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면 누가 들어주나요? / 법상스님

2014. 4. 2. 20:2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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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스님의 수행상담 이야기 /

기도하면 누가 들어주나요?        

 


인간의 한계를 느끼면서 최근에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간절하게 소원을 빌면

하나님이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하는것 같습니다.

불교에서는 수행을 열심히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불상 앞에서 기도하면 누가 기도를 들어주는 건가요?


기도라는 것은 무언가를 이룰 수 있도록 누군가에게 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사람들은 빌 대상을 찾게 되고 빌 것을 빌 대상에게 빌었을때
빌 대상이 들어준다 뭐 이런 공식을 가지고 기도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비는 사람과 비는 대상을 둘로 나누어 놓지 않습니다.
중생과 부처를 무명과 지혜를 생사와 열반을 둘로 나누어 놓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불교에서는 기복적인 의미의 빈다는 말, 기도라는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비는 사람이 비는 대상에게 어떤 것을 빈다는 그런 것을 기도라고 한다면

그런 말은 통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비는 주체인 ‘나’도 없고, 비는 대상인 ‘부처’도 없으며, 빌 ‘어떤것’도 사실은 없습니다.

텅~ 비어 空하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기도라는 말이 성립되겠습니까?

 

누가 들어주느냐에 애써 답을 해야 한다면
내가 내게 들어준다고 할 수도 있겠고 내 안의 자성불이 들어준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답변을 드린다고 해도 그건 방편의 말일 뿐이니

올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도리어 그 말이 족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는 없습니다.
기도를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기도요, 수행인 것입니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바람인데 바람 자체를 놓아 버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온전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바람 자체를 놓아 버리면 지금 이 자리에서 다 이룬것 아닙니까?
이미 그 기도가 다 이루어진것 아닙니까?

이미 다 이루어 졌으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감사와 찬탄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祈禱의 本質은 어떤 바람이나 기복적인 기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感謝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每 瞬間 自足하며 그 한없는 풍요로움에 感謝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도의 본질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는 완전히 풍요로우며

지금 이 자리가 모든 기도가 이루어진 자리라는 것을 바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처든 신이든 내 밖에 어떤 기도의 대상을 만들어 놓고
마음을 바깥으로 向하면서 기도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한참 잘못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 부처가 있다, 내 안에 불성이 있다고 함으로써

내 안을 향해 기도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해놓고도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이제는 안에 집착을 하게 된단 말이지요. 안팎을 나누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안팎을 나눌 것도 없고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를 들어주는 사람을 나눌 것도 없으며
기도할 것을 애써 만들것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方便으로 조금 덧붙이자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기도를 했으니 잘될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함께 한다면
그때 기도하는 바를 이루게 되는 도리가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내 밖에 어떤 부처나 신이 있어 그 기도를 들어줘서 그런게 아닙니다.
그건 내안에 본래 충만하게 갖춰져 있던 본래의 능력, 본래의 불성, 자성불이
기도의 힘과 믿음의 양분을 받으면서 비로소 發顯되기 때문에 기도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수능 백일기도를 한다고 했을때, 처음에는 대입 합격이라는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복적인 기도를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바라는 마음이 놓여지고 고요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시험 결과에 연연해하지 않는 우뚝 선 마음의 중심이 잡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마음에 執着이 가득 들어 있었다가 마음을 비우는 기도수행을 통해
그 執着의 實體를 들여다 보고 놓아버리게 되기에 그렇습니다.
바로 그렇게 집착이 놓여지는 瞬間, 마음이 비워지는 瞬間에

奇蹟과도 같이 삶의 신비스러운 힘이 비밀스러운 작동을 시작합니다.

우리 안에 본래 갖추어져 있던 무한한 힘과 이 宇宙法界 法身의 힘이 强한 共鳴으로 連結되면서
자연스럽게 한 생각을 일으킨 발원을 이루게 해주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奇蹟같은 일이 아니라,

우리 내면이 탐진치로 꽉~차 있어서 本然의 無限한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가

마음을 닦음으로써 비로소 그 힘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꼭 필요하다면 기도를 하도록 하세요.
다만 내 밖에 어떤 초월자를 세워놓고 그 대상을 향해 기도를 하지는 말라는 말입니다..
내 안에 본래 충만한 자성부처님과 내 밖에 본래 충만한 법신 부처님,
그둘이 사실은 둘이 아닌 원만한 본래 자리, ‘바로 그자리’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는 굳은 원을 세워 보십시오.

세상은 마음 내는 대로 이끌어 가지는 것이므로

그 원의 힘, 그 마음 일으킨 힘이 기도하는 바를 이루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다만 한가지 중요한 것은 기도에 이타적인 자비심이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나 하나만 잘되자는 기도는 我相에 갇힌 기도이기 때문에 그리 큰 힘을 받을 수가 없지만
모든 이웃과 생명과 존재들을 위한, 全切를 위한 利他的인 誓願을 세워 기도를 하게 되면
我相에 갇히지 않은 원만한 기도의 성취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친구인 그대가 좋습니다

 

늘 함께 한 공간에서 인스턴트 커피라도 마시며

그대의 마음이 훈훈하다면, 친구인 그대가 좋습니다.

 

바라보는 그대의 눈빛속에서 잔잔한 떨림은 없더라도,

환한 웃음을 동반한 이야기를 할 수만 있다면 친구인 그대가 좋습니다.

 

마주 보며 아늑함을 느끼며 아픔과 고통을 어루만져 주고,

한없는 위로와 작은 소망을 가질 수만 있다면 친구인 그대가 좋습니다

 

간혹 그대와 떨어져 있더라도 그대를 생각하고 입가에 미소를 흘리며,

고마워하는 마음이 가슴 깊은 곳에 있다면 친구인 그대가 좋습니다

 

그대를 그리워 하면 할수록, 한줌의 흙과 한방울의 이슬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함께 오늘을 살고 내일을 설레임으로 기다리기에 친구인 그대가 좋습니다

 

그대와 나, 부부라는 인연이 아니더라도 오래 오래 기억할 수 있는

그대 이기에 친구인 그대가 좋습니

 

- 해윤님이 올린 글

 

 

 

 

욕  망 / 법륜스님

 

인간의 욕망은 충족되지 않는다.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삶이란 영원히 만족할 수 없는 삶인 것이다.  

이러함 욕망 충족은  타인간에 끊임없이 경쟁을 조장하고

불평등의 조건을 조성해 내는 것이다.

 

나의 충족은 곧 남의 불충족을 낳은 것이며,

이것이 사회의 대립과 모순이 격화되는 원인 것이다. 

또한 이 욕망은 [나]라는 실체가 있다고 믿고 내 것을 추하는

집착에서 비롯됨을 직시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집착의 원인은 짓 나를

참나로 착각하는데서 오는 것이다.