 그렇게 큰 소리는 아니어도 봄날에는 숨죽이듯 갇혀 울고 싶더라 먼발치서 불목하니로 살아도 봄날에는 사랑이 살짝 들키기도 해서 절마당에 핀 동백처럼 붉은뺨 이고 싶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